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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Aug 17. 2023

다른 방식으로 말하기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조던 스콧 글 시드니 스미스 그림, 책읽는곰,


안녕 하나야.


오빠는 요즘 초등학생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마라탕을 먹고 싶다는데 엄마는 별로 먹고 싶지가 않아서 계속 미루고 있어. 사실 엄마는 유행이라는 건 절대 따르고 싶어 하지 않은 이상한 고집이 있거든. 사람들이 줄 서는 곳은 고개를 빼꼼 내밀고 기웃거리기보다 멀리 빙 돌아가길 택하는 편이지. 유명하다고 하는 건 손사래부터 치고,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칭찬하는 건 일단 삐딱하게 봐. 미술관에 가도 도슨트의 설명을 듣기보다 구석에서 내 속도에 맞게 혼자 그림을 보는 편이지. (우리 엄마 왜 이래? 라면서 우습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걸 보고 엄마는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피했단다. 단숨에 유명해지는 많은 책들 가운데는 그 책의 힘이라기보다 그 책을 많이 팔려는 사람들의 힘이 더 클 때가 있거든. 그래서 엄마는 '베스트셀러'를 잘 믿지 않아. 오히려 가자미 눈을 하고 의심부터 하지.


어떤 책이 떠들썩해지면 그 인기가 한 풀 꺾일 때까지 기다려. 그 뒤에도 살아남아 작은 책방들의 매대에서 밀려나지 않았거나, 믿을 만한 사람이 여전히 추천한다면 그때쯤 읽어볼까 생각하게 되지. 세상에 읽을 책들은 항상 넘쳐났으니까 순서야 조금 뒤로 밀려도 상관없었거든. 책의 진가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엄마는 책은 타고난 운명이 있다고 믿어. 수년이 지나도 누군가의 책장에서 중고책으로 팔리거나 폐지로 버려지지 않고 오래 살아남아 또 다른 사람에게 보인다면 그 책은 분명 좋은 구석이 있는 거겠지.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도 그런 책이었어. 좋은 책은 오래 살아남는 법이고, 오래 읽히는 책을 좋아하지 않을 제간이 없어서 엄마는 끝내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단다. 표지에 노란 딱지가 붙은 이 책을 말이야. 띠지와 뒤표지에는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추천사와 찬양하는 문구가 가득했지. 뉴욕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오래의 그림책! 올해 최고의 그림책! 놀라운 치유의 힘! 낯간지러운 문구들을 피해 오롯이 책과 만나고 싶어서 띠지를 벗겨내고 처음 만나는 것처럼 책장을 넘겼어.



하나가 가끔 이야기하는 친구가 있잖아. 산새반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친구가 있다고. 하지만 말을 못 하는 건 아니고 유치원에서만 안 하는 거라고 했던 아이. 엄마는 너에게 이 책을 읽어주면서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네 반응은 미지근했어. 하긴 <이파라파 냐무냐무>처럼 네가 깔깔거리며 웃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으니까.


책을 다 읽고 말하지 않는다는 그 친구 이야기를 슬쩍 물어봤어. 말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거든. 그 친구랑 놀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네가 먼저 놀이를 제안하면 그 친구가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저어서 대답한다고 했지. 너는 별스럽지 않게 말했어. 말하지 않아도 같이 노는 건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그래, 그러면 되겠구나. 가볍게 이야기하고 우리는 금방 다른 책으로 넘어갔어. 하지만 언젠가 살며 몇 번은 입을 떼기 어려운 순간들이 오거든 이 책이 떠올랐으면 좋겠다. 주인공 남자아이처럼 말을 더듬는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는 작가의 말도 그림만큼이나 좋았거든. 엄마도 기억하고 있으려고 너에게도 적어 보내는 거야.



다섯 살 때 제주도에 있는 고양이가 많았던 어느 공원에 갔던 거 기억나니? 네가 실수로 아빠를 다치게 했었잖아. 엄마가 아빠에게 사과하라고 했을 때 너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어. 그래서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아 네가 준비되길 기다리기로 했지. 마음속에서 미안한 마음이 있는 것과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건 또 다른 거라는 걸 너도 나도 새로 배우는 중이었단다.

하나가 준비되면 다시 아빠한테 가서 미안하다고 얘기하자. 그러면 아빠는 괜찮다고 하실 거야. 했더니 너는 눈물이 그렁그렁 한 눈으로 알겠다고 했어. 준비가 되면 얘기해 달라고 하고 추운 겨울 우리는 공원 밖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봤지. 시간이 길어지자 엄마는 하나가 이야기하는 동안 엄마가 옆에 있을 거라고, 사과하고 나면 꼭 안아 주겠다고도 했어. 아마도 네 입을 열게 하기 위한 모든 응원의 말들을 했던 것 같아.

추운 바람을 맞으며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앉아있던 네가 어렵게 발걸음을 떼고 아빠 앞에 섰어.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는데 너는 아주 힘겹게 한 걸음씩 내디뎠지. 아마 그 순간에도 네가 진짜 입을 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을 거야. 드디어 아빠 앞에 선 네가 아주 작은 소리로 '아빠 미안해요'라고 하는 순간 우리 둘 사에는 축제날 밤 풍경 같은 폭죽이 퐁퐁 터졌지. 이미 용서할 준비가 된 아빠도 널 안아줬고.

자존심이 상해서인지, 사과했다는 쑥스러움인지, 아니면 용기를 내서 마침내 해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몰라도 너는 혼났을 때 보다 더 크게 울었단다. 하지만 아주 개운해 보였.


아이를 키우는 건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라 생각해. 너의 이야기를 통해 엄마는 많은 걸 배우고 있단다. 세상에 그 어떤 육아서 보다 더 확실하게 넌 어떤 아이이며 너에게는 어떤 돌봄이 필요한지 네 입으로 이야기해 주고 있지.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는 아들을 강으로 데려간 아빠처럼 엄마언제나 네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었으면 좋겠어. 말하지 않는 순간에도 이해하는 사람이고 싶어. 네가 눈물을 참고 웅얼거리는 때에도 엄마는 마음속으로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을 거야.



배 속에 폭풍이 일어난 것 같아요.
두 눈에 빗물이 가득 차올라요.

아빠는 내가 슬퍼하는 걸 보고 나를 가까이 끌어당겼어요.
그리고는 강물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강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이지?
너도 저 강물처럼 말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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