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면 뭐가 제일 그리울 것 같냐고 남편에게 물으니 생각하기 귀찮아서인지 "Nothing" 하며 짧게 답을 한다. 표현이 애매모호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그리울 것 같다.
그동안 많은 친구들이 살다가 떠났고, 그 빈자리를 새로운 사람들이 '친구'가 되어 채워 주었다. 보내는 것도 맞이하는 것도 모두 익숙해진 우리들이다. 애초에 다들 무슨 생각으로 고향을 떠나왔으며 이곳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다른 이방인들과 정을 나누며 살게 되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좁은 땅에 살면서 내가맺은 모든 인연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던 듯하다.
이삿짐을 부치고 호텔에서지낼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몇몇 친구들은 자기들 집에서 머물러도 되는데 왜 호텔에서 묵느냐며 진심 섭섭해했다. 가족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내러 긴 여행을 가 있는 동안 집에 애완동물과 가정부만 남아 있을 거라며 오히려 우리가 자기들 집에 와서 지내주면 감사할 것 같다며 빈 집에서 'house sitting'을 해 달라고 신세 지기 싫어하는 우리들의 성격을 너무 잘 아는 친구들은 부탁하듯 우리들을 빈집으로 초대했다.
나는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내 집을 내주며 '나 여행 가 있는 동안 내 집에서 편히 지내'라고 하지 못할 것 같은데, 내 친구들은 망설이지도 않고 우리에게 자기 집을 내주겠다고 한다.그동안 좋은 친구들을가까이 두고 참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은 '예약된 호텔을 캔슬할 수 없다'는 거짓말로 친구들의 제안을 겨우 거절하고, 우리가 살던 집 근처의 호텔에서 일주일을 묵으며 호텔과 연결된 쇼핑몰에 있는 Cafe Beviamo에서 매일 아침 진하게 내린 Long Black을 마시는 소소하지만 큰 행복을 만끽했다.
지하에 있는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올 때마다 적당한 온도로 서서히 데워지고 있는 우유의 달콤한 냄새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Flat White를 한 잔씩 하곤 했던 곳이다. 나는 이 카페에서 그동안 몇 잔의 커피를 마셨을까?이카페가 생긴 지 20년도 더 되었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맛을 유지하고 있는 게 대단하다.
이 익숙한 맛을 뒤로하고 떠나야 하는 아쉬움이 크다.
싱가포르 탕린 몰에 위치한 Cafe Beviamo
싱가포르의 크리스마스.
찬란한 크리스마스 조명으로 장식된 오차드 로드 (후원사 Hitachi의 로고는 해마다 더 커지는 것 같다), 루이비통과 샤넬로 쇼핑몰 앞에 세워진 트리, 눈대신 비눗물을 뿌려대는 쇼핑몰 앞의 '가짜 눈'을 맞으며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니 싱가포르엔 올해도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잘 짜인 시나리오같은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는 것 같다.
싱가포르 오차드 로드, 2023 크리스마스
호텔에 묵는 동안 친구들이 베풀어준 만찬으로 잘 먹고 잘 지냈다.
이사하느라 탱스기빙에 터키를 못 먹었다는 말을 듣고 탱스기빙 디너를 풀코스로 준비해 대접해 준 친구, 호주에서 직접 공수해 온 양고기를 반나절 오븐에 구워서 우리 대신 친구들을 초대해서 우리의 송별회를 해 준 친구, 면을 직접 뽑아서 한국식 자장면을 만들어 준 친구, 집밥이라 누추하다며 내놓은 상다리가 휘어지게 많이 차린 인도 음식으로 우릴 기겁하게 만든 친구.
나는 친구들에게 별로 해 준 게 없는 데, 내 친구들은 나에게 진심 잘한다.
싱가포르를 떠나면 가장 그리워하는 것이 이곳의 '음식'이라고들 하는데 미식가의 천국이라는 싱가포르를 떠난 후에도 내가 배고플 때 제일 먼저 생각 날 음식은 미슐랭 가이드의 '맛집'에서 먹은 음식이 아닌친구가 해주는 '집밥'일 것 같다. 바쁜 삶 중에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내가 먹고 싶다는 것을 정성껏 만들어 주던 친구들의 손 맛이 많이 그리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