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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May 16. 2024

엄마 반찬

반찬집 버금가는 엄마 반찬

휴일 아침, 아이들은 이미 깨어 있고 작정하고 늦잠을 자기로 한 나는 화장실이 가고 싶은 것도 참고 그저 누워만 있었다.


뜬금없이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동시에 아이들은 "아빤가?" 하며 현관문을 쳐다본다.


아이들 기대와 달리 친정엄마였다. 반찬을 담은 캐리어를 끌고 말이다.


남편이었다고 해도 내 표정은 어그러졌을 것이고 친정엄마 역시 어그러질테지만 차마 엄마에게는 그 표정을 들킬 수 없으니 그저 받아드리고 만다.


이번달만 벌써 두번째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엄마, 그리고 엄마 반찬.


자다 깨기도 했고 피곤에 쩐 나는 모처럼 늦장을 부리려고 계획했던 연휴였기에 엄마의 등장에 짜증이 나기도 하면서 또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겨보려 한다.


그런 내색을 알아차리기라도 한듯 엄마는 새로운 요리법으로 만든 가지 요리에 대한 소리만 하신다. 허공에서 맴돌뿐인 말을 말이다. 미적지근한 내 태도때문이었을까? 이미 미적지근한 본인 상태에 대한 하소연이라도 할까 싶었는데 차마 입이 안떨어지셨던 건지, 그도 아니면 휴일 아침에 본인 방문이 아니었다 여기셨는지 엄마는 온지 10분도 안되어서 돌아서신다. 냉정한 뒷모습으로 말이다.


그 뒷모습에 미안함이 스미지만 이내 감추어 버린다. 엄마까지 짊어질 여력이 나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내 선을 넘나드는 엄마에 대해서 내 미온적인 태도는 엄마에게 전달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내 것을 침범당하듯 그닥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반찬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내 마음도 닫아 버린다.


그러다 이틀지나 엄마 반찬으로 점심을 차려 먹는데 그때 미처 해결되지 못한 감정이 떠오른다. 그리고 엄마의 새로운 요리법으로 탄생된 가지의 맛도 말이다. 맛있네. 엄마에게 맛있었다고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바라는 건 엄마 반찬에 대한 인정과 긍정이니 말이다. 이것을 안 것은 최근이다.엄마가 반찬을 나에게 갖다 바치는 것과 엄마가 해 준 밥을 잘 먹는다는 것이 엄마를 인정한다는 태도라는 것을 말이다.


엄마는 소문난 손맛의 소유자다. 그리고 그런 맛을 아는 나는 나름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잘 먹지 않거나 덜 먹는 것에 대한 불만을 항상 잊지 않고 쏟아내신다. 나 외 남편과 아이들에게까지도 말이다. 그 뒤로 엄마 음식을 먹는 것이 나에게는 의무감으로 새겨졌다. 내 가족 대신 잘 먹어야 하는 부담감을 떠안은 것이다. 그 부담이 엄마 음식에 대한 거부감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니 난감하지만 말이다.


평생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 아마도 음식이었을거다. 칠십이 넘은 연세에도 교회 식당에서 봉사하며 음식맛에 대해 서로 경쟁들을 하시니 여자들의 주방 세력은 보통일이 아닌듯 하다. 얼마전 선언하듯이 교회 주방 봉사를 그만두시겠다고 하더니 여전히 엄마는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그리고 부쩍 딸인 나에게 반찬 셔틀을 자청하신다. 엄마는 무엇이 허전하신걸까? 그 허전함에 대한 채움을 딸인 내가 책임져야 하는걸까?


엄마가 딸을 생각하며 만든 음식이 엄마의 사랑의 한 방식일까? 그저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할까? 평생 음식 이야기를 들어온 나로써는 엄마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도구로 밖에 여겨지지 않지만 그것이 엄마의 존재 이유라면 그것 또한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고 사랑을 하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엄마 손맛에 익숙한 딸은 엄마 생각에 잠겨 밥을 맛있게 먹는다. 그렇게 엄마 사랑에 응답하였음을 마음으로 엄마에게 전달해본다.


선이 분명하고 그 선을 넘나드는 예고되지 못한 사랑에 대해 거부감부터 생기는 딸이긴 하지만 엄마는 알까? 어떤식으로든 엄마 방식의 사랑에 가닿기 위해 응답하기 위해 애쓰는 딸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떤식으로든 엄마는 딸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딸로 살면서 느끼고 또 딸을 키우면서 느낀다. 다행이라면 무언의 방식이 내 딸에게 성처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상처가 없을 순 없으니 적어도 그 상처가 상처로써 남지는 않도록 사랑을 가득 주자는 것, 그것이 내가 엄마 딸로써 살면서 내 딸에게 건내는 방식이 되었다.


가지가 참 맛있었다고 잊지말고 엄마에게 알려줘야지. 내 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듯이 엄마에게도 구지 상처를 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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