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허리는 내가 지킨다
우리 집 막내 토퍼 입성기
'띠리리리리.'
“와, 벌써 왔어?”
현관을 들어서는 여자가 들뜬 목소리로 외친다. 아마도 내가 들어있는 종이 상자를 발견한 듯하다. 사실 여자의 딸이 나를 발견하고도 현관 입구에 세워두어 살짝 기분이 상하던 참이었다.
‘그래, 바로 이거지. 역시, 기대했던 반응이야.’
공장에서 출고를 기다릴 때 숱하게 들었던 이야기다. 사람들이 우리 형제자매들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는지 이미 소문이 자자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을 고스란히 담은 첫 대면의 순간 내뱉는 숱한 감탄사들에 관한 소문들은 가벼운 열기를 띤 울렁거림으로 창고를 가득 채웠다. 달뜬 울렁거림과 열기는 처음 공장 창고를 벗어난 두려움과 덜컹거리는 트럭의 불편한 시간도 기꺼이 견디게 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자의 감탄사를 만났다.
아마 바로 나를 꺼내려나 보다. 낑낑대며 내가 든 상자를 바로 세웠다. 박스 테이프를 북 뜯어내는 걸 보니 그리 섬세한 사람은 아닌 듯하다. 들은 바로는 칼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조심스럽게 상자의 테이프를 뜯어내는 사람도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본체에까지 상처가 난 이야기를 듣기도 했던 터라 ‘그보다는 낫겠지.’ 하고 혼자 중얼거리던 순간, 상자가 휘청했다.
“현주야, 그쪽 좀 잡아봐. 힘이 없어서 엄마 혼자서는 못 뒤집겠다.”
아, 상자를 거꾸로 세워 모자를 벗기듯 상자를 빼내려나 보다. 둘이서 낑낑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렸다.
“미안, 손에 힘이 없어 놓쳤네. 그쪽 비닐 좀 벗겨봐.”
드디어 나는 비닐 포장 밖으로 나와 바닥에 누웠다. 사흘만이다. 비로소 크게 숨을 쉬고 주변을 살펴본다. 그리 좁다 할 수 없는 거실이다. 지금은 밤이라 검은 하늘만 가득하지만, 낮에는 큰 창으로 하늘을 볼 수 있겠다. 나는 어디에 놓이는 걸까. 이왕이면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음. 엄마, 이게 뭐야?”
“그러게. 매트리스 위에 얹는 토퍼라는 거래. 그런데 왜 조각이 나 있지? 연결하는 건가….”
“아, 여기 커버가 있어요. 끼우는 건가 보네.”
딸인가 보다. 현주라 불리는 조금 더 젊은 여자가 내 커버를 거실 바닥에 펼쳐둔다. 그리고 지퍼를 열고서는 나를 하나씩 하나씩 집어넣는다. 그동안 여자는 커버 귀퉁이를 잡고 딸이 수월하게 나를 집어넣도록 힘을 준다.
“근데, 토퍼는 갑자기 왜 샀어요?”
침대 위에 낑낑대며 나를 올리더니 딸이 묻는다.
“너 이사 나가고 침대가 하나 남아서. 내가 써볼까 했더니 허리가 너무 아프길래. 근 이십 년 만에 침대에서 자는 거잖아. 편하긴 한데 불편해.”
말하고서도 이상한지 여자가 웃는다.
“어제도 병원 가서 팔꿈치랑 어깨에 주사 맞았거든.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아. 자꾸 자다 깨니 더 피곤하고.”
“잘했네. 엄마, 잘했어요!”
“근데, 이거 엄청 비싼 거야. 손이 덜덜 떨려서 겨우 결제했다니까!”
아, 그렇게 된 거구나. 괜히 마음이 짠하다.
다음날 혼자 남은 나는 거실만큼은 아니지만 절반쯤 되는 베란다 창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파트라 아래쪽에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난 주로 하늘밖에 볼 수가 없다. 그래도 다행이다. 가끔 창문도 없는 방에 누워 종일 천장만 본다는 아저씨도 있다 했으니. 그래도 언젠가 여자가 나를 깨끗하게 씻겨 말릴 때 창문 가에 세워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때, 작은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누구예요? 거기 누구 있어요?”
“흠흠, 새로 들어온 식구가 있어. 다들 인사 나누지, 그래.”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다.
“안녕, 난 식탁이야. 오랜만에 새 식구가 왔군. 여자가 나를 데려온 지는 16년쯤 되었지, 아마.”
“여기 그 정도 안 된 이가 얼마나 된다고 거드름이야? 얘야, 반갑구나. 나는 냉장고란다. 종일 전기로 일을 하느라 소리가 좀 난단다. 소란스럽더라도 이해해 주렴.”
“안녕하세요. 아저씨도 여기 온 지 오래되셨어요?”
“나? 나도 16년이 되었단다. 저 식탁보다 두 달 정도 늦게 왔으니.”
“그럼, 식탁아주머니가 가장 어른이신가 봐요?”
그때 조용히 있던 옷장이 기척을 냈다.
“뭐, 오래된 게 자랑은 아니지만... 난 25년째 이 집에서 지내고 있지.”
“우와! 그렇게나 오래요?”
“원래 이 집 여자는 한 번 들어온 물건은 잘 버리지 못하거든.”
“맞아요. 아주머니도 한동안 흰색 시트지를 붙여두더니 또 다 뜯어내 원래 모습으로 만들었었잖아요. 뭐지, 원래 세 칸이었던 몸도 방마다 하나씩 떨어뜨려두고. 왜 그러나 몰라요.”
집안 곳곳에서 책장과 오래된 밥상들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한꺼번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혼자 조용히 누워있다가 갑작스레 시작된 수다 삼매경이 어찌나 정신이 없었는지 혼이 쏙 빠질 것 같았다.
“자자, 조용히 좀 해봐요. 애 놀라겠네.”
옷장 아주머니와 벽 사이에 서 있던 거의 옷장만큼이나 큰 교자상 아저씨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얘야, 나는 제사상이야. 저쪽에 병풍 형도 보이지? 이 집주인 여자는 일도 많고 가족도 많아서 짐도 많은 사람이야. 너도 봐서 알겠지만, 가장 최근에 들어온 식구가 작년에 들어온 공기 청정기란다. 이거 사는데 5년도 넘게 고민했는데, 그때 우리가 얼마나 답답했는지 넌 모를 거야. 아, 청소기도 2년밖에 안 됐다! 그런데 그전 청소기가 10년도 안 되어서 사망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오게 된 거니, 참. 그 외에는 모두 20년, 30년은 되었지. 어쩌면 우리는 이 집에서 천수를 누리고 떠날 운명일지 모르니, 모두 가족이라 생각하고 의지하면서 지내야지.”
“그래도 요즘은 남들이 버린 물건은 안 주워 오는 것 같던데요?”
거실 책장이 한마디 툭 던졌다.
“그렇지. 예전엔 누가 버려둔 서랍장, 책장을 주워와서 사포질에 페인트칠에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기 일쑤였는데 말이야. 그 왜 황금빛으로 빛나던 나비장 모두 기억하지?”
“사실 저도 12년 전에 이사 가던 사람이 버리고 간 걸 얻어서 지금까지 쓰고 있는 거잖아요.”
저쪽 멀리서 책장 하나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여자의 모습이 기억이 났다. 잠자리가 바뀌어서인지 뒤척거리다 5시에 벌떡 일어나 나도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단단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헉, 혹시 마음에 안 드나? 이런 반응 흔치 않은데? 어쩌지?’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훨씬 낫네. 며칠 써보면 알겠지? 그럼, 네가 얼마짜린데. 제발, 잘 부탁한다!”
그리고는 거실로 나가 노트북을 펴고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타닥타닥 두드렸다. 그러다 왼쪽 다리를 접어 오른쪽 다리 위로 올렸다가 ‘아구구’ 소리를 내더니 툭 떨어뜨렸다. 잠시 또 그렇게 앉았다가 이번엔 다시 벌떡 일어나 노르스름한 네모 종이를 오른쪽 어깨에 붙였다. 팔을 빙글빙글 돌리더니 이번엔 또 손가락과 팔꿈치를 살살 주무른다. 뭘 하는 걸까? 끙끙거리는 소리로 미루어보아 어디가 아프긴 한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알 길이 없었다.
“얘야, 너 우리말 듣고 있니?”
“아, 네.”
다시 냉장고 아저씨다.
“여하튼 우리 식구가 된 걸 환영해! 사실 요즘 여자는 무척 바쁜지 우리에게 좀 소홀해. 저기 약 보이지? 병원에 다니면서 무슨 주사도 맞았다더라고. 그래서 특별히 막내 네가 입성한 것 아니겠어? 너 책임이 막중하단다. 우리 모두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지내려면 네가 잘해야 해!”
“제가요? 뭘 어떻게요?”
나는 겁먹은 목소리로 우물쭈물 말했다.
‘난 공장에서 막 나온, 이 집에도 막 들어온 막내인데, 어쩌지?’
“그저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나 하루를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탄탄하게 잘 받쳐주면 될 것 같은데?”
다시 제사상 아저씨다.
“그렇게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럼, 너도 지내보면 알겠지만, 여자는 앞으로 하고 싶은 일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아 보이더라고. 본인은 결심 반대주의자라고 하던데, 그거 자기도 잘 모르고 하는 얘기야. 매일 반성하고 결심하는 거 우리는 다 봐왔거든. 어쨌거나 이 고비를 잘 넘겨야 건강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아니냐. 그저 잠만 잘 자도 보약보다 낫다니, 막내 네가 힘을 써줘야겠다.”
“오늘 아침에 봤죠? 남편한테 미안해서 써보고 다시 주문하려고 하나만 우선 샀다고 중언부언하는 거요. 막내 위에 누워본 남편이 좋다고 하니 당장 하나 더 주문할 기세더라고요. 며칠 전에 자기 것 살 때는 그렇게 고민하더니만.”
식탁 아주머니의 툴툴거림에 모두 또 시끌시끌하다.
‘그렇구나. 그 여자는 이렇게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나를 샀구나. 좋아! 오늘 밤부터 난 더 탄탄한 내가 되어야겠어. 편히 잠들도록, 자는 동안 허리와 무릎과 팔꿈치들이 모두 편안히 쉴 수 있도록 내가 딱 받쳐줘야지!’
난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선 거실 끝 현관까지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씩씩하게 외쳤다.
“걱정 마세요, 여자의 허리는 제가 지킬게요! 제가 오래오래 힘써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