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들고 갈 곳이 없습니다.
내 인생의 올해 계획 중 하나는 알겠다. 바로 양극화가 아닌가 싶다. 퇴직서를 제출하고 다음날 생일을 맞이했다. 남편은 생일 선물로 좋은(명품) 가방을 하나 사준다고 했다. 세상에나. 명품은 나와 정말 거리가 먼 것이었는데. 30대 초반 베르사체를 베르사스라고 읽었었지. 그리고 30대 초중반쯤 샤넬 매장을 처음으로 갔는데 너무 이쁜것이다. 갖고 싶다는 마음이 갑자기 생겨서 가방 가격을 물어보고는 충격을 받았었다. (5백만원정도 됐다) 결국 고르고 고르다 예산에 맞추니 키홀더만이 남게 되었다. 그때 마음속에서 명품을 지웠는데 이렇게 갑자기 기회가 올 줄이야. 이게 모라고 떨리던지. 겉으로는 관심 없는 척했지만 전날 남편이 먼저 잠들었길래 가방만 한참 보다 잠들었다.
우리는 여주 아웃렛을 갔다. 가자마자 바로 구찌 매장을 찾아갔다. 매장이 아주 크다란게 눈에 잘 들어왔다. 남편 말에 의하면 나는 아주 처음 온 사람 티를 냈다고 한다. 어쩐지 소심해져서는 가방이 있는 곳 가까이에 가지도 못한 채 남편에게 속닥이며 저거 어때? 저건? 이러면서 멀리서 서성거리기만 했다. 만져본다고 돈 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3개 정도 맘에 드는 걸 골랐는데 역시 가장 맘에 드는 게 그만큼 비쌌다. 270만 원이었다. (구찌인데 이걸 비싸다고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매우 큰돈이다.)
그 가방에는 호랑이 얼굴이 박혀있었는데 가격을 듣고는 장난감 같아 보였던 호랑이 얼굴의 큐빅들이 스왈로브스키인가 싶었다. 남편은 그 가방으로 하자고 했지만 나는 좀 더 보고 결정하자며 일단 나왔다. 그 뒤로 몇 개의 브랜드를 더 둘러보았지만 나도 모르게 구찌 갱이 되어있었다. 내 눈에 다른 것들은 딱히 들어오지 않았다. 눈치를 챈 남편은 나에게 이게 그만 결재를 하러 가자고 했다. 다행히 아직 재고는 있을 것 같다며 구찌 매장으로 향했다. 아까와 달리 줄이 꽤나 길어져 있었다.
솔직히 말해도 돼?
나는 물어봤다. 남편은 어떤 대답일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한숨 한번 쉬더니 말해보라 했다.
나 가방 안 갖고 싶어. 왜인지 다급해지는 건 선물을 주겠다는 남편이다. 남편은 이번 생에 마지막 기회라고 프로모션 홍보를 시작했다. 지금은 자기가 유일하게 사주는 기회라면서 어찌나 옆에서 한탄을 하던지. 그러는 사이 우리는 구찌 매장을 앞에 두고 몸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주차장을 향했다. 남편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마지막 기회다.라고 겁을 주었다. 나는 조용히 시간낭비라고 했다.
남편은 나중에 나에게 비용 때문인지 물어봤다. 전혀 아니라고 했다. 그저 가방을 보고 있어도 갖고 싶다는 욕망이 들지 않았을 뿐이라고 했다. 솔직히 나도 내가 갖고 싶기를 바랬지만 그런 마음이 정말 1도 안 들었다. 오히려 바나나 우유 앞에 서있는 게 더 설렐까 싶었을 정도다. 내가 가방에 마음이 동하지 않은 이유를 떠올려보니 나름의 이런저런 생각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1. 가방을 메고 갈 곳이 없다.
이젠 난 백수니깐. 남편은 그냥 어디든 잘 메고 다니면 되지 그게 슈퍼면 어떻고 그게 직장이면 어떠냐고 했다. 맞는 말이다. 다만 코로나가 퍼진 후로 백수가 된 후로 운동을 제외하고는 사실 밖을 거의 안 나간다. 차라리 집에서 화장실 갈 때마다 메는 게 더 많을듯하다.
2. 관리를 못한다.
똑같이 물건을 샀는데 꼭 먼저 고장내고 떨어지고 부서뜨리는 사람이 있다. 그게 나다. 내가 패션에 관심이 없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좋은걸 선물 받아도 관리를 못하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는다. 심지어 잘 잃어버리고 다닌다. 그래서 그냥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걸 선호한다.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멀쩡히 쓴다는 것은 불가능이란 걸 잘 안다.
3. 기분만으로도 충분하다.
남편이 가방을 사준다고 했을 때 솔직히 엄청 좋았다. 가방이 정말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가방선물이라는 상징 때문이었다.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선물의 상징인 가방을 주려고 하는 것이 고마웠다. 그걸로도 충분히 마음이 가득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가격 이꼬르 마음의 크기인 걸로 받아들이게 되는것 같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아이가.
4. 샤넬이 더 좋다.
내 취향은 샤넬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원하는 건 신상이다. 그게 종이로 만들어져 있든 짚으로 만들어져 있든 어떻게 생긴지는 몰라도 내가 사러 갔을 때 갓 나온 신상을 갖고 싶다. 가방선물이 갖는 의미처럼 샤넬 신상이란 의미만으로도 난 충분하다. 결국 모두 상징을 사는 거니깐.
예전부터 마음속 한 구석에 밀어 넣어놨지만 이따금씩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많은 돈을 벌어서 아무렇지 않게 샤넬백을 사는 어느 날을. 무엇보다 첫 샤넬은 내 힘으로 사고 싶었다. 비록 오늘은 생일선물이란 핑계로 남편 지갑을 가지고 구찌까지만 왔지만 다음에는 내 힘으로 샤넬 신상을 편안한 마음으로 사리라. 그나저나 정말 올해 내 인생은 양극화다. 백수이면서 명품가방을 보러 다니고 그 와중에 제일 비싼 가방 아니면 싫다고 하고 있으니. 그래도 마음속으로 외쳐보다. 언젠간 나도 샤넬! 열쇠고리 말고 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