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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Jul 24. 2023

걷기 좋아하는 우리

걷는 존재, 애나벨 스트리츠, 위즈덤하우스, 2023

하나야 안녕.

여름 장마가 계속되는 날들이야. 하지만 빗줄기가 우리의 산책을 막을 수는 없지!

요즘 우리는 비 오는 날 밤산책에 흠뻑 빠져있어. 사실 낮이고 밤이고 얇은 점퍼를 걸쳐 입고 우산을 쓰고 밖으로 더 열심히 나가고 있지. 무더운 날보다 더 많이 걷고 있는 것 같아. 하루를 마감할 때쯤 걸음수를 확인하면 만 오천보 정도 되거든.      



한편, 젖은 흑에서 생성되는 지오스민이라는 물질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우리는 이 풍부한 향기를 아주 예민하게 잡아내는데, 수영장에 단 일곱 방울만 떨어뜨려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우리 지오스민 향기에 편안함을 느끼고 안심하는 이유는 우리의 먼 조상들에게 이 냄새가 곧 물과 비옥한 흙이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지오스민은 곧 생존의 냄새였다.

p.50 진흙 속에서 걷기          


엄마를 따라 걷는 네 작은 발은 얼마나 씩씩한지, 우리는 매일 번갈아 대장이 되어 동네를 탐험해. 대장은 그날의 산책 코스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데, 그래봤자 크지 않은 동네를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한 바퀴 빙 도는 것뿐이지만, 너는 오늘은 내가 대장이라며 앞장서는 걸 무척 좋아한단다.      


가끔은 옆 단지 아파트를 탐험(단순히 바로 옆 아파트 단지 안을 걷는 것뿐이지만 탐험이라고 하면 훨씬 더 흥미로워지니까) 하기도 하고, 비 오는 날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엉덩이가 축축해지도록 미끄럼틀을 타기도 하지. 무더운 날에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걷기도 하고, 킥보드를 타고 가는 날이면 조금 더 멀리 공원까지 다녀오곤 해. 그런 날은 밤 산책이 한 시간을 훌쩍 넘기고 돌아와 너는 씻기기 무섭게 잠이 든단다.     


엄마는 이런 평범한 날들의 기억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나 안에 쌓일 거라고 믿어. 네가 커서 기억하는 건 워터파크나 놀이동산처럼 특별한 날이 아니라 동네를 걷던 밤공기일 거라고. 평범한 일상과 소소한 대화가 어른이 되어서도 널 흔들리지 않도록 해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어.

축축하게 달라붙은 바짓단과 슬리퍼 사이로 들어가고 나오는 물웅덩이의 흙탕물, 이마에 땀방울과 빙글빙글 돌아가던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망울처럼 사소한 것들 말이야. 그런 것들이 네 피부에 스며들어서 언젠가 네가 어른이 되어서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 들 때, 사는 게 그다지 즐겁지 않은 것 같을 때, 평온했던 어느 날들에 함께 걷던 기억이 널 지탱해 줄 거라 믿고 있단다. 그래서 낮과 밤을 매일 함께 걷고 있아.

 

사랑하는 하나야. 비 오는 날 각자 우산을 쓰고도 손을 놓지 않고 걸었던 너와 나를 잘 담아주렴. 어린 시절 네가 준 맹목적이고 열렬한 사랑을 엄마도 오래 기억할 거야. 네가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할 때, 친구나 애인과 노느라 엄마를 찾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 때. 우산 속에서 내 손에 매달려 손등에 뽀뽀하던 너에 대한 기억이 엄마를 외롭지 않게 해 줄 수 있게 말이야.      



           

<걷는 존재>에는 1년 동안 매주 한 개씩 다양하게 걸을 수 있는 방법이 나온단다. 이 책을 절반정도 읽었을 때 너와 한 개씩 리스트를 지워가며 언젠가 52개의 걷기를 다 정복해 보면 어떨까 생각했어. 이미 우리가 자주 하고 있는 걷기도 많아서 생각보다 금방 해낼 것 같아.


추운 날의 걷기

느리게 천천히 걷기

단 12분의 짧은 걷기

아름다운 경치 보며 걷기

바람 부는 날 걷기

일어난 후 한 시간 안에 걷기

비 내리는 날 걷기

노래를 부르며 걷기

도시락을 들고 소풍 길 걷기

밤길 걷기


우리가 그동안 생각보다 다양하게 걸었더라. 특히 '걸으며 춤추기, 춤추며 걷기'는 오로지 너와 함께일 때만 할 수 있는 걷기였어. 음악 없이도 엉덩이를 흔들고 팔을 휘저을 수 있는 건 아이들의 특기니까. 춤이라면 어색하게 손뼉 치는 게 전부인 엄마도 너와 함께라면 흥이 나서 어깨를 들썩이며 걸을 수 있었지.     



폴짝폴짝 뛰거나 질주하는 것으로 춤을 대신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는 아이들과 함께 할 때 특히 효과적이며, 걷기 운동의 유산소 강도를 높이는 동시에 즐거움과 기분을 좋게 하는 요소를 더해준다.

p.83 걸으며 춤추기, 춤추며 걷기     



책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유모차를 끌며 걷기'나 '아기띠를 하고 걷기'도 만족스럽고 행복한 걷기였단다. 아기를 품에 안고 걷는 경험을 부모가 된 사람 할 수 있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어. 조용히 숨 쉬는 연약하고 작은 생명을 품에 안고 걷다 보면,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워지지. 길가에 작은 돌멩이나 비탈길, 뜨거운 햇살과 바람도 모두 민감하게 느껴져. 한 몸처럼 붙어있는 아기가 너무 덥거나 춥지는 않은지 팔이나 다리가 불편하지는 않은지, 목은 안정적으로 받쳐지고 있는지, 머리가 너무 흔들리고 있는지 않는지, 그 어느 때보다 조심해야 할 것들이 많지만 나약해지기보다 그 반대가 된단다. 놀랍게도 강력한 힘을 부여받은 기분이 들어. 아기를 품에 안고 걷는 엄마는 품 안의 것을 지키기 위해 못할 게 없어서 그런 걸까?

      

그러고 보니 널 뱃속에 품고 걸었을 때도 그랬어. 우리가 안전하게 만나기 위해서라도 엄마는 매일 걷기에 최선을 다했지. 산을 오르고 계단을 걷기도 했어. 다소 무리일 수 있더라도 그게 너와 나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지. 걷는 중간중간 뱃속에 손을 얹고 너에게 말을 거는 날들이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결코 혼자가 될 수 없는 10개월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뱃속에서부터 너는 엄마의 아주 훌륭한 산책 친구였단다.

     

유모차를 밀며 걷는 건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었지. 더 멀리 갈 수 있었고, 잠시 쉴 수도 있었어. 약간의 짐을 실을 수 있다는 것도 큰 변화였지. 유모차 아래에는 네가 유모차에서 잠들면 언제든 꺼낼 준비가 된 책 몇 권과, 칭얼거리는 네 입을 달콤하게 달래줄 아기 과자와 주스, 바스락 거리는 봉제 인형과 버튼을 누르면 소리가 나는 책이 있었어. 깔고 덮을 얇은 아기 이불도 항상 준비되어 있었지.


비 오는 날도 레인커버와 우비를 입고 우리는 산책을 게을리하지 않았단다. 여름에는 집게가 달린 유모차용 선풍기를 달고 걸었지, 솜이 누벼진 겨울용 방풍커버는 네 자리를 달리는 침대로 만들어줬어. 포근하게 잠든 네가 뿜어내는 습기로 유모차 안은 후끈후끈해지면 엄마는 살짝 손을 집어넣어 휴지로 창을 닦아내고 네가 잘 있는지 확인했단다.


엄마는 우울할 때는 유모차를 밀며 기분 전환을 했고, 바쁠 땐 잠든 네 뒤에 서서 일을 했어. 혼자일 때 보다 챙겨야 할 것이 많고 자유롭지도 않았지만 엄마의 삶에서 꼭 필요한 몇 년이었다고 생각해. 언젠가 다시 홀가분하게 걷게 되면 그리워할 날들이란 걸 알고 있었지. 그때부터 우리는 참 좋은 파트너야. 그렇지?



하나가 알다시피 엄마는 걷는 걸 참 좋아한단다.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도 20~30분 거리는 늘 걸어가지. 짧은 거리는 일부러 멀리 돌아가기도 해. 엄마에게 걷기란 운동이자 명상이자 머릿속에 쓰는 글쓰기인 것 같아. 동네 엄마들은 운동 겸 삼삼오오 모여 자주 걷던데 엄마에게 그건 걷기라기보다 수행에 가깝단다. 생각만 해도 괴로운 일이야. 엄마는 조용히 혼자 걷는 편이 좋아. 음악도 듣지 않고 혼자 주변 풍경을 보며 딴생각을 할 때가 많지. 혼자 걸으면서 얻은 고독은 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나와의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는 회복의 시간 같아. 그 에너지로 살아갈 힘을 얻지. 언젠가 너도 혼자 걷는 걸 좋아하게 될까 궁금하네.


     

1947년, 오스트리아 작가이자 농원 경영자인 클라라 비비안은 자신이 혼자 걷는 시간을 얼마나 자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기록했다. “내 평생의 열망은 탁 트인 야외에서 보내는 혼자만의 산책 시간이다.” 많은 시간 혼자서 시간을 보내며 전 세계를 걸었던 비비안은 자신이 언덕, 계곡, 탁 트인 길을 사람보다 좋아한다는 사실을 꾸밈없이 드러냈다. 비비안은 친구가 많았지만, 오직 걷기만이 그녀에게 오래도록 잊었던 어두운 밤, 새벽, 사람과 바다와의 친밀감을 기억나게 해 주었다. 혼자 걸으며 비비안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거대한 세계의 맥박만을 들었다.

p.89 혼자 걷기     


     

52가지 걷기 중 하나와 새로 도전해 보고 싶은 것도 있었어.


쓰레기를 주우며 걷기

반려견과 함께 걷기

종이 지도를 보며 걷기

그림을 그리며 걷기

채집하며 걷기


아마 너에게 얘기하면 바로 좋다고 할 방법들이지? 다른 건 쉽게 할 수 있을 텐데 동물을 키우지 않아서 반려견과 함께 걷기는 조금 힘들겠다. 강아지를 키우는 친구에게 함께 산책해 보길 부탁하거나, 네가 조금 더 큰 후에 봉사활동을 가야 할 수 있을 거야. 언젠가 반려견을 키우겠다는 너에게 강아지와 함께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무척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      


네 다리가 더 길어지고 더 튼튼해지면 엄마와 더 많은 길을 갈 수 있을 거야. 시간이 지나면 엄마보다 네가 더 빨리 더 많이 걷겠지. 그때나 지금이나 엄마는 네 뒷모습을 보며 넘어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볼 것 같네.


너를 통과하는 바람이 기분 좋은 미풍이길, 널 쓰러뜨릴 정도는 아니길, 끊임없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걷겠지. 아마도 '기도하며 걷기'가 평생 엄마 몫의 걷기 인 것 같아.


          

에리트레아에서는 바람을 툼 니파스라고 부르는데, 이는 자양분이 되는 바람, 영혼을 살찌우는 미풍이라는 의미다. 네덜란드에서는 바람이 부는 날 나가는 산택을 레커 어트와이언이라고 부르며, 이는 ‘기분 좋게 바람으로 가득 차다’라는 의미다. 네덜란드에서 레커 어트와이언은 ‘감정 대청소’와 같다. 묵은 먼지들이 상쾌하게 쓸려가며 생기와 활기를 찾아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p.62 바람 부는 날 걷기     



하나와 엄마의 첫 산책를 기념하며 찍은 사진. 코트 안 포대기에 신생아였던 작은 하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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