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에 있어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함이 우선이지만 일하기 위해 먹는 먹기도 한다. 둘 다 생존과 연결된 먹부림이라고 할까?
이른 약속이 있어 점심과 디저트까지 배불리 먹은 후 일하러 가는 길에 왠지 당충전을 해야할 거 같아서 간단하게 즉시 해결할 수 있는 편의점으로 발이 향한다.
마침 2+1 행사라 일하기 직전에 가끔 먹는 스니커즈를 세개 집어든다. 가방 아무곳에 던져 넣고 이동하며 급하게 하나 우걱우걱 씹어 먹는다.
맛보다는 씹히는 땅콩의 질감과 달달하게 입 속에 퍼지는 에너지를 느껴보려 한다. 레슨 시간내 말을 하고 박자를 세기 위한 손놀림 그리고 악보와 아이 손을 번갈아 보며 온 뇌를 회전 시켜야 하는 레스너로서 에너지가 차 있지 않으면 아이를 가르치는 일은 곧 고된 노동이 되어버리고 만다.
나에게 일은 노동이 아닌 나의 연장선이고 또 가르치는 아이의 연장선이다. 그러기에 멈춤이 때론 있을 지언정 후퇴는 없다. 오로지 전진이다. 오로지 전진을 하는 일에 있어서 그 일을 끌어가는 입장에서는 없는 에너지도 쥐어짜고 에너지 충전하는 일에 사력을 다한다.
그런데 급하게 먹는 밥이 체한다고 너무 우걱우걱 씹었던지 얼마되지 않아 가슴이 턱 막히는 느낌이 아무래도 스니커즈가 걸린거 같다. 이미 점심을 거하게 먹어서 구지 당충전을 하지 않아도 됐을거 같은데 너무 의지가 앞서지 않았나싶다. 때론 의지보다는 상황에 내어두는 것도 답이겠다 싶다.
성격상 상황에 내어둠을 당하는 것에 불안을 느끼는지라 모든 것을 통제권 안에 두고자 한다. 아마도 일하기 직전에 당을 채우려 하거나 공복인 상태로 두지 않는 것은 그 상황에서 통제되지 못하는 자신을 느끼는 것이 가장 불편함을 주기 때문일거다. 남은 전혀 모르는 나만의 내적 불편함을 말이다. 그것이 자기관리의 차원이 될 수도 있지만 스스로 옭죄는 통제는 상황에 대한 여지를 전혀 주지 않고 그러므로 인해 깨닫게 될 성찰 역시 기회를 박탈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게 된다.
의도한 행복과 의도치 않은 행복의 강도는 분명 다를 것이다. 모든 행불행을 마치 내 손안에서 이뤄낼 수 있을거 같은 전지전능함은 삶의 의외성을 경험하지 못하게 한다. 어쩌면 삶에서 행복을 가장 크게 느끼며 사는 사람은 그 의도성을 손에 쥐지 않고 자신의 무능함을 차라리 인정하며 사는 사람일거다.
별거 아닌 스니커즈 하나로 내 삶의 통제권에 대한 성찰과 내 행불행에 대한 주도적인 권력행사가 내 인생을 단조롭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남은 스니커즈 두개는 뇌에서 당부족의 신호를 보내올 때 내 입으로 인도해야겠다.
나는 내가 먹는 일로 일과 좋은 기분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에 유독 먹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조르바는 적어도 먹는 것에 큰 의도를 가지진 않는다. 그저 먹는 일 자체에 대한 행위에 대한 기쁨이 있을 뿐, 나는 어쩌면 먹는 행위에 대한 큰 의미부여를 통해 정작 참 맛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닐까? 노동의 기쁨은 후에 누릴 만찬이 있기 때문일거다. 노동의 노동력을 위해 배를 채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먹부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