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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Aug 20. 2020

구 책방지기의 관점으로 보는 도서정가제

1.

어제인 8월 19일,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에서 도서정가제 개악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내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에 발맞춰 동네책방과 작은 출판사 인스타그램에서는 도서정가제를 지지하거나 정가제의 취지나 장점을 쉽게 풀어 설명한 카드 뉴스를 앞다투어 게시하고 있다. 11월 20일이 개정 시한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이런 움직임을 취하는 게 크게 늦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가제 폐지를 원하는 쪽에서는 작년 말부터 움직임을 시작했기 때문에 조금 더 빨리 움직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2.

수원에서 운영하던 동네책방을 계속할지 말지 고민하던 때, 도서정가제 폐지를 원하는 사람이 엄청 많다는 걸 알게 된 두 가지 사건이 있다.

- 하나는 국민청원이고, 20만 명이 넘게 서명했다.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3076

- 다른 하나는 텀블벅에서 한 개인이 도서정가제 폐지를 위한 헌법소원을 청구한다며 관련 콘텐츠 제작 및 재판 비용을 위한 펀딩을 진행한 것이었다. 천여 명이 넘는 사람이 후원해 약 4200만원이 모금되었다.

https://tumblbug.com/bookfreemarket/story


    책방을 운영하던 시절 이런 움직임을 보았을 때는 참담한 마음이었다. 이 시기에 강남에 나갔다가 온라인 서점에서 운영하는 오프라인 중고서점을 보고 이미 마음이 무거워진 상태였다. 강남점만 그런 건지 모르지만, 몇 년 전과 비교해 중고서점의 디스플레이나 공간의 쾌적성, 중고책이지만 새 책과 크게 다르지 않은 책상태는 정가로 책을 파는 내가 손님들에게 사기를 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었다. 정가로 팔아도 이렇게 수익 내기가 힘든 상황인데, 사람들은 책을 할인해서 사고 싶어 하고, 이미 할인해서 팔고도 있다.

    이게 책방을 닫은 주요 이유는 아니었지만, 오프라인 공간을 유지하는 주요한 이유가 책 판매였기 때문에 공간을 접는 결정을 하는데 영향을 주긴 했다.(독서모임이나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는 꼭 오프라인 공간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3.

책방을 닫았지만 여전히 동네책방과 작은 출판사가 이루어가는 생태계를 애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나는 도서정가제를 (당연히) 지지한다. 하지만 책방을 닫고, 이 문제가 생존에 직결된 입장이 아니게 되고 나니 동네책방의 생존과 출판 생태계 보호라는 이유만으로는 이미 정가제를 폐지하기 위해 돈까지 후원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책방을 해본 입장에서 책방이 지금도 얼마나 돈을 못 버는지 알고 있고, 이들이 도서정가제를 지지하는 건 이익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움직임이라고 본다.

    하지만 동네책방의 가치에 전혀 동의하지 않고, 어차피 메이저 출판사의 책을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만 구매하는 독자라면, 이러한 동네서점의 움직임이 떼쓰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정가제는 신간 종이책뿐 아니라 중고책과 e-book 가격 정책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이쪽 독자는 더욱 싫어할 것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개인의 입장에 따른 선택의 영역이다. 이렇게 쓰는 마음이 참 불편하지만 그게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4.

그래도 글을 한 번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도서정가제 폐지를 주장하는 쪽에서 근거로 드는 이야기 중에 반박할 거리가 꽤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올바른 정보를 얻은 상태에서 어떤 입장을 선택하는 건 개인의 자유이지만, 그 개인이 특정 선택을 지지하도록 잘못된 정보와 논리를 퍼뜨리는 건 선동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청원에 대한 반박


"지역서점은 2014년 1625개에서 2017년 1535개로 감소.

오프라인 서점 수 2009년 2846개 > 2013년 2331개 > 2017년 2050개로 감소"


>> 흔히 '독립서점'으로 불리는, 정말 작은 규모의 책방에서 책방지기가 선별한 인문도서나 독립출판물 위주로 파는 곳이 붐을 이루기 시작한 게 2016년 정도부터다. 그전까지 오프라인 서점은 주로 'OO문고'라고 불리던, 학교 앞에서 참고서를 주로 팔던 곳이나 교보/영풍/반디앤루니스 등의 체인형 대형서점이었다. 인터넷 서점의 발달 + 독서 인구 및 학령인구의 감소와 함께 OO문고 형태의 지역 서점은 경쟁력을 급격히 잃었다. 대형 서점 체인도 교보문고 정도만 서점 안에 대형 테이블을 놓거나 온라인 가격으로 산 책을 오프라인에서 받는 '바로드림' 서비스 등을 도입해 오프라인 서점의 가치를 유지하며 살아남았고 나머지 체인들은 거의 정리되었다. 만약 독립서점 붐이 없었다면, 2017년의 서점 개수는 눈에 띄게 감소했을 것이다. 도서정가제와 독립출판 시장의 성장을 토대로 독립서점은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도서정가제가 서점 개수를 증가시키진 못했지만, 급격한 하락은 충분히 막아줬다. 한 문제집 중심이 아니라 인문서 중심의 동네서점 증가를 지원했다.


"독서시장은 도서정가제 이후 꾸준히 하락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 독서인구가 줄어든 것을 도서정가제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논리적 비약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 이유가 책값 때문이라는 설문 조사라도 가져왔으면 하는 마음이다. 독서인구가 감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책값이 아니라 유튜브, 넷플릭스, 웹툰 등 저렴하거나 무료인 재밌는 콘텐츠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읽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책을 읽을 시간과 집중력이 부족해 읽지 못한다.


"전자책은 동네책방을 위협하는 요소도 아니며 책을 소유할 수조차 없는데 종이책과 같은 정책을 적용받는다는 것은 불합리해 보입니다. 다른 국가처럼 전자책에 있어서는 규제를 폐지 혹은 별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전자책, 특히 리디북스나 밀리의 서재처럼 구독형 전자책 서비스는 동네책방에 위협이 되고 있다. 아직은 종이책 독자가 다수라고 생각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전자책 사용자로 옮겨가고 있고, 한 번 옮겨간 사람은 종이책 구매를 꺼리기도 한다. 아직은 플랫폼의 파워가 크지 않아 유명 도서나 신간이 구독 서비스에 많이 포함되지 않은 것 같지만, 점점 많은 책이 구독 서비스에 포함될수록 사람들은 책 한 권에 개별적으로 지불해야 되는 돈이 아깝다고 느껴질 것이다. 전자책이 가지는 편리함을 선택하는 독자를 탓할 수는 없겠지만, 전자책 시장의 성장은 동네책방에서 환영할 일이 아니다.

>> 여기서 생각해볼 여지는, 전자책 시장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웹소설/장르소설 중 '전자책으로만 출판되는' 책에까지 정가제를 적용하는 게 맞느냐의 여부이다. 그런 책들은 이미 처음부터 전자책에 적당한 가격으로 출간되는 것 같긴 하지만, 여기도 정가제가 적용된다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일이다.


*텀블벅 프로젝트에 대한 반박


"도서를 할인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대형 서점 대신 동네 서점을 이용하는 것도 아니고요."


>> 일부는 맞는 말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정가에 팔더라도, 집에서 서점이 멀거나 배송을 좋아하는 사람은 여전히 동네 서점을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전제가 틀렸다. 대형 서점과 온라인 서점은 현재의 도서정가제에서도 책을 할인해 판다. 온라인은 기본 10% 할인에 5% 마일리지, 그리고 주기적으로 이벤트성 적립금을 마구 뿌려댄다. 교보문고는 10% 마일리지를 적립해준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동네 서점에 방문해 정가로 책을 사는 사람들이 신기해 보인다. 저 주장은 온라인/대형/동네 서점에서 모두 같은 가격에 파는 '완전 도서정가제'를 시행했지만 여전히 동네 책방 매출이 그대로일 때, 맞다고 해줄 수 있다.


"책은 보통 사치재지만, 누군가에게는 필수로 사야 하는 책이 있어요. 바로 전공서적과 문제집이에요. 꼭 저소득층이 아니더라도 전공서적과 문제집을 살 때 부담을 느꼈던 기억이 한두 번은 있으셨을 거예요. 신학기에 교복은 할인된 가격으로 살 수 있는데, 문제집은 사지 못하다니…. 이상해요!"


>> 안타깝지만 필수로 사야 하는 책은 어차피 사람들이 사기 때문에 출판사나 서점 입장에서 할인을 할 유인이 낮아진다. 실제로 전공/학술 서적을 주로 출판하는 '학지사'의 책을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보면 1%도 할인하지 않는다. 나온 지 오래된 책이라면 할인해 팔겠지만, 할인 좀 받겠다고 2020년 버전 문제집이 아니라 2015년 문제집을 살 학생이 있을까?


"얼마 전 작가의 친필 사인본을 경품으로 증정하는 이벤트가 조기 종료되는 일이 있었어요. 도서정가제를 위반했다고 지적당했기 때문이래요. 작가가 자기 글에 관심을 둔 사람들에게 친필 사인본조차 선물할 수 없도록 만드는 법이라니. 슬픈 현실이에요."


>> 정확히 어떤 사건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도서정가제에 위반이 되는 정도였다면 신간을 구매했을 때 작가의 구간 사인본을 추첨이 아니라 무조건 증정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안타까울 수 있다. 출판사나 작가 입장에서 재고로 남을 수 있는 책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정가제를 위반할 수 있는 여지를 양산할 수 있다. 모두가 조금씩 위반하면 그 규칙은 의미가 없어진다.

>> 때로는 도서정가제가 서점이나 출판사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팔리지 않아 버려야 할 책이라면 왕창 할인해서 파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할인이 정례화되면 소비자들은 정가에 사지 않고 할인을 기다리게 된다. 제살 깎아먹기 경쟁의 시작이다.


"책값을 할인할 수 있게 되면 먼저 서점들의 가격 경쟁이 시작될 거예요. 서점들은 좋은 책을 먼저 들이기 위해 작가와 출판사에 여러 가지 마케팅을 제안할 것이고, 작가와 출판사 역시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죠."


>> 텀블벅 소개글을 읽으며 가장 황당했던 근거였다. 서점들의 가격 경쟁은 결국 경쟁에서 살아남지 않은 서점을 도태시킬 수밖에 없다. 일부 경쟁력 있는 서점만 살아남아도 충분하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경쟁의 끝에는 자본력 있는 인터넷 서점과 교보문고만 살아남을 것이다. 출판 생태계는 대형 출판사와 유명 작가의 팔리는 책 위주로 돌아갈 것이다. 

>> 작은 책방은 지금도 책을 많이 못 팔고, 영향력이 미미하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작가나 출판사에 마케팅을 제안하는 경우가 드물다. 마케팅은커녕 직거래를 요청해도 거절하는 대형 출판사도 많다. 대부분의 책방이 한 종의 책을 많이 파는 것보다 여러 종의 책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판매하는 걸 지향한다.


"그 과정에서 “어? 이 책 싸네? 한 번 읽어볼까?” 하면서 접근하는 독자가 생길 거예요. 독자가 많아지면 서점은 돈을 벌게 되어 있어요. 서점도 늘어날 것이고요."


>> 책이 싸다고 접근하는 독자가 많다면 지금은 많이 사라진, 책 한 권에 500~1000원씩 팔던 헌책방은 왜 사라졌을까. 원래 읽고 싶던 책을 싸게 팔면 의미가 있지만, 아무 책이나 싸게 파는 건 독자를 유인하지 못한다. 무료로 준다고 돈많은 꼰대의 자랑용 자서전을 읽을 사람이 있을까.


이 두 콘텐츠 외에 최근 나온 기사 등에서도 반박할 논리는 많이 발견했지만, 이미 글이 너무 길어졌다고 생각한다. 정가제 폐지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근거를 보면서 드는 생각을 요약하면 이렇다.


<요약>


*동네 책방 + 작은 출판사 대부분이 망해도 상관없고, 인터넷 서점에서 메이저 출판사의 책을 가능한 싸게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정가제 폐지를 지지하는 거라면 이해한다. 물론 이것도 단기적으로는 좋을 수 있지만 일부 출판사나 서점의 독점이 지속되면 과연 소비자한테 지금과 같은 혜택을 줄지 의문이다.


*적어도 정가제 폐지를 주장하면서 정가제가 동네책방 살리는데도 도움이 안 된다는 둥, 가격 경쟁을 하면 서점이 더 돈을 벌거라는 근거를 대지 않길 바란다.


5.

실질적으로 도서정가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격에 민감한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이익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과거 도서정가제를 시행하면서 "과도한 할인 경쟁을 막고 책값의 거품을 뺀다"는 근거를 댔지만 대부분의 독자는 가격이 낮아지는 걸 체감하지 못했다. 책값이 싸지지 못하는 이유 역시 여러 가지가 있지만, 과연 공급자의 사정을 일일이 헤아려줄 만큼 아량 넓은 독자가 얼마나 될까. 그렇다고 나 역시 뾰족한 묘수가 떠오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처럼 소비자와 경쟁 구도를 형성하다가 괜히 동네책방만 미운털 박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차라리 온라인/대형 서점이 동네 책방에 비해 유리한 공급율로 책을 받아오는 구조를 개선하는 방향의 '공급률 정가제'가 지금과 같이 정가제에 대한 여론이 안 좋은 상황에서 도움이 될 것 같다. 현재는 정가 1만원의 똑같은 책을 인터넷 서점은 6천원에 공급받아서 9천원에 팔고, 동네 책방은 7천원~7500원에 공급받아 1만원에 판다. 할인을 해서 팔더라도 인터넷 서점은 동네 책방과 비슷한 이익률을 취하고,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해서 이익은 늘어난다.

    사실 현재의 도서정가제 상황에서도 이미 동네책방은 대형 서점에 비해 불리한 경쟁을 하고 있다. 많은 동네서점이 책 판매로 생계는커녕 월세 내기도 빠듯해 카페를 겸하거나 주인이 투잡을 뛴다. 동네 책방에서 좋은 책을 발견하고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 보니 동네책방에서는 현재의 15% 범위 내의 할인을 금지하는 '완전 도서정가제'를 원하고 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이미 작년의 국민청원에 대해 문체부 장관이 "정부 차원에서 ‘완전 도서정가제’는 검토한 적도 없고, 검토할 계획도 없습니다."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6.

글을 쓰기 전에는 동네책방의 입장에 거리를 많이 둘 거라고 생각했는데, 쓰다 보니 결국 도서정가제를 적극 옹호하는 사람이 되었다. 책방을 직접 운영해본 사람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나 보다.


11월에 어떤 결정이 이루어질까.

이미 올해의 코로나 사태로 힘든 시기를 보낸 사람들에게 더 끔찍한 상황이 찾아오지는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출처 : 유유출판사 인스타그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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