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그릇에 담긴 권능
시편 8편 (개역개정)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편은 어려서부터 내가 참 사랑하던 시편이다. CCM 찬양으로 즐겨 듣고 따라 불렀던 찬양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2절)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온 땅에 가득한 여호와의 이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데 굳이 이런 구절을 노래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다시 펼쳐 든 시편 8편에서 예기치 않은 위로의 보화를 캐냈다. 그것도 2절 말씀에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나눠보려 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찬양으로 숱하게 부르던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는 고백.
마치, 갓난아기의 손과 얼굴, 작은 속눈썹과 입술을 바라보며
'어쩜 이렇게 예쁠까?'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라고 감탄하듯, 온 땅에 가득한 여호와의 이름을 보며
'어쩜 이렇게 아름답나요?라고 감탄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은 내가 머릿속에 그리던
'샤랄라라 우아한'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숲의 나무가 지닌 장엄한 아름다움,
끝없이 펼쳐진 바다 앞에 섰을 때 느끼는 웅장한 아름다움,
공의와 인자로 다스리는 왕의 품격에서 나오는 아름다움,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실천하며 사는 귀족의 기품에 깃든 아름다움.
'영광의 무게'를 품은 고결한 위용이 내뿜는 아름다움이었다.
그 '영광의 무게'가 깃든 ‘모든 만물’에는
여호와의 이름에 담긴 '장엄한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 그 원수 된 자들은
똑같은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그 '장엄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다.
동방의 박사들은 별을 보았고,
그 별이 가리킨 예수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하지만 가장 큰 왕이고자 했던 헤롯은
하늘의 별도, 이 땅의 예수도 보지 못했다.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 죽이려 했을 뿐.
학대자 역시 하나님의 권능을 본다 말하면서도,
그분의 공의에 합하는 삶을 원하는 나에게는 분노와 비난을 퍼부었다.
유해한 배우자는 나보다 더 오랜 시간 기도한다. 수시로 찬송가를 틀어 놓고 흥얼거린다. 자신은 말씀에 대한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치는 자라 믿는다. 그의 자기 확신 앞에 내가 던지는 신앙적 의문은 늘 '악마의 목소리‘로 둔갑했다.
하루는 그에게 따져 물었다. 다른 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친다 하면서 집에서는 학대하는 이중적인 모습에 동의할 수 없다 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신이 '멀쩡한 아빠, 좋은 남편'인 것처럼 맞장구치며 거짓말하고 싶지 않다 했다.
그는 내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모르는 악한 자라 했다. 하나님은 연약하고 허물 많은 자를 들어 쓰시는데, 감히 자신의 허물을 들추며 말씀을 욕되게 하느냐며 ‘너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라 비난했다.
그런 비난을 1년 넘게 받아내며 싸웠다. 아무리 바른 이야기를 하고, 좋은 의도로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그건 네가 하나님을 몰라서 그래"라며 무시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사람"이라 정죄했다.
그런데 시편 8편 2절은 노래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을 향해서
그분의 권능을 세우시는 여호와의 방법이 있다고.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예수께서 그 이름의 권능을 세우신 장면이 떠올랐다.
성전 안에서 장사하던 이들의 상을 둘러엎고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꾸짖고,
보지 못하는 자와 저는 자를 고치신 예수.
종교 지도자로서 모든 권위를 독차지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들이 보기에 '이상한 짓'을 하는 이 예수.
그리고 그 예수를 향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를 외치는
어린아이들의 소리로 인해 노를 발한다.
"예수, 너 저 소리 안 들려?
철없는 아이들이 너 따위를 보고
다윗의 자손이라며 찬미를 하는데
당장 말리지 않고 뭐 하는 짓이야 지금?"
바로 그때, 예수는 시편 8편을 인용하며 말씀한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 21:16)
"읽어 본 일이 없느냐"라는 말은
"너희들이 그 뜻을,
너희들 눈앞에 있는 나를
제대로 알기는 아느냐"라는 반문일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이 편의에 따라 더럽힌 성전.
성전의 본질을 바꾸어 버린 그들의 부패함.
보지 못하는 자와 저는 자를 향한 그들의 무심함.
이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신' 예수를 향해
분노하며 비난하던 이들의 외침을
'멈추어 잠잠하게 하신' 말씀이 바로 시편 8편 2절이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날 선 정죄와 비난은
학대자의 그것과 매우 닮았다.
자신이야말로 진리를 아는 자이며,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 단언하는 모습.
성서에서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은
살아야 할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 이들의 대명사다.
정복의 칼날 앞에 가장 먼저 희생된 존재들이다.
부모가 죽으면 살 수 없고, 부모와 떨어져도 살 수 없다.
스스로를 방어하거나 홀로 생존할 힘도 없다.
그런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을 통해
여호와께서 권능을 세우시는 이유가 있다.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은
강함이나 유창한 언변과 거리가 멀다.
언제든 권력자들의 힘 앞에
짓밟혀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입"이다.
그 "입"에 '참된 진리'를 담아 찬미하게 하시는 것이
여호와께서 그분의 원수들을 '잠잠케' 하시는 방법이다.
그들보다 더 강한 힘으로 이기게 하지 않으신다.
그들보다 더 완벽한 논리로 무릎 꿇리지 않으신다.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 담긴 찬미는
마치 질그릇에 담긴 보화와 같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의 비밀은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을 통해 높임 받는다.
지극히 보잘것없는 질그릇 같은 인간으로
하늘의 달과 별, 땅의 들짐승,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 모든 만물 안에 있는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참된 찬미"를 하는 자이고 싶다 노래한다.
이중적인 모습은 '허물'이라 둘러대고
가식적인 악행은 '연약함'이라 포장하며
여호와를 신앙하는 일 자체를
'강도의 도적질'로 만들어버린 학대자를
내 입술의 찬미로 잠잠하게 해 달라 기도한다.
학대자의 비난을 '멈추어 잠잠하게 하는 안식(Shabbat)'이
나에게도 임하게 해달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그 안식의 날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여호와의 권능이 선포되는 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질그릇 같은 내 입술에 담긴 작은 찬미의 고백이,
학대자의 거대한 소음보다 더 강한 권능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여호와의 영광일 것이기에.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힘(machtvoll)이 있는지요!" (시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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