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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컨리 Jul 04. 2020

삼성 그만둔 동생이 해준 선물

삼성에서 5년을 일한 결과물


2015년 동생이 잘 다니는 회사를 그만둔다고 부모님께 통보했다. 회사 일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도저히 다니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만한 직장을 들어가기가 힘들다고 부모님은 극구 말리셨다.

아들이 힘들어 도저히 다닐 수 없는 상태인데도 무조건 참고 버티라고 했다. 부모님이 이렇게 한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 "삼성 전자"에 다녔기 때문이다.




동생이 공부를 잘해 사무직으로 출근한 건 아니다. 때마침 생산직에서 사람을 뽑았고, 이력서를 넣어 "" 좋게 뽑혀 일을 할 수 있었다. 꼭 '운'만 가지고 된 것은 아니다. 수많은 이력서를 기업에 제출한 결과이다.

2010년 나는 대학교를 갓 졸업해 취준생이 되었고, 동생은 사회 초년생으로서 당당히 첫 발을 내딛는 해였다. 동생이 잘 돼서 축하는 해줬지만 조금 씁쓸했다. 형으로써 먼저 모범을 보여주지 못했다. 첫째로 태어나 서러움 없이 자랐지만 이 날 만큼은 스스로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못난 형'이다 보니 그런 생각을 했다.

동생은 며칠 뒤 서울로 일을 하러 올라갔다. 서울이 아닌 경기도 기흥에 위치한 "삼성 전자 LED 부서"에 취직하게 되어 떠났다.(서울과 경기도는 같은 지역인 줄 알고 살았던 사람이라...)




어릴 때 동생은 차별을 받으면서 자랐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동생보다 장남인 나를 더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할아버지가 조금 더 심하셨다고 한다. 어릴 땐 몰랐는데 커서 동생과 어머니가 말해서 알았다.

할아버지는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분이셨다. 집안을 이끌어야 될 장남이었기 때문에 잘해주셨다고 본다. 그래서 동생이 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동생과 자주 싸웠다. 우리는 치고받고 싸우진 않았다. 언성을 높이면서 싸웠고, 말로 '쌍두 문자'를 오고 가는 정도에서만 끝이 났다. 신기하게 꼭 치고받고 할 때쯤 어른들이 나타나서 무마되곤 했다. 맨날 '형이니깐 참아야 한다.' 이 말밖에는 안 하셨다.

하루는 싸우다 동생한테 맞아 코피가 난 적이 있다. 그때도 크게 싸울 뻔했는데 어머니가 말렸다. 참 억울했다. 동생은 동생이어서 차별을 받았겠지만, 난 형이라 참아야 했기 때문에 힘들었다. 그래서 어릴 땐 사이가 좋지 않았다.


동생은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녔다. 실업계는 고 3이 되면 실습을 나간다. 경기도에 있는 휴대폰 만드는 공장에 실습을 나갔다. 거기서 1년 정도 고생해서 그런지 형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조금은 유해졌다. 타 지역에서 고생을 하면 종종 그런 소리를 들었지만 실제로 동생이 변하니 이상했다.

동생은 휴대폰 만드는 공장에서 일해서 번 돈을 엄한데 허투루 쓰지 않았다. 돈을 모아 부모님과 조부모님께 용돈을 드렸고, 가끔 나에게도 용돈을 줬다. 돈을 받아서 동생이 좋아진 건 아니지만 어릴 적과 다른 모습을 보여 이상할 뿐이었고 그런 모습이 대견스럽고 좋았다. 실습이 끝나고 집에 왔다.

집에 오자마자 부모님이 "무조건 대학은 나와야 된다"라고 말했다. 그 성화에 못 이겨 공부를 해 전문대에 들어갔다. 좋은 대학은 아니지만 착실히 다녔다.

졸업을 하고 일자리를 구하면서 부모님 일을 거들었고, 3년 뒤인 2015년에 "삼성 전자 LED 부서 생산 라인"에 취직했다. 동생은 삼성에서 5년 조금 넘게 일했다.


3년 정도 지났을 때 한 번의 큰 고비가 왔었다.(중간중간 많은 고비가 있었다고 나중에 들었다.) 견디기가 힘들고, 혼자 지내다 보니 외롭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알게 된 사람도 있긴 했지만 '사람들은 일이 끝나면 술 먹고 노는 것을 좋아해 어울리지 못했다'라고 한다. 동생은 술을 잘 못 마셨다. 그리고 엄한데 돈을 쓰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재미없게 지냈다. '회사-> 숙소'와 같은 반복적인 일상을 살았다.

만약 내가 힘든 일을 하고 돈을 벌었으면, 술 먹고 노는 데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한 편으로는 미련해 보이지만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더 대단한 것은 "5년 정도 돈을 모아 1억을 벌었다." 10년을 돈을 모아도 1억 모으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고 하는데 5년 만에 1억을 모았다. 의식주만 해결하고, 가끔 가족에게 용돈 주는 것 빼고, 번 돈을 다 적금을 넣어 모을 수 있었다. 동생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인간 승리자'라고 생각한다.

이때도 한 번씩 집에 내려오면 가끔 용돈을 주고 갔었다. 난 백수 생활을 했기 때문에 넙쭉 받았다. 그때는 쪽팔리지도 않았다. 공돈은 누가 줘도 좋다. 나중에 일하면 동생한테 갚을 생각으로 받았다.

생각과 달리 "계약직만 5번" 정도 하다 보니 한 곳에 오래 정착할 수 없었다. 술 먹고 논다고 돈을 모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은혜를 갚지 못하고 있다.




동생은 삼성을 5년 정도 다니면서 집에 많은 것을 해줬다. 조부모님, 부모님한테 가끔씩 용돈을 드렸다.(난 정말 아주 가끔 드렸다.) 동생이 중간중간 많이 해줬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4가지를 들 수 있다.


< 소파 >

아버지 환갑 때 동생과 내가 돈을 모아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그때 하필 일을 하다 허리를 다쳐 비행기를 탈 수 없었고, 그 대신 거실에 놓을 소파를 구입했다.


< 건조기 >

농사일을 하면 아침 일찍 준비해 밭에 가야 한다. 어머니는 밥, 청소, 빨래를 하고 가야지 일이 잡힌다고 한다. 그걸 모르는 아버지는 일이 바쁘면 하루 정도는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보니 아침마다 잔소리를 한다. 어머니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또 비가 오면 빨래 말리기가 힘들다. 방에서 말리면 꿋꿋한 냄새도 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이런 상황을 알고 동생이 어머니를 위해 건조기를 구입했다.


< 세탁기 >

원래 기존에 쓰고 있던 세탁기가 오래되어 고장이 자주 났다. 어머니는 청소, 빨래는 무조건 해야 마음을 놓으셨기 때문에 이것 역시 스트레스 원인이 되었다. 또 그걸 알고 동생이 구입했다.


< 안마 의자 >

아버지가 허리를 다치시고 난 후 부쩍 일이 힘들다고 하셨다. 나이도 있으셔서 더 그러셨다. 몸이 쑤시고 결리신다고 말해 거진 매일 밤마다 내가 손수 안마를 해드렸다. 휴식하기 위해 가끔 집에 오는 동생한테도 안마를 해달라고 한다. 꼭 본인이 하기 싫어 큰 맘먹고 안마의자를 구입한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위의 제품 4개를 동생이 다 구입했다. 난 1원 한 푼도 보탤 수 없었다. 모은 돈이 없었고 월급이 작아 내가 쓴다고 바빴다. 이렇게 말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물질적인 것 말고 정신적인 부분을 담당한다.

동생은 이런 점에 있어 대단하고 본받을 점이 있다. 본인이 쓰고 싶은 것도 많을 건데 부모님을 생각해 돈을 쓰는 것이 고맙고 대견스럽다.

이 것들을 집에 배치시키고 얼마 후 삼성을 그만두었다. 집에서 몇 개월 쉬다가 지금은 다른 회사를 다니고 있다. 역시나 "회사-> 집"과 같은 반복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정말 아주 가끔 친구를 보러 가지만 대부분 집에서 쉰다. 동생이지만 대단함을 느낀다.

나도 하루빨리 직장을 잡아 부모님 걱정을 덜어 드리기 위해 노력하겠다. 동생처럼 못하겠지만 좀 더 분발하겠다. 지금은 쩌리일지 모르나 나중은 크게 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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