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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Apr 15. 2021

하이데거와 마하 마니의 대담 그리고 생기Ereignis

현대의 존재사유와 자기성찰



들어가며



20세기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의 근원과, 현존재인 인간이 존재와 관계를 맺는 양태에 대해 일생 동안 사색했다. 시간을 실존 양식으로 바라본 전기부터 예술과 언어를 존재의 통로로 간주한 중기, 이윽고 기술 문명 아래 존재 사유의 위기를 우려한 후기까지 그의 사유에서 위의 테마는 일관되어 왔다.


하이데거에게 말함Sagen은 언어를 통해 은폐되어 있던 것들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명명命名은 은폐된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이며, 거기에는 사방四方의 방위가 있다. 사방은 한편으로는 이 방위를 따라 길Weg이 형성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X표 쳐진 (은폐된)존재 즉 진존재Seyn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길Weg은 언어의 원초적 어휘로 추정된다. 단 이 어휘가 이성, 정신, 로고스 등으로 오역된 데서부터 존재의 역사, 달리 말하면 형이상학의 역사는 어그러졌다. 이름으로 드러나기 이전의 말해지지 않은 부분을 포착할 때 비로소 은폐된 존재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하이데거는 주장한다.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사유 속에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이데거의 표현에 따르면 이는 사물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생기Ereignis의 비밀에 자신을 여는 일이다.


우리는 우선 1963년에 독일 남서부방송(SWR)에서 방영된 하이데거와 태국 승려 마하 마니Maha Mani의 대담의 일부를 보며 당시 그의 주된 관심사를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는 『존재와 시간』 이래 하이데거 사색의 근본을 관통하는 ‘생기Ereignis’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생경한 어휘인 만큼 이후 독자 여러분께서는 ‘생기’와 유사한 ‘발현’이라는 어휘로 치환해 읽으셔도 무방할 것이다)



(1) 하이데거와 마하 마니의 대담







마하 마니 교수님께서는 수십 년간 인간의 본질에 대해 깊이 사색해 오셨습니다만, 그에 대해 어떤 통찰에 이르셨습니까?

하이데거 제 사유의 중대한 경험이자 동시에 서양철학에서 사상의 역사의 반성은 저에게 보여준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종래의 사색에서 결코 한 가지, 즉 ‘존재Sein’의 질문이 제기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는 중요한 질문인데, 왜냐하면 서양의 사색에서 우리는 존재와 관련하여 인간의 본성을 결정하고, 인간은 존재에 상응하여 존재하기(역자 – 존재를 인식하는 존재자, 현존재) 때문입니다. 즉 이 상응에 의해 인간은 언어를 소유한 존재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서양 사상은 인간과 다른 생물, 즉 식물이나 동물을 본질적으로 구별하는데, 이는 불교의 가르침과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언어를 소유함으로써 구별되는데 이는 곧 존재와 알고 있는-관계wissenden bezug로서 존재함입니다. 이 존재의 문제는 종래의 서양 사상의 역사에서 제기되지 않았거나, 오히려 더 명확하게 언급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존재 자체는 지금까지 인간으로부터 은폐되어왔습니다(Das Sein selbst hat sich in dieser hinsicht für den menschen bisher verborgen). 그러므로 이 질문을 제기함과 동시에 ‘인간은 무엇이며 또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얻을 필요가 있다는 게 저의 의견입니다.


마하 마니 생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를 새로 구축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종교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추구해야 할까요?

하이데거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설명함으로써 새로운 사유 방식이 어느 정도 필요한지 이미 분명히 드러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특히 중요한 대목인데 왜냐하면 종교 안에서 이 질문을 제기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질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오늘날 전 세계와 서양의 관계는 더 이상 투명하지 않으며, 교회 안의 신앙의 다양한 방향에 의해, 철학에 의해, 과학에 의해, 그리고 과학 스스로가 종교의 일종으로 굳어진 오늘날 현대 세계에 계속 존재하는 신기한 행위에 의해 부분적으로 혼동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이 주장을 좀 더 명확히 밝히겠습니다.


마하 마니 라디오나 TV 같은 현대 매체를 통해 교수님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게 어떠신지요.     

하이데거 오늘날 사유에 제시되는 과업은 어떤 의미에선 완전히 새로운 사유 방법을 요한다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방법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직접적인 대화 그리고 이른바 사유 안에서 관찰하는 기나긴 연습과 경험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습니다. 즉 이 사유 방식은 처음에는 몇몇 사람들만 가능하지만 나중에는 여러 교육 분야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라디오나 TV를 조작할 수 있습니다. 배후의 물리 법칙을 몰라도, 그 법칙을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방법들을 몰라도 말입니다. 오늘날 그러한 방법의 진정한 내용은 아마 대여섯 명의 물리학자들만이 이해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이런 사유도 있습니다. 이 사유는 처음에는 너무 어려워 몇몇 사람들만 훈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마치 지금 이 사람들이 뛰어난 사람들이란 오해를 쉽게 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론상으로는 인간이 사유하는 존재인 이상 누구나 목표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 체계와 역사에 따르면 이 사유의 조건을 스스로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마하 마니 기술과 철학의 접점은 있습니까?     

하이데거 그 질문에 대해 저는 ‘예’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확실히, 양자는 매우 중요한 관계입니다. 현대 (과학-역자)기술은 철학으로부터 생겨났습니다. 분명하고 명확하게(즉 수학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만이 진실이라는 원칙이 근대 철학에서 처음으로 생겨났지요. 독일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Max Planck의 유명한 주장 “측정 가능한 대상만이 현실이다”의 골자는, 현실은 수리・물리적 맥락에서 측정 가능한 한에서만 인간이 접근 가능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고방식이 모든 기술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 사고방식을 처음 고안한 사람이 근대 철학의 창시자 데카르트인 이상 현대 기술과 철학의 관계는 매우 명확합니다.


마하 마니 서양에서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을 곧잘 공산주의자라 부르고, 반면 종교를 품고 사는 사람들을 미친verrückt 사람이라 부릅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이데거 ‘종교 없이 사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고 종교를 품고 사는 사람들이 미쳤다’라… 그런 주장은 비난을 받았을 텐데요, 여기서 ‘종교’의 의미를 숙고한다면 그 주장을 배제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종교Religion’는 어휘 자체가 암시하듯(re다시+lig묶다 - 역자)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권능, 힘, 법칙의 재연결을 의미합니다. 심지어 유일신 여호와를 모르는 불교와 같은 무신론적 종교도 그 자신 안에 유대를 형성하는 이러한 종교의 범주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령 공산주의자 같은 사람들도 종교를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현대 과학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 무조건적인 믿음 즉 과학적 결과의 안전성에의 신뢰는 그들의 신념이며 어떤 맥락에선 개인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종교입니다. 종교 없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넘어서 있습니다, 즉 미친verrückt 상태입니다.

 

마하 마니 4,000년이 지나도록 종교와 철학이 주장한 바는 인간의 생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다시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와 철학을 폐지해야 할까요?     

하이데거 단지 사색과 신앙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기나긴 역사 때문에 이들을 폐지하는 건 불가능하고 폐지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의 본성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두고 늘 새로운 시도를 강요받았습니다. (아까 말했듯 - 역자)첫 질문의 ‘오늘날 인간이 무엇이며 누구인지를 성찰하는 게 필수적인’ 문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특히 현 시점에서 인간은 기술에 완전히 농락당할 위험이 있으며, 언젠가 제어당하는 기계가 될 것입니다. 다른 자리에서 스님이 고향을 준거하여 말씀하실 때, 귀국과 국민들이 후진국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개발 상태에 대해 말할 땐 개발을 두고 어떤 목표를 염두에 두는지 항상 질문되어야 합니다. 현대적 개념 – 개발의 구미歐美식 맥락 – 에 따르면 개발은 우선적으로 과학기술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성찰의 관점에서 - 역자) 귀국은 오랫동안 이어진 전통에 기반을 두고 고도로 발전한 나라라고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대조적으로 과학 기술과 원자 폭탄으로 무장한 미국은 후진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하 마니 사람들을 조화시키는 방법은 있습니까? 있다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같은 현 세계의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될 수 있습니까?

하이데거 당연하지만 이 질문은 매우 일반적입니다. 우선 가능한 통일의 정치적 조건과 사람들을 결집시킬 심리적 조건을 구분해야 합니다. 어느 조건이든 우리의 역사적 상황 전체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사람들이 다양한 종교, 다양한 철학, 다양한 과학과의 관계에 따라 파편화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이들을 직접적이고 단순한 이해로 귀결시킬 공통의 지반은 없다고 저는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역사와 과거를 가진 유럽의 국가와 귀하의 고향이 있는 국가 사이에 있는 커다란 차이를 깨달아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견 가능한 장래를 두고 가능한 이해를 확립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치의 정세와는 별개로 모든 측면에서 사람들의 자기성찰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다른 질문들에서 이미 말했듯 오늘날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현실과 우리 자신과의 명확하고, 공통적이고, 그리고 단순한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이 성찰은 이행되기 어렵습니다. 이는 서구의 모든 나라가 직면한 커다란 문제이며,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의견이 혼동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2) 생기Ereignis에 대하여

 


하이데거에 따르면 자기 자신과 타자로서의 세계의 관계를 분명히 하려면 생기Ereignis의 문제를 구명하는 게 첫걸음이다. ‘존재’에서 출발한 하이데거가 마지막에 ‘생기’의 사태에 다다른 건 그의 사유의 근본이 ‘자기의 진정한 고유성Eigenes과 타자’에 대한 질문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생기’에 대해 논함으로써 사색의 근저에서 자기와 타자・세계의 문제를 물었다.


앞서 이야기한 형이상학의 존재(망각)의 문제에서 하이데거는 ‘자기’에의 물음을 돌파구로 제시했다. 생기Ereignis와 자기의 해명에 의해 근원의 길Weg을 거슬러 올라가는 존재물음은 명확해진다. 생기Ereignis는 특히 『철학에의 기여 ~생기에 대하여~ Beiträge zur Philosophie ~Vom Ereignis~ 』를 중심으로 한 중기 이후 하이데거 철학에서 특별한 의미로 논해지며, 이후 그의 철학의 중추를 관통하는 근본개념이다. 그런 만큼 이는 ‘존재’나 ‘시간’에 머무르지 않고 ‘진리’, ‘세계’, ‘사물’, ‘언어’, ‘예술’, ‘사유 자신의 가능성’과 같은 하이데거 사유의 근본 사태들과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고유함Eigenes고유성Eigen의 사태는 하이데거의 ‘자기’론과 ‘생기’론의 중추를 이룬다. 생기의 문제는 그의 사색 초기부터 근저에 있었으며 이는 고유성Eigen의 구명을 통해 비로소 보이게 된다. 하이데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에서 중심적 물음인 ‘시간성’은 결국 ‘본래적・고유적이게 하는’ 작용인 셈이다. 이로써 현존재인 인간은 고유하게, 즉 ‘본래의 자기’가 될 수 있다. 이 시간성temporaritat은 차후 하이데거가 ‘생기’라 부르는 사태의 ‘예감’이었다. 즉 생기 역시 근원적 의미에서 ‘고유적・본래적이게 하는 작용’이라 할 수 있다.


사유가 진전됨에 따라 ‘시간’에서 ‘생기’로 전환되게 되는데, 전환의 근저에는 하이데거가 전회Kehre라고 부른 사태가 있었다. 전회의 근본과 관계하는 사태가 바로 ‘진존재Seyn의 자기은폐’ 즉 비밀Geheimnis이라 부르는 사태였다. 생기는 스스로 은폐하고 드러나는 방식으로 전회하고, 이를 통해 진리(존재)가 규정된다. 이처럼 ‘자기성’의 근본을 규정하는 사태 즉 ‘본래의 자기・고유함이도록 하는 작용’은 하이데거의 초기부터 후기 사유까지 일관된 근본문제였다.



마치며



대담으로부터 육십 년이 되어가는 현대 시점까지 하이데거가 우려한 ‘과학의 종교화’ 그리고 ‘파편화’의 문제는 꾸준히 심화되어 왔다. 이는 달리 말하면 공통된 지반에서 자기성찰을 통한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어려워졌다고 해서 당면한 과제의 필연성이 퇴색된 건 아니다.


기성 종교나 과학의 울타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망각된 존재, 은폐된 존재를 구명하고자 자기와 타자(세계)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그러기 위해 생기Ereignis의 비밀에 자신을 여는 과정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표현을 통해 세계와 대화하며 사색되고 성찰된 ‘나’를 드러낼 것을 주장한다. 그를 통해 ‘나’와 ‘세계’는 좀 더 다채로워지고, 선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상치 못하게 단편적이고 맹목적으로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수행들을 멈추지 않고 진전시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시대상, 사회상을 보며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자기성찰이 막대한 어려움에 부닥쳤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점부터인가 줄곧 소외되어 온 인간을 회복하는 데는 그 회복의 필요성을 실감하는 순간순간만큼 적기가 없을 것이다. 불완전한 자기와 세계의 시련과 유혹을 겪고, 그를 넘어 사색할 결단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










참고 문헌



《自己の真相~ハイデッガーにおける「性起」(Ereignis)の問題~》 小柳美代子 著

『Beiträge zur Philosophie ~Vom Ereignis~ 』 M. Heidegger 著, 茂牧人 譯

《Ein Interview mit Martin Heidegger》 Südwestrundfunk,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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