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생신날 테이블 3개가 있는 방 하나를 빌려 가족 모임을 했다. 주차를 하고 아이들을 챙기느라 우리가 가장 마지막에 들어갔는데 8인용 테이블 하나가 남아있었다. 테이블 가운데 코로나 확산 방지로 칸막이가 되어있어서 가족들과 가까운 쪽으로 붙어 앉으면 되었는데, 우주와 하나가 테이블 양 끝에 자리 잡고 서로 여기 앉겠다고 우긴다. 크게 문제 될 건 아니었지만 아이들이 양 끝에 나눠 앉으면 중앙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불고기 전골을 양쪽으로 나누고 반찬을 덜고 두 녀석이 다 잘 먹는지 의자에 앉을 세도 없이 칸막이를 넘어 양쪽을 오가야 할 게 뻔했다. 식사가 다 나오기 전까지 설득해 보았지만 그날따라 어느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다. 나도 그날만큼은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또야. 또 시작이구나' 속으로 화가 들끓었다.
카페나 식당에 가면 아이들 스스로 앉고 싶은 자리를 고르게 하는 편이다. 분명 다 먹지 못하고 남길게 뻔 해도 자기가 먹고 싶은 걸 선택하게 하고, 머물기 좋은 자리를 스스로 정한다. 그런데 이 날은 지쳐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애초부터 너희에게 자리를 고르는 자유를 주지 않았더라면....
사실 방법은 알고 있다. 수년간 해왔으니까. 우리가 두 자리를 다 쓰면 안 된다는 걸 차분히 설명하고, 함께 앉을 수 있게 양보하도록 권한다. 다음번에는 양보한 사람이 선택한 자리에 앉자고 하거나, 양보해 줘서 고맙다고 폭풍 칭찬을 해주면 됐을 거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을 또 반복해야 하는 게 지겨웠다. 다정하고 이성적인 엄마 노릇에 지쳐버렸다.
집 앞 편의점이나 유치원 앞 문방구를 지날 때마다 사탕 하나라도 사들고 나와야 하는 하나에게 한동안은 '그래 그럴 나이지. 이런 즐거움도 있어야지.' 했다. 사달라 조르는 법이 없었던 우주와는 다른 하나가 오히려 귀엽기도 했다. 그러다 하나가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이틀에 한 번, 삼일에 한 번으로 간격을 늘리다가 때가 되었다 싶어서 이제는 매일 사탕이나 장난감을 살 수 없다는 걸 너도 알아야 한다고 얘기해 주었다.
"엄마 저금통에 돈이 있는데, 그걸 매일 문방구에서 쓰면 나중에 하나가 바다에 가고 싶어도 저금통에 돈이 하나도 없어서 못 가. 키즈카페도 가고 여행도 가고 해야 되는데 돈이 없으면 안 되겠지. 그러니까 꼭 필요할 때만 쓰자?"
"하나 저금통에 돈 있잖아. 그걸로 사면 되지."
"하나는 아직 어리니까 하나 저금통에 있는 돈도 마음대로 쓰면 안 돼. 그것도 참았다가 너무너무 쓰고 싶을 때 써야지"
"매일 안 갈게. 맨날 가면 안 되지."
의외로 쉽게 인정한 하나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고, 하나는 기필코 문방구에 가야겠다며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매일 문방구에 갈 수 없다는 걸 이해는 하지만, 장난감을 사고 싶은 마음은 아직 어쩔 수 없는 나이니까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입구에 주저 않아 울고 있는 하나를 조금 떨어진 곳에 옮겨 놓고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천천히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를 고민한다.
아이가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하며 바닥에 앉아 생떼를 쓰고 울 때. 엄마의 선택지는 여러 개다.
1. 해줄 수 없는 이유를 차분하게 설명한다. 여러 번 말했지만 처음인 것처럼.
2. 공감한다. 장난감이 너무 갖고 싶을 텐데 속상하겠다. 엄마도 사주고 싶지만 매일 그럴 수 없는 거라고.
3. 주머니에 있는 젤리를 주고 그래도 안 되면 집에 가서 간식을 먹자고 달랜다.
4. 매일 장난감을 살 수는 없어. 단호하게 얘기하고 울음이 그칠 때까지 차분히 기다린다.
지금까지 상황과 아이의 컨디션에 맞게 이 선택지들을 돌아가며 선택해왔다. 때로는 여러 개를 다양하게 조합해서 쓸 때도 있었다. 2,3번 혹은 1,4번 가끔은 2,1,4,3 순으로 모든 선택지를 다 꺼내야 할 때도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경험치가 쌓였고 아이는 성장했으므로 어떤 상황에 몇 번을 선택해야 이 사태가 진정되고 아이가 쉽게 받아들이는지 정답을 맞히는 확률도 높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난데없이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
5. 소리 지르고 협박한다.
5번 선택지는 우발적이고 충동적으로 튀어나왔다.내 인내심을 담당하던 회로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이게 정답이 아닌 걸 알면서도 도무지 다른 선택지를 고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디 해봐라. 그래 울어라 울어. 그래도 엄마는 안 해줄 거야. 엄마가 여러 번 얘기했지! 절대 안 사줄 거야. 너 혼자 거기 있어. 엄마는 집에 갈 거야. 네가 이렇게 울면 엄마 평생 장난감 안 사줘."
내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대체 뭐라고 떠들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혀에서 만들어져 입 밖으로 너무 쉽게 나가는 것 같았다. 설사 머릿속에 그런 생각을 했을지언정, 평소라면 생각만으로도 수치스러워서 서둘러 지워버렸을 최악의 말들이었다. 그런 걸 잘도 내뱉고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이건 훈육도 교육도 아닌 단순한 화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 시작된 분노는 그칠 줄 모르고 끔찍한 말들을 쏟아냈다.
내 등 뒤로 '엄마 가지 마. 나랑 같이 가.' 울면서 따라오는 하나를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씩씩거리며 앞서 걷고 있었지만 지금이라도 내 잘못을 이야기하고 사과하고 싶었다. 너는 아직 아이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고, 다음에 또 그런다 해도 엄마가 잘 설명해줬어야 하는 거라고. 오히려 내가 엉엉 울며 엎드려서 내 부족함을 고백하고 싶었다. 부끄러움과 성난 감정이 뒤범벅되어 지옥에라도 떨어진 기분이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피곤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감정은 체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니까. 놀이터에서 놀면서 하루치 인내심을 다 써버려서였을까. 어젯밤 이제 편의점이나 문방구에서 쓰는 자잘한 돈은 좀 아끼라던 남편의 말이 생각나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우는 하나의 우는 모습이 이제 정말 보기 싫어졌을지도. 어쩌면 이 모든 이유가 합쳐져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반복되는 아이와의 일상 때문에 엄마 노릇에도 번아웃이 오는 건지, 지금까지 애써 노력은 했지만 사실 나는 원래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인 건지, 내가 미운 건지 아이가 미운 건지, 우리가 이렇게 지내는 것도 모르는 남편이 미운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엄마가 된 지 9년이나 되었는데도 5번 선택지를 고른 순간, 육아 경험치가 리셋되어 0에서 다시 시작된 것 같아 허망해졌다.
원인도 이유로 모르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은 수습해야 했기에 스스로를 위안할 핑곗거리를 찾았다. 할 말 큼 했잖아. 엄마도 사람인데 사람이라면 이럴 때 화가 날 수도 있는 거지. 나도 살아야지. 안 그래? 하지만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오랜 경험을 통해서 배웠고, 본능적으로도 느꼈다. 그 선택지를 쓰는 순간 슬픔과 억울함이 아이와 나를 다 좀먹는다는 것을. 아이는 분노와 외로움 외에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아이를 향한 분노는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았다. 억지로 아이 눈물을 삼키게 할 수도 없었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아이는 무서워서 더 울었고 나는 소리를 질러도 후련해지지 않았으며 우리는 점점 더 괴로워졌다.
우주와 OO에 대해 떠오르는 세 가지를 얘기하는 놀이를 할 때 엄마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엄마 하면 떠오르는 세 가지."
"예쁘다. 착하다. 하나한테 화를 낸다."
애써 당혹감을 감추고 나는 우주의 말을 통해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다. 아, 나는 마침내 화내는 엄마가 되었구나.
화를 낸다는 새로운 선택지가 없을 때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새로운 선택지가 한 번 추가되고 난 이후에는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타이르고, 인내하고, 웃으며 넘기고, 알려주고, 기다릴 수 있고, 이제는 무섭게 소리 지르면서 아이를 협박할 수도 있는 사람이 된 거다.
나는 이제 아이에게 소리 지르고 부정적으로 말하고 협박하고 공포에 몰아넣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한두 번 그 선택지를 선택하고 났더니 이제 습관처럼 수시로 아주 쉽게 답을 고른다. 왜? 화가 나니까. 화가 나면 아무리 사랑하는 아이에게라도 화를 낼 수 있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스스로를 아름답다 여기던 엄마는 어디 갔나. 존재 자체로 감사했던 아이에 대한 무한한 사랑은 어디로 갔을까.
며칠 전에는 하루 종일 밖에서 놀고 돌아오는 길 하나가 '오늘 재미없었어.' 하는데 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오늘 놀이터에서 다른 엄마들은 의자에 앉아 대화의 장을 여는 동안, 엄마 혼자 너랑 친구들을 다 데리고 숨바꼭질을 하고 술래잡기도 했는데. 네가 울 때도 화내지 않고 달래기 위해 참을 인자를 열 번도 넘게 새겼는데. 엄마 밉다고 소리를 지르는 너를 안고 토닥이며 계속 재미있게 놀 수 있도록 갖은 애를 썼는데. 그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내가 바란 건 오직 너의 기쁨 하나였는데. 뭐? 재미가 없었다고?
나는 아이들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걸 누리고도 즐거워하지 않으니 화가 났다. 내 노력 같은 건 몰라도 너희들만 즐거우면 되는 거였는데. 열성적인 엄마로 자부심을 갖고 살던 내가 이제는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설렁설링인 엄마들이 부러워졌다. 나도 아이와 그 정도의 간격이 필요해 보였다.
애초에 있는 힘껏 애쓰다 지쳐 나가 떨어져 버린 건 내 탓이니까.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 데.'라던지 '내가 이렇게 까지 해줬는데.'라는 마음이 치고 올라오지 않도록 해야했다. 그건 너무 끔찍하니까.
지금까지 아이들이 만들어 가야 할 몫의 행복까지 내 노력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자만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정말 좀 지쳤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