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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시편이 허락한 폭로

침묵당한 마음을 위한 대본

by 겨자풀 식탁



이틀 전 꿈을 꿨다. 꿈에서 나는 배우자에게 학대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여전히 아무런 죄책감도 없어 보이는 그는, 오히려 더 큰 소리로 나를 비난했다. 숨이 막혔다. 몸부림칠수록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 잠에서 깼다. 오랜만이었다. 학대자와 관련된 악몽을 꾼 건. 잠에서 깨자마자, 오래전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2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가위에 자주 눌렸다. 배우자의 학대가 심해지는 시기에 주로 그랬다. 가위에 눌릴 때마다 갇혀버린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소리를 지르려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팔과 다리도 움직이지 않는다. 숨도 목소리도 빼앗긴 그 시간은 고독이라는 이름의 감옥이다. 그 감옥 안에서 나의 오감이 겪는 현실은 곧 실제 나의 현실이기도 했다. 그렇게 무력한 절망의 찰나를 견디고 나면, 나는 어김없이 기진맥진했다.




현실이라는 감옥은 나의 신앙도 질식시키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그럼에도 배우자와 함께 하는 세월이 길어질수록 하나님의 이름도 무의미해졌다. 나와 아이들을 매일 지옥으로 끌고 가는 유해한 배우자.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사는 신앙인이라 자처하는 배우자. 그는 늘 하나님을 방패 삼아 현실을 외면했고, 성서를 집어 들어 나와 아이들에게 창을 꽂았다. 그 속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할 때마다, 하나님은 점점 희미해졌다.


하나님의 자리가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면 오히려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학대가 거듭될수록 내 속에서 학대자와 하나님은 하나가 되어갔다. 둘의 모습이 겹쳐졌다. 기도를 하려고 눈을 감을 때마다, 학대자에게 들었던 비난의 목소리는 곧 하나님의 목소리가 되어 나를 정죄했다. 십자가의 은혜로 살아간다 하면서, 어찌하여 네 십자가는 지고 가지 않으려 하느냐 질책했기 때문이다.


성서의 말씀도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예수의 고난과 인내, 죄인을 품는 사랑은 마치 학대자를 위해 예비된 은혜처럼 느껴졌고, 나는 짓밟혀도 상관없다 속삭이는 듯했다. 그에게 받은 상처가 깊어질수록, 내 상흔은 그리스도의 못자국을 닮아가야 한다 말하는 듯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학대자는 내 안에서 뒤엉켜 갔다. 두 존재는 하나가 되어 나의 숨을 조여왔고, 학대자의 얼굴 속에서 하나님의 목소리가 나를 정죄했다.


내가 사랑한 하나님,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 고통의 순간마다 나를 위로하던 하나님.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순간에 늘 내 곁에 있어주신 하나님. 이제 그 하나님은 나의 고통에 귀를 닫고 있었다. 나의 신음을 외면하고 있었다. 황량한 고독이라는 바다에 나를 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가위에 눌렸다.


어김없이 배우자가 등장했다. 찬송가를 부르며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몸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소용없었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를 향해 외쳤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 번 더 외쳤다. "저리 가라고!"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찬송가를 부르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한 번 더 외쳤다. "죽어어어어어어!" 그리고 가위에서 깼다.


그날의 경험을 잊지 못한다. 하나님과 한 덩어리로 엉켜있던 학대자에게 죽음을 선고한 순간, 나는 자유해졌다. 그리고 매우 오랜만에, 시편을 펼쳐 들어 읽기 시작했다. 내 안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여호와의 율법을 다시 노래하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학대자가 앗아가 버린 내 노래를 되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잃었다 생각했던 하나님을 향해 다시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시편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책이었다. 학대 경험자의 눈으로 바라본 시편은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거대한 모자이크였다. 그 조각들은 아픔과 위로를 동시에 비추고 있었다. 고통의 잔해가 스며들어 생겨난 찬란하면서도 서글픈 빛의 조화였다. 그 속에서 나는 잃었던 나의 목소리를 찾았다. 그리고 더 이상 가위에 눌리지 않는다.


그 여정의 기록은 <노래하며 우는 마음>이 되었다. 울음과 노래, 눈물과 웃음이 뒤섞인 그 소리들이 나를 다시 살게 했다. 단단하게 얽혀 풀리지 않던 절망의 실타래는, 시편의 구절들을 타고 하나 둘 나를 관통했다. 시편 저자들의 다채로운 목소리가 깊은 곳에 묻혀 있던 나의 목소리를 밖으로 불러냈다. 너의 목소리가 갇혀 있으니, 우리가 대신 노래하겠다 속삭였다. 함께 노래 부르자며 통곡과 한탄, 애통과 슬픔, 감사와 환희, 고요와 침묵이라는 다양한 곡조를 들려주었다. 그 끝에서 나는 새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월터 부르그만은 시편의 기도를 "폭로"의 행위라고 설명한다. 우리의 모든 감정을 하나님 앞에서 숨김없이 드러내고, 가장 깊은 비밀마저 폭로할 때, 우리는 같은 상처와 비밀을 가진 사람들과 연대하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용기를 주고받으며, 내면의 경험을 구체화하고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또한 그는 시편을 "과거의 다양한 상황을 '재연'(reperformance) 하기 위해 고도로 양식화된 대본"이라 정의한다 (월터 부르그만, 《시편적 인간》 참고).


<노래하며 우는 마음>은 시편이라는 "대본"을 통해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재연'하며 숨김없이 낱낱이 "폭로"한 기록이다. 나의 괴로움도, 절망도, 분노도, 부끄러움도, 슬픔도, 환희도, 모두 다 그 "대본"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오롯이 올려지는 "폭로의 기도"였다. 바라기는, 고통으로 삶이 멈춘 듯한 이들이, 나와 함께 시편의 언어로 울고 노래하며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길 바란다. 시편이라는 깊고 고요한 바다에서 새로운 호흡을 마주하길 바란다. 그 속에서 부르는 노래가 당신의 숨결이 되길 바란다.


억눌린 자가 수치를 당하고 물러가지 않게 해 주십시오.
가련하고 가난한 사람이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게 해 주십시오. - 시편 74:21 (새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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