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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Mar 21. 2022

살피는 마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과 최대한

여름에는 항상 가방에 여벌의 옷과 수건을 가지고 다녔다. 언제든 아이들이 물에 뛰어들 수 있도록 아이들 것과 내 옷까지. 그 순간을 대비해서 우리는 여름 내내 물에 젖어도 되는 고무로 된 샌들을 신었다. 금방 크는 아이들은 해마다 디자인이 다른 걸 신었지만 몇 년째 같은 신발을 신은 내 발등에는 사계절 내내 문신처럼 진한 자국이 남았다. 매년 그렇게 반복되다 보니 발등 위에 샌들 자국은 겨울이 되어도 흐려지지 않았다. 까맣게 탄 내 발등을 본 사람들은 어디 휴양지라도 다녀왔냐며 놀렸지만, 아이들과 밖에서 열심히 놀고 얻은 훈장 같아서 나는 은근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공원에 인공폭포를 틀어놓은 날에는 작은 개울이 만들어지는데 가볍게 산책하러 나왔던 아이들은 뜻밖의 기회 망설임 없이 뛰어든다. 저녁을 먹으러 들린 상가에도 바닥분수가 틀어져 있는 날이면 밥 먹기 싫어하는 하나도 한 공기를 후딱 비우고 놀고 있는 아이들 사이로 합류했다. 나는 물에 들어가도 되냐는 아이들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항상 고개를 끄덕인다. 엄마 가방에 수건이랑 여벌 옷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놀라고, 다 젖어도 상관없다고. 항상 준비가 되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예쁜 옷이 더러워지면 안 된다거나 신발이 젖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한여름 시원한 물줄기를 만난 아이들의 손을 잡아끌어 집으로 향하고 싶지는 않았다.


미쳐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때에도 나는 언제나 OK 하는 엄마였다. 아이들에게는 느긋하게 놀아라 해놓고는 나 혼자 방법을 찾아내느라 분주했지만 말이다. 눈앞에 보이는 옷가게에서 제일 저렴한 옷을 사 올 때도 있었고, 내 겉옷으로 대충 감싸서 차를 태울 때도 있었다. 그것도 안 될 때는 편의점에서 수건을 사서 젖은 옷 위에 둘러주고 집에 올 때도 있었다. 아무 준비 없이 가게 된 속리산에서는 입구에 있던 관광 용품점에서 어른용 티셔츠를 사서 원피스처럼 입혀 돌아온 날도 있었다. 어찌 됐든 아이들의 즐거움을 뺏지 않을 수 있게 대안을 찾는 게 내가 생각하는 엄마의 일이었다.


어느 부모가 그렇지 않겠냐만은 아이들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게 해주고 싶었다. 확고하고 대단한 교육열이나 충분한 경제력 같은 것이 뒷받침되었다면 아마 내 노력이 다른 방향을 향했을지 모르지만, 그런 게 없으니 사소한 부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이를테면 보고 싶은 뮤지컬이 있다면 차로 두 시간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가거나, 유튜브에서 본 물감놀이를 해보고 싶다면 집안이 엉망이 되어도 말리지 않는 것. 김장할 때 쓰는 커다란 대야에 들어가 감자전분 한 통을 탈탈 털어 넣고 촉감놀이를 하는 것 같은, 내 몸이 좀 힘들면 아이들이 즐거워지는 것들 말이다.


집에서는 매끼 새로 밥을 한다. 간단히 간식을 차려 먹을 때도 예쁜 접시에 담아주고, 과일은 손님에게 대접할 때와 다르지 않게 가지런히 잘라 준다. 아이들이 탕목욕을 할 때는 중간중간 뜨거운 물을 부어서 모락모락 연기가 나도록 따뜻한 온도를 유지해 주고, 샌드위치를 만들어 줄 때는 식빵의 딱딱한 테두리를 잘라 주고, 나 혼자 있을 때 보일러를 끄고 환기했다가 아이가 집에 돌아올 때에 맞춰 보일러를 켜고 집안 공기를 쾌적하게 만들어 놓는 식의 거창하지 않는 배려 같은 것도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사랑이자 배려였다.


한 편으로는 이런 내 방식이 어쩌면 아이를 까탈스럽게 만들거나 이기적으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든다. 아이들은 어느 정도 막 키워야 한다는 엄마들의 생각에도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다. 그녀들의 과감한 날것 육아를 볼 때마다 나는 부러움 반, 걱정 반으로 나 혼자 아이를 온실 속 화초로 키우나 움찔한다. 특히 식빵 테두리를 자를 때마다 늘 내 머릿속에서 재연되는 장면이 있는데, 어른이 된 우주 하나가 밖에서 식빵을 먹다가 '저는 식빵 테두리는 안 먹어요. 엄마가 옛날부터 잘라줘서 안 먹어봤어요.'라고 하는 거다. 윽! 글로 적으면서 또 생각했는데 역시나 너무 싫다.


정말 그럴까. 나의 세세한 보살핌이 아이를 망칠까? 아니면 반대로 지극한 사랑으로 기억할까. 자기가 당연하게 받은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주려는 배려심 많은 사람으로 자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그랬듯 다른 이에게 부드러운 빵을 주기 위해 테두리를 잘라 주는 우주 하나로 바꿔 상상해본다. 지금은 계란말이랑 돈가스를 좋아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청국장과 과메기도 즐길 줄 아는 나이가 되면 식빵 테두리 같은 것은 자연스럽게 먹게 될지 모른다. 그러면 식빵 테투리를 잘라주던 마음만 남겠지. 내가 아이를 살피는 마음이 그렇게 아이들의 몸과 마음에 익숙하게 스며들었다가, 적절할 때에 드러난다면 바랄 게 없겠다.




언젠가 남편에게 오렌지를 좀 까달라고 한 적이 있다. 과일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평소 남편에게 그런 부탁은 잘하지 않는데 왜 그랬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얀 껍질이 그대로 붙어있는 오렌지를 투박하게 몇 조각으로 뜯어낸 접시를 주며 했던 말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걸 어떻게 먹냐며 예쁘게 좀 잘라 달라는 나에게 '그냥 대충 먹어.'라고 했다. 나는 아이나 남편에게 무얼 주든 그냥 대충 인적이 없는데 왜 나를 이렇게 대우할까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단순히 서운하다거나 화가 나는 것과는 좀 다른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남편의 태도는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시댁에 가면 어머님은 과일을 한 번에 잔뜩 깎아서 큰 그릇에 담아두신다. 시간이 지나면서 냉기를 읽고 푸석거리는 게 싫어서 내가 조금만 깎으면 하는 김에 아예 다 깎으라며 굳이 여러 개를 가지고 오신다. 식사를 차리실 때도 풍성하게 담고 음식이 남으면 배가 불러도 다 먹어 치우라는 얘기를 종종 하셨다. 나는 어머님이 가족들에게 하는 '먹어 치우자'는 말이 무척 듣기 거북했는데 남편의 '대충 먹어'를 만들어낸 것이 아마도 그 말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반면에 친정엄마는 식탁을 차리실 때 예쁜 접시를 고르고 음식의 담음새를 항상 신경 쓰셨다. 식사 후에 음식이 남으면 억지로 먹지 말라고 하셨고, 과일이나 간식은 귀찮아하지 않고 그때그때 바로 해주셨다. 특히 조미김을 싸서 아이들 입에 넣어 줄 때 미리 만들면 눅눅해 지니까 아이들이 먹는 속도에 맞춰 새로 만들어주는데 그럴 때면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내가 아이들에게 해주는 방식도 아마 엄마의 모습을 보고 배운 것이리라.


이런 걸 정성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편의 어릴 적 집과 우리 집은 상황이 매우 달랐다. 어머님은 시부모님과 여러 명의 고모들이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고 출근까지 하는 워킹맘이었다. 그런 집에서 과일을 가족들이 먹고 싶어 할 때마다 깎아야 했다면 종일 주방에서 과도만 들고 서 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먹어 치우지 않으면 버려야 하는 음식도 매 끼마다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두 어머니들의 다른 태도는 환경에서 비롯한 것이니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걸 보고 자란 남편의 성의 없는 오렌지도 나에 대한 사랑이나 배려가 부족해서라고 해석하며 탓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내가 내 아이에게 어떤 태도를 물려줄 수 있는지 고민하는 계기는 되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이왕이면 잘 까진 오렌지를 먹기 좋게 잘라서 보기 좋은 접시에 담을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남이 까준 예쁜 오렌지만 받아먹을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한 번은 혹시 내가 죽으면 누가 아이에게 이렇게 해줄까 라는 생각한 적이 있다. 지난 12월의 어느 날, 아이들이 몹시 기다리던 '쌓이는 눈'이 내린 날이었다. 오후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눈이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놀 수 있을 만큼 쌓였다. 우리들은 잠옷에서 다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밖으로 나갔는데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 그런지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텅 빈 하얀 놀이터는 우리 차지가 되었다. 신이 난 아이들에게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양보하고 싶어서 뒤를 따라 걷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누가 아이들의 발자국 뒤로 걸어줄까. 잘 시간에 어딜 나가냐고, 창문에 붙어있는 아이를 탓하지 않고 흔쾌히 밖으로 나가 놀아줄까. 엉덩이가 다 젖도록 뒹굴고 있는 아이에게 이제 그만하면 됐으니 들어가자고 성화하지 않고 오래오래 기다려 줄까.


여벌의 옷이 없어도 물가에 뛰어들게 해 줄까. 발등이 까맣게 되도록 놀이터에서 놀아줄까. 비가 오는 날에도 나가고 싶다는 아이에게 우비와 장화를 신겨 데리고 나갈 줄까. 손을 씻을 때마다 물놀이가 되는 걸 귀찮아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새 옷으로 갈아입혀줄까. 안아달라는 아이에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또 속아주고 아픈 허리는 잠시 잊은 채 볼을 비비며 안아줄까. 만약 내가 없다면.... 아이를 위해 나처럼 혹은 나보다 더 애써주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애초에 내가 줄 수 있는 종류의 사랑은 나 밖에 줄 수 없다는 게 당연한데도 내가 없는 상황의 아이들이 쓸 때 없이 가여워졌다.


내가 없더라도 아빠든 할머니든 아니면 내 자리를 대신할 누군가가 아이들에게 밥도 주고 옷도 입히고 놀아도 줄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는 가족이 나 혼자만은 아니니 아마도 잘 자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먹기 싫어하는 브로콜리를 잘게 썰어 계란말이에 몰래 넣고, 아무것도 모르고 잘 먹는 걸 뿌듯해해 줄지는 모르겠다. 우유를 먹으면 배가 아픈 아이에게 딱 잘라 안 된다 하지 않고 반 컵만 따라 따뜻하게 데워 주려나. 계절에 맞게 옷이야 입히겠지만 답답한 걸 싫어하는 우주는 소매 끝이 넓게 벌어진 실내복을, 거추장스러운 걸 싫어하는 하나에게는 말아 올라가지 않게 쫀쫀하게 시보리가 된 내복을 사줄까. 빙글빙글 돌며 자는 아이들이 잠결에 얼굴을 발로 차도 화내거나 짜증 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나는 진짜도 아닌 미래의 아이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해 안달이 난다. 그리고 갑자기 생의 의지가 활활 타오른다. 내가 잘 먹고 잘 자고 잘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생긴다. 그러니 건강하게 살아서 오래오래 아이 옆에 있어줘야지. 내가 쏟고 있는 노력이 비록 아이에게 최선이 아니라 해도, 나만이 줄 수 있는 배려와 사랑을 넘치도록 오래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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