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시내 나갈 일이 없는 책방지기에게 오랜만에 지하철을 탈 일이 생겼다. 약속 장소까지 지하철을 타리라 마음 먹고선 어떤 책을 데려갈까 잠시 고민했는데 한 꼭지 한 꼭지 쉬어가며 읽을 수 있는 요조 작가님의 신간 에세이 <만지고 싶은 기분>으로 정했다. 설령 내내 서 있어야 한다거나 혹은 깜빡 잠이 들어 책 읽을 겨를이 없더라도 책 한 권이 짐스럽다 생각말고 데리고 가야 한다 싶었다. 반려 책이라고 해둘까..
하지만 요즘 지하철에서 반려 책을 데리고 다니며 읽는 독자와 조우하기란 쉽지 않다. 손바닥 속 네모 상자에는 이미 너무 재미난 세상이 가득 담겨있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난히 내 앞 아저씨도, 내 옆 아저씨도 책을 읽고 있었다. 심지어 옆 아저씨는 한 손으론 책을 들고 또 한손으론 빨간펜을 들고 줄까지 그어가며 열심이었다. 자리가 나자 냉큼 앉아 더욱 빠져들고 있는 듯 했다.
지하철이든 까페든 책 읽는 사람과 만나면(만났다고나 할까, 나만의 일방적인 관심이니 발견이라고 해야겠지만)반갑기도 하고 무슨 책을 읽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책을 힐끗거려본다. 적어도 들키지 않게..아차차.들켰으려나? 몇 주전 스타벅스에서 앞 자리에 앉아 있던 분은 미술 책을 읽고 있었는데 때마침 나 역시 미술 책을 읽고 있었던지라 묘한 동질감을 느낀 적이 있었고, 우리 책방에도 입고한 다자이 오사무 작가의 <인간실격>을 읽고 있던 어느 분과 조우(말했다시피 일방적인)했을 때도 하마트면 책방 손님 대하듯 말을 걸 뻔했다.
다시 덜컹덜컹 지하철로 돌아와 이 분들은 무슨 책을 읽고 있나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앞에 계신 분은 수학 관련인지 화학관련인지 잘 모를 책이었는데 소제목에 '수학적'이라는 단어가 보였고 다른 페이지에는 화학 기호가 그려져 있었다. 마침 독서 모임에서 <세계사를 바꾼 화학 이야기>를 읽은터라 화학이 이리 흔할 일인가 싶다. 이 분은 관련 일을 하시거나 교수님이거나?
안경을 머리 위에 걸친 빨간 펜 아저씨 책에는 그래프와 워런 버핏 할아버지 사진이 보이는 걸로 봐서 재테크, 경제경영 도서인가보다. 주식투자 중이신가?요즘 주식 시장이 슬슬 시동을 걸고 있기도 하지. 출입구 전광판을 보는 척하며 다시금 살펴보니 부동산 책이다. No Money, No Life!니 암, 재테크 책, 당연히 읽어야 한다!
갑자기 괜스레 웃음이 났다. 저 분들은 내가 책방지기라는 걸 상상도 못했을 텐데. 바로 앞 이 사람이,
바로 옆 저 사람이 동네 책방을 운영중이고 무슨 책을 읽고 있나 점검(?)했다는 생각을 하니 말이다. 각자의 세상에 빠져 다른 사람의 모습이나 행동에는 관심없는 이 공간에서 책을 읽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책방지기에게 세심하게 관찰당했다는 걸 저 분들은 알 리 없겠지.
(일타스캔들 남행선 사장(전도연 배우분)의 말투를 빌려)
암튼, 애니웨이!!
책방을 떠나서도 책밖에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책방지기가 되었나보다.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 확인하느라 최대한 교묘한 방법을 쓰고 있는 것만 봐도 말이다. 어쩌면 그 분들은 눈치챘을지도..아, 그래서 오늘 지하철 앞자리 아저씨는 소심하게 책장을 넘기신건가! 앞으로 언제 어디선가 책읽는 모습을 들킨 것 같고 누군가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 싶으면 그건 바로 작은 책방을 운영하는 책방지기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아두시길..그리고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마음껏 뽐내주셔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