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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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4년 출간된 위스망스의 소설 <거꾸로>에는 여행을 더 이상 떠나지 않게 된 한 남자가 등장한다. 어느 나라의 지위 높은 공작 '데제생트'가 그 주인공이다. 소설은 데제생트의 여행을 그리면서, 우리가 어떤 장소를 상상하는 것과 실제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일어나는 극명한 차이에 대해 기술한다.
"데제생트는 짐 16개와 하인 2명을 거느리고 네덜란드 자체를 여행했을때보다 박물관에서 골라놓은 네덜란드 이미지를 볼때 네덜란드 안에 더 깊이 들어갔다" <빨간머리 앤>의 주인공 앤은 여기에 한 마디 덧붙인다. "여행을 떠나는건 결국 집의 소중함을 알기 위한 과정 같아요"
2. <절규>로 유명한 20c 표현주의 화가 뭉크는 "나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고 했다. 미술평론가들에 따르면, 뭉크는 풍경이나 사물을 '보이는대로' 그린 게 아니라, 자신이 '본' 것, 즉 자신의 기억에 남은 이미지를 그렸다. 이는 그림의 대상이 화가의 뜻대로 편집되고 해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뭉크의 <절규>에서 배와 난간, 후경의 두 사람이 단순히 보인 것이라면, 휘몰아치는 풍경과 공포에 질린듯한 중심인물은 뭉크가 경험했던 강렬한 기억을 시각화한 것이다.
3. 나는 스무살때부터 많은 곳에, 자주 여행다녔다. 엄마는 내가 집에 돌아올때마다 빨간머리 앤 처럼 "결국 집이 제일 좋지?"라고 말하시곤했다. '왜 사서 고생이냐'는 투의 잔소리와 함께 말이다. 나는 그럼 "맞아요. 역시 집이 제일 좋네요"라고 답하고 했다.
어느덧 나는 커서 결혼을 했고, 여행코드가 잘 맞는 아내 덕에 그런 핀잔(?) 없이 여행을 다닐 수 있게됐다. 이번 여행은 결혼하고 나서 10번째, 성인이 되고나서는 아마 수십번째 여행인듯하다. 데제셍트가 실망했다던 네덜란드도 포함된 여행이었다.
이제와서 엄마와의 도리를 떼어놓고 말하자면, 나는 사실 집보다 여행떠나는 게 좋았다. 아마 나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는게 좋아서 떠났던 것 같다. 데제생트와는 반대로, 뭉크와는 비슷하게, 세상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런저런 세상의 표정들은 내 기억 안에서 내 식대로 편집됐다. 그 곳곳에서의 장면들은 설레고, 아련한 느낌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예술적 재능이 없어 이를 어떤 작품으로 승화시키진 못하지만 그 나름대로의 과정이 좋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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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연차를 하루도 안 썼다는 사실이, 그래서 여행 갈 수 있는날이 15일이 남아있음이 즐겁다. 여행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아내에겐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아마 애가 생긴다면 못 갈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엔 최대한 많이 다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