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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인부 Oct 25. 2022

(위)선의 낙지

동물권에 대하여 

미나리, 무등 각종 야채가 들어간 육수에 낙지 한 마리가 빠진다. 낙지는 기력에도 좋고 맛도 좋은 영양 가득 식재료이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입맛을 다신다. 이때, 낙지가 돌연 다른 존재가 된다. 식재료로만 알고 있던 낙지였는데, 온몸으로 고통을 감각하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낙지는 이 순간만큼은 나와 같은 생명체이다. 식당 사장님은 뚜껑을 힘주어 누르지만, 낙지의 저항이 심하다. 팔팔 끓는 물에서 생명체 낙지는 서서히 죽어간다. 


유투브에서 우연히 보게된 연포탕 영상을 보고, 나는 산낙지를 끓여 먹는 탕만큼은 먹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이때, 누군가 나를 보고 위선이 아니냐고 물었다. 조리가 다 되어서 나온 낙지호롱, 낙지 볶음, 낙지죽은 이제껏 잘만 먹었으면서, 죽는 과정을 지켜봤다는 이유만으로 달라지는 건 없다고. 그까짓 낙지의 고통보다 심오한 인간의 고통이 도처에 널려 있다고.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먹는 고기, 야채, 생선 모든 맛있는 것들에는 죽음이 따르는데, 아닌 척 입맛을 다시고 맛볼 땐 언제고, 죽음을 목격한 것만으로 '죽음' 자체의 본질을 흐릴 수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낙지를 그렇게 뜨거운 물에 팔팔 끓여버리는 것과 최소한 기절이라도 시켜 죽이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죽일 거면서 고통을 덜어주는게 무슨 의미냐고 묻겠지만, 인간은 본디 그런 존재가 아니었나.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선택을 의도적으로 하는 존재. 무방비한 약자와 어린아이들을 위한 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 인간을 따르는 네발 달린 포유류를 사랑하고 그들을 보살피는 것, 가만 있으면 식재료 이상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발이 여러개 달린 연체동물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 하는 것. 그걸 정말 위선이라고만 불러야 할까. 


오늘 아침 뉴스를 보았다. 생선을 잡아 죽일 때 덜 잔혹하게 죽이는 국제적 기준이 마련되고 있다고 한다. 국제 비영리기구 ‘지속가능한양식관리위원회는 야만적인 도살 방식을 없애고 이 과정을 통해 도살·판매된 생선에는 관련 인증 표식을 붙일 예정이라고 한다. 추후 적용되는 해양생물의 범위도 늘어날 예정이라고. 이는 오징어, 문어와 같은 두족류나 게, 가재와 같은 갑각류도 우리와 똑같은 아픔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에 기반한다고 한다. 

학교 업무포털에서는 생소한 제목의 공문을 발견했다. '동물보호 교육 컨설팅 계획과 신청안내'. 동물 보호 교육을 직접 컨설팅 하는 것은 아마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내용인즉슨 동물 보호 교육에 대한 사회적 요구 증가로 동물 기르기 교육과 동물 환경 개선 역량 개선을 지원한다는 것. 누군가는 거창한 수식어를 붙여가며 이런 예산 낭비를 왜하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업무 담당자가 여러번 고심하며 작성했을 교육 목적과 배경을 읽으며 아마 교육청의 답변도 아래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아이들에게 동물 사랑을 가르치면 생명 존중 가치관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동물을 사랑하는 일이 곧 인간을 사랑하는 일과 맞닿아 있으니까요. 고도로 발달한 지능을 가진 인간이 포유류도 아닌 연체동물의 고통까지 생각해준다고 해서 그것이 위선이기만 할까요? 어쩌면 눈앞에 놓인 식재료의 입장이 되어보는 일이 우리가 그토록 강조하는 안간성 ㅡ나의 이웃을 사랑하고 돌아보는 일ㅡ의 시작이 아닐까요?'

나는 반려동물도 없고, 고기를 덜 먹으려 노력은 하지만 그렇다고 끊지는 못한 평범한 육식인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다양한 이유로 채식을 하고, 동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언제나 열렬한 지지를 표한다. 참 위선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위선으로 시작해도 선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까짓 낙지의 고통을 생각해주는 일이 합리성과 효율성의 맥을 타고 흐르던 인간사에 사랑과 행복도 같이 흐를 수 있던 이유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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