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전화를 할까 싶었다. 기침은 괜찮은지 말이다. 그 사람의 건강이 염려된다기 보다는 건강으로 인해 불거진 문제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남편에게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은 용건이 있을때 만이다. 주말부부지만 그가 우리곁에 거하지 않은 시간에 대한 호기심은 그닥이다. 오히려 모르는게 약이라고 할까? 그런 존재일까?
다정이라면 다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남편은 수시로 전화를 한다. 하지만 이것도 자기가 할일이 없거나 자기의 상태를 좀 알아줬으면 할때 하는 편이다.
어제도 전화가 왔다. 아이들 기침은 괜찮냐며 말이다. 2~3주전 중2 큰아이 기침이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온 남편에게 옮겨갔고 둘째, 셋째는 환절기라 간간이 기침을 하는 정도다. 나는 만성 기관지염을 달고 사는 인간이라 의미없다.
이삼일전 큰아이 반에서 백일해 환자가 나왔다고 공지와 함께 증상이 있으면 등교 중지를 해달라고 한다. 다행히 큰아이는 옮은거 같진 않지만 기침을 하는 거 보니 영향이 없진 않은듯 싶다. 이래저래 요즘 가장 면역력이 가장 떨어진 남편이 기침에 가장 큰 피해자가 된 것이다.
원래도 기침을 잘 참지 못하고 온 힘을 다해 기침을 해대는 사람인데 증상이 있으니 더 격렬하게 기침을 한다. 참 신기한건 집에서만 식구들 앞에서만 유독 심하다. 물론 아닐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어제 아이들 기침이 괜찮은지 물어보는 것도 자기의 안위를 전하고 싶은 심경이 깔린 것이란 걸 이제서야 파악했다. 있는 그대로 그를 수용한지 결혼 16년차가 지나서 그의 모든 행동과 말에는 전의가 깔린 것이란 걸 알게 된다. 미련하다. 내가 말이다. 그의 미련이 나에게 학습이 된 걸까? 그에게 자동 반사적인 미련인걸까?
남편에게는 정서적인 기능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당장은 타인의 심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사이에 정서는 애진작에 사라졌고 그저 기능적인 인간 아니 남편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과연 이게 맞는 걸까? 오늘 문득 생각이 든다. 이방인을 보고 나서라 더 그랬을까? 이방인의 뫼르소를 기능적인 인간이라 말하긴 어렵지만 그렇다고 정서적인 인물은 적어도 아니니 말이다. 그저 타인의 하는 말에 반응조차 하지 않고 그의 말을 그냥 귀찮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타인에게 맡겨버린다. 소설 내내 뫼로소는 자기를 설명하지만 자기에 대한 자기의 설명은 모르겠다.
남편 역시 그렇다. 그저 반응할 뿐, 자신이 싫어하고 하기 싫은 것에 대해서만 말이다. 타인의 수용은 바로 수용은 아니지만 왜인지 그래야 할거 같은 기분이 드는지 대부분 수용하는 편이다. 이유가 없다. 뫼르소 역시 그랬다.
어쨌든 나는 내가 정말로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는 확실할 수 없을지 몰라도, 무엇에 관심이 없는지는 절대적으로 확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방인 p.140
자기의 생이지만 자기의 생처럼 여기지 않은 태도는 무엇에서 기인한 것일까? 뫼르소는 마치 자기를 서술하는 또 다른 자기일 뿐이다. 남편은 자기를 서술조차 하지 않는다. 정서란 것이 존재조차 하지 않은가?
표면적인 행동과 말 속에 그 의미를 묻고 사는 사람일까? 있지만 없는듯 알아주길 바라면서? 그걸 알아주고 인정해줄 사람은 결코 타인이 될 수 없다.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
자신이 되지 못한 자는 기능적인 사람으로만 인식되고 인정될 뿐이다. 타인이 문제가 아니다. 기능적인 존재로서만 가치를 가지는 자신의 문제이다.
시아버지 한마디는 어쩌면 자신의 아들을 너무도 간파한 것일지도 모른다. 돈벌이라도 하니깐 옆에 있는거지 그러지 않으면 애진작에 버렸을 거라고, 내가 남편을 말이다. 그건 나도 모른다. 겪어보지 않았으니깐. 나조차도 그런 상황에 어떤 선택과 결론을 내지을지 모른다. 그저 아닐수도 있지만 그럴수도 있다 정도 가늠할 뿐.
그런 나를 나무라지 않는다. 기능적으로만 존재하고 그 기능만을 충실한 사람에게 받은 것이라고는 정서의 메마름뿐이니 말이다.
뫼르소의 결국이 슬프지만도 안타깝지만도 않은 건 그때문이다. 타인이 안타까워한들 자신은 아무렇지 않은 무정서의 인간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