윙어의 소설과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에로》를 중심으로
<“작가가 만든 인물들Charaktere은 어느 만큼 객관적인가?” 라고 물으면서 헤벨은 “인간이 신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운 만큼”이라고 말한다. 신비주의자는 자신을 포기하고 신과 완전히 일체가 되었을 때 자유롭다. 영웅은, 그가 루시퍼처럼 반항하면서 자기 자신 속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완성했을 때, 그리고 자신의 파멸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로부터ー자기 영혼의 행동을 위해ー어중간한 것을 모두 다 추방했을 때 자유롭다. 규범적 인간은, 작품들과 실체적 윤리의 높은 규범들이 모든 것을 완성한 신의 존재 속에, 구원의 이념 속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규범들이 가장 내적인 그 본질에 있어서는 현재의 지배자에 의해 건드려지지 않은 채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해 자유를 획득했다. 그러나 영혼이나 작품에서 규범성의 현실화는 그 기반, 곧 현재적인 것에서 분리될 수가 없다. 만약 그럴 경우 자기 대상과의 형성적인 부딪침이라고 하는 규범의 가장 고유한 힘은 위태롭게 되고 말 것이다.> - 『소설의 이론』(G. Lukacs 著, 김경식 譯) 中
<질서는 공동의 적이다.> - 『일기』 (E. Jünger 著) 中
<계몽의 시대는 끝났다. 전쟁은 그 종말을 완성시키며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감정을 복구시켜주었다.> - 『작은 숲 125』 (E. Jünger 著) 中
<현상의 홍수로부터 한 가지는 점점 더 명확해졌다. 바로 물질의 중대한 필요성이다. 전쟁은 물질의 싸움으로 치환되었다. 기계, 강철, 폭발이 물질의 요소였다. 심지어 인간조차 물질로 치환되었다.> - 『전쟁 폭풍 속에서』 (E. Jünger 著) 中
<부상을 당해 붕대를 피로 물들인 무리가 우리 옆을 지나쳤다. 그들의 창백한 얼굴은 싸움의 흥분에 물들어 있었다. 힘든 시간이 닥칠 예감이 우리를 엄습했다. “조심해라, 제군들!” “내 팔! 내 팔이!” “이봐, 정신 차려!”> - 『전쟁 폭풍 속에서』 (E. Jünger 著) 中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다. 제군들, 그대들의 가치는 불멸이며 그대들 옆에 나란히 선 형제의 마음 깊숙이 새긴 기록은 불타는 고리를 두르고 있다. 우리는 그대들의 상처를 하얀 리본으로 동여매고, 그대들의 파괴하는 눈에 영원의 막이 엄습하는 것을 들여다보지 않았는가?> - 『전쟁 폭풍 속에서』 (E. Jünger 著) 中
<비로소 우리 세대에 와서 기계(문명)와의 화해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그 속에서 단지 유용성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의미로운 일보一步이다 (…) 아마도 이 전쟁은 우리에게 거대한 가능성일 수 있다. 이러한 방향의 가능성에 비하면 수백만의 죽음은 오히려 값싸게 치러진 셈이다.> - 『불과 피』 (E. Jünger 著) 中
<출구가 전혀 없다. 옆길도 퇴로도 없다. 가능한 것은 오히려 우리가 직면해 있는 과정의 비중과 속도를 상승시키는 것이다.> - 『노동자 ~지배와 형상~』 (E. Jünger 著) 中
<이러한 유의 파괴는 너무나 깊고 너무도 근거가 명확하기에 이 파괴를 통과해 지나가지 않고서는 이를 멈추게 하거나 새로운 조화를 이룰 방도가 없는 것이다.> - 『노동자 ~지배와 형상~』 (E. Jünger 著) 中
<우리가 사는 곳은 동화와 같은 풍경을 지니고 있다. 가끔 열차를 타고 대도시로 진입해보라. 기술이란 식물로 가득한 무한한 마법의 정원을 통과해 달리면서 일하는 남녀의 금속성 환영을 보고 이 도시들 중심부의 이글거리는 아크등이 연출하는 인공 하늘 아래에서 수없이 울리는 기계의 광란과 비명소리에 도취되고 나면 이 세계가 특수한 것이며 사실상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종결부에서 아직 매우 전원적인 분위기로 공업에 관해 말한 바 있었다. 그 이래로 우리는 과연 어디에 이르렀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 『불과 피』 中
<허무주의를 잘 정의한다는 것은 아마도 암의 발병원인을 명확히 보여주는 일과 흡사할 것입니다. 허무주의를 잘 정의한다고 해서 그러한 좋은 정의가 곧 치료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인류 전체가 그 일에 다 같이 힘쓴다면, 그것이 치료의 전제는 될 수도 있겠지요. 실로 문제가 되는 것은, [허무주의가]역사를 광대하게 뒤덮으면서 침식하고 있는 그 과정입니다.> - 《선을 넘어서》(E. Jünger 著) 中
<이성은 결코 이성 자신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유로 하여금 이성의 방식으로 사유하도록 명하여왔던 그것(그 자신의 고유한 진리 속에서 사유가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말 건네고 있는 존재 자체의 부름 - 역자)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입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25,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에른스트 윙어의 저작인 『노동자』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여태까지 니체의 모든 문헌들이 할 수 없었던 작업을, 즉 존재자를 힘에의 의지로서 기투하였던 니체의 시각 속에서 존재자 및 존재자의 존재방식에 대한 모종의 경험을 중개하는 작업을, 슈펭글러와는 다른 방식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28,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허무주의의 완성Vollendung은 이미 그것의 종말Ende이 아닙니다. 허무주의의 완성과 더불어 비로소 허무주의의 최종단계는 시작합니다. 최종단계의 영역은 추정하건대, 그것이 정상상태 및 이러한 상태의 고착화에 의해서 철저히 지배되기 때문에, 기이할 정도로 드넓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성이 종말에 이르는 그 영도선은 최후에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32,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인간존재의 이데아가ー처음으로 존재자에게서 [현존의]“재현Repräsentation”을 허락해줌으로써 이러한 것을 존재자로서 존재하도록 (존재자에게) 정당한 자격을 부여해주는ー그런 현존Praesenz으로서 이미 모든 현존자의 근저에 놓여 있는 그런 것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이 무엇보다 먼저 ‘[모든 것에게 척도를 부여하는 식으로]표준적으로 근저에 놓여 있는 것das maßgebende Zugrundliegende’이라는 의미에서 표상되어야만 합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36,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기술에 대한 모종의 현실적인 관계를 점유하기 위해서, 사람은 기술자 이상으로 존재해야 한다. 기술은 노동자의 형상이 세계를 움직이는 양식이자 방식이다.> - 『노동자 ~지배와 형상~』 (E. Jünger 著) 中
<이데아의 본질유래는 또한 그것과 친근한 형상의 본질이 유래하고 있는 동일한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일까요? 혹은 몰아세움은 단지 (노동자라는) 한 인간의 형상의 기능에 불과한 것일까요?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존재의 본질과 더 나아가 존재자의 존재는 인간의 표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표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40,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형이상학의 언어와 형이상학 자체는ー그것이 살아 있는 신의 언어이든 혹은 죽은 신의 언어이든 간에ー형이상학으로서 선을 넘어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즉 허무주의의 극복을 방해하는 그런 울타리를 형성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요? 사실이 그렇다면, 그때 선의 가로지름은 반드시 말함의 변화로 진행되면서 언어의 본질에 대한 모종의 변화된 관계를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45,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무는 허무주의의 완성과 더불어 사라질까요, 아니면 적어도 허무주의의 극복과 더불어 사라질까요? 겉으로는 하찮아 보이는 무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전부터 ‘존재’와 친밀한 사이로 있는 무의 본질이 도래하여 사멸할 자인 우리들 가운데서 머무를 수 있다면, 아마도 그때 비로소 무는 극복될 것입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51,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더 이상의 여분은 없다. 인간은 단지 경제적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자기가 착취되는 대상이라고 느끼고 있다. (…) 소멸이 정말로 단순히 소멸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감소)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점차적으로 증대되는 권력의 신장 및 관통력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는다.> - 《선을 넘어서》(E. Jünger 著) 中
<비록 우리가 무를 단지 ‘현존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의미에서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는 현존의 여러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부재적으로ab-weisend(부재하는 식으로) 현존Anwesen에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허무주의에 무가 편재하고 있고 또 무의 본질이 존재에 속해 있되, 이러한 존재는 넘어섬의 역사적 운명이라고 한다면, 허무주의의 본질장소로서 형이상학의 본질은 드러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오직 우리가 형이상학의 본질을 넘어섬의 역사적 운명으로서 경험할 때에만, 그리고 그렇게 경험하는 한에서만, 말해질 수 있습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56,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형이상학을 감내하여 초극함은 존재망각을 감내하여 초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극은 형이상학의 본질을 향해 스스로 다가옵니다. 형이상학의 본질이 자신의 진리의 자유로운 터전 속으로 자신의 본질을 드높여주는 그런 영역을 향해 [간절히 소망하여]부르고 있는 한, 이러한 본질 자체가 도달하길 염원하는 바의 그것( * 형이상학의 본질이 그 본질의 진리에 도달하는 근원적인 장소, 즉 무가 무화되는 발현의 장소 – 역자)을 통해서 이러한 초극은 형이상학의 본질을 휘감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유가 형이상학을 감내하여 초극하기 위해서는 먼저 형이상학의 본질을 명확히 해명해야 합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59,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그러나 형이상학을 그것의 본질에서 구원하고자 한다면, 사멸할 자( * ‘죽을 자’, 즉 현존재로서의 인간 – 작성자)가 이러한 구원에서 마땅히 가져야 할 그의 관심은 이제 비로소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한 번쯤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다른 곳에서 말한 것을 장황하게 되풀이할 위험이 있지만, 그래도 나는 그 물음의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설명하고자 이번 서신을 적절한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당신의 관심이 당신 나름대로 허무주의의 극복을 위해 조력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극복은 형이상학을 감내하여 초극하는 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60,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하이데거는 사고대상의 총체 또는 세계, 즉 존재자의 집합 속에서 사고대상과 사고형식이 포개어지는 특정한 존재자를 발견한다. 하이데거는 자주 그런 상태를 이중주름Zweifalt이라고 부르고 있다. 독특한 이중구조를 가진 그런 특이한 존재자를 통해 한계에 대한 사고가 간접적으로 가능하게 된다. 그런 존재자에 대해 사고하는 것, 즉 그것을 사고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대로 동시에 사고형식(존재)에 대한 물음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하이데거는 그것이 바로 인간, 그의 술어로 말하자면 ‘현존재Dasein’라고 주장한다(『존재와 시간』 제4절). 논리형식은 인간에 의해 산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인간은 한 사물로서 논리형식을 따른다. 그러므로 세계=사고의 한계에 대한 물음Frage은 세계=사고 자체를 산출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실존론적 구조’에 질문을 던짐으로써 탐구된다.> - 《하이데거, 지젝,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 中
<무는 아무런 중앙도 가지고 있지 않다. 무는 자신의 경계들이다. (…)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위대한 사물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무의 존재다.> - 『일기와 메모』(L. Davinch 著) 中
<형이상학에 대한 물음이 어떠한 근본방향에서 제기되는지, 또 그러한 물음의 길은 어떠한 결말에 이르는지, 그 물음을 언제 전개해야 하는지, 그 물음이 문제삼는 학문들의 권역은 어떠한지를 결코 진지하게 전체적인 맥락에서 사색한 적이 없는 사람은 누구든지 필연적으로, 여기서는 [부정적인 허무주의라는 의미에서]무의 철학이 강연되고 있다는 피상적인 앎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66,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당신은 허무주의의 본질에 대한 논구가 필연코 모든 도상에서ー우리가 아주 엉성하게 사유의 참말이라고 부른ー매우 사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기이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참말은 사유의 표현이 아니라, 사유 자체이고, 즉 사유의 진행Gang이며 노래Sang입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69,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만일 혹자가 낱말과 표현을 신성한 증인으로 여기면서, 마치 잔돈이나 지폐를 사용하듯 그것을 단지 재빨리 순간적인 소통의 수단으로 삼으려 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것이 정신적 행위와 변화 속에서 그에 버금가는 참다운 것으로 바뀐다는 것을 알고자 한다면, 아무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전승된 표현들이 어떻게 해로운 영향을 주기도 하고, 의견을 흐리기도 하며, 개념을 일그러뜨리기도 하고, 또 모든 전문분야를 왜곡시키기도 하는지, 그가 이러한 점에 관해 주의를 환기시킨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에게 화를 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 『Vollstandige Ausgabe letzter Hand』 (J. W. Goethe 著)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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