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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현정 Sep 28. 2022

물컵이 알려준 '자유와 책임'

우리 집에는 갖가지 컵들이 즐비하다. 손님이 오시면 어찌나 제각각인지 내놓기 민망할 적도 많다. 

그런데 이 컵 때문에 자주 옥신각신,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정신을 차려보면 싱크대 위에 쓰고 놓아둔 컵이 수북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식구가 많아 그렇겠지.' 싶다가도 '너무하네.'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참다못한 남편은 '자기 컵을 정해서 그것만 쓰자'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나는 좀 못마땅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당신만 계속 일해야 하잖아."

막내가 툭 끼어든다.

"아빠도 컵 쓰잖아."

"나는 내 컵만 쓴다니까."

남편은 버럭 화를 낸다. 그리고 아이들은 나와 남편 사이에서 눈치를 본다.

"글쎄."

왠지 모를 거부감에 내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결국 이야기는 흐지부지 된다. 

이삼 주에 한 번씩 반복되는 우리 집 풍경이다. 무엇일까? 나는 자기 컵을 정해서 쓰자는 말이 왜 이렇게 불편한 걸까? 내 마음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 걸까? 모습을 드러내! 도대체 뭐니?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이 질문이 며칠 전 갑작스레 '자유'라는 외피를 입고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그랬다. 나는 사용하고 싶은 컵을 선택하는 내 '자유'를 침해받기 싫었던 것이다. 규칙이라는 옷을 입은 규제로 내 선택의 폭이 제한되는 것이 불편했던 것이다. 규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일까?라는 질문은 이미 케케묵은 과거의 유산이 된 지 오래다. 규제는 일반적으로 더 큰 규제를 동반할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그 규제의 룰이 권위나 일방의 힘에 의해 결정된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규제를 통해 사용하는 컵 개수를 줄인다 하더라도 엄마의 노동력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에게는 내가 사용하고 싶은 컵을 사용할 자유가 있다. 오늘은 커다란 머크컵을 사용하고 싶고 내일은 꽃무늬 커피잔을 사용하고 싶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또 알고 있다. '자유'란 반드시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매번 다른 컵을 사용할 자유, 물컵을 들고 방으로 가서 마실 자유, 지금이 아니라 조금 있다 치울 자유... 다 좋다. 하지만 엄마의 노동력이라는 일방적 희생이 그 전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미 우리 가족에게 공유되어 있다고 믿는다. 마음은 있으되 방식이 문제라면 그래. 선택권을 나에게 돌려주는 자유를 누리자. 그리고 나의 자유를 책임지자. 그래서 나는 안내판 하나를 만들었다. [자기가 사용한 컵은 씻어서 엎어두세요!] 이로써 엄마는 산더미 같은 컵 씻기의 노동에서 해방되리라!


살다 보면 알고 있는 것과 살아가는 것 사이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자주 느낀다. 수북이 쌓인 물컵을 따라 나에게 온 '자유와 책임'. 이번 기회에 작은 원칙 하나를 다시 정리해봐야겠다. 살아가는 일은 자유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그 자유에 따르는 책임은 간과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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