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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수 Apr 30. 2020

흔들리지 않는 나이는 없다.

데미안을 읽고


며칠 전, 친정어머니와 다정하게 전화통화를 하다가 결국에는 대성통곡으로 이어진 일이 있다.

우리는 여느 모녀처럼 사이가 좋을 때에는 세상 가장 좋은 친구였다가 어느 순간, 방심하는 순간 서로의 상처가 맞물리는 지점에서 부딪치고는 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불안을 이겨내지 못하셨고, 나는 마음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양끝이 뾰족한 창을 사이에 둔 채 끌어안은 것 같다.

결론은 엉킨 실타래를 최초의 매듭을 빼고 어느 정도 풀어내고 애정을 표현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아마 어머니는 당분간은 어쩌면 계속 속상해하실 것 같다.

내가 그런 것처럼.


그때 타이밍이 절묘하게 읽고 있던 책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다.


이제까지의 체험들 중 가장 영원할 순간이었다.
아버지의 권위가 최초로 찢긴 자국이니까.
유년기를 지탱하는, 하지만 자기 자신이 되려면 반드시 무너뜨려야만 하는 기둥들에 생긴 최초의 균열이니까.
운명의 핵심적인 길은 이런 보이지 않는 체험들이 그려간다.
찢김과 균열은 계속 생긴다.
아물고 잊혀진다지만, 마음속 가장 후미진 은밀한 곳에서는 여전히 피 흘리며 살아가게 된다.
나는 즉시 그 새로운 느낌에 겁먹어서, 아버지 앞에 엎드려 발에 입 맞추며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사죄할 수 없다.
어린아이도 그 정도는 어떤 현자 못지않게 잘 느낀다.
28p


살아오면서 나름 모범생 딸이었다.

다소 게으르고 투덜거리긴 했어도 큰 틀은 결코 벗어나지 않는 딸이었다.

20살 이후로는 용돈도 알아서 해결했고, 학비는 장학금을 받으려 무던히 애쓰고, 심지어 결혼할 때에는 오히려 쌈짓돈을 안겨드렸다.

그래서 나는 내가 독립 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을 한 뒤 철저히 나만의 착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결혼 전까지 밥솥 한번, 세탁기 한번 제대로 작동시켜본 적이 없었다.

늘 아르바이트, 출퇴근하느라 얼굴 보기도 바쁜 딸이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마주한 온전한 내 시간 앞에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그때는 내가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실망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의존적인 인간인가를 처절하게 깨닫게 되었다.

하물며 그렇게 스스로도 수습하지 못하는 내가 엄마가 된 후 얼마나 방황했는지...

오랜 시간을 방황하던 내가 정신 차린 건 남편의 말 한마디 덕분(덕분인 건지 때문인 건지)이다.


바깥에서 일을 할 때에는 나도 나름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집안일을 하는 나는 늘 힘이 들었다.

집안도 나 자신도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첫째 아이와 놀아주며 목이 늘어지게 남편의 퇴근을 기다렸다.

그런데 막상 남편이 와도 힘이 드니까 온 얼굴에 짜증과 불만이 가득했다.

그때 남편이 나지막이 한마디를 했다.


기대는 마음을 버리면 힘이 덜 든다고.


순간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대지 말라는 말처럼 들려서  서운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기대하지 않는 마음'은 남편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지려고 노력하는 마음인 것을 알기에 서운한 감정은 살짝 접어두고 며칠간 계속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주체하는 삶' 이 인생에 화두가 되었다.

그때부터 나의 생각을 많이 바꾸었다.

내가 힘이 들 때마다 누군가에게 또는 어떤 상황에 기대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본다.

그러면 비교적 쉽게 고민에 대한 해결책이 나온다.

내가 할 것.

누군가가 대신해주기를 바라지 말자.

주변의 상황을 탓하지 말자.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자.


내가 주체하는 삶을 살자.


그렇게 생각을 바꾸니 나의 주변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무기력했던 일상이 무기력할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주체하는 삶을 살겠다고 마음을 먹은 뒤로는

그런 나의 마음을 방해하는 기존의 나의 세계를 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의 삶을 재정립하기 위해.

다시 태어나기 위.


새가 알에서 나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듯이,
우리도 세계로 통하는 자신의 껍질을 부수는데 사력을 다해야 한다.
자신과 싸워 가는 길은 참 좁고 힘들지만, 그 길에 집중하며 인생의 돛대를 세워야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다.

한 개인이 독립적으로 성장하려면 의존하고 있던 많은 것들에서 떠나야 한다.
따뜻한 가족, 부모님의 품, 도덕적인 신, 의지가 되는 친구, 기대고 싶은 사랑, 추구하고 싶은 이상향......
하지만 많은 것들을 떠나 홀로 서려면, 자아의 내면적 탐구와 비판적 사고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필요하다.

237p


소설 속의 싱클레어는 사춘기 소년인데 나는 다소 때늦은 방황이지만

겁에 질려 평생 자아를 세상 밖으로 꺼내보지도 않을 것인가,

아니면 당당히 세계와 마주하겠는가,

두 선택 중에서 나는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진짜 나로 다시 태어나

진짜 감정으로

진짜 나를

진짜 나의 사람들을 마주하기로 했다.


흔들리지 않는 나이는 없는 것 같다.


10대에는 그 흔들림이 흔들림인지 몰랐고

20대에는 그 흔들림이 두려워 많은 일과 성과에 나를 몰아넣으며 나 자신을 마주할 시간을 만들지 않았고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조금씩 나를 마주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는

뒤늦게 흔들리는  때문에 함께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엄마가 된 후의 흔들림은 흔들림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졌다.

외풍에 흔들리지 않으면 이내 꺾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조금만 더 흔들리다가 이내 블랙홀에서 빠져나와 중심을 잡아야겠다.


흔들리는 자녀가 있거나

스스로가 흔들리고 있는 이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그리고 괜찮다고 가끔씩 흔들려도 괜찮다고 그렇게 위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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