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째 날, Villafranca del Bierzo
폰페라다는 다른 도시들과 다르게 노란 화살표가 많이 없었다. 셋이 걷다가 어느 순간 민지는 보이지 않았고, 다른 순례자들을 뒤따라 걸었지만 이내 순례자와 화살표 모두를 놓쳤다. 구글 지도를 봐도 'Camino de Santiago' 또는 'Camino de Frances', 우리가 걸어야 되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른 아침이라 거리에 사람도 없어서 물어볼 곳도 없었다. 아, 어디로 가야 되는 거야. 나는 가이드북을 꺼내 다음 마을을 찾았다. 어떻게든 그 마을로 가면 되겠지.
다음 마을로 가면 가는 건데 도로로 가야 하는 건가, 난감했다. 어느 삼거리에서 어물쩡 거리며 납작 복숭아를 씹어먹다가 카페 오픈 준비를 하는 직원이 보여 길을 물었다.
"이쪽으로 가면 Villablanca로 갈 수 있지?"
"그렇긴 한데, 너희 Camino de Santiago를 찾는 거야?"
"응, 저쪽으로 가면 되지?"
"아니 그쪽으로 가면 안 돼. 반대 방향으로 가야 돼."
그래.. 젠장..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야지.
민지를 다시 만난 곳은 아침을 먹기 위해 들린 바였다. 왜 이렇게 늦었냐는 핀잔에 길을 잃었다며 서럽게 찡찡대는 우리들.
오늘 처음으로 토스타다를 먹어봤다. 카페 입간판에 아침메뉴로 쓰여있길래 주문해봤는데 웬걸 진짜 맛있어! 순례길 25일 만에 토스타다 맛을 알았다. 그냥 구운 빵인데 이렇게 맛있다니.. 빵 자체가 맛이 좋은 거겠지?
어느 순간부터 앞뒤로 빨간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보였다. 하나둘 보이던 빨간 티셔츠는 열댓 명으로 늘어났고 연령대도 다양해졌다. 가족 단체로 온 게 분명했다.
일전에 민지에게서 이분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때는 폭풍우가 쏟아지던 엘 아쎄보 가던 날, 민지가 대피한 바에 이분들이 있어서 주문하는데 엄청 기다렸다는 이야기를ㅋㅋㅋㅋ.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던 이들은 스페인 남부에서 왔다고 한다.
"Hyundai! Hyundai!"
"응??"
"Hyundai.. Kia!"
스페인어로 '현대'라는 발음을 알아듣지 못해서 한참을 되묻다가 '기아'라는 단어를 듣고 알아챘다. 아! 현대, 기아~ 맞아맞아 꼬레아~
이분들 중 한 분과 대화하고 있으면 어느새 두세 명의 빨간 티셔츠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워후~ 정신없어!
나는 카카벨로스를 빠져나올 때부터 매우 지쳐있었다. 그늘이 없어서 더 지쳤던 것 같다. 이 귀여운 사진을 마지막으로 한 시간 반 동안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 한 시간 반 동안 지영이와 떨어졌고, 마을 하나를 지나 구불구불한 도로의 갓길을 걷고 있을 땐 하늘에 닿을 것 같은 언덕을 오르고 있는 순례자들을 봤다. 조금 전 도로와 산길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산길로 올라간 순례자들인가 보다. 산길로 갔으면 저 언덕을 올라야 했구나..
여전히 무거운 발걸음으로 고개는 푹 숙이고 터벅터벅 걷는데, 건너편 갓길에서 어린 아들과 함께 걷고 있는 남자가 날 불러 세웠다.
"고개 들고! 앞을 보고 걸어! 그렇지!"
남자는 검지와 중지로 두 눈을 짚고는 앞을 보라며 날 다그쳤다. 아, 오키오키!
다시 가방을 고쳐 매고 음악을 들으며 비트에 맞춰 걷고 있을 때, 이번엔 뒤에서 오는 지프차가 따봉을 날리며 힘내라고 소리쳐줬다. 아, 오케 땡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순례자'라는 신분에서 묘한 소속감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낯선 이들에게 도움을 받거나 격려의 메시지를 듣게 될 때. 거기에 더해 나는 매일 외치는 'Buen camino!'라는 인사말에서도 소속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길 위에서는 기분 좋은 이 외침을 어디서든지, 누구에게나 할 수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어떤 언어를 쓰는지, 성별이 무엇인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 같은 순례자이기에.
친구들은 이미 숙소에 도착해있다 하고 나는 드디어, 드디어 마을 초입에 들어왔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알베르게까지 거리가 좀 있다는 걸 확인하고 절로 탄식이 나왔다.. 아.. 힘들다.
지친 몸으로 샤워와 세탁을 마치고 카페라테 한 잔을 시켰다. 친구들은 저녁을 먹으러 레스토랑으로 갔고 나는 숙소에 남아 납작 복숭아로 허기를 달래기로 했다. 입맛도 없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지영이와 민지는 내일 Trabadelo라는 작은 마을까지만 걸을 거라고 했다. 그곳에 있는 라면 맛집에서 라면 한 그릇 할 거라며.. 나는 어쩌지.. 라면이고 뭐고.. 의욕이 없어.. 고민해보겠다고 하고 테이블에 앉아 지도를 펼쳤다.
이곳저곳 거리와 날짜를 봐가면서 고민하고 있을 때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오스트리아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날 보고 웃고 있었다.
"???"
"뭘 그렇게 심각하게 보고 있는 거야?"
"아 내가 그랬어? 내일 어디까지 갈지 못 정해서 그거 보고 있었어."
"납작 복숭아는 맛있어? 좋아해?"
"응. 맨날 먹고 있어."
"유럽에서 납작 복숭아가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된 거 알아?"
"정말?!"
남자의 납작 복숭아에 대한 이야기가 꽤 흥미로웠다. 나중에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면서 혹시 납작 복숭아 씨앗을 한국에 가져와서 재배시키면 어떨지, 그게 합법적인 일인 건지, 혹시라도 잘못돼서 9시 뉴스에서 날 보게 되는 건 아닌지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국내에서 납작 복숭아 재배에 성공했다는 기사를 보게 됐다. 쳇.. 한발 늦었군.. ㅎㅎ
13.07.18 비야프랑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