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 날이었다. 연차를 낸 남편과 함께 부산 KMI 한국의학연구소로 향했다. 대기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카운터에 주민등록번호를 알려주자 카드 목걸이가 발급되었다. 안내에 따라 번호가 적힌 검사실로 향했고, 카드를 찍자 대기 번호가 화면에 떴다. 앞선 대기자들의 이름이 하나씩 불리고 나서야 내 차례가 되었다. 검사가 끝나자 간호사는 다음 검사실 번호를 알려주었다.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같은 절차를 반복하던 중, 문득 어릴 적 본 찰리 채플린의 흑백 영화가 떠올랐다. 표정 없이 기계적인 동작을 반복하는 장면이 생생했다. 순간, 대기 중인 사람들이 자본가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돌아가는 부속품처럼 느껴졌다.
검사는 장장 3시간 반이 걸렸고, 겨우 12시 30분이 되어야 끝이 났다. 혼자 남아 있을 남편이 걱정되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루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남편이 배고프다며 웃었다. 아침을 먹지 못한 채 검사 시간에 맞추려 했으니 당연했다.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오후 일정을 의논했다. 남편은 함양의 걷기 좋은 길을 검색했다고 말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회사에서 받은 시상금으로 롯데상품권을 쓸 기회에 여름 정장을 사고 싶었다. 남편은 알겠다며 김해 아울렛으로 차를 돌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찜통더위에 놀라 기온을 보니 30도였다. 6월인데 이 정도라면, 한여름은 얼마나 더울까 걱정이 되었다. 둘이 함께 지구 환경에 대한 고민을 나누며, 앞으로 더 심각해질 온난화에 대비해 작은 노력이라도 하자고 다짐했다. 맘에 드는 매장에 들어서자 빵빵한 에어컨 바람에 금세 시원해졌다. 에어컨이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조금 전의 환경 걱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깔끔한 매장에 새 옷들이 가득 펼쳐져 있는 것을 보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떤 옷을 고를지 고민하고 있는데, 사장이 흰색 정장을 권했다. 내가 고른 아이보리 정장도 입어보니 마음에 쏙 들었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 남편이 한 마디 했다.
"뭘 고민해? 두 벌 다 사면되지."
마음에 쏙 드는 멘트였다. 그럼에도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나도 양심이 있으니까. 그래서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돼? 돈이 많이 들 텐데…"
제발 이 말을 남편이 못 들었으면 하고 생각하던 그 순간, 남편은 이미 카드를 꺼내 사장에게 건넸다. 결제를 마친 남편에게 장난스럽게 90도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숙소에 들어가서도 새로 산 옷이 자꾸 생각났다. 입어보고 싶다고 말하자, 남편은 고맙게도 차에서 옷을 가져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매장에서 입어보았을 때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이 옷 너무 예쁘지? 그렇지? 그렇지?"
한참을 바라보던 남편이 말했다.
"네가 옷보다 훨씬 예뻐!"
"뭐야? 말을 왜 이렇게 예쁘게 해. 기분 좋은 말하는 법을 따로 배운 거야?"
참고로 남편은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다. 그런데 그가 덧붙였다.
"어떻게 옷하고 너를 비교하겠어?"
이 남자 기분 좋게 말하는 법을 배운 게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