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은유, 서해문집, 2020
오늘 아침에는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동그랗게 말아 고무줄로 한 번 더 묶어 줬어. 양쪽 볼 뒤로 쫑쫑 동그란 머리를 달고 있는 네가 얼마나 에쁘던지. 요정이 따로 없네 세상에서 우리 하나만큼 예쁜 아이는 없을 거야 호들갑을 떨었지.
아직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순진한 7살 꼬맹이지만, 언젠가 엄마 제발 그만 좀 하라며 내 입을 막는 날이 오겠지. 그때도 여전히 엄마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이일 텐데 말이야.
유치원에 가려고 나와서 철쭉이 만개한 아파트 단지 화단에서 널 세워놓고 사진을 여러 장 찍었어. 얼굴 아래로 꽃받침을 하고 발끝을 발레리나처럼 세워서 포즈를 잡는 너보다 더 아름다운 꽃이 있을까. 벌을 보고 뛰어가는 너에게 우리 하나가 꽃인 줄 알았나 봐 했더니 쑥스러운 듯 웃으면서도 부인하지 않았지.
엄마가 그런 얘기하면 너는 자주 되물어. 엄마는 내가 꽃보다 예뻐요? 엄마는 내가 세성에서 제일 좋아요? 내가 너를 혼낸 뒤에도 어김없이 묻지. 엄마는 내가 아직도 좋아요?
어떻게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니. 잠들기 전 오빠한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아들이라고 얘기하고 바로 옆에서 듣고 삐졌을 네 옆으로 와서 사실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건 우리 딸이지 작게 속삭이는 것도, 토라진 너를 달래는 것도 엄마의 행복인 걸. 언젠가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을 날이 오겠지. 그런데 하나야 오빠에게는 비밀이지만 딸은 좀 달라. 아픔을 몰라볼 수 없는 '대를 이은 소수자 감성' 때문인지 몰라도 의지하고 지켜주고 싶어 져서 더 애틋하단다.
유치원에서 배웠는지 어느 날 네가 그런 얘기를 했어. 가장 사랑하는 건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고. 요즘은 그렇게 가르치는구나, 친구나 부모를 사랑하기 전에 나 자신부터 사랑해야 한다고. 너무 훌륭한 이야기라서 잘 배워왔다고 정말 맞는 말이라고 손뼉 쳐줬지. 그리고 너는 너를 가장 사랑하라고. 하지만 엄마는 너를 가장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도 했어. 넌 그러면 안 된다면서 엄마도 엄마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데 나를 제일 사랑하면 어쩌냐고 고양이 발 같은 주막으로 날 콩콩콩 때렸지. 하지만 올라가는 입꼬리와 만족해하는 눈웃음을 엄마는 봤지.
나한테 잘해 주니까 푼수처럼 좋다가도, 쓸쓸하다. 고작 여덟 살인데. 아기 때부터 엄마 젖 물고서 한 몸 되어 눈물의 방을 드나든 딸이라 그런가 싶다. (중략) 엄마 따라서 눈물의 방에 갇혀 봤기에 안다. 나지막한 신음 소리. 그곳에서 오래 있으면 들린다. 서로서로 얼굴을 비춰 보는 신통력이 생긴다.
p.148
엄마는 널 가장 사랑하지만 너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엄마가 행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 ‘젖 물고서 한 몸이 되어 눈물의 방을 드나든 딸’은 엄마 손에 작은 상처가 생기면 엄마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던걸 너는 가장 먼저 알아채. 막상 엄마는 모르고 있다가 설거지를 할 때 빨갛게 벗겨진 상처에 물이 닿아야 뒤늦게 알거든.
내 작은 아픔에 가장 민감한 널 위해서라도 엄마는 너에게 행복해야 할 의무를 지어주고 싶지 않아. 네 삶이 100% 너를 위한 삶이길, 네 자신이 가장 중요한 삶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 아플 수도 있고, 부족한 게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안에서 진심으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단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딸이 있고, 꽃보다 예쁘다 믿는 7살이라 애쓰지 않아도 자주 웃게 돼. 참 감사한 일이지.
엄마가 웃지 않으면 알아차리고 애처로워하면서 웃게 하려고 애쓰는 존재가 딸이다.
P.161
보이기 위해서 문제없는 척하는 건 딸이 가장 먼저 알아채니까. 엄마의 삶에 행복은 널 위해서라도 진짜여야 한다고 생각해. 고백하자면 엄마는 삶의 1/3 정도는 만두 할머니의 행복을 위해 살아. 만두 할머니의 삶이 바스러질 것처럼 퍽퍽하다는 걸 엄마도 느낄 때쯤부터였지. 나라도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엄마를 위해서 반드시 행복했어야겠다고. 끔찍하다고 느꼈을 할머니의 삶에 그래도 행복하게 잘 사는 딸 하나를 낳아 키웠으니 다 의미 없는 건 아닐 거라고, 삶이 허무해지지 않도록 붙잡아줄 사람이 되고 싶었어. 때로는 사위 험담도 하면서 친정엄마와 수다도 떨고 싶었는데 할머니 앞에서는 콩알말한 아빠의 장점을 부풀려 칭찬했지. 항상 괜찮아 보이고 행복해 보이고 싶었어. 할머니 눈에는 여전히 안쓰럽고 고생하는 딸이겠지만 말이야. 고러고 보니 너를 위해서라도,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엄마는 행복해야겠구나. 내 행복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