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퀘스트
병원에는 아침 일찍 병원을 방문해서 최소한의 휴가를 쓰고 진료와 검사를 받는 분들이 많다. 아침 일찍 방문해 보면 바삐 움직이며 모든 퀘스트들을 서둘러 이행하려는 모습들이 왕왕 보인다. 회사를 그만두고서 아침 늦게까지 퍼질러 자는 것에 금방 익숙해져 버린 나로서는 정말 대단해 보였고 놀면서 투덜거리는 내가 작아진다.
이번 진료는 나의 난소에 자라나는 난자를 확인하고 지난번 남편의 검사 결과를 대신 듣는 두 가지 미션이었다. 비뇨기과는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사전 예약을 15일 전에 하거나 8시 이전에 내원하여 대기를 해야만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보름 뒤 예약 가능한 날에 남편이 연차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진료가 겹쳐진다는 보장도 없어서 내 진료일에 비뇨기과 진료까지 하기 위해 아침 일찍 서둘러 병원으로 갔다. 8시 10분에 도착하자 이미 3명의 남성분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부랴부랴 진찰표부터 뽑았다. 아직 간호사도 없었고 휑한 대기실에 앉아 숨을 돌렸다. 여유롭게 도착했구나 안도하고서 e북을 꺼내 책을 읽기 시작했다. 8시 반이 지나자 간호사가 나타났고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대기실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대기공간에 설치된 화면에 진료 명단이 뜨는데 남편의 이름이 뜨질 않았다. '아차'싶었다. 진찰비를 먼저 결재하고 와야 하는데 진찰권부터 끊고 마냥 기다려버린 것이다. 일찍 와 놓고도 비뇨기과 진료를 보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 서둘러 수납을 하고서 헐레벌떡 비뇨기과 간호사에게 수납을 보여주고 순번이 어떻게 되냐 질문을 하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툭 자르며
- 예약 안 하셨잖아요?! 그럼 2-3시간은 기다리셔야 해요.
친절을 가장한 날카로움에 짜증이 확 돋았지만 늦게 수납한 내 잘못이니 뭐라 말도 못 했다. 9시 반부터 산부인과의 내 진료가 있었던지라 지나가는 1분 1초가 초조했지만 간호사는 냉담했다. 9시 반이 다되어가서 결국 산부인과 진료를 받고 오겠다고 하니 '알아서'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 네 알아서 하시면 돼요. 그래도 돌아오시면 기다리셔야 할 거예요.
'아차.. 또 까먹으면 안 되지' 수납을 하고 부랴부랴 자궁 초음파실로 달려갔다. 병원에 사람이 한가할 때가 잘 없는 듯하나 오전에는 정말 사람이 많다. 특히 회사 출근 전 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30분 정도 기다리고 자궁 초음파를 봤다. 그래도 동네 산부인과에서 들은 게 있다고 오른쪽 난소에 작은 난포 같은 게 보였다.
- 이쪽이 오른쪽인가요?
- 네 오른쪽이고 이제 왼쪽 볼 거예요.
내 쪽으로 돌려진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별다른 말 없이 초음파는 끝났다. 그래도 내심 오른쪽 난소에 난포가 커져있는 걸 보고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네 녀석 죽지 않고 살아있었구나!' 오른쪽 난소 기능이 간당간당하다고 했었기에 낙담했는데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다. 얼른 담당 선생님에게 확인하고 싶었다. 다행히 진료실 앞에서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그리고 진료시간도 길지 않았다. 오른쪽 난소를 이야기하기보다 왼쪽에 물혹인지 배란된 흔적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켜봐야지 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어 시험관을 할 마음의 준비를 슬슬 해야 한다고 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병원을 옮겨서 인지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병원을 옮기고서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믿고 시키는 데로 해보자는 게 스스로 내린 결론인듯하다. 아무튼 며칠 뒤 다시 와서 배란 여부를 살펴봐야 한다고 했고 간호사와 시간 예약을 체크한 뒤 다시 비뇨기과로 향했다.
북적이는 비뇨기과에서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남편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큰 걱정 없었고 검사 결과도 정자수가 6억 마리 이상이라니 이건 '정자왕'이라 해야 할 것 같다. 평균의 3배 이상이라며 자연임신에 전-혀 지장 없는 수치라고 했다. 모든 호르몬 수치며, 소변검사에도 특이사항이 전혀 없는데 굳이 문제라면 정자의 활동성이 약간 떨어져 운동을 시키라고 했다. 그리고 추가로 운동성 강화를 위해 카르티닌과 아연을 처방해 주었다.
남편과 함께 아연과 아르기닌을 먹고 있었는데 하루에 먹는 영양제 양이 점점 늘어났다. 웃프지만 어쩔 수 없.. 그래도 한동안 남편은 올 일이 없으니 다행이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