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현정 Jan 25. 2023

사춘기, 어린 영혼을 채워준 방이 있었기에


   4학년 끝나갈 즈음 우리 가족은 두실이라는 동네로 이사했다. 斗實이라는 이름은 논과 밭이 비옥하여 항상 곡식이 가득 찬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십이 년 전 두실은 이름과는 달리 없이 사는 사람들이 모여들던 부산 북쪽 끄트머리 작은 동네였다.


   마당이 있던 2층 양옥에서 13평 임대 아파트로 그리고 다시 일 년 만에 새로운 집으로 옮겨간 참이었다. 두실 집 역시 작은 마당이 딸린 2층 양옥이었지만, 1층 마당을 ㄱ자 모양으로 둘러싼 다섯 집과 2층 독채까지 모두 여섯 가족이 바글바글 모여 살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마당에서 반투명 유리로 된 여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폭이 좁은 쪽마루가 나오고 다시 같은 여닫이문 너머로 방 하나가 있다. 방에 들어서면 왼쪽 정면으로 다락으로 올라가는 문이, 오른쪽 정면으로 부엌으로 나가는 문이 보인다. 부엌으로 내려서면 반대쪽으로 나가는 문이 있고 그 너머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틈을 두고 담을 만난다. 1층 똑같은 구조의 집 다섯 채에 다섯 가족이 세 들어 살았다.


   두실에서의 시절이 경제적으로 어려웠음은 사실이다. 석유곤로를 쓰던 시절이었고 통보리를 삶아 냉장고에 넣어두고 쌀에 섞어 밥을 하던 시절이었다. 겨울이면 연탄을 몇 장이나 들여놓을 수 있을지 걱정하고 석유 한 병, 쌀 한 되를 사러 심부름 가곤 했다. 한 달 동안 외상으로 슈퍼에서 물건을 갖다 쓰다 아버지 월급날이면 외상값을 갚았고 다음 날이면 다시 외상 장부에 기록을 시작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경제 상황은 솔직히 내 마음에 큰 상실감이나 상처로 남지는 않았다. 그보다 떠오르는 즐거운 추억들이 많다. 가난은 내 어린 삶을 제멋대로 휘젓지는 못했다. 엄마를 따라 쑥 캐고 빨래하러 얕은 뒷 산과 계곡을 오르내렸던 기억도, 동네 아이들과 다망구에 딱지치기에 원 없이 놀았던 기억도, 그 모두가 좋았던 시절이었으나 딱 하나! 늘 아쉬웠던 것이 있었다. 막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내 방’을 갖고 싶었다. 단칸방에 여섯 식구가 오글오글 살아가는 처지에 내 방이라니. 당치도 않은 꿈이었지만, 돌아보면 참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도전하고 또 도전했었던 내가 떠오른다.


   처음엔 엄마가 쪽마루 구석에 책상을 하나 마련해 주셨다. 마당으로 난 문과 방문을 닫으면 의자를 완전히 뒤로 뺄 수도 없을 만큼 좁았지만, 그래도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졌다. 나는 동생들은 들어오지도 못하게 문을 닫아두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해가 지면 전등이 너무 어두워 그만 방으로 들어오라 잔소리를 들었지만, 동생에게 물려주기 전까지 소중한 내 방이 되어 주었다. 생각해 보면 연년생인 여동생도 자기 공간이 필요했을 텐데, 엄마의 절대적인 지지로 맏딸인 내가 특권을 누린 셈이었다. 그러다 드디어 한층 업그레이드된 내 공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바로 다락이다. 집을 좁혀 이사한 탓에 쪽마루 아래도 책과 짐이 한가득이었고 다락 또한 계단까지 밟을 틈 없이 짐이 꽉 차 있었다. 호시탐탐 내 공간을 노리던 나는 어느 날 다락에 올라가 짐을 더 다닥다닥 밀어 넣고 딱 한 사람이 앉을 만큼의 자리를 비웠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엄마는 우리 남매에게 특별히 뭘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먼지 구덩이 다락을 쓰겠다는 말에 심란했을 법도 한데 그냥 “니가 잘 치우고 써.”라고 하셨다. 나는 틈만 나면 다락에 올라가 쪽 창문을 열어두고 책도 읽고 편지도 쓰고 낙서도 하고 숙제를 했다. 희뿌연 해거름이면 다락방에 혼자 앉아 기적처럼 찾아올 집안의 회생과 내 삶의 봄날을 꿈꾸기도 하고 비밀의 화원을 찾아 혼자 상상 속을 거닐기도 했다. 언니의 공간이 궁금해 기웃거리던 동생들을 가차 없이 몰아내며 내 공간을 누렸다. 착한 동생들은 부러워하면서도 언제나 나를 거스르지 않았다.

   

   그때 우리 집 풍경을 가만 되돌아보면 실컷 놀다 들어와 나는 다락으로 둘째는 쪽마루로 셋째와 넷째는 이불장 안에 숨어들어 각자의 시간을 보내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다 또 다 같이 모여 밥을 먹고 방 한가득 쏟아둔 이불 위에서 구르며 같이 놀고 텔레비전을 봤다. 다섯 남매를 기르던 엄마는 어떻게 그 소란함을 그 어지러움을 견뎠을까 싶지만, 우리 다섯 남매는 단칸방에 산다는 설움을 느낄 새도 없이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대학에 들어가 집을 떠날 때까지 식구는 많고 방은 늘 2칸 이하였으므로 베란다, 마루 한 편 등 나만 쓸 수 있는 공간을 끊임없이 만들고 또 만들어댔다. 그마저도 힘든 날들은 학교가 그 공간이 되어 주기도 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에게 자신만의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 무엇하랴. 그 크기나 생김새보다 존재 자체가 갖는 의미가 실로 지대하다. 자기만의 세계로 침잠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한창 예민하게 마음과 영혼이 자라는 시간. 아무리 좋은 기억들이 충분했다 하더라도 결핍의 무게로 자신을 갉아 상처를 낼 수도 있었던 그 시절, 내 어린 영혼을 채워주었던 그 방들이 있었기에 나는 절망하지 않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북적거리는 가족들 틈새에서 그 보석처럼 빛나는 공간을 나에게 내어준 엄마 그리고 동생들에게 늘 감사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엄마가 된 나는 내 아이들에게도 그런 공간이 그리고 시간이 함께 하기를 온 마음으로 바란다. 훗날 성장의 자양분이 되었던 ‘나의 방’을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고 있기에 당연히 주어지는 방들이 아니라 아이들이 만들어가는 방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 방을 차지하기 위한 우리 아이들의 투쟁과 기분에 따라 종종 뒤집어엎어 재구성하는 번잡스러움에도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낸다. 모두 자신들의 방에서 누리고 즐기고 영혼을 살찌우길, 그리하여 넉넉하고 행복한 어른으로 자라나길 응원한다. 엄마의 방이 그러했듯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단풍 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