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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계 May 15. 2020

청이

   언 땅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봄날이다. 안나물(우리 집 옆 골짜기)에  냉이가 많다는 남동생 말에 가까이 사는 언니에게 냉이를 캐러 가자고 했다. 좋다고 찾아온 언니 팔에는 푸들 한 마리 안겨 있다. 하얀 푸들 모습이 어찌나 깨끗한지 함께 냉이를 캐기는 그른 것 같아 개는 왜 데리고 왔냐고 핀잔을 했다.

  언니가 피식 웃는다. 시골에 왔으니 뛰어다니게 놓아도 좋으련만, 언니는 한사코 안고 다닌다. 방금 씻기고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언니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란다. 결국 언니는 푸들을 안고 봄볕을 즐겼고 나는 그깟 개가 뭐 그리 중하냐고 구시렁거리며 남동생과 둘이서 냉이를 캤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갔던 둘째동생이 COVID 19를 피해 귀국하였고, 나는 살던 시골집을 동생에게 자가 격리 처소로 내어주고 이웃면에 사는 언니네로 갔다. 결국 언니 반려견과 함께 살게 된 것인데, 안락사 당할 위기에 처한 유기견이 불쌍하다고 며느리(시바견을 키운다)가 데려온 푸들은 ‘청’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면서 언니네 가족이 되었다. 


  청은 언니 집으로 온 첫날,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동물병원에 가서 종합검사를 받았으며 피부병을 치료받기 시작했다. 언니는 버림받은 게 불쌍하다며 개 치료에 아낌없이 투자를 했는데 내 눈엔 꼴불견일 정도였다. 이후 청은 병세가 줄어들었고 언니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따르더니 잠을 잘 때도 언니 침대에서 함께 잔다. 자다가 깨어보면 청은 언니가 잠든 사이에 내려가 잔다는데 언니 옆자리가 불편한 모양이다. 


  그런데 수면제에 의존했던 언니가 청이 온 뒤로 약 없이도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다가 아이들이 출가하자 서로가 소원해진 언니와 형부는 청이 온 뒤로 함께 웃고, 함께 이야기한다고 한다. 집안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다. 


  청이와 함께 산 2 주, 나는 청이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발견한다. 내가 이모라는 것을 아는 것일까. 얼마나 잘 따르는지, 나갔다 들어오면 격렬하게 반기는 모습은 저러다 몸이 다칠까 걱정스러울 정도다. 두 발로 서서 깡충깡충 뛰다가, 달려들어 앞발로 긁어대다가, 눈앞에서 후다닥후다닥 왕복달리기를 서너 번 한다. 그렇게 기쁨으로 날뛰다가 벽에 제 몸을 부딪기도 하는데 아픈 줄도 모른다. 그런 청이 모습이 걱정스러워 안아 올리면 몸부림을 친다. 기쁨을 다 표현할 때까지는 뛰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목이 타면 허접허접 몇 모금 물을 핥아먹고 다시 뛰어다닌다. 거실이고 마당이고 장소에 구애 없이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온몸을 내어 던지는 것이다. 주인의 발짝 소리는 물론 차 소리도 구별하여 꼬리치며 격렬하게 반기는 청을 보면 예뻐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더러 배변을 못 가릴 때가 있어 혼내는데, 그땐 슬그머니 몇 발짝 뒤로 물러나 까맣고 말간 눈동자를 굴리며 곁눈질을 한다. 잘못한 것은 알아서 눈치를 보는 것이다. 그 모습이 우스워 청아, 다정하게 부르면 언제 혼났냐는 듯 꼬리치며 달려드는데 배알로 없고 속도 없다. 다른 개들은 자기를 귀찮게 하거나 먹는 걸 방해하면 으르렁거리며 송곳니를 드러내는데, 견종이 달라서일까, 청은 저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언니가 침대에 누울라치면 청은 잽싸게 먼저 올라간다. 그러고는 배 위를 징검징검 밟기도 하고 얼굴을 부비거나 뽀뽀를 하기도 한다. 청이 그럴 때마다 언니는 기쁨으로 청이 좋아하는 것들을 챙겨준다. 뿐만 아니라 가끔씩 찾아오는 조카들은 청이 좋아할만한 간식과 장난감을 사다준다.  언니는 청을 위해 친구들과 만남을 포기하기도 하고, 개를 동반하지 못하는 맛집도 과감하게 포기한다. 청을 위해 마당가에 없던 울타리도 만들었다. 다시 유기견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예쁘다고 만져주면 발라당 드러누워 말간 눈으로 바라보거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쫙 벌린 다리 사이를 사삭사삭 핥기도 한다. 간식을 주면 던지고 받고 숨기며 가지고 놀다가 먹는다. 어느 땐 먼 곳에 두고 와서는 또 줄 때를 기다린다. 제 딴에는 아껴먹는 것 같은데, 그런 행동을 보면 선악과를 따 먹기 전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저 모습이지 않을까, 혼자서 상상에 빠지곤 한다.


  청과 함께 산 2주 동안 나는 청이 모습에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는 에베소서 2장 8-10절 말씀을 깨닫는다. 


  병들어 안락사 위기에 처한 청이 언니에게 온 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 구원을 위해 청이 노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쁜 것도 아니고 건강한 것도 아니었으며 값나가는 개도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선택받기 위해 애쓰지도 않았다. 병들어 안락사 당할 위기에 처했던 유기견이었을 뿐이다. 함께 있던 유기견들 중에 대다수는 안락사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청은 조카가 선택하여 언니에게로 왔다. 그러니까 청에게 지금과 같은 삶이 주어진 것은 스스로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 선물이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행함 없이 구원받는 청은 언니가 가지고 있는 온갖 것을 제 것처럼 누리며 사랑을 독차지한다. 언니의 침대에서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함께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조건 없이 주는 게 선물인데, 사도 바울은 구원이 그런 선물이라는데, 그 의미를 안다면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며 살아갈 일이다. 그러면 청처럼 매일을 기쁨으로 채울 수 있을 텐데, 아담의 후예인 나는 생각만 거기에 이를 뿐 행함이 없어 오늘도 크든 작든 스트레스를 받는다. 삶의 뒤안길을 살펴보면 은혜 아닌 게 없는데, 왜 현실에서는 깨닫지 못하고 꼭 지난 뒤에야 아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찬란한 봄빛아래 청이 온몸으로 기뻐하고 찬양하는 모습, 하염없이 기다리는 모습, 그런 청을 기쁘게 책임지는 언니 모습이 눈에 선하다.      

                                                                  2020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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