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아이와 싸움닭 엄마
사람의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어느 정도 믿는 편이다. 누구나 태어난 그대로 부여받은 기질이 있고 그걸 억지로 바꾸려고 하면 그 사람도 나도 불가능한 것을 꿈꾸다 끝내 상처 투성이가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을. 내가 내 부모의 불합리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남편에게 원하는 바를 요구하지 않고, 오랜 친구에게 서운한 게 생겨도 싸우지 않는 것 역시 그걸 항상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타고난 것은 바뀌지 않는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만 이해하고 더 이상은 영역 밖의 일. 물론 바뀔 수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감히 그 사람을 내가 옳다는 방향으로 교화시킬까. 설사 바뀐다 한들 우리 모두 상처 투성이가 될 텐데.
아이를 바라볼 때도 그랬다. 세상의 착함을 모두 끌어 모아 만들어진 것 같은 우주를 보며. 지금이야 어려서 그렇지 조금 더 크면 눈치가 생길 거라 기대하면서 은근슬쩍 약삭빠르게 제 몫을 챙기도록 부추겨 보기도 했다. 하지만 9년을 키워보니 역시는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놀이터 원정대로 지내던 3살 무렵 우주는 앙증맞은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려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규칙을 만들었다. 미끄럼틀을 이용하는 사람이 없다면 자유롭게 놀 것. 거꾸로 올라가거나 머리부터 내려오거나 옆으로 누워 내려오거나 마음대로 해도 좋았지만,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계단으로 올라가기로. 원칙은 위에서 밑으로 앉아서 내려오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놀기도 했다. 아이는 그 약속을 철석같이 지켰고 제 멋대로인 동생을 보면 아직도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모른다.
한 번 알려주면 그대로 지키는 아이라 매사에 가장 처음 약속을 제대로 정해야 했다. 그래서 이 별것 아닌 원칙을 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세상에 모든 아이들은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고 싶어 하고 엎드려 내려오거나 뛰어내리는 등 온갖 방법으로 타길 원한다. 기상천외하게 즐기는 아이들 사이에서 우주에게 미끄럼틀은 거꾸로 올라가면 안 된다고 했다면 아마 쭉 그렇게 놀았을 것이다. 말 잘 듣는 내 아이만 미끄럼틀은 오로지 계단으로 올라가 엉덩이로 앉아서 내려오는 것이라 가르쳐야 할지. 그게 아니라면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지 초보 엄마는 이런 결정에도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문화센터 놀이 체육 시간에는 수업 시작과 동시에 차례대로 줄을 서서 앞구르기를 했다. 우주는 그 시간을 무척 좋아해서 선생님이 매트를 깔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가 줄을 섰다. 대부분 우주의 뒤로 나란히 줄을 섰지만 어떤 아이는 바로 매트로 돌진했고 또 어떤 아이는 우주의 앞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니 그냥 놔두는 부모도 있었고, 차례대로 줄을 서는 것을 여러 번 알려줘도 먼저 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그러는 아이도 있었다. 그때마다 우주는 도대체 이 아이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난감하게 나를 쳐다봤다. 그 아이 앞으로 다시 가서 다시 자기 자리를 되찾거나 친구에게 화를 내는 경우는 없었다. 그저 영문을 모르겠다는 황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볼 뿐.
선생님이 놀이 도구 나눠줄 테니 모이라고 하면 우주는 가장 먼저 달려가지만 손을 뻗거나 빨리 낚아채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냥 가장 먼저 달려가서 선생님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걸 알아채는 선생님은 빨리 온 순서대로 우주부터 도구를 나눠 주셨는데 보통은 똑 부러지게 자기 것을 챙기는 아이들 사이 우주는 멀뚱히 서있다가 마지막으로 남은 것을 받아 돌아올 때가 많았다. 덕분에 나는 우주가 친구들과 있을 때면 예민하게 주위를 살폈다. '선생님! 당신 바로 옆에! 가장 먼저 온 애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고요.' 열심히 텔레파시를 보냈다.
한 번은 놀이 체육 시간에 어떤 아이가 누워 있는 우주 위로 점프를 해서 뛰어내리는 바람에 크게 다칠 뻔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매트 위라서 상처가 나지는 않았지만 당황스러운 것은 우는 우주를 보고도 그 아이를 훈육하거나 사과하지 않는 그 엄마였다. 그 이후로 나는 아이가 억울한 경우가 생기면 망설임 없이 직접 나섰다. 가만히 있었더니 마땅히 사과를 받아야 할 우주에게 아무도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아이 엄마도 꽤 있었다.
내 아이를 울게 한 아이도 아직 어리니까 그럴 수도 있지 지나가기에는 우주의 억울함이 너무 컸다. 아이와 내가 속상한 걸 넘어서 착한 아이는 울고 아프게 한 아이는 웃는 상황이 점점 부당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일이 생기면 아이의 부모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나섰다.
"친구야 잠깐만 이리 와봐. 이렇게 하면 위험해. 다칠 수 있어.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해 하는데 모르는 것 같아서 아줌마가 알려주는 거야. 다음에는 조심히 놀자. 알았지?"
다행히도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은 늦게나마 다가와 미안하다고 했고, 아닌 사람은 유난이라고 수군거리며 피했다. 최대한 친절하게 얘기했지만 자기 아이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게 싫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울고있는 우주를 위해 엄마로서 무언가 행동을 취해야 했다. 사과받지 못하더라도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나를 못마땅해하는 엄마가 있다면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이가 더 들어서도 놀이터에 나와있는 엄마들은 대부분 우주와 같은 성향을 가진 아이의 엄마들이었다. 친구들과 놀다가 다툼이 난다면 주로 맞는 아이 쪽 엄마들. 거기 나와있는 엄마들 모두 아이를 지키고 싶은 나와 비슷한 마음이였으리라.
어느 날은 놀이터에서 어린 아기가 우주가 지나가지 못하게 막아서고 있었다. 갓난쟁이라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눈물이 많은 우주는 '좀 비껴줄래? 아가야 좀 비켜줄래?' 하더니 알아듣지 못하는 아기를 어쩌지 못하고 그냥 울어버렸다. 자기 반토막 만한 아기가 막고 있다고 우는 우주가 너무 웃기고 가여워서 나서려는데 동네 친하게 지내는 형이 우주에게 그러는 것이다.
"그냥 밀어버려. 니가 더 쎄!"
그러면 큰 일난다는 표정으로 우주가 말했다.
"밀면 안돼. 그러면 다치잖아."
그 아이는 따르지 않는 우주를 보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도 우주는 다른 사람을 때리는 게(대련하는 걸 말하는 듯) 싫다고 태권도도 안 배우겠다고 한다. 오죽하면 자기는 총 쏘는 거 싫다면서 벌써부터 군대를 걱정할까. (정말 진지해서 매 번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군대를 안 가도 될 수도 있다고, 그게 아니면 시험을 봐서 대체 복무를 할 수도 있다고 정말 수십 번 얘기해주고 있다)
그런 우주를 키우며 나는 아이가 받을 상처를 언제까지 엄마가 막아줄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세상은 우주가 생각하는 것처럼 올바르지 않고 네가 착하게 살수록 손해 보는 것이 많은 거라는 걸 어떻게 알려줘야 할까. 직접 겪으며 좌절할 것이 두려웠다. 조금 더 야물었으면. 좀 이기적이었으면. 솔직히 말해서 급할 때는 빨간 불에도 좀 건너고, 마음에 안 드는 애가 있으면 당하고 있지만 말고 치고 박고도 했으면.
그런 고민이 믿음으로 바뀐 것은 우주가 아직 힘들면 안기고 업히던 나이, 단양에 있는 아쿠아리움에서였다. 구경하느라 앞을 보지 않았던 우주와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부딪혔다. 엉덩방아를 찧은 우주는 일어나더니 '형아 미안해.'하고 다시 씩씩하게 걸어갔다. 짜증을 내려다 순간 멋쩍은 얼굴이 된 그 아이는 자리로 돌아가 방금 어떤 꼬마랑 부딪혔는데 그 아이가 먼저 미안하다고 했다며 엄마에게 상황을 이야기했다. 애꿎은 머리만 벅벅 긁으며.
그 순간이었을 거다. 나는 더 이상 이 아이의 착함을 걱정하지 않겠다 마음먹었다. 선함이 곧 나약함을 뜻하는 건 아니구나. 너는 너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헤쳐나가겠구나. 걱정 대신 믿음을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다행히도 우주는 새치기를 하는 어른에게 '아저씨, 여기 제 자리예요.'라고 당당히 말하는 아이로 자랐다. 내가 혼을 내면 겁먹은 얼굴로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엄마, 그런데 그 정도로 화낼 일은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해서 나를 앗차 싶게 만들 때도 있다. 여전히 길에서 쓰레기를 주어 집으로 가져오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