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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May 03. 2022

솔직히 부러워

나혼자 키운다

어떤 몰이꾼이 말과 당나귀에게 짐을 지우고 길을 떠났다. 평지를 걸을 때는 그나마 견딜만했지만, 비탈길을 오르게 되자 힘에 겨워진 당나귀는 말에게 자기의 짐을 조금만 덜어가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말은 당나귀의 부탁을 냉정하게 거절했다. 급기야 당나귀는 얼마 가지 못하고 쓰러져 죽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몰이꾼은 당나귀의 짐과 죽은 당나귀의 가죽까지 벗겨 모두 말에게 지고 가게 했다. 그러자 말은 짐에 눌려 한숨을 지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진작에 당나귀가 도움을 청할 때 짐을 덜어주었으면 이렇게 도맡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
 
출처 : 학부모뉴스24(http://www.sptnews24.com


아이들을 키우며 종종 말과 당나귀 이솝우화를 떠올린다. 나는 당나귀다. 심지어 말에게 짐을 나누어 들자고 얘기하지 않은 당나귀. 당연히 말은 남편이다. 우리 집 말은 종종 짐을 나누어 들었지만 어딘지 불편하게 짊어지더니 급기야 떨어뜨리까지 했다. 말에게 갔다 당나귀에게 돌아온 짐은 흙투성이가 되어서 이러다 깨질까 조바심이 났다.

이솝우화와 우리가 다른 점은 등위에 올려진 짐이 보기에도 아까운 두 아이들이라는 것과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육아를 하며 내가 가장 힘들었던 점은 내가 대체 불가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육아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출산이나 모유수유처럼 육아도 꼭 나여야만 했다. 아이들에 대한 애정과 남편의 방관이 더해져 스스로 그렇게 여기게 되었다.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요구하고 싸우고 나 몰라라 한다면 남편도 아이를 돌봤을 것이다. 아이랑 남편만 두고 몇 시간 나갔다 오면 기저귀도 갈고 이유식도 먹이고 우는 아이를 재우려고 안아 보고 유모차도 태우며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나귀가 등에 짊어지고 있는 짐을 너무 사랑하게 된 나머지 덜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당나귀가 바라는 건 그저 힘들다 싶을 때 잠시 옮겨 갔다 다시 짊어지는 정도였는데 말은 그걸 아주 가끔 아주 짧은 시간만 해줬다. 애석하게도 먼저 들어주겠다 얘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흔히 말하는 딸바보를 남편으로 둔 엄마들은 남편이 딸아이를 너무 예뻐해서 질투가 난다 하던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는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조금 슬퍼지고 만다. 간혹은 이게 서운함을 가장한 자랑인가 싶다. 남편에게 선물 받은 다이아가 너무 커서 반지를 낀 손가락이 무겁다는 그런 개그처럼. 지금 자기 남편이 아이들에게 자상한 아빠라는 걸 유머 코드로 활용하는 건가? 아니면 사랑받던 여자에서 아이의 엄마로 밀려난 것 같은 아쉬움을 귀엽게 토로하는 것인가? 나는 겪어보지 않은 그들만의 서운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든 겪어봐야 아는 나로서는 끝내 모를 세계일 테니.


나밖에 모르던 남자가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아이들 바라보는 것이, 물에 젖은 아이의 발을 자신의 옷에 닦아주는 것이, 팔이 아파도 금이야 옥이야 절대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 정말 서운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아까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부럽다. 그 집 당나귀는 여전히 말에게 사랑받길 원하고 있는 것일 테니.

엄마의 빈자리를 느낄 세도 없이 둘 만의 세상을 독자적으로 만드는 딸바보 아들바보 아빠가 나는 솔직히 부럽다. 좋아 죽는 부녀 사이를 서운하게 보는 그 시선까지도.



하나의 친구 엄마 중에 애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있다. 하원길에 만나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눈인사를 하자마자 바로 얼굴을 찌푸리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늘 등원 길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요즘 짜증이 늘어서 힘들어 죽겠다고. 맨날 안아달라고 하는데 밤에도 그렇게 자주 깬다고.


그 엄마의 푸념 엄살이 아닐 것이다. 유독 그 아이가 힘들게 한다거나 유난히 그 엄마가 인내심이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게 그 엄마가 힘듬을 떨쳐내는 방식일 거라 짐작해본다. 내가 매일 글쓰기로 도망치고 그것도 안 될 때는 훌쩍 여행을 떠나버리듯. 그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힘들다고 털어놓으며 받는 공감과 위로로 이겨내는 것이다. 내가 남편에게도 힘들다는 말을 죽어도 입 밖으로 뱉지 않는 것으로 나를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그 사람은 쏟아내는 것으로 버티는 게 아닐까. 우리는 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중이었다.


하루는 그 엄마네 집에 초대되어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다. 자기가 하도 아이 키우기 힘들다고 했더니 친정엄마가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오고, 서울에 살던 시부모님까지 이 지역으로 이사를 오셨다고 했다. 토요일이면 시부모님이 오셔서 첫째를 데려가는데 혹시 며느리에게 부담이 될까 얼굴도 마주치지 않고 1층에서 아이만 데려가신다고. 그렇게 매주 하룻밤이라도 자고 와서 그나마 살 것 같다고 했다. 매일 삼시 세끼 차리는 어려움에 대해 얘기하다가는 종일 아이들과 씨름하느라 기운이 없어서 저녁은 못하고 아이 아빠가 퇴근길에 항상 저녁거리를 포장해 온다고 했다. 그 지역에 맛집이 많더라며 몇몇 가게를 얘기해 주는데 알고 보니 남편 회사와 같은 지역이다. 세상에 나는 지난 몇 년간 그 지역에 맛집이 있는 걸 몰랐네. 뭐 먹어 본 적이 있어야지.


그렇군요. 그랬군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대꾸했지만 속으로 충격과 혼란에 빠져있었다. 이게 무슨 상팔자란 말인가. 어떤 부와 성공도 이 팔자와 바꾸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음 생을 고를 수 있다면 너 이 사람 팔자로 태어날래 김태희 송혜교 외모로 태어날래 물어도 주저 없이 이 팔자를 택할 것이다. 로또 당첨도 다 필요 없다.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내 육아를 언제든 도와줄 준비가 된 양가 부모님과 내 힘듬을 알아주는 남편이라니. 각자의 방식으로 버티고 있다는 말 취소. 이건 너무 불공평하다.


 

처음 이곳으로 내려올 때 옆에서 많이 돕겠다던 시어머니의 말이 떠올라도 먼저 전화를 걸어 아이를 부탁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먼 곳에 있는 친정엄마를 불러 나 좀 쉬겠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참 못나도 시어머니가 마사지를 받았다는 얘기를 듣거나 길게 연장한 속눈썹이 반짝이는 걸 볼 때면 아픈 손목이 욱신거렸다.


남편을 따라 시골로 내려와 낯선 곳에서 우주를 키우며 내 소원은 딱 하나였다. 또래 아이를 키우는 내 친구 한 명만 근처에 살았다면. 그러면 지겹게 안 가는 시계가 조금은 더 빠르게 흐를 텐데. 어린이집에 가기 전까지 친구 한 명 없었던 우주에게 놀러 갈 친구 집이 생길 텐데. 몇 년간 맥주 한 잔 마실 밤마실 상대가 없었던 나에게도 재충전할 여유가 생길 텐데. 하지만 그 소원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육아야 누구나 힘들겠지만 도와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훨씬 가벼워진다. 실제로 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존재 만으로도 마음이 놓인다.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하는데 아기를 데리고 물리치료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발을 동동 굴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잠이 쏟아질 때 딱 한 시간만 아이를 부탁하고 늘어지게 잘 수 있는 여자 형제라도 하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 옷을 물려주고 장난감을 빌려줄 격 없는 친구 한 명만 근처에 있었더라면. 이제는 동네 엄마들과 친구 비슷한 관계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게 참 부럽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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