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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현정 Dec 14. 2022

단풍 들다


   난 나뭇잎도 처음 돋아나는 맑고 투명한 연둣빛 나뭇잎이 좋고 단풍도 맑고 투명한 물기 가득한 첫 단풍이 좋다. 둘 다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려 숨이 턱 막힌다. "아, 어쩌나, 이렇게 고와서 아, 어쩌지?" 툭툭 잘린 의성어들이 두서없이 흘러나온다. 한참을 보고 있어도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를 지경이다. 그런 단풍을, 올 가을엔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가을이 가기 전에 꼭 내소사를 가고 싶어. 좋지. 개심사는 어때? 개심사도 좋지. 남편과 둘이서 계획만 열두 번은 더 세웠다 지우며 11월을 보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작은 일정들이 쌓이고 쌓여 일상을 점령해버렸다. 가까스로 남은 창 밖 늦은 단풍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아쉬움의 탄식을 내어 놓는다.


   나뭇잎은 초록의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아 단풍이 든다. 우리는 단풍이 든다고 말하지만, 사실 단풍은 새롭게 물이 드는 것은 아니다. 여름내 광합성을 하느라 바쁘던 엽록소가 가을이 되어 줄어들자 본래 잎이 지니고 있던 다른 색소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을에 드러나는 빛깔들을 바라보면 더욱 애틋한 마음이 든다. 그동안 먹고 사느라 크게 성장하느라 미처 드러내지 못한 본모습을 짧은 가을 동안 숨 가쁘게 보여주는 듯해서일까. 나 여기 있어. 그동안 간직해 온 나를 보여줄게. 온 산을 물들이며 불타오르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어쩌면 그 마음을 좇아 산으로 산으로 달려가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한 살 한 살 더 들어갈수록 알지 못했던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내가 이런 걸 즐기던 사람이었어? 혼자 놀라기도 한다. 사회적 관계망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스스로 주문이라도 걸었던 걸까. 거의 30년 가까이 낮잠을 잔 적이 없다든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도 예의 바르게 내 역할을 자연스럽게 해 낸다든가 휴지나 치약, 비누 등을 떨어뜨려본 적이 없다든가 친인척들에게도 때때로 전화를 해 안부를 물을 도량을 지니고 있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내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했던 엽록소들이었나 보다. 가을을 맞아 수분도 줄고 영양분도 줄어들자 나무가 울긋불긋한 빛깔을 드러내듯, 나이가 들자 혼자 있기와 게으름을 즐기고 인사치레가 한없이 불편하고 귀찮은 내가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와, 깜짝 놀랄 일이다.


   2023년 새해가 밝으면 53세가 된다. 단풍이 불타오르듯 격렬하지는 않으나 숨어있던 내 모습으로 삶의 전반이 서서히 채워지고 있다. 그런데 좋아하는 투명하고 말간 물기 어린 단풍이 아닌 것 같아 조금 아쉽긴 하다. 하지만 인생의 가을은 무척 길 듯 하니 단풍 빛깔도 다채로울 거라 기대도 가져본다. 올 단풍은 졌지만, 내 인생의 단풍은 이제 물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단풍이 끝이 났구나. 단풍을 즐기지도 못했는데 모두 떨어졌구나. 후회하지 않도록 내 인생의 가을을 여유롭게 만끽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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