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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Sep 20. 2023

할머니처럼 버티기

보부아르, <제2의 성>; 영, <Throwing Like a Girl>

“남자가 여자에게 연극을 하도록 요구한다. 그는 여자가 타자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실존자는 아무리 필사적으로 자신을 부정하려고 해도 주체임에는 변함이 없다. 남자는 여자가 객체이기를 바란다. 여자는 자신을 객체로 만든다. 여자는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 순간 하나의 자유로운 활동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여자의 근원적인 배신이다. 가장 유순하고 수동적인 여자도 여전히 의식이다.”(드 보부아르, 2021: 838)


<제2의 성>


드 보부아르는 인간 외의 생명체들의 사례를 통해 ‘암컷’과 ‘여자’의 차이를 밝혀나가고, 월경과 같은 생리현상부터 양육 과정에서의 성차까지 검토하며 여자와 남자의 차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추적한다. 나아가 성장 과정에서 생겨나는 2차성징과 같은 생물학적 변화뿐 아니라 문학 작품 등의 수많은 기록물을 분석하며 성에 대한 기존의 관념과 대결한다. 


2부가 시작할 때 등장하는 이 책의 가장 유명한 문장,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생물학을 배제한) 전적으로 사회적인 개념으로서의 젠더에 대한 이야기이기보다, 실재하는 생물학적 특징들이 그 자체로는 ‘여자’를 규정하고 통제하기에 불충분한 근거임에도, 그것이 그럴 듯한 근거로 변하는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과정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생물학적 개념과 사회적 개념이 불가분하게 뒤엉켜 있는 몸을 가진 존재로서의 ‘여자’의 개념이다. 그 자체로 여자를 위축시키는 신체적 특징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압박이 여자들의 활력을 억누르는 것도 사실이라는 것이다. 드 보부아르가 여자에 대해 단정적으로 서술하는 것도 그가 언급한 대로 보편적 진리가 아닌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술이기에, 여성의 처지나 성격, 혹은 ‘본성’처럼 적혀 있는 것들도 그대로가 아니라 역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여자는 ‘만들어진다.’ 


그러나 여자는 그저 만들어지기만 하지 않는다. 모든 행위자가 그렇듯, 여자도 저항한다. 여자가 종의 운명을 받아들이길 거부한다는 언급이나, “끈기 있는 항의”와 같은 표현은 여자가 사회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사회가 기입하는 대로 적히는 백지나 텅 빈 그릇이 결코 아님을 함축한다. 


<소녀처럼 던지기(Throwing like a girl)>


영(Young, 1980)은 이를 비판적으로 이어받아, 신체적 특징이 아닌 몸을 ‘사용하는 방식’의 문제를 통해 세계와 여성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낸다.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과 몸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해부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세계 안에서 이들에게 주어지는 실존적 공간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몸을 다양하게, 더 넓은 폭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자아이들의 몸이 지닌 가능성은 세계에 의해 눌린다. 성차별적 사회에서 여성이 가부장적 문화에 의해 ‘신체적 장애’를 겪는다는 말은 장애가 언제나 개인과 구조 사이의 관계 혹은 상호작용에서 기인하는 경험이라는 장애의 관계적 모델 혹은 상호작용으로서의 장애의 관점(Shakespeare, 2013)과 관련 지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장애는 전적으로 사회적인 것도, 전적으로 개인적인/해부학적인/생물학적인 것도 아니다(해부학과 생물학 자체의 사회적 구성에 대해서는 잠시 여기서는 제쳐두자). 다리만을 사용하여 보행할 수 없는 사람이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다가 계단 혹은 턱을 마주할 때처럼, 장애는 그러한 ‘마주침’에서 발생하는, 특정한 몸과 사회 사이의 불화를 드러내는 일종의 사건인 것이다. 이는 ‘을 사용하는 방식’이라는 영의 접근에서 드러나듯, 둘의 상호작용을 지칭하는 언어다. 


어떤 의미에서 여자아이들은 운동을 하거나 할 때 사용하는 몸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장애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드 보부아르와 영의 텍스트는 모두 여자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가부장제의 체계적인 신체적·정신적 장애화를 폭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녀 할머니


‘소녀처럼 던지기’를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오른 것은 할머니였다. 현대자동차 영업부에서 일하실 때, 할머니의 별명은 ‘소녀 할머니’였다고 한다. 그 별명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다만 할머니는 그것을 자랑처럼 ‘수줍게’ 말씀하셨고, 그 별명이 내게 어렴풋이 남긴 ‘순수하고 선한’이라는 이미지는 할머니와 잘 어울렸다는 기억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얼마 전 할머니를 뵈러 산청에 갔을 때도 할머니는 여전히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할머니는 평생에 걸쳐 소녀로 만들어졌고, (이를 부르는 여러 방식 중 할머니가 유일하게 이해하는 것인) 치매는 평생에 걸쳐 억눌리며 만들어진 할머니의 모순적인 자아를 우리 앞에 적나라하게 펼쳐놨다는 것을. ‘소녀됨’은 할머니에게 자랑이자 억압이었고, 치매는 ‘소녀’ 외에 할머니에게 겹쳐 있던 수많은 실재가 불쑥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그 시절에 여대에 진학할 수 있었을 만큼 서울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할머니는 어릴 때부터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라는 교육을 1940년대 출생인 사람 치고도 심하게 받으며 자랐다. 그는 자신의 딸과 함께 걷다가 짧은 치마를 입었거나 술에 취해서 걷는 여성을 보면 ‘너는 저러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는 자신을 억압한 시선을 다른 여성들에게 되풀이했는데, 치매에 걸린 이후에는 길거리에서 젊은 여성들을 보고 걸핏하면 옷차림이나 몸매를 두고 욕을 했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서 나와 아버지가 부엌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할머니는 자신의 딸은 하는 일이 없다며 사과했고, 결국 그의 딸은 할머니가 그런 말을 한없이 되풀이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 힘든 몸을 이끌고 부엌일에 나서곤 했다. 할머니와 함께 지내는 일은 어색한 가부장제 연극이었다. 


그의 사위와 함께 있을 때면 할머니는 내내 자신이 평생 ‘욕 한 번을 안 하고 담배도 손에 안 댄’, ‘남편과 싸움 한 번을 안 한’ 아내이자 엄마임을 강조했다(그의 딸은 바로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나면, 우리는 수저까지 ‘남자 꺼, 여자 꺼’를 따지는 할머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 했다. 내가 어릴 때 일부러 나를 ‘여자아이’처럼 꾸며서 데리고 다녔던 어머니, 아내가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을 포기하고 돈을 벌며 집안일을 도맡아 해온 아버지, 이런 관계를 그냥 보고 자란 나에게 그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문제였다.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것도 문제였다. 원래는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든 할머니는 순순히 따랐지만, 치매에 걸린 이후로 할머니는 달라졌다. 할아버지는 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평생 해온 것처럼 할머니에게 큰 소리로 화를 냈고, 할머니는 평생 처음으로 그에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때로는 욕설까지 해가며 응수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없을 때면 우리에게 할머니를 욕했고 그럴 때면 우리는 치매로 이어진 할머니의 우울증(진단받은 적은 없지만 알 수 있다)의 원인이 그의 남편임이 명백하다고 생각했다. 


병원에서는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했기에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것 자체가 할머니의 병에는 계속되는 위험이었다. 자기 돌봄을 해본 적이 없어서 노인공공일자리 근무 중 점심을 마트에서 파는 빵으로만 해결하다가 당뇨에 걸려 버렸지만 여전히 할머니가 자신을 돌보고 ‘모시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목청을 높이던 할아버지는 폐암으로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자주 눈물을 흘렸다. 버거웠다. 생전의 할아버지도, 사후의 할아버지도,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는 할머니도. 


할머니의 고집, 그리고 힘


악화되는 증상 중 하나라고 우리가 생각한 것은 고집이었다. 평생 누구에게도 고집 부리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아주 작은 문제들로 할머니는 엄청난 고집을 부렸다. 정신분석을 공부한 어머니와 최근 심리학 독학사를 취득한 아버지, 그리고 인류학을 공부하는 나는 밤마다 모여서 그 고집의 정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우리 생각에 여기에는 너무 많은 문제가 얽혀 있었다. 


다만, 내가 영의 글을 읽으며 떠올린 것은 할머니의 힘이었다. 깨끗한 밥상을 계속 휴지로 닦으려고 하거나, 설거지를 대신 하려는 할머니를 말리려고 할 때면, 나름 아마추어 운동선수였고 여전히 20대인 나조차 할머니가 버거웠다. 나이를 생각하나, 걱정될 정도로 마른 할머니의 몸을 생각하나, 이해할 수 없는 힘이었다. 고집보다 무서운 건 그 힘이었다. 


고집과 힘은 치매의 증상일까, 아니면 오래된 소녀에 눌려 있던 할머니의 다른 실재일까. 영의 글을 읽으며,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할머니는 어둠을 무서워해서 혼자 자는 것도 무서워하고 혼자 사는 것도 무서워했지만, 혼자 살고 싶고 혼자 자고 싶다는 마음을 피력했다. 혼자 지내면 안 되는데 치매안심센터에도 안 가고 성당에도 다시 안 나가려고 했다.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자신만의 삶이라는 걸 살아본 적이 없었다. 대학에 다니는 내내 가족의 통제를 받고, 졸업과 동시에 결혼해서 주먹을 휘두르진 않지만 무신경하고 폭력적인 언어 습관을 가진 남편과 평생을 살았다. 할머니가 일해서 번 돈으로, 할머니 본인의 명의로 산 집이었지만 할머니의 공간은 없었다. 이제라도 혼자 살아보고 싶은 건 어쩌면 당연한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 마음이 할머니의 입 밖으로 나온 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본인의 치매가 악화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혼자 사는 할머니 집에서는 담배 냄새가 났고, 냉장고의 음식들은 썩어갔다. 버거웠다. 


할머니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게 할머니를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하는 것일까.  (제대로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할머니를 돌보는 일은 할머니의 역사를 알아나가는 일이었고, 그보다 정확히는 성차별이 한 사람의 자아를 수십 년에 걸쳐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알아나가는 과정이었다. ‘여자가 살이 찌면 안 된다’와 ‘이 나이 먹고 말라서 뭐 하냐’ 사이를 오가는 할머니를, 자신이 얼마나 순진하고 순수한 ‘여성’으로 살았는지 강조하는 동시에 대학생 때는 길거리에서 속옷모델 제의를 받았고 현대자동차에서 일할 때는 남자 손님들이 자신을 얼마나 좋아했고 그게 영업 실적에 얼마나 반영됐는지 자랑하는 할머니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일이었다.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고 해서 할머니를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하는 데 성공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였다. 


할머니처럼 버티기


어쩌면 여기서 고집과 힘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상냥함과 수줍음이 아니라, 욕설과 담배와 고집과 힘에 할머니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할머니 안에는 언제나 그런 욕설들, 담배를 향한 갈증이, 남편 외의 남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욕망이, 니가 뭐라고 하든 내 맘대로 해보겠다는 고집과 힘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자신의 고집을 팔과 어깨의 근육에 힘을 주어 나를 밀어내고 접시를 잡아당김으로써 실현한 것은, ‘소녀처럼 던지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할머니의 근육들은 다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깡마른 1940년대 생의 버티는 힘은 황당할 정도로 강했다. 


할머니는 더는 몸을 소녀처럼 쓰지 않았다. 그저 할머니 당신처럼 썼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 힘을 다해 ‘버티기’ 시작했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돌봄과 부딪히고,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삶’과 부딪히고, 우리가 만들고 싶은 평화를 깨뜨려도, 그것은 적어도 소녀가 아닌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고집과 힘을 황당해하는 걸 넘어서, 바로 거기서 다시 출발했으면 어땠을까. 할머니를 할머니로 대하는 일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할머니가 사람이 되는 일에 대해. 가부장제 연극에서 요구된 배역을 평생 군말 없이 수행하면서도, 그렇게 자신을 부정하면서도, 주체임에는 변함이 없었던 할머니에 대해, 여전히 의식적인 존재였던 할머니에 대해. 할머니의 수많은 실재에 대해. 


이것은 어쩌면 ‘치매는 삶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흔해 빠진 은유의 한 변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치매는 분명 할머니에게서 소녀라는 한 꺼풀의 실재를 들춰내어 온갖 욕망으로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 할머니(들)을 고집과 힘의 형태로, ‘버티기’의 형태로 튀어나오게 했다. 소녀처럼 던지기 대신, 할머니처럼 버티기. 내가 다시 질문을 시작해야 하는 지점은 여기인 것 같다. 



■ 참고문헌

드 보부아르, 시몬. (2021) 제2의 성,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Shakespeare, Tom. (2013) 장애학의 쟁점, 이지수 옮김, 학지사

Young, I. M. (1980). Throwing like a Girl: A Phenomenology of Feminine Body Comportment Motility and Spatiality. Human Studies, 3(2), 137–156. http://www.jstor.org/stable/20008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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