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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Jun 02. 2022

내가 가장 아름다웠을 때

남들보다 한참 늦은 산후우울증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마주오던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아유 예뻐라"


막 서점 화장실에서 나오던 참이었다. 혼자 앉을 수 없는 우주를 눕혀 둘 마땅한 곳이 없어서, 아기띠를 벗지 못하고 큰일을 보느라 혼이 쏙 빠져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까지 내려와 해초처럼 붙어있었다. 앞에는 아기띠, 뒤에는 기저귀 가방을 메고 엉거주춤 어쩔줄 모르던 내 몰골이 어땠는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이도 나는 할머니의 예쁘다는 말이 꼭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아이가, 엄마가,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예쁘지 않을 리가 없으리라 굳게 믿던 때였다. 머리카락에 밥풀이 붙어있거나 허벅지 부분이 허옇게 늘어난 검정 레깅스를 입고 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나는 그 말이 아기띠 속 내 아이에게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치 내가 들은것 같았다. 아이의 칭찬이 내 기쁨이어서도 아니고 내가 공주병이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엄마인 내가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30대 초반의 나는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꼈다. 처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우주를 임신하고 봉긋하게 배가 나와 제법 임산부 티가 날 때부터였다. 살이 찌고 발이 붓고 입을 수 있는 옷은 몇 벌 되지 않았지만 그런 문제들은 생명이 내 몸 안에 자라고 있다는 신비를 경험하는 것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심지어 임신성 호르몬 변화로 양쪽 겨드랑이에 부유두가 생겼을 때도 그랬다.(들어는 보았는가! 부유방 아니고 부유두) 크기는 유두보다 작지만 진짜 젖꼭지처럼 생긴 작은 부유두가 양쪽 겨드랑이 근처에 생겼었다. 검색해보니 유선이 발달하며 생기는 것으로 실제로 젖이 나오기도 한단다. 믿기지가 않아 몇 번이나 거울 앞에 서서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확인하려고 애썼다. 내가 젖꼭지가 네 개가 되다니! 들어본 적도 없는 임신 증상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신체의 변화가 좌절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경악할 정도로 놀란 건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런 증상이 있다는 것을 공부한 후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자연적으로 없어진다고도 하고, 안 되면 수술하면 되겠지. 로봇이 암도 없애는 시대에 젖꼭지 하나 못 없애겠나. 혹여 없애지 못하더라도 그깟 젖꼭지 누가 본다고. 오히려 젖꼭지가 네 개가 될 정도면 아마 젖은 엄청 잘 나올 건가 보다 약간의 기대감까지 생겼다.


아이를 임신하고 나서 내 존재 자체가 귀하고 예뻤다.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거나, 성공하기 위해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거나, 남들에게 예뻐 보이기 위해 여드름 없이 깨끗한 피부를 꿈꾸거나, 친구들과 수영장에 갔을 때 가슴이 커 보이고 싶다거나,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는 세련된 옷을 입는 것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무얼 하지 않아도 무엇이 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귀했다. 모두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건 노래 가사처럼.


기미가 가득한 울긋불긋 내 볼이 아름다웠다. 엎으려 누울 수 없이 볼록하게 나온 배가 아름다웠다. 몇 달간 미용실에 가지 못해서 묶고 다니는 반곱슬 머리칼도 아름답고. 인정받기 위해 성실히 일하지 않아도 아름다웠다. 낮이고 밤이고 침대와 한 몸이 되어 게으름을 피워도 아름다웠고. 호르몬이 날뛰어서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수시로 울어도 아름다웠다. 젖꼭지가 두 개든 네 개든 상관없이 아름다웠다.

내 아이가 그렇듯, 아이였던 나도 살아있다면 생명은 그 자체로 귀한 것이다. 엄마가 되고 나서 그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불편한 상황들을 이해했고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해졌고 사랑이 넘쳤다. 나와 아이뿐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것에 그랬다.


한 때 세상을 핑크빛으로 보던 그때의 나에 비해 요즘 나는 뒤늦게 우울감에 젖어 있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아주 엉망이다.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운데 거기서 나는 쏙 빠졌다. 젖꼭지는 다시 두 개가 되었는데도 네 개였을 때 보다 괴상했다. 머리는 새치 염색을 해야 하는 데 갈색도 검은색도 어울리지 않고. 미용실을 옮겨 두 번이나 자른 단발머리도 계속 마음에 안 들어서 이렇게 하면 좀 나을까 매일 아침 가르마를 바꿔본다. 살은 더 많이 쪄서 홀몸으로 갱신할 수 있는 최고 숫자를 찍었고, 비염은 여전히 내 삶을 갉아먹느라 종일 콧물을 쏟아내고 있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고 싶지 않고, 예쁜 곳에 놀러 가서도 꽃 앞에 나를 세워놓기 싫어서 아이들 사진만 찍는다.

어쩌다 내 사진이라도 찍힌 날에는 화면 속 내가 날씬해 보이지 않거나 예쁘게 찍히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넘어, 내가 알던 내 모습과 달라서 당황한다. 핸드폰 화면 속에 웃고 있는 내가, 진짜 내가 맞나? 내가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이렇게 웃었나. 이런 표정을 지었나. 뻔히 정답을 알면서도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삭제해 버린다.


애 키우느라 고생하는 엄마 행색이야 거기서 거기일 테고 세월이 흘렀으니 해봐야 그때보다 몇 년치 더 늙었겠지. 달라진 건 아마도 내가 나를 바라보는 마음일 것이다. 나는 요즘 우울한 내가 영 못마땅하다.

'산후우울증이 남들보다 조금 더디게 온 게 아닐까.'

첫 아이를 낳은지 9년, 둘째를 낳은 지 6년 뒤에도 올 수 있다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정신적 아픔이 산후우울증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그 시기를 제 때에 지났을 엄마들에게 뺨 맞을 각오로 말하자면 나는 그 당시 산후우울증을 믿지 않았다. 천사 같은 아이를 품에 안고 있으면서 세상을 다 가진 기쁨을 누리기도 모자란 시간에 우울증이라니 그러다 하늘이 노하시지. 강한 모성과 뛰어난 의지를 가진 나는 감사할 줄 모르는 그들보다 좋은 엄마가 될 자격을 갖췄다고 자만했는지도 모른다. 멍청하게도.


나 역시 힘들었다. 그런데 힘들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기를 갖게 된다면, 아이를 낳는다면 어떤 엄마가 되어야지 꿈꿨던 시간만큼, 우주가 태어난 순간부터 뼈를 갈아 넣을 각오로 덤볐으니까. 뱃속의 아이를 밀어내기 위해 다리를 벌리고 힘을 주던 그 순간부터 이건 나밖에 할 수 없는 내 몫이라고 당연하게 여겼다. 자꾸 몸이 붓고 견딜 수 없는 피로감에 힘들었지만, 아이와 놀다가 꾸벅꾸벅 졸면서도 애 키우는 게 다 그렇겠지 피곤한 게 당연하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주가 처음으로 까꿍이라는 말을 했던 날, 친정엄마와 영상 통화를 하는데 오랜만에 우리 딸 얼굴도 좀 보자 하시던 엄마는 내 꼴을 보고 다그치셨다. 단순히 잠이 부족하거나 피곤해서 그런 것 같지 않다고 당장 병원에 가보라고. 그 시절 찍은 사진을 보면 이제야 나도 그때 엄마의 시선으로 내가 보인다. 얼굴이 풍선처럼 부풀어 있다. 이제 막 일어난 사람처럼 눈꺼풀이 부어서 눈은 다 뜨지 못하고 반쯤 감겼다. 그렇게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선 우주를 껴안고 행복하게 웃고 있다.


병원에 가서야 갑상선 기능 저하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임신 전 갑상선 기능 항진증을 앓았는데 아무리 먹어도 살이 쭉쭉 빠지던 그때와 정 반대의 증상이라 몸이 붓는 게 갑상선 때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호르몬이 양극단을 오가는지, 원래 이런 경우도 있는 건지, 오로지 아이만 보는라 매일이 신비롭고 힘겨워서 내 몸의 변화는 알아채지 못했다.

병원에 가기 위해 시아버지 차를 얻어 타고 아기띠로 우주를 안고 간 나를 놀란 눈으로 보던 의사 선생님의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검색해서 알아보고 왔는데요."

"아니 그게 아니라 병원에 뭐 타고 오셨냐고요."

"아버님 차 타고 왔는데요?"

"이 정도 수치면 엠뷸런스 타고 와야 해요."


나는 아직도 그때의 외로움과 피로감을 평생 지워지지 않는 화상 자국처럼 달고 산다. 남편에게 서운한 일이 생기면 그때 내가 내 몸 아픈지도 모르고 살 때,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자던 당신은 무얼 했나 따져 묻고 싶어 진다. 가까이에 사는 시부모님은 왜 며느리를 도우러 반나절도 시간을 내주지 않으셨을까 묻고 싶었다. '오늘은 우리가 애 봐줄 테니 너는 밖에 나가 바람 좀 쐬어' 라던가 '우주 데리고 나갈게 편하게 잠 좀 자라' 라던가. 그때 그런 배려를 받았다면 지금 마음이 덜 힘들까. 사랑한다더니 평생 행복하게 살자더니, 시골에 내려오면 잘해주겠다더니 고맙다더니. 그들은 나에게 왜 그렇게 무심했을까.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작고 사소한 불만의 불씨가 피어나면 내 몸에 남은 흔적이 다시 뜨겁게 욱신거린다. 지난 고통이 꿈꾸듯 생생하다. 그때의 나는 일찍 결혼한 친구가 물려준 노란색 수유복을 입고 있다. 편의를 위해 가슴 위로 길게 가로질러있는 지퍼를 열고 손수건으로 한쪽 가슴에서 젖이 새어 나오지 않게 막고 있다. 우주는 내 품에서 기특하게도 힘차게 젖을 빨고 나는 아이를 놓칠까 봐 한 쪽 무릎을 올려 팔을 받치고 젖을 먹이며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 시절의 나는 분명 행복했다. 죽기 전에 행복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흐른다면 분명 가장 먼저 떠오를 순간이었다. 내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경험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내가 좀 가엽다. 매일 입고 빨아서 보풀이 난 노란 수유복을 입고 허리를 숙이고 있는 내 살찌고 동그란 어깨가 안쓰럽다. 아이 때문이 아니라 내 고단함을 덜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제 몸보다 커다 학교 가방을 메고 놀이터를 혼자 서성이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처럼 불안하고 애처로워진다. 그럴때면 아무것도 용서할 수가 없는 기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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