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땐 진짜 확
여행을 많이도 다녔다.
여행 목적지나 일정에 대한 결정권이 없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여행은 뭐랄까 아주 멋진 일처럼 느껴졌다. 몸집 만한 배낭을 메고 종이지도를 들고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일. 여행기를 좋아했다. 바람의 딸이 되고 싶었고, 나도 80일 동안 세계일주를 한 번 해보고 싶었다.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저가 항공권을 검색하고 짐을 싸고 숙소를 예약하는 일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렵고 복잡했던 일이 쉬워진 순간부터 내게 여행은 처음만큼 아주 설레는 무엇은 더 이상 아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1년에 한 번은 어딘가 '찍고' 돌아와야 내가 일 년을 잘 살아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여행하는 일이 멋지다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돌아와서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한 계획을 묻는다. 여행이 그렇게 좋으냐고 묻는 이도 많다.
사실 어렸을 때 떠올렸던 낭만적인 여행은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낭만적이기에 기술은 너무 빨리 발달해버렸다. 이리저리 돌려봐야 할 종이지도보다는 GPS가 딸린 휴대폰의 구글 맵이 더욱 빠르고 손쉽다. 몸집만 한 배낭보다는 바퀴 달린 캐리어를 가지고 공항철도에 오르는 게 더 익숙하다. 게다가 완벽한 미지의 세계는 거의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요즘은 너무 많은 이들이 여행기를 남긴다. 이 여행기들은 단순히 여행기로 그치지 않고 '꼭 봐야 할 것', '꼭 먹어봐야 할 것'이라는 타이틀로 여행자들에게 은근한 부담을 주고 말이다. 비록 낭만은 덜 하지만 그럼에도 타지를 여행하는 일은 나에게 아직까지 재미있는 일이자 휴식이 된다.
하지만, 물론이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항상 유쾌한 일만은 아니다.
하루는 이런 적이 있다.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위치한 한 호스텔이었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왔다. 전공이 미술사라고 하자, 자신이 화가라며 초상화를 그려주겠다고 했다. 악의 없는 얼굴이라 고맙게 초상화를 받고 자러 들어가려는데 할아버지가 나를 붙잡더니 자신의 침대는 몇 번이라며 같이 가자는 것이 아닌가. 네? 순간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해서 얼굴에 말 그대로 물음표를 띄웠다. 그런 농담은 하지 말라며 서둘러 돌아갔지만 자려고 누웠더니 화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하는 생각부터 내가 여지를 줬다고 생각하나? 애초에 그 여지가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 정중하게 돌아올 일이 아니었다. 초상화라고 그려준 그 그림을 그냥 확 찢어서 던져주고 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까지.
이런 일들이 처음은 아니었다. 유럽 어디를 가나 '니하오', '치나(중국 여자아이라는 뜻)'을 듣는 일은 다반사고 간혹 눈을 찢어 보이는 인간들도 있다. 캣 콜링에, 잘 모르겠거니 하고 관광객에게만 바가지를 씌우는 식당, 택시도 많다. 그저 배우지 못한 가련한 사람들이나 경우 없는 사람들이라고 여기기에는 화가 나는 일이다. 화를 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여기서 더 화가 나는 것은 우리는 그저 길을 지나는 이방인일 뿐이고, 원하는 만큼의 화를 표현했다가 생판 모르는 저들에게 어떤 불상사를 당하게 될지 그 순간에도 아주 많이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꾹 참고 돌아오는 길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도 몇 번쯤 있던 일이었다.
몇 번쯤 있는 일이라고 해서 내성이 생기지는 않았다. 매번 무섭고, 화가 난다. 여기까지 와서 이런 일을 겪고 싶은 이가 어디 있겠느냔 말이다. 게다가 이런 억울한 일을 겪지 않는다고 해서 그 여행이 완벽한 것은 또 아니다. 아무 일이 없어도 종종 아주 깊은 외로움이, 걱정이 여행을 잠식한다. 금방 지나가고 마는 감정들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그 알 수 없는 감정들에 휘둘리기도 한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지만, 아는 이 하나 없는 머나먼 타지에서 같은 일이 생기면 그 영향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럴 때면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집에 가고 싶다.
여행은 유쾌하지만은 않다. 아주 자주 불쾌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주 운이 좋게도 유쾌한 일들도 많이 만났다. 우연히 들어간 바에서 '인생 음악'을 만나기도 하고 아무 대가 없이 근사한 식사초대를 받았다. 동행 없이 혼자 길을 걷다가 눈물이 날 만큼 예쁜 노을을 보기도 했다. 말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른 이들이 내 인생을 바꾸는 걸 경험했다. 내 속에 있는 여행에 대한 로망이 0이 되기 전에, 이 말도 안 되는 경험들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언제 불쾌할지 모르는 여행을 놓지 못하고 있다.
부디 이번 여행에서도 유쾌한 일들이 그렇지 않은 일보다는 하나 더 많기를 바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