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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Apr 09. 2022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작고 동그란 위로

아무렇지 않은 순간들. 이를테면 씻고 나온 아이의 머리카락을 드라이로 말려주고 있을 때나, 학교에 가는 아이를 현관 앞에서 배웅하는 그런 평범한 일상의 순간. 눈앞의 아이들에게 속으로 고백한다.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는 물음도 아니고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도 아니다. 하나가 고양이 세수를 하면서 얼굴보다 옷에 더 물을 많이 묻히고도 뿌듯하게 웃고 있을 때 속으로 하는 이야기다.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입술을 쭉 내밀고 심혈을 기울여 또 무언가 그리고 자르는 우주를 보며 멀리서 마음속으로 하는 말이다.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조차 감히 헤아릴 수 없고 너희는 짐작도 못할 그 마음이 항상 내 속에서 맴돈다.



"우주는 완벽해."

우주를 낳고 하루가 지났을 때 엄마에게였나 남편에게였나 감탄하며 말했다. 예쁘다는 말이 아니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넘어선, 손댈 것 없이 지나치게 완벽해서 놀랍다는 의미의 감탄이었다. 신이 나에게 스스로 자신이 낳을 아이를 흙으로 빚어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줬다 해도 이렇게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진 눈 코 입과 손발을 만들어 아이에게 줬어도 지금보다는 더 나을 수 없을 거라고. 아무리 제 자식에 예뻐 콩깍지가 씌었어도 그렇지 농담이 심하다 생각하겠지만, 그 당시 나는 진심이었다. 하루 종일 갓난아기를 보고 어루만지며 그런 종류의 생각만 했다.


내 눈에 우주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어 보였다. 모난 것도 없었고 도드라지는 것도 없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진 생김새였다. 아기가 태어나면 예쁘다 귀엽다 하는 게 보통일 텐데 나는 우주를 볼 때마다 어쩜 이렇게 완벽할까 감탄만 했다. 내 지나친 태도가 기저귀를 벗고 걸음마를 해도 사라지지 않자 남편은 심각하다며 고개를 저었고 그 친정엄마도 그 정도면 병이라며 나를 놀렸지만 말이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유독 콧날이 오뚝하다거나 쌍꺼풀이 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아기 내복을 입히는 데도 커다란 머리 때문에 웃음을 주는 아이였다. 내가 말하는 완벽은 외모에 대한 예찬이 아니었다. 우주가 다른 아이에게 없는 특별한 것을 타고났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수많은 산부인과 병동 신생아실에 누워있는 작은 번데기 중 하나일 뿐, 다만 이 아이는 나에게 완벽했다. 세상에 존재한 것 자체로 이 아이는 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어주는 것으로 다 되었다는 기분이었다. 이 아이의 외모가 남들과 좀 다르게 태어났다고 해도 내가 느끼는 감정은 같았을 것이다.


우주가 완벽하다고 해서 여기서 조금도 달라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자주 상상하며 행복했다. 자르기 무서울 정도로 얇은 종잇장 같은 손톱도 더 이상 내가 잘라줄 필요 없이 두껍고 딱딱해질 때가 오겠지. 솜털이 가득한 뽀얀 볼도 여드름투성이가 되는 사춘기가 오겠지. 방울토마토처럼 동그랗고 말랑말랑한 발뒤꿈치가 평평해지고 허연 각질도 생기는 꼬랑내 나는 아저씨 발이 될 날이 오겠지. 우주가 어떻게 성장하고 변해도 상관없었다. 우주는 우주니까 나에게는 여전히 완벽하게 아름다울 것이다.


우주를 낳고는 따로 앉아 글을 쓸 시간이 없어서 핸드폰에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나의 감정 변화나 떠오르는 생각들을 아이와 함께 있을 때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는데 당연하게도 점점 아이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너는 마치 세상에 태어난 게 가장 잘한 일처럼 웃는다. 
세상에 태어난 게 너무나 즐거운 듯 웃는다.


눈을 녹이는 햇살. 아이는 아무 이유 없이 즐겁다. 제자리에서 점프를 하는 제 자신이 저를 즐겁게 만든다. 입에서는 비행기 소리가 나고. 노란 버스가 지나길 때마다 손가락이 바쁘다. 그림자를 보느라 뒤로 걷고. 나뭇가지 수집이라도 하는 듯 길이와 모양이 다른 것들을 공들여 모은다. 너와 걸으면 네가 음악이다.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봄날 같은 너. 네 주변이 온통 분홍색이다.


당연한 것들을 설명한다. 우주가 '왜요?'라고 물으면 나도 다시 생각해 본다.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정말 그런가 고민한다. 가을이면 단풍이 지는 것. 길에서 쓰레기를 줍는 사람이 있는 것. 아이 덕분에 나는 세계를 통째로 다시 배운다.


그렇게 우주를 키웠던 시간이 하나를 낳고 나서부터 비슷하지만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재현되고 있다. 요즘 내 핸드폰 메모장에는 하나에 대한 것들로 가득하다. 주로 기억하고 싶은 의외의 순간들이나, 아이의 예쁜 말들이다.


세상 모든 둘째들이 그렇듯. 너 역시 무조건 예쁜 운명을 타고났다. 너를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고. 너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예쁜 짓을 하지 않아도 예쁘고. 미운 짓을 해도 밉지 않았다. 너는 그냥 좋고. 마냥 기특하고. 항상 예쁘다. 둘째란 그런 거다.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예쁜지. 미치도록 귀여운지 기억하려고 이 글을 쓴다. 특히 막 이야기하기 시작한 지금의 너를 말이다. 너는 작고 부드럽고 입안에서 달콤한 냄새가 난다. 생각하지 못한 타이밍에 의도하지 않은 몸짓으로 내 눈을 하트로 만든다. 네가 하는 모든 움직임은 어설프고. 그 의도가 빤히 보여서 귀엽다. 네가 하는 말은 오로지 나만 번역이 가능한 언어라 더 귀하다. 잠들기 전 내 머리통을 붙잡고 정수리부터 눈 코 턱까지 입 맞추는 널 사랑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내 거', '오빠같이'를 입에 달고 나온 네 영약함을 사랑한다. 내 옷 속에 손을 넣고 쑥스러운 듯 웃는 널 사랑한다. 아무 이유 없이 혹은 수만 가지 이유로 우는 널 사랑한다. 울기 시작하면 바로 한 줄로 뚝 떨어지는 네 눈물과 네모나지는 입술까지.


너는 별것 아닌 게 재미있고. 널 지켜보는 나는 별것 아닌 것도 예쁘다. (욕조 구멍에 물이 빠져나가는 것 보고 신기해하는 하나 보며) 지나가는 개미가 궁금하고.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줄기가 지겹지도 않고 매일 즐겁다. 똑같은 자리에 있는 화단의 열매가 예쁘고. 빨갛게 노을 지는 풍경이 저를 위해 만들어진 거라 여긴다. 길에서 만나는 고양이를 보려고 바닥에 엎드리고. 무섭게 짖는 커다란 개가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 그러는 거라 착각한다. 내 눈에는 평범하고 무의미한 것들이 너에게는 작은 환희다.


미운 네 살이라고 많이 하지만 사실 4,5살의 아이들은 미치도록 귀엽다. 누워만 있던 갓난아기에서 제법 사람 흉내를 내는 아이를 곁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마치 '엄마' 하고 부르거나 '안녕'하고 인사하듯 '사랑해'라고 매일 고백한다. 밥을 먹다가 말고, 자기 전 머리맡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내 등 뒤에다 내가 듣지 못하는 순간에도 따뜻한 말들을 흩뿌리고 다닌다.


한동안 일이 많았을 때 퇴근한 남편과 현관에서 교대하고 카페로 가는데 일하러 나가는 나를 하나가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안아 주구. 뽀뽀해 주구. 엄마 일 잘해요. 조심해서 가요. 차 조심해요. 파란불에 가요. 빨리 와서 안아줘요."


끝나지 않은 하나의 인사말이 닫힌 문 안에서도 끊기지 않고 들렸다. 친정엄마 잔소리가 이보다 더 할까. 아이는 문밖을 나서는 내 걱정이 한가득이다. 미련과 사랑을 가득 담은 이 말들은 아마도 내가 아이에게 했던 말들일 것이다. 요맘때 아이들은 고맙게도 엄마에게 받은 사랑을 흉내 내며 돌려준다.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때면 나는 미리 이어폰을 빼서 가방에 집어넣는다. 삑삑삑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순간부터 엄마다!라고 달려 나오는 아이들의 발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우리가 떨어져 있던 두어 시간이 마치 서너 일은 된 것처럼 감격적인 재회의 순간을 만끽하려고.


요즘은 우주가 하나만 한 나이 때 육아일기를 쓸 걸 하고 후회하고 있다. 그때는 언젠간 더 시간이 쌓이면 육아나 돌봄에 대해 그럴듯한 지혜가 쌓인 후 뭔가 대단한 걸 쓰고 싶었다. 물론 그때보다 세계를 더 넓게 보게 되었지만 잃어버린 것도 많다. 그때의 반짝거리는 아름다움 들을 추억하듯 쓰게 되는 게 조금 아쉽다. 어설퍼도 갓난아이 하나 키우던 33살의 내 이야기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으로든 더 가벼웠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에 대한 사랑을 차마 글로 다 표현하기 어려워서 쓰지 못한 것도 있다. 이 감정을 어떤 문장으로 쓸 수 있을까. 내가 내 아이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커피를 마셔보지 않은 사람에게 시큼하고 쌉쌀한 한 검은 물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막막하다. 쓰면 쓸수록 내가 경험한 커피의 맛과 향과는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해, 그 행복과 즐거움에 대해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만, 반대로 선명하게 눈으로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아이 사진을 찍어주려고 급하게 핸드폰 카메라를 켰을 때, 우연히 셀카 모드로 되어 있는 화면 속에서 아이를 바라보는 무방비의 내 얼굴을 본다. 그 속에서 나는 놀라울 정도로 행복하게 웃고 있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유니콘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두 눈은 반짝거리고 입꼬리는 올라간 채로 다물어질 줄 모른다. 그런 표정을 짓게 하는 것이 유니콘이나 무지개 따위가 아닌 내 아이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매일 행복을 얼마나 가까이하고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어젯밤에도 잠시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 이미 늦은 시간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화장실에 가겠다, 물을 마시겠다, 자꾸 일어나는 아이들에게 이제 잘 시간이야, 이제 그만을 반복하길 여러 번. 그러고도 또 물 마시러 나가겠다는 하나에게 다행히 화내지 않고 잠재우기에 성공했다. 그러고 눈을 감았는데 어디서 고소한 냄새가 난다. '아, 아까 하나가 먹은 고래밥.' 자기 전에 분명 이도 닦고 손도 씻었는데 작은 손으로 야금야금 열심히 집어먹었을 고래밥 가루가 손톱이나 머리칼 어딘가에 남아있었나 보다. 아이를 안고 고소한 냄새를 킁킁거리다 갑자기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와의 일상에는 이런 예기치 않는 사소한 즐거움들이 가득하다.


언젠가 아이가 다 크고 더 이상 과자 냄새를 묻히지 않고 잠들 때. 내 손을 잡고 놀이터에 가지 않을 때. 나는 네다섯 살 된 내 허리에도 못 미치는 작은 아이와 손을 잡고 걸어갈 조금 초췌한 엄마들을 부러워할 것 같다. 그 엄마의 꾸미지 않은 옷차림과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를 그리워하겠지. 얼마 남지 않은 지금의 행복이 너무나 선명해서 벌써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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