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기 직전 말려두었던 우산 세개를 정리한다. 내일 아침 학교에 입고 갈 큰아이 교복이 선풍기 바람에 얼추 마른거 같아 딸아이 방에 선풍기를 넣어둔다. 제일 약한 바람으로 해두고 잠깐 고민스럽다. 계속 켜둘까? 타이머를 맞춰둘까? 아이가 추우면 어쩌지? 아니 더우려나? 아이 이마를 만져보며 땀이 나나 확인 후 타이머를 맞춘다.
보라차를 끓여두고 따스한 기운이 느끼고 싶어 두 컵을 마셨더니 괜시리 화장실만 두번이나 가게 된다. 자기 전 화장실을 마지막으로 다녀오고 자야지 하다 불현듯 엄마의 수고로움이 떠오른다. 글을 써야겠다.
제목을 무엇으로 할까? 엄마의 수고로움? 아니 오늘 하루종일 나를 사로잡은 사는 것에 대한 수고로움을 남겨보자싶다.
비가 오는 날은 특히나 일하러 가기가 싫다. 안그래도 하기 싫은 일이 비가 온다는 이유로 더 하지 못할 혹은 안해도 될 이유로 내 머릿속을 채워버린다. 완벽주의 탓인가 하기도 전에 해야 할 일에 대한 걱정이 꽤 크다. 그 걱정을 닥치기 전까지 마주하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다. 애쓰는 만큼 나쁘진 않다. 그렇다고 걱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일이 끝난 후 마친 것에 대한 후련함과 대견함으로 스스로를 칭찬도 해본다.
이렇게 내 삶에 대한 수고로움을 명명하고 그 수고로움을 해내는 자신을 들추어내 본다.
행동보다 머릿속 생각이 먼저인 내가 요즘 주력하는 건 그냥 하는 것이다. 행동하기 전에 머릿속에 휙휙 돌아가는 과한 생각들이 내 삶을 더 지난하게 만든다는 걸 그랬다는 걸 최근에 한 권의 책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그것이 하지 않기 위한 작동인지 아니면 완벽주의에 의한 방어기제인지 아니 둘다 맞을 것이다.
생각으로 생각을 잡을 수 없다. 생각을 잡을 수 있는 건 그냥 하는 거다. 그냥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행동보다 생각이 앞서고 생각에서 생각으로 대부분 끝나니 볼장을 보지도 못하고 살고 있다. 이왕 사는 거 한번쯤 볼장을 봐도 되지 않을까?
그러려면 살아가는 수고로움에 대한 생각도 지워버리게끔 행동으로 옮기는 건 어떨까? 정 아쉬우면 그 수고로움에 대한 의의를 글로 남겨서 티는 내고 말이다.
며칠 전 만난 아주 오랜 절친에게 40대의 삶이 넘 치열한거 같다며 푸념아닌 푸념을 했다. 생활에 치이고 아이들에게 치이고 해야할 것에 치이는 지금의 삶이 틈이 없으면서도 틈을 비집고 생각이 삐죽거린다. 고달프다고 말이다.
사는 건 원래 그런거라고, 그런데 그게 조금 더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 뿐이고 그게 하필 나라는 것을 그냥 받아드리면 되는 거 아닐까?
자기 사유에 한계를 정해 두는 것은 건강한 일이다
<나는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까>
생각을 멈추고 행동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딱 그거다. 내 사유의 한계를 정하기 위해서 말이다. 자기 사유에 사연이 많은 사람이고 보니 나는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고 고달플까 싶지만 내 삶만을 너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진 않은지 말이다. 조금은 떨어져서 내 삶을 관조하는 것이 나를 위한 건강의 지름길이 아닌가 싶다.
살아있으니 살아내야하는 수고로움이 드는 건 당연한거 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