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하는이니 Oct 30. 2019

어디에도 없던 더블데이트

싸우다가 정든거지, 뭐

친구는 여러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굳이 나눠본다면 말이다. 친밀함의 정도나 관계가 시작된 계기 등으로 나눌 수도 있겠다.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별 갈등 없는 친구도 있는 반면, 종종 의견이 충돌해 싸우다가 미운정까지 들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온 마르티나는 후자에 가까웠다. 때로는 일방적으로 미워하고 급기야 다툼까지 이어지기도 하면서. 그녀는 그야말로 '애증의 마르띠'였다. 거의 4년 전의 인연이지만, 우리는 신년이나 크리스마스, 각자의 생일 마다 연락을 주고 받았고 그 덕에 올해 어디에도 없던 특별한 더블데이트를 할 수 있었다. 참, 싸우다 정든다더니. 


둘 다 연애는 진즉에 끝나버린 터라 더블데이트의 주인공은 각자의 엄마와 우리 둘이었다. -더 근사하지 않은가.- 내가 엄마와 여행 중이라고 하자 마르티나가 휴가까지 내고는 어머니와 함께 스플리트까지 날아와준 것이다. 그렇게 예상하지 못했던, 특별한 더블데이트가 시작됐다. 


잠깐 4년 전의 우리를 떠올려보자면 우린 말그대로 우르르, 그것도 자주 몰려다녔다. 교환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파티, 모임이나 축제 등은 매주 요일마다 일정이 정해져 있었기에 거의 매일 만났던 것 같다.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도 종종 있었는데, 이는 '문화교류'라는 명목 하에 우리의 몸무게를 끝도 없이 올려줬다. 그리고 이 신성한 문화교류 역시 갈등의 원인이 될 때가 있었다. 마르티나는 김밥이 맛있다고 만날 때마다 김밥, 김밥!을 외쳤었는데 이게 처음엔 분명 괜찮았던 것이 슬슬 분노 게이지를 채우는 것이다. 재료 썰고 볶고 밥도 해야 되는데, 파스타는 비교적 너무 간단해 보였던 거다. 급기야 나와 언니들은 '직접 만들어봐야 손이 많이 가는 걸 알지' 라는 마음으로 김밥 레슨을 해줬지만, 친구들이 김밥 만드는 일에 흥미까지 느껴버리는 역효과(?)를 보고 말았다. 그 덕분에 우리는 스페인에서 김밥집을 열어야 하나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하하.


그때의 마르티나는 나보다도 4살 정도가 많았음에도 마냥 밝았다. 감정표현이 풍부하고 붙임성이 좋아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사람. 그게 내가 기억하던 그녀의 모습이다. 몇 년이 지나 만난 그녀는 전과는 분명히 달랐다. 어엿한 직장인으로, 자기 몫을 해내는 어른으로 훌쩍 커 있었다. 입을 활짝 벌리고 웃는 그 밝은 미소와 사진을 찍을 때 나오는 특유의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어느새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변화한 만큼 나도 변화했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아주 잠깐 그때의 철없던 우리가 그리워졌다. 


친한 친구는 몇 년에 한 번 봐도 엊그제 만난 듯한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마르티나 역시 시간의 흐름이 무색할 만큼 만남이 편안했는데 놀랍게도 서로 초면인 우리의 엄마들도 그랬다. 꼭 아는 언니를 만난 것 같다며 웃는 엄마와 번역기로 대화하는 두 사람을 보면 어딘가 마음이 포근해지는 느낌이었다. 번역기는 종종 이상한 해석을 내놓았고 우리는 그럴 때마다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친한 딸들을 둔 엄마는 친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국적이나 나이에 상관 없이 말이다. 아마 우리가 그들의 말투를 닮고, 성향을 닮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전보다는 점프샷 찍는 것이 조금 힘들어졌다. 에너지가 넘치던 당시의 우리는 조금 희미해지고, 대화의 주제도 무척 현실적으로 바뀌었다. 직장이니 미래니 하는 이야기들로 말이다. 그럼에도 이 더블데이트가 매순간 즐거웠던 것은 어딘지 모르게 닮은 두 어머니와 함께 훗날 이야기할 새로운 기억을 쌓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때 참 즐거웠지 하고. 


3박 4일의 여행이 끝나고 헤어질 때 두 어머니는 각자의 나라의 말로 인사를 나눴다.

- 로마에 꼭 오세요, 그때는 가족 모두와 함께.

- 언니 너무 고맙고 즐거웠어요. 항상 건강하세요.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뭉클해져 눈물이 나오고 말았지만, 우리는 아마 몇 년 후 로마에서 혹은 한국에서 그것도 아니면 제 3의 어떤 곳에서 다시 한 번 만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부디 그때까지 우리 모두가 건강하고, 따뜻하기를 바란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난 흑진주, 오빠는 호랑이였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