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한 학대자와의 동거, 그 이면에 있는 이야기들
최근 몇 년 간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관심이 물밀듯 생겨난 듯합니다.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요. ‘나르시시즘’이 그저 ‘하루 종일 거울을 보고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대중적인 오해의 틀을 벗어나 다양한 지식과 논의가 오가는 것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르시시즘’이라는 모호한 단어 뒤에 숨어서 타인의 삶에 돌이킬 수 없는 해악을 행하는 이들의 정체성을 바르게 드러내 주니까요.
혹자는 ‘나르시시스트’ 혹은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를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말도 맞습니다. 타인을 특정한 ‘범주’에 넣어 진단하는 일은 누구라도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일이죠. 하지만, 나르시시즘, 자기애성 성격장애, 심리조종자 등으로 불리는 이들의 행동 패턴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소 일관성이 존재하기에 그 ‘패턴’을 식별해 내는 작업이라고 보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흔히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이 나르시시스트라면, 지금 당장 멀리 도망가세요!”
나르시시스트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고 나르시시스트를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분들이 자주 하는 말입니다. 그 말 자체를 부인하고 싶지는 않아요.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피하는 것이, 그들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안정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요.
하지만, 나르시시스트인 줄 모르고 만났던 누군가가 현재 내 배우자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 나아가, 그 나르시시스트와 함께 자녀를 키우고 있는 상황이라면 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장 최대한 멀리 도망가라!”라는 조언은 이론적으로 타당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해결책이 됩니다. 오히려 더 큰 좌절감과 무력감을 가져다줄 뿐이죠.
나르시스스트를 부모로 둔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가 나르시시스트인 경우, 본인이 ‘선택’한 사람이죠. (그렇다고 해서 그 선택을 탓하며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경우, 어떠한 선택의 여지도 없이 그 삶을 감내해야 합니다. “당장 최대한 멀리 도망가라!”라는 조언은 감히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해결책이죠. 아니, 어쩌면 해결책에 포함되지도 않는 전혀 딴 세상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드디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르시시스트인 줄 모르던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서로 진심으로 사랑한다 생각하여 결혼을 했고, 그 결과 현재 나르시스스트와 함께 자녀를 키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제 삶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당장 도망갈 수 없기에 나르시시스트와 한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그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그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지키는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 나르시시스트가 철저하게 지워버린 ‘나 자신’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당장 도망가라는 말에 무력감을 느끼셨던 분들이 쉼을 얻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도망갈 수 없는 이 현실 속에서 삶이 비참하다 느끼는 분들이 위로를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르시스스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은 분들이 버겁지 않은 선에서 하루하루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동참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드디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의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
*2025년 1월 17일 브런치 스토리에 발행한 글을 <겨자풀 무물> 매거진으로 재발행했습니다.
#누구도 학대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겨자풀식탁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