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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Sep 09. 2023

영혼으로서의 이데올로기와 이미지를 통한 주체화의 문제

수잔나 월터스,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여성들>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여성들>은 주로 영화나 텔레비전, 광고, 뮤직비디오 등 대중매체에 대한 기존 페미니스트 문화 비평과 그에 대한 비판 모두의 한계를 짚으며 페미니스트 문화 비평의 계보를 정리한다. 다소 표면적인 층위에서 이루어진 ‘여성의 이미지’ 패러다임에서 출발해서, ‘이미지로서의 여성’이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과정과 그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구조주의적 접근, 이것의 폐쇄성을 극복하기 위한 인류학적, 사회학적 접근, 나아가 이들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에 이르기까지.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여성들>의 원제 Material Girls : Making Sense of Feminist Cultural Theory에서 드러나듯, 그가 생각하기에 페미니스트 문화 비평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은 구체적이고 물질적(material)으로 현실에 존재하며, 동시에 대중문화에서 (길티) 플레저를 즐기는 세속적인 여자들(material girls)의 관점에서 사회와 문화를 비평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핍”, “부재”, 기표로서의 여성을 반복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가부장제가 여성을 어떻게 기표로서 구성하는지를 기술하는 것이 필수적인 작업이며 어떠한 문화 분석이라도 거쳐야만 하는 첫번째 단계라 할지라도, “여성”과 “여자들”의 관계를 계속 미결 상태로 둔다면 그러한 작업은 공허해질 것”(월터스, 1999: 209)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배적인 문화적 생산물을 탈신비화하고 싶다면 그리고 해방적이고 표현적인 여성주의 문화를 구성하는 데 도움을 주려 한다면”(월터스, 1999: 212)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래드웨이의 문장을 빌려 대답한다. “사회가 특정 매체와 장르의 관중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면서 그것을 기계적으로 나누어 놓는 대신에, 그날 그날의 현존을 통해서 여러 종류의 만남과 관계를 겪으면서 유목민처럼 움직이는 역사적 주체들이 능동적이고 불연속적이고 심지어 모순적으로 이어 맞추는 일상생활의 습관과 실천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유익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Radway, 1988: 368~370; 월터스, 1999: 211에서 재인용) 여기서 핵심은 구조에 그대로 끼워 맞춰지지 않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현실 속의 유동적이고 역사적인 주체로서의 여자들일 것이다. 이들은 같은 영화,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도 다르게 행동하며 살아간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필요하다. 이들은 같은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된 걸까, 아니면 다른 세상에 살게 된 걸까?
달리 표현하면, 재현의 문제에서 우리가 다뤄야 하는 것은 인식론의 문제인가, 아니면 존재론의 문제인가? 


이것은 아직 다소 뒤죽박죽인 아주 성긴 아이디어다. 구체적으로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다자연주의, 즉 관점주의를 접붙임으로써 누가, 어떻게, 어떤 주체가 되며, 같은 호명을 받은 주체들 사이의 비동일성이 어떻게 발생하는지의 문제를 해명하는 단초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고, 나아가 동물과 인간의 분할을 이야기하는 다자연주의에 성별을 기입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영혼과 이데올로기를 서로 치환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해야 한다. 


다만 두 개의 문제를 미리 밝혀둬야 한다. 하나는 ‘영혼’의 명확한 정의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라는 물질적 배치의 효과, 즉 ‘귀결’이라는 사실과 달리, 영혼은 물질적 배치의 귀결이기보다 물질 이전에 존재하고 물질들에 깃드는 ‘원인’에 가까워 보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둘을 접붙여 보는 것은 그렇게 할 때 이미지를 통해 이데올로기에 호명되는 주체로서의 여성이 호명에 일률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현실, 나아가 그 이미지를 자신의 방식으로 다르게 읽어낼 수 있는 이유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관점주의에서는 인간도 동물도 모두 원래 인간이었다. 그러나 누구는 인간이 되고 누구는 동물이 되는 것은 그들이 다른 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가 영혼을 지니고 있고, 이 보편적(즉, 하나의) 영혼은 다양한 몸들에 ‘감응가능성(affectability)’을 통해서 체화된다. 이때 이 영혼이라는 것은 ‘인간성’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화들은 “인간을 통해 계승되고 보존된 특성들을 동물이 어떻게 잃어버렸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인간이 과거에는 비인간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이 과거에는 인간이었다”고 주장한다(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 2018: 61). 


여기서 영혼의 보편성은 곧 관점의 보편성을 의미한다. 영혼의 차이가 아니라, 몸, 물질의 차이에 따라서 상이한 자연을 사는 상이한 주체가 생성된다. 즉, 인간의 영혼(관점, 문명)이 서로 다른 몸에 체화되면서, 이들은 서로 다른 세계를 살게 된다. 관점도, 영혼도 하나다. 하나의 세계를 다르게 보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것은 관점이나 문화가 아닌 세계이고, 자연이다. 


이제 처음에 제기한 문제로 돌아가자. 영혼의 자리에 이데올로기를 집어넣어 보는 것이다. 하나의 동일한 이데올로기는 서로 다른 몸을 가진 존재들에 감응가능성을 통해 체화된다. 달리 말하면, 이데올로기의 호명을 받아 고개를 돌리는 과정은 ‘감응(affect)’이며, 특정한 방식으로 몸이 변용되는 정동적인(affective) 과정이다. 여자들이 여성이 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제각기 다른 몸을 지닌 여자들에게 체화되는 과정이다. 이때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직접 마주치지 않고, 물질적 매개들을 통해 마주친다. 월터스(1999)가 다루고 있는 ‘이미지’ 혹은 ‘재현’은 그 대표적 사례다. 


여기서 이미지, 재현은 호명 장치이며,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호명 장치를 거치며 굴절된다. 그러니까 재현은 현실이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현은 (현실의) 여자들과 (이데올로기의) 여성들 사이를 매개하며 상호 간섭을 일으킨다. 즉, 이것은 “독립된 개체들 사이의 상응 관계와 유사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의 관계적인 본성과 특정한 물질적 얽힘”(박신현, 2023: 4장)에 관한 것이다. 몸, 이미지, 이데올로기 사이의 관계와 물질적 얽힘에 따라 ‘여성’이 만들어진다. 


“나는 더 나아가 대중문화에 대해 여자들이 갖는 고유한 위치(여성은 주체이자 대상이며 또 한 차이가 생산되는 몸을 통해서 그녀는 “남자”가 아닌 것으로 정의된다)가 여성주의라는 입장이 탈신비화와 전복적 해석이라는 험난한 과정에 이르는 특권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월터스, 1999: 204)


이제 우리는 위 인용문의 “대중문화에 대해 여자들이 갖는 고유한 위치”를 몸과 감응가능성, 그리고 존재론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여자들의 구체적인 삶에서 출발하는 여성주의가 대중문화의 탈신비화와 전복적 해석에 이르는 “특권”을 제공할 수 있는 이유는, ‘여성’이 서로 다른 몸을 가진 ‘여자들’에게 체화되면서 ‘여성들’이 되고, 이들이 살아가는 세계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기존의 다자연주의 논의에서 구분된 것이 인간의 세계와 동물의 세계였다면, 여기서 구분되는 것은 남성의 세계와 여성의 세계, 나아가 여성들의 세계들이다. 


몸들을 포섭하기 위해 영혼보다 훨씬 많은 물질적 매개들을 요구하는 이데올로기는 더 많은 굴절을 거친다. 하나인 이데올로기는 여럿인 재현과 여럿인 여성들을 만든다. 하나의 호명이 다양한 주체를, 나아가 다양한 세계를 만든다. 서로 다른 여자들은 서로 다른 여성들이 되어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게 된다. 하나의 호명이 하나가 아닌 여럿의 여성 주체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여자들의 다른 몸과 이들을 호명하는 물질적 배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주체들 사이의 비동일성은 그러한 물질적 조건에서 기인한다. 


“다자연에 존재하는 것은 다르게 지각되는 자기동일적 개별체들이 아니라, 피│맥주 유형의 직접적으로 관계적인 다양체들이다. 말하자면, 피와 맥주 사이의 경계만이 존재한다. […] 결국 어떤 종에게는 피이고, 다른 종에게는 맥주인 x 같은 것은 없다. 처음부터 인간│재규어 다양체의 특징적 정서작용이나 독특성 중 하나인 피│맥주가 있는 것이다.”(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 2018: 69) 


이때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 무관한 존재라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경계들로 가득한 세계다. 인간에게 피인 것이 재규어에게 맥주일 때, 이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하나의 대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 다른 감응에 따라 서로 다른 존재가 되는, 하나이면서도 여럿인 경계로서의 대상이다. 이미지 혹은 재현도 그렇다. 그것은 서로 다른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여성들의 감응에 따라 서로 다른 존재가 되는 하나이면서도 여럿인 경계로서의 대상이다. 


이것은 세계와 거리를 두고 그것을 관찰하며 살아가는 주체들이 아니라, 세계와 물질적으로 감응하며 계속해서 변용되는 몸을 지닌 주체들과 그들의 세계들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서 이미지의 의미와 이미지의 효과를 논한다는 것은 곧 각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호명되는지, 그러니까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배치를 추적하는 것이며, 그러한 호명에 감응한 자신과 타인의 몸, 그에 따라 만들어지고 바뀌어가는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다자연주의에서의 ‘영혼’처럼 여기고, 그에 따라 재현과 이미지의 호명과 주체화를 논할 때,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와 몸과 이미지 사이의 물질적 얽힘이고, 그에 따라 시시각각 만들어지고 변하는 몸과 세계다. 이미지와 재현을 논한다는 것은 여자들이 살아가는 아주 구체적인 몸과 세계를 논하는 일이어야 한다. 


세계를 바꾼다는 것은 다른 대상들, 혹은 타자들에 감응하며 자신의 몸이 바뀔 수 있도록 정동적으로 취약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며,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서로 다른 몸들의 연대는 바로 그러한 감응의 연쇄 안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 참고문헌


박신현. (2023) [전자책] 캐런 바라드. 컴북스캠퍼스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 에두아르두. (2018) 식인의 형이상학, 박이대승·박수경 옮김, 후마니타스

월터스, 수잔나. (1999)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여성들, 김현미·김주현·신정원·윤자영 옮김, 또하나의문화

이강원. (2018) 센스 & 센서빌리티: 안드로이드(로봇)의 관점과 나름의 인간. 한국문화인류학 51(2), 221-279

이진경. (2020) “감응이란 무엇인가?”, 최진석 엮음, 감응의 유물론과 예술. 도서출판 b

Viveiros de Castro, E. (2015) The Relative Native, Hau Books

Radway, Janice. (1988) “Reception Study: Ethnography and the Problems of Dispersed Audiences and Nomadic Subjects,” Cultural Studies 2, no. 3,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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