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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Mar 05. 2021

관능 소설의 인문사회학적 접근

더글라스, 사드, 프리다와 젤다




Image from 『Lust, Caution』Copyright by Ang Lee



들어가며   

  


나는 야한 것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미성년자 때 에로게임을 번역하기 위해 일본어를 독학했고, 그 가닥을 살려서 대학까지 갔었다. 지금도 틈틈이 에로게임을 플레이하고, 에로만화를 구독하고, 에로소설을 읽는다. 왜 그런 콘텐츠를 소비하느냐고 질문을 받으면 여러 가지 대답을 할 수 있겠지만 뭐가 어찌됐든 그 근간에는 ‘야한 게 좋아서’라는 이유가 굳건히 버티고 있다.


단 각 콘텐츠마다 생산자의 중점의도가 다른 만큼 소비하는 입장에서도 소비의 형식과 목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에로 게임은 주인공과 플레이어 자신을 동일시하여 히로인과의 정사를 포함한 신변잡기를 통한 유사 연애경험을 제공하고자 한다. 전통적으로 어드벤쳐 게임의 주인공이 플레이어와 갖는 상호작용을 생각하면 일종의 부분 집합인 셈이다. 에로만화는 장편과 단편 같은 분량의 차이는 있지만 만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대사나 독백보다 그림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이고, 소비자의 목적이 속된 말로 주로 ‘편하게 한 발 빼는’ 데 있다 보니 치밀한 콘티보다는 만족스러운 여성(혹은 남성) 신체묘사와 농밀한 정사 신이 우선적으로 고려된다.


관능 소설은 삽화가 딸려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지만 어찌됐든 인물 간 대화, 상황묘사, 심리묘사 등을 전부 텍스트로 커버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는 그만큼 독자의 상상력에 의존하는 바가 큰 서사 양식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작가의 종합적인 필력 역시 최소한 한 편의 기승전결이 마련된 이야기를 쓸 정도는 되어야 한다. 게다가 소설의 특성 상 에로 게임이나 에로 만화보다 서사의 측면에서 소비자의 기본적인 기대치가 높기 때문에 이를 고려하며 앞서 말한 실용성(?)까지 염두에 둔다면 관능 소설을 쓸 때는 기본적으로 기성 소설을 쓰는 만큼 품이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만큼 관능 소설의 장르 역시 非관능 소설 장르의 가짓수만큼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학원물, 액션물, 스릴러물, BL물, GL(백합)물, TS물, 기타 등등… 물론 지금 출판되고 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동아시아 문학 사조에서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순문학이나 참여 문학과는 동떨어진,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의 층위를 형성하는 ‘캐릭터’에서 비롯된 세계관을 답습하고 있다. 오오츠카 에이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문학, 미스터리, SF 등등 라이트노벨 외의 모든 소설을 ‘현실을 사생한 것’이라 파악한다. 미스터리나 SF는 비현실적인 사건을 그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실의 사생을 전제로 한 것이며 거기에 위화감을 끌어들인 귀결이라는 게 오오츠카의 고찰이다. 그와 대조하여 라이트노벨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라는 세계에 존재하는 허구를 사생한다는’ 점이 특징이다.”(《포스트모더니즘과 그 비판, 이윽고 동물화하는 오타쿠》( https://brunch.co.kr/@erasmut/18 ) 中)


이번 글의 목적은 학문적 관점에서 관능 소설의 묘사를 살펴보는 것이지만 굳이 비중을 따지자면 이론을 소개하는 데 더욱 무게를 두고 있다. 그렇기에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 기반의 요즘 작품을 끌어들여도 딱히 문제는 되지 않겠지만 굳이 고전 두 작품을 이번에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1906년에 출판된 『요세피네 무첸바허 혹은 빈Wien 창녀의 자전적 이야기』, 또 하나는 1873년에서 1876년에 걸쳐 출판된 『욕망의 로맨스』이다. 두 작품 모두 관능 문학의 베스트셀러이며, 주인공인 ‘나’를 화자로 하는 1인칭 주인공 시점 소설이며, 현재와 약 한 세기 정도의 시대 차이로 작중 묘사된 생활상에 그다지 큰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각각 소녀와 소년의 시점에서 물리적으로 상정할 수 있는 온갖 배덕적인 연출이 내내 이어지므로 이번 글의 소재로 쓰기 알맞다고 판단했다.


단 이 블로그는 연령제한이 없고 나 역시 늘 남녀노소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쓰기를 지향하므로 원문을 번역・인용할 때 수위 조절을 위해 부득이하게 번역어를 교체하거나 아예 블러 처리를 하게 될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넓은 아량으로 양해해 주셨으면 한다.



메리 더글러스가 말하는 깨끗함과 부정, 그리고 성기의 하혈



앞서 글을 시작하며 나는 ‘야한 것을 좋아한다’며 짐짓 대담한 선포라도 하듯 글문을 텄다. 왜 나는 각오라도 한 듯 일말의 비장함을 갖고 이 주제를 시작해야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섹스’와 그에 대한 담론은 우리들의 관습체계에서 낯설고 심지어 불결한 것으로 명시적으로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는 주저 『순수와 위험』에서 이 가름, 배제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우리의 더러움 관념에는 위생에 대한 염려와 관습의 존중, 이 두 가지가 뒤섞여 있다.> - 『순수와 위험』(M. Douglas 著, 유제분 譯)


우리는 깨끗함을 위생적이고 과학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 이는 믿음에 불과하다. 무엇이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이 더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깨끗함은 더러움에 의해 규정되는 상대적 개념이다. 현대인의 깨끗함 역시 문화적으로 규정된 개념이고 종교 문화와 연속선에서 논의된다.


전통사회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금줄을 치고 삼칠일의 금기를 지킨다면, 현대사회에서는 산후조리원이라는 격리된 공간을 설정하고 드나들 때마다 손에 소독약을 뿌린다. 이 사례에서 ‘어떻게 전통사회와 현대사회를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냐?’는 반발심이 드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글러스의 개념적 작업들은 사실 이러한 마음의 장벽을 부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현대인과 원시인 간에 사유의 질적 차이가 있어서, 도저히 같은 수준의 생각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마저 우리는 스스로의 종교를 고등하다고 생각하며 원시인의 종교를 ‘원시종교’라 부른다. 더글러스는 원시종교의 주술과 고등 종교의 성사聖事sacrament를 별개의 것으로 보는 우리의 인식을 비판한다. 둘 다 종교 의례로서 상징적 의미의 차원에서 비교 연구될 수 있음에도 주술에 대한 현대인의 경멸적 인식 때문에 두 현상의 동질적 측면은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구분은 원시인의 터부taboo 관념을 현대인이 공유하는 언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인의 이 구분은 원시인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관념이며 종교적 의미를 함축한다. 더글러스 저서에서 많이 등장하는 더러움dirt, 오염pollution 등의 용어를 물리적 의미로만 해석한다면 그의 책을 오독하는 셈이다. 오히려 우리말 ‘부정’으로 번역할 때 이 그의 논의가 선명해진다. 한국 전통의 부정 관념은 문화적 경계를 함축하며 터부와 다르지 않은 금기들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더글러스는 문화 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경계에 대해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안했다. 그것은 깨끗함과 부정을 가르는 선線이 ‘몸의 경계’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몸을 매개로 사회의 경계를 사유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입속의 침을 문제 삼지 않지만, 입 밖으로 나온 침은 더러운 것으로 취급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는 교육을 통해 학습된다. 갓난아기는 자신의 입에 넣었다 뺀 것을 더럽다고 인식하지 않는다.


이 기준으로부터 더글러스는 몸의 경계 주변에서 위험이 발생한다고 통찰하였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확장되고 응용된 후대의 논의를 언급해보자.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공포의 권력』에서 비체卑體abjection라는 개념을 제안하는데, 이것은 주체subject와 대상object 사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존재다. 자아의 일부로 인식되거나 범주화되기를 거부당한 존재로 ‘내가 아닌 나’다. 자아 정체성을 규정하는 몸의 경계에 속하지 않은, 다시 말해 경계를 교란하는 존재이기에 불쾌하게 여겨진다.



Image from 『부산행』,『엑소시스트』Copyright by Next Entertainment World, Warner Bros.



위의 첨부 이미지들을 보도록 하자. 왼쪽 사진부터. 좀비는 한때 살아 있는 인간이었지만 이제는 자아를 상실하고 오로지 충동만으로 움직이는 유기체다. 엄밀히 말하면 시체이지만 살아 움직이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를 알던 사람에게는 여전히 생전의 모습을 지녔기에 쉽사리 마음속에서 배제할 수 없는 대상이다.


오른쪽 사진을 보자. 십자가, 나체, 피. 이 키워드로 제일 유명하면서 제일 오래된 상징은 뭘까? 그렇다, 다들 떠올렸듯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순교 장면이다. 그러나 성별이 여자로 바뀌고 출혈 부위가 성기로 바뀌는 것만으로 본래의 ‘거룩한 희생’이라는 기의는 ‘기성의 부계 상징체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안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인간 주체에 도전’ 하는 위협의 의미로 탈바꿈한다. 고전 공포영화 『엑소시스트』(1973)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 『에반게리온』, 『엘펜리트』 등지에서 꾸준히 활용되는 클리셰이기도 하다.


여기서 『요세피네 무첸바허』의 한 장면을 살펴보자. 어린 요세피네는 이웃에 살던 십대 언니, 오빠들, 지주 집 도련님의 하녀를 통해 섹스에 입문을 하고, 양조장 관리인 호락 아저씨와 라인탈러 아줌마를 통해 어른의 섹스를 배우게 된다. 그러나 요세피네가 본격적으로 능동적인 섹스를 주도하게 된 상대는 일꾼 겸 식객으로 있는 에크하르트 아저씨였다. 요세피네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 에크하르트는 그녀를 ‘나의 천사’라 부르며 조심스럽게 다루지만 몇 번 몸을 섞으며 색녀로 거듭나는 요세피네가, 밤에 아빠가 상대해주지 않아 몸이 달아오른 엄마와 섹스해 달라고 하는 말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기분 좋았니?” 그가 말했다. “네. 하지만 왜 그게 딱딱해지지 않는 거죠?” 나는 대답했다. “다시 늠름해진 걸 보고 싶어요…” “너희 엄마가 네가 뭘 하고 다니는지 알면…” 뜻밖의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나는 웃었다. “엄마도 아빠 물건이 더 자주 서지 않는다고 푸념하는걸요?” (…) 확인하려는 듯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 “그, 그러니까 너네 엄마가, 기분 좋은 일을 할 다른 상대를 찾겠다고 말했다고?” 그리고 갑자기 그의 꼬리가 평소처럼 단단해졌다. (…) “내가 너희 엄마와 기분 좋은 일을 했으면 하니?” 나는 기꺼이 “네…” 라고 대답했다. 동시에 그는 나에게 흩뿌렸다. 나는 그에게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성이 나 있었다. “꼼짝 말거라, 이 바보 천치 녀석아… 중간에 가는 법은 없다…” (…)“누가 너에게 해 줬느냐? 말해라.” “호락 아저씨요…” 나는 대답했다. 그는 모든 걸 알고 싶어 했다. “아래층의 맥주통 관리하는 사람 말이냐?” “네.” “언제부터?” “오래 전부터요.” (…)“이 색녀, 매춘부, 음녀 굴의 뱀 같은 것…” (…) “각오하거라. 내가 기분 좋은 일을 철두철미하게 가르쳐 주겠다. 더 이상 지하실에서 맥주통 녀석과 뒹굴지 않게 될 거다. 내 전처에게 했던 대로 너에게 해 주마. 금방 애를 배게 되겠지만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치부를 드러낸 채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겉옷을 벗고는 침대에 쓰러졌다. 조가비 안팎이 불타는 것 같았다. 분명 상처가 잔뜩 났을 거라고 믿었다. 불을 켜고는 손거울로 들여다보니, 염증이나 피가 나진 않았지만 음부가 빨개지고 넓어진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거기서 느껴지는 통증에 충격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 『요세피네 무첸바허』 中


이제 겨우 십대 초반의 여자아이가 외간 남자에게 자신의 어머니와 몸을 섞으라고 종용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일상의 끝을 달리는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일상적인 님프의 충동질을 통해 에크하르트의 심리는 한층 더 부정의 심연으로 다가간다. 배덕감에 휩싸인 그는 눈앞의 소녀를 마구 매도하며 창녀처럼 거칠게 다룬다.


요세피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에로 게임이나 에로 만화에선 흔해빠진 처녀막 파열에 따른 하혈 장면이 여기선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섹스로 인한 음부의 상태 변화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게 이 장면이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전근대적 가부장적 권위가 건재한 공간에서 딸이 엄마의 외도를 조장하며 권위에 위협을 가한다. 이를 통해 요세피네는 가족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분방한 창녀의 길로 성큼 발을 내딛는다. 또한 다른 시각에서 볼 때 이는 그리스적 비극의 단초이기도 하다. 결국 에크하르트와 몸을 섞은 요세피네의 모친은 얼마 안 가 1부 마지막에 기저 질환으로 요절하고, 2부에서 아내를 잃은 데다 수입이 변변찮아 창녀를 살 처지가 안 되는 요세피네의 아버지가 딸과 동침하게 된다. 졸지에는 가계를 위해 열세 살의 요세피네를 창녀로서 거리에 나서게 한다. 이는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발현이면서도 아버지에게서 딸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관습 사회의 붕괴라고 말할 수 있다.


비슷한 장면은 『욕망의 로맨스』에도 등장한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여동생들과 함께 자란 주인공 찰리는 열다섯 살이다. 몸의 성장과 발육은 동년배를 웃돌지만 정신은 이제 겨우 성에 눈을 뜬 사춘기 초입일 뿐이다. 어느 날 젊고 아름다운 가정교사 에벌린 선생이 찾아오면서 찰리는 남자로서의 성적 충동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찰리는 일부러 잘못을 하여 에벌린 선생에게 체벌을 받으며 피학 쾌감을 느끼는 동시에 여자의 육감적인 몸에 하복부를 비비는 간접 수음을 행하는 등 육체를 매개로 하여 성욕을 해소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 간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손님인 벤슨 씨 내외의 정사 장면을 엿보게 되고, 찰리를 눈치 챈 벤슨 부인은 입막음 겸 그에게 섹스를 전수해 주게 된다. 부인과의 정사를 통해 섹스 기술을 쌓아가는 동시에 에벌린 선생과 은밀한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던 어느 날, 찰리는 동생 메리에게 섹스를 가르쳐주게 된다.


<“찰리 오빠!” 예전과 달리 두껍게 강고해진 아들에 놀라서 눈을 떼지 못하며 메리가 말했다. “와아! 진짜 크다.” 그리고 손으로 움켜잡았다. “왜 이렇게 몽둥이처럼 딱딱해진 거야? 그리고 머리는 또 왜 이렇게 빨갛지?” 이유도 모른 채 아들을 주무르면서 그녀는 뭔가를 느꼈는지 얼굴을 붉혔다. (…)나는 상체를 숙여 키스했고 자그마하게 튀어나온 그녀의 완두콩을 혀로 핥았다. 딱딱해지면서 메리는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틀었다. “찰리 오빠! 기분이 이상해져! 뭐 한 거야? 좋은데? 계속해줘.” 거기서 멈추면서 내가 말했다. “지금은 안 돼. 나중에 우리끼리 있게 되면 이것보다 훨씬 좋은 거 해줄게.” (…)그리고 응접실로 들어와 메리는 내 목을 팔로 휘감고 키스하며 말했다. “찰리 오빠가 신호해줘서 다행이야. 이제 우리 세상이다. 이제 그 비밀에 대해서 전부 얘기해줘야 돼. 그리고 전처럼 앙증맞은 계곡에 키스해줘야 해. 말할 수 없이 짜릿해서 꼭 다시 하고 싶었어.” “그래, 메리.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은 물론 그 이상도 해줄 수 있어. 하지만 여기선 안 돼.” (…)준비 단계가 끝나자 메리를 내 무릎 쪽으로 가까이 오도록 했다. 우선 그녀의 속치마와 내 셔츠를 올려 서로의 맨살이 닿도록 했다. 속치마를 올리자 조막만 한 가슴이 드러났다. (…)메리가 오르가슴을 느끼는데 전보다 시간이 좀 더 걸렸지만 훨씬 많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앙증맞은 협곡은 이제 긴장이 풀렸고 액체와 침으로 촉촉하게 젖어 아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별 무리 없이 아들이 반쯤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거칠게 밀어 넣지 않기 위해 굉장히 애썼다. 갑자기 뭔가 막힌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힘껏 밀었더니 동생이 아프다고 멈추라며 소리 질렀다. (…)메리의 처녀 꽃을 따지 못한 채 참지 못하고 그녀의 협곡에 분사하여 선정적인 찬사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내 배출물이 약간 찢긴 메리의 처녀막을 진정시켰다. (…)와락 뭔가가 찢어지는 것이 느껴지자 아들을 5센티 정도 더 삽입할 수 있었다. 메리는 아파서 악악대고 비명을 질렀다. 메리는 나를 밀쳐내려고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지만 아들은 이미 협곡에 깊숙이 진출한 상태였다. 계속 저항하는 동작에 맞춰 아들을 뿌리까지 깊숙이 박을 수 있었다. 메리가 울며 소리치자 더욱 흥분했다. 곧바로 분사를 하고 동생의 몸 위에 시체처럼 쓰러졌지만 성욕은 아직 다 채워지지 않았다. (…)이제 나를 방해했던 처녀막은 사라졌으므로 메리가 반항하지 않는다면 쾌감이 훨씬 커지리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내 예상이 정확히 맞았다. 메리의 욕정이 치솟으면서 하찮은 쓰라림 따위는 잊어버린 듯 기분 좋은 일에 몰입했다. 메리는 집게로 물듯 아들을 꽉 조였고 놀랍게도 벤슨 부인처럼 자유롭게 엉덩이를 비틀었다. (…)가녀린 여인이 거대한 몸집의 남자에게 깔려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으며 자유자재로 절정에 이르는 장면은 많이 봤지만 볼 때마다 놀랍다. 몸을 빼고 일어나자 아들이 피로 뒤덮여 있다. 메리의 협곡에서도 피와 분사한 액체가 섞여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우리는 기겁했다. 처음에는 나도 메리만큼이나 두려웠다. 하지만 잠시 진정하고 생각해보니 기분 좋은 일을 하고 즐기는 데 별 문제가 없었고 강제로 진출하면 피가 나는 게 당연했다. 이런 설명으로 메리를 진정시키며 피가 묻은 소파는 내 손수건으로 닦아 자국을 깨끗이 없앴다. 메리의 좁디좁은 협곡도 손수건으로 말끔히 훔쳤다.> -『욕망의 로맨스』 中


여동생 메리는 열 살이 갓 넘은, 이제 겨우 2차 성징이 시작될까 말까 한 어린 나이이다. 당연히 여성기의 발육은 고사하고 골반도 여물기 전이다. 성에 대한 의식도 미숙하여 장성한 오빠의 성기에 대한 생리적인 거부감도 발동하지 않는다. 찰리는 메리와 몸을 섞으며 처음으로 어른의 입장에서 섹스를 가르친다. 그런 만큼 메리의 처녀막과 처녀혈도 찰리의 입장에서는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처녀혈이라는 비체는 금기를 깼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며 앞으로의 평범한 일상과 남매 관계를 위협하는 것이다.


처녀막이 찢어지는 합을 기점으로 섹스의 쾌감을 안 메리는 더욱 능동적으로 정사에 참여한다. 요세피네와 마찬가지로 성기 상태의 변화를 일종의 ‘넘어섬’으로 상징하는 것이다. 찰리는 메리가 훌륭한 여자로 성장하리라고 예견한다. 조금 빠르지만 한 단계 어른의 계단을 오른 셈이다.



『규방철학』의 예언가적 부르짖음 그리고 프리다와 젤다의 진취적 여성관



<돌망세 : (근친상간은)오히려 자연이 가장 감미롭고 자연스러운 결합으로서 우리에게 명한 것이지. 그리고 자연이 우리에게 제대로 된 권고를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야! 외제니, 생각해 보아라. 지구에서 천지창조의 혼돈 상태가 끝난 후 근친상간이 아니라면 어떻게 인류가 종족 번식을 할 수 있었겠느냐? 기독교에서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여러 책에서도 그와 같은 예와 증거를 찾을 수 있지 않느냐? 즉 아담과 노아의 가족이 근친상간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종족을 번식할 수 있었겠느냐? (…) 만일 자연이 비역, 근친상간, 자위행위 등을 금했다면, 우리가 그 행위들에서 그렇게 감미로운 쾌락을 얻는 것을 그냥 놔두었겠느냐는 것이다. 자연이 자신에게 진정으로 해가 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일이야.> - 『규방철학』(D. A. F. Sade 著, 정해수 譯) p.60 中


사드의 『규방철학』은 희곡의 신체적 잠재력을 논리적인 최종 극단까지 밀어붙인 본보기로, 그는 이 잠재력을 발휘하여 지성과 신체의 상호 의존성 그리고 섹스의 힘 및 그것이 폭력과 어우러졌을 때 이루는 시너지 효과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적 문화가 가진 위험성을 입증한다. 사드는 자신의 희곡 작품을 다른 어떤 것보다도 높이 평가했지만, 그를 무대에 올릴 수는 없었다. 그의 형식적인 희곡의 주제는 유혹, 배신, 근친상간, 운명의 흥망성쇠 등이었기 때문이다.


<외제니 : 마님께서 쾌감을 만끽하는 데 제가 한몫했다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마님, 제가 모르는 단어 하나를 마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창녀가 무슨 뜻이지요? 죄송해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여기에 배우러 온 것이잖아요. / 생탕주 부인 : 방탕한 남정네들의 공공연한 제물을 그런 식으로 말한단다. 즉 언제든지 남정네들의 육체적 욕구나 그들의 호기심에 몸을 내맡길 준비가 된 여자들을 일컫는 거지. 정당하고도 존중받을만한 이 여인네들을 세상 사람은 억누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사람들의 향락 취미 때문에 우대한단다. 게다가 정숙한 여인네보다 우리 사회에 훨씬 필요한 창녀들은 사회로부터 이미 부당하게 자신들의 존엄성을 강탈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 그 존엄성을 기꺼이 희생하고 있단 말이지. 창녀의 칭호를 가진 그 여인들에게 영광이 있기를! 이 여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그녀들만이 진정한 철학자들이야.(…)> - 『규방철학』(D. A. F. Sade 著, 정해수 譯) p.42~43 中


돌망세와 생탕주 부인에게 규방철학을 전수받는 외제니는 처음에는 자신의 어머니를 원망할 뿐 순수한 숫처녀였으나, 자신을 리베르텡의 손아귀에서 구해내기 위해 어머니가 당도할 때쯤이면 몸이나 정신이나 더 이상 처녀가 아니다. 그녀는 돌망세에게 자신에게 성교하라고 지시하는 등 단호하게 자신의 권위를 선언하며, 자신의 어머니를 강간한 끝에 그녀에게 매독균을 주입하는 전체 작업 과정을 수행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각자 역할을 자기 마음에 들게 해보라고 지시한다.


<외제니 : 아주 훌륭한 생각이에요! 빨리, 빨리 내게 실과 바늘을 가져다줘요! 엄마, 허벅지를 벌려요. 그래야 내가 한데 꿰맬 수 있지. 그래야 내게 더 이상 여동생도 남동생도 더 낳아주지 못하게 되지. / (…) 외제니 : 와요, 엄마, 이리 와요. 내가 당신 남편이 되어줄게. 남편 것보다 굵지 않나요? 신경 쓰지 말아요. 들어갈 테니까. (…) 아, 엄마, 소리를 질러, 당신 딸과 하면서 소리 지르라고! (…) 그리고 돌망세, 당신이 내게 성교하는군! (…) 그러면 나는 한 번에 근친상간과 간통과 항문 성교까지 해보게 되는군. 그것도 오늘 순결을 처음 잃은 여자가 말이지! (…) 발전하는 속도가 아주 빠르지 않나요, 친구들이여!> - 『규방철학』(D. A. F. Sade 著, 정해수 譯) p.278~282 中


외제니의 발언은 무엇보다도 자의식적 아이러니의 발언, 여러 가지의 금기를 단 한 번에 위반하는 성적 행위를 수행하는 데서 느끼는 기쁨의 선언이다. 딸이 자신의 죄를 기쁘게 열거하는 데서 암시되듯이 그 기쁨은 성적인 것만큼 언어적인 것이기도 하다. 딜도를 끈으로 매단 외제니는 이미 자기 어머니에게 ‘남편 노릇’을 했으며, 이 구절에서 그녀는 어머니가 ‘더 이상 여동생도 남동생도 낳아주지 못하게’ 막은 데 기뻐하고 있다. 장래의 동생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사드적 리베르탱들은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세계를 즐기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기를 원한다. 거의 대부분 삼인칭으로 지칭되는 정원사 오귀스탱은 자신이 주인이나 마님과 대등한 자가 아님을 안다. 길이 35센티 둘레 23센티의 음경을 가진 그는 ‘자연 세계의 연장(공구의 순우리말과 延長 어느 쪽이든 적용된다)’으로서 자연이 쾌락 원칙을 우선시함을 보여 주고자 정원에서 규방으로 호출된다. 그러나 이야기가 정치, 종교, 도덕성으로 흐르면 다시 밖으로 돌려보내진다. 사드의 성적 유토피아는 근본적으로 엘리트의 낙원이며, 단순한 정신의 소유자들에게 위험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관념은 반드시 교양 계급의, 사회를 주도하도록 태어나고 그렇게 양육된 가부장적 소수파의 전유물로 남아야 한다.


이렇듯 이 작품에서 돌망세로 대표되는 리베르탱은 엘리트 의식을 기조로 여전히 아버지/왕의 권위를 갖고 세상을 재정裁定한다. 차이가 있다면 아버지의 법률이 조화가 아니라 부조화를 가져오며, 범죄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지하며, 가족을 재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한다. 아버지는 여전히 권력의 유일한 근원, 오로지 그만이 정당성을 판정해줄 수 있는 권리를 분배하는 존재이다. 리베르텡이 꾀하는 낙원에서는 리베르텡이 되고자 하는 여성들도 남자만큼 자유를 누리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말이다.


작중 돌망세의 논리에 따르면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그 정의에 따라 각기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만큼, 논리적으로 보면 자연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 있을 수 없다. 옳고 그름의 개념은 문화적이고 시간적으로 상대적인 것이며, 한 가지 행동을 선하다고 하고 다른 행동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무도덕적인 자연의 현실, 일체의 이성이나 감상이 결여되고 오로지 자기 이익의 원칙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자연의 현실을 무시하는 소치다.


이 작품이 공개된 건 1795년 프랑스에서였다. 독재자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하고 몇 달이 지나 감옥에서 풀려난 사드가 발표한 이 작품은 개인의 독재와 육욕을 옹호하여,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 사이, 당시의 집단적 덕성과 인류의 형제애를 찬양한 시대적 분위기와는 확연히 동떨어져 있다. 그리고 약 백 년이 지나고 영국과 오스트리아에서 『욕망의 로맨스』『요세피네 무첸바허』가 나왔다. 등장하는 여성들은 보다 직설적이고 주도적으로 육욕을 갈망한다. 남성의, 혹은 교양 계급의 일말의 훈수나 재정은 사드적 자연 앞에서 오히려 그 밑천을 드러낸다.


여기서 『요세피네 무첸바허』의 1장과 2장 앞부분을 잠시 보기로 하자. 각각 창녀의 삶에 대한 소회와 열세 살 소녀의 성적 매력 앞에서 무장해제한 성직자의 모습을 들려주고 있다. 점잔 빼는 교양주의자들에게는 영락없는 시대말 타락한 군상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등장인물들과 작가 자신에게는 한없이 날것의 자연에 가까운 군상이었을 것이다.


<흔히들 젊은 창녀가 늙어서 수녀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나는 어린 나이에 창녀가 되었다. 침대에서, 식탁에서, 의자에서, 벤치에서, 맨 벽 구석에 기대서, 풀밭에 누워서, 대문 구석 그늘에서, 외딴 방에서, 기차에서, 막사에서, 사창가에서, 심지어는 감옥에서 여자의 방중술의 모든 것을 경험했지만 그 중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나이가 들 만큼 들었고 스스로의 성性에서 비롯되는 기쁨은 사라지고 있다. 나는 부유하고, 시들었고, 아주 곧잘 외로움을 느낀다. 언제나 신실하게 신앙을 지켰지만 지금도 회개해야 한다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주어진 가난과 불행은 스스로의 육체에 빚을 지웠다. 일찍이 모든 감각적 기쁨에 대한 흥분으로 점철되어 유년기부터 모든 부정을 경험한, 이 욕망에 찌든 몸이 없었다면 나는 내 친구처럼 쇠락하여 구빈원에서 생을 마감하거나 미련하기 이를 데 없는 청교도 여편네로 썩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을 변두리의 쓰레기 더미가 어울리는 마냥 미천한 여자는 아니었다. 좋은 교육을 받았고, 이는 명예롭고 배운 남자들과 어울리는 덴 유효했다. 오직 그런 사람들과의 간통에만은 말이다. 계몽의 차원에서 내가 깨달은 사실은 우리 같은 가난하고 천한 태생의 창녀들이 흔히 말해지듯 죄가 많지는 않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나는 삶의 소위 ‘부정한’ 방식을 통해 세계를 보아 왔고 지평을 넓혔다. 지금 나의 운명에 대해 글을 쓰는 건 어디까지나 고독의 시간을 줄이고 지금도 잃어가고 있는 기억을 더듬어 창조를 하기 위함이다. 교화 교육의 참회 시간보다는 그쪽이 나을 것이다. 내 담당 목사는 그 시간을 참 좋아하지만 내게는 마음에도 와 닿지 않고 끝없는 지루함만 야기하는 시간일 따름이다. 또 내가 깨달은 사실은 내 또래 창녀들의 삶이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하고, 우리를 유혹하고, 모든 불가능한 일을 해결하게 해 주는 명예롭고 부유한 신사 분들은 부디 여기 그 중 한 소녀의 이야기를 읽어보시라. 누가 그녀의 몸을 그리도 열정적으로 안았고, 그녀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 『요세피네 무첸바허』 中


<일어서서 그는 자신의 축성된 촛대를 들이밀었다. 매우 따뜻한 촛대가 내 입구로 밀려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를 밀어내야 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가 들어왔다. 신부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가 크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조가비가 꽤 안쪽으로 가로지른 그의 손잡이를 꽉 물고 있었다. 이제 나도 기분 좋은 일을 당하고 싶어졌다. 그것이 죄는 아니니 그 이상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놀라움과 욕망과 즐거움이 뒤섞인 웃음을 지으며 나는 누웠다. 아까 느꼈던 당황스러움이 마침내 해소되었다.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신부는 싸구려 연극을 하고 있었고, 단지 나와 몸을 섞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연극에 어울리기로 결심했다. 눈치 채지 못한 체하며 한편으로는 신부에게 나의 죄를 없앨 권능이 있었다고 믿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막대기를 내 살 속에 들이박은 채 몸을 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저 헐떡이기만 하던 신부는 내가 위아래로 허리를 찧기 시작하자 더욱 가파르게 헐떡댈 뿐이었다. (…)그는 내 위로 몸을 구부리고는 자신의 뚱뚱한 배가 허락하는 한 거리를 두고 두 팔로 몸을 지탱했다. 넓은 평수에 어두운 빛깔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종아리를 잘린 채 매타작을 당한 숫염소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는 속삭였다. “그냥 심판의 망치를 치는 거야… 그래… 맞아… 다치거나 하는 게 아니란다… 그냥 여자아이들에게… 주사를 놓는 거란다… 그게 내 일이란다… 너도 그걸 원하지…? 좋아, 주사를 놔 주마… 네게 성수를 부어 주마…” “신부님,” 중간에 말을 끊고 나는 말했다. “신부님, 저는 가슴으로도 죄를 지었어요.” “어째서?” 그는 의문에 찬 눈으로 나를 보았다. “왜냐하면… 음… 음… 그러니까… 기분 좋은 일을 할 때마다 제 돌기를 쓰다듬고 입 맞추고 껍질을 뜯었어요.” 이렇게 말하면 그는 내가 말한 대로 할 것이다. 그 이면에는 가슴을 짜이고 애무 당하고픈 소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비곗덩어리는 내 가슴을 다루는 데 장애물이었다. 침대에 손을 짚지 않고는 자기 몸을 가눌 수도 없었고 뱃살에 상체가 들려 머리를 숙여도 내 몸에 닿지 않았다.> - 『요세피네 무첸바허』 中


요세피네는 시종일관 순종적인 성욕의 배출구가 아닌 적극적이고 당돌한 요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어떤 명예롭고 부유하고 신실한 남자라도 자신의 유혹 앞에서는 똑같은 한 마리 수컷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녀는 창녀지만 자신이 선택한 삶에 당당하며 한 점 비굴한 기색이 없다. 자신의 인생이 참회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젊은 창녀들의 신변잡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실로 훌륭한 창작자의 소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Frieda Lawrence & Zelda Fitzgerald



여기서 글의 초점을 범세계적 격변기인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활약한 두 소설가의 뮤즈에게 돌려 보고자 한다. D. H. 로렌스의 아내 프리다 로렌스와 스콧 피츠제럴드의 아내 젤다 피츠제럴드는 스스로를 남편에게 종속된 뮤즈가 아닌 어디까지나 남편과 대등한 예술가로 여겼다. 이들은 예술가의 낭만적 감성으로 서로에게 이끌렸지만 성실과 인내, 관습에 대한 순응을 요하는 현실의 인간관계와 결혼 생활에서는 도저히 문학처럼 낭만적일 수 없었다.


프리다 위클리는 열아홉의 나이에 남편 위클리 교수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정신과 의사 오토 그로스와 불장난에 빠지게 된다. 그로스는 성의 해방을 추구한다며 ‘자유연애’를 실천하는 성 심리 탐구자였다. 한쪽 시각에서 보면 자유연애란 무책임함이나 최소한 변덕스러움, 지속적인 관계를 회피하는 태도를 의미했다. 그러나 19세기식 분위기가 유럽에서 쇠퇴하던 시기에 이 개념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자유연애는 구애와 결혼을 지배하는 전통적인 도덕관과 사회적 기대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실험이었다. 그것은 여자는 물론 남자도 일부일처제의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성관계가 보다 자발적인 토대에서 발생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로스는 프리다 속에서 잠자고 있던 성욕을 부추겼다. 그는 프리다에게 위클리를 버리고 구시대적 전통에 얽매인 영국을 떠나라고 연애편지로 수없이 유혹했다. 그러나 그로스에 대하여 이중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던 프리다는 열정적 로맨스가 식자 이내 ‘자유연애를 위해 내 멀쩡한 남편을 파괴할 권리는 없다’는 편지를 보내어 그와의 관계를 끝냈다. 그러나 이때 프리다의 마음속에 불붙은 자유연애 관념은 얼마 후 교사 자리를 부탁하고자 방문한 청년 로렌스를 보고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아들과 연인』에서 볼 수 있듯 로렌스는 개인사적으로나 시대에 대한 시선에서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강했다. 보헤미안 낭만주의자의 교과서와도 같았던 그는 연애 시절에는 자신의 오이디푸스적 욕망을 애 딸린 유부녀 프리다에게 투영했으나, 결혼한 이후에는 자신과 안 맞는 영국인 예술가나 셀럽과 친교를 쌓으며 그들 앞에서 남편으로서의 대응을 원하는 독일 귀족 가문의 규수인 그녀를 증오의 대상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정서적으로 로렌스는 자신의 버팀목으로서 프리다가 필요했다. 그러니 위클리와의 이혼으로 자식을 잃은 그녀의 우울증을 탐탁지 않게 본 건 당연했다. 이 시절 프리다의 모성에서 그가 본 파괴적인 잠재성과 살인적인 능력은 유년기에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체험한 그것이었다. 이를 본격적으로 나타낸 게 『아들과 연인』이었다. 로렌스는 자신을 전적으로 사로잡은 세계관에 눈이 멀어, 한때는 프리다에게 자기가 프리다의 자녀들을 위해서 이 세상을 보다 좋은 곳으로 바꿔 놓을 테니 상실감을 버리라고 한 적도 있을 정도로 자신의 비전과 신념에 천착하고 있었다.


자신감 넘치고 외향적인 여자인 프리다는 불만을 대놓고 쏟아냈고 화가 나면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쳤다. 내향적인 로렌스는 이를 속에 쌓아두며 프리다에 대한 분노를 조용히 불태웠다. 동거인이나 다름없던 작가 캐서린 맨스필드와 집필가 존 미들턴 머리 부부와의 관계에서도 이들의 자기본위 기질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맨스필드는 자신의 지인들에게서 프리다의 유별날 정도로 당차고 거침없는 태도를 ‘저 미친 여자가 로렌스의 몸과 정신을 근본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뒷담을 수없이 들었고, 싸움 중 로렌스의 머리에 질그릇을 깨기까지 하는 프리다를 어느새 자신도 경멸하게 되었다. 넷 중 유일하게 글 쓰는 일을 하지 않던 프리다가 “로렌스는 나의 온 존재를 통해 창작을 할 수 있는 거다.”라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일정 부분 인정했지만, 프리다 자신이 독일인이며 사랑을 위해 자식을 버렸으며 무엇보다 예술가가 아니라는 자격지심을 공격성으로 바꾸어 내비치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었다.


머리와 프리다는 동거 시절부터 피차 연모하던 감정이 있었다. 맨스필드가 결핵으로 죽은 후 머리를 위로하러 찾아간 프리다는 시기가 적절하지 못함에도 이를 상기시켰다. 그러나 머리는 끝까지 로렌스와의 우정을 지킨다. 아내 맨스필드는 전업 소설가가 아닌 자신을 무시하며 다른 남자와 교제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는데 그는 아내와의 의리 역시 지킨 셈이다. 머리의 이런 예술에 발을 걸친 사람이면서도 인간관계에서 성실한 사람의 상은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에 등장하는 더크 스트루브를 연상케 한다.


로렌스가 마흔넷의 나이로 이국의 요양소에서 요절하자 프리다는 남편의 말년을 돌봐준 이탈리아 육군 장교 라발리와 재혼한다. 오 년 후 프리다는 프랑스까지 가서 손수 그의 유해를 거두고, 남은 이십 년의 생을 남편의 무덤을 지키며 살았다. 그리고  이때쯤 전남편 위클리가 다시금 프리다에게 돌아올 것을 종용하지만 끝끝내 그녀는 위클리와 자식들 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정작 로렌스가 죽은 후에야 프리다는 아내로서의 성실을 다 한 것이다.


젤다의 이야기를 해 보자. 1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장교로 참전한 프린스턴 재학생 스콧 피츠제럴드는 남부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 머물던 중, 무도회에서 춤추는 젤다 세이어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젤다는 아름다운 외모와 짐짓 오만해 보일 수 있는 당찬 태도로 좌중의 남자들을 쥐락펴락했다. 이후 피츠제럴드의 일생에서 젤다의 모든 것은 그의 미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고, 젤다 역시 이날 대작가를 꿈꾸는 자신의 포부를 말하는 잘생긴 피츠제럴드에게 큰 감명을 받았음을 훗날 고백한다.


젤다의 어머니 미니는 젊은 시절 배우를 꿈꾸고 문학적 야망을 간직한 쾌활한 여성이었지만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지 않은 채 변호사인 젤다의 아버지와 결혼했다. 부부가 40대에 막둥이로 얻은 젤다는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고, 자연스럽게 솔직하고 당찬 여자로 성장했다. 이는 남부 명문가에서 선호하는 전형적인 여성상과는 정반대였다. 그녀는 상황을 지배하는 다른 규칙이 있다손 치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야마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젤다의 이러한 모습은 경솔한 현학적 취미와 함께 아름다운 미모를 한껏 휘날렸던 당대 신여성의 등장과 관련이 깊었다. 젤다는 이러한 종류의 여성, 특히 그것의 미국적 변종을 ‘신세대 말괄량이 여성’으로 불렀는데, 이 새로운 여성들은 흥미삼아 남자들과의 연애를 즐겼으며, 멋진 몸매를 과시하기 위해 노출이 심한 수영복을 입었다. 이들은 또한 화장품을 마음껏 사용했으며 점잖음이나 진지함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피츠제럴드는 중성적으로 잘생긴 외모와 작가로 성공하겠다는 열망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주변의 양갓집 규수들에게는 근육질의 몸도 없고 집안의 명망도 재산도 없는 서생으로 비칠 뿐이었다. 집안이 부유하고 정숙함을 미덕으로 여기면서도 ‘누구의 사모님’이라는 사회적 배경과 야심을 가진 양갓집 규수들과 달리 젤다는 집안 재산도 근근이 먹고사는 수준이고, 남자들을 안에서든 밖에서든 지배하고 휘두르려는 여자였다. 양갓집 규수 지너브러 킹에게 실연당했을 당시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일기장에 킹의 손수건을 붙이고 그 아래 ‘한때 마음을 사무치게 했던 이야기의 종결’이라고 썼다. 그러나 이것은 종결이라기보다는 서곡이었다. 젤다야말로 접근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쟁취하기 위해 분투하게 만드는 새로운 이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젤다와 스콧은 둘 다 그들의 부모를 무시하거나 부정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젤다는 자신의 아버지를 이전 세기의 완고한 가치를 옹호하는 구시대 유물로 생각했다. 겁 없이 면전에서 아버지를 모욕할 정도였다. 피츠제럴드는 저녁 식사 초대로 세이어 씨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젤다가 식사 도중 아버지를 매우 화나게 해 세이어 씨가 벌떡 일어나 손에 나이프를 든 채 젤다가 앉아 있는 쪽으로 쫓아갔던 일을 회상한 적이 있다.


젤다에게는 사회적 형식에 의해 강제되거나 순화되지 않을 본질적으로 야생적인 측면이 내재되어 있었다. 비순응성의 측면에서는 사랑의 도피 직전의 프리다보다 오히려 젤다가 더 예측불허였다. 두 여인 모두 적절성이나 관례에 대한 지침과 거리가 멀었지만 프리다가 그로스 같은 예비 경험을 겪고 나서야 적극적으로 변화한 데 비해 젤다는 천성이 반항아가 아니었을까. 젤다와 같은 길을 갈 뻔한 어머니 미니가 늘 딸을 감싸기도 했으니 말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젤다와 피츠제럴드는 운명적인 한 쌍이었다. 피츠제럴드처럼 젤다도 자기 자신을 낭만적으로 신화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비 사위에 대한 젤다 아버지의 반대는 더욱 피츠제럴드에 대한 젤다의 열정을 부추겼다. 1937년 출간된 그녀의 소설 『나를 위해 왈츠를 남겨 주세요』에서 젤다는 피츠제럴드를 데이빗 기사, 즉 몽고메리의 답답한 관습에서 자신을 구해 줄 낭만적 기사로 불렀다. 남편 피츠제럴드가 소설을 써 내려가듯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있음을 감지했던 것이다. 피츠제럴드의 작가 인생이 말년에 가까울 무렵 정신병원을 전전하던 젤다가 집필한 작품임을 고려하면 단순히 대작가의 뮤즈라 하기엔 동시대 사람들의 예상 이상으로 그녀는 영리했다.


『위대한 개츠비』, 『밤은 부드러워』 등 피츠제럴드의 대표작이 지닌 생생한 현장감과 묘사는 많은 부분 젤다의 일기장과 편지, 그리고 20대의 가장 선정적인 셀럽 부부의 알코올과 기행으로 점철된 사교 경험에 신세를 지고 있다. 문제는 피츠제럴드의 사상이 다소 마초적인 데 있었다. 『아름다운 저주 받을 자들』의 여주인공 글로리아 패치의 어린 시절은 ‘언제나 가능한 초상의 시간을 즐기려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미모로 먹고 사는 여자’의 그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그 모델이 젤다임은 자명했다. 발표에 맞춰 피츠제럴드는 〈뉴욕 이브닝 월드〉와 인터뷰를 했는데, 거기서 그는 글로리아를 미국 여성의 대표상으로 언급하며, 모든 미국 여성을 남자를 지배하는 거머리로 비유하는 실언을 하기도 했다.


프리다처럼 젤다 역시 자신의 이야기가 작품화되는 것에 대해 사진이 찍혀 자신의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꼈다. 주체적인 무언가를 늘 열망하던 젤다는 피츠제럴드의 작업을 일종의 예술적 강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피츠제럴드의 감상은 냉담했다. 부부싸움 중 서른 살이 가까운 젤다를 십대 후반의 예쁜 여배우와 비교하며 “적어도 저 여자는 자기가 가진 젊음과 미모를 가지고 뭔가 하려고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때부터 젤다는 무용 레슨과 소설 집필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십 대 시절의 방탕한 생활이 가져온 막대한 빚과 망가진 몸과 정신은 예술가 부부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말았다. 술의 힘을 빌어 피츠제럴드는 글쓰기에 요구되는 꿈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가 적지 않았다. 더 이상 알코올이 주는 환각으로도 영감을 얻을 수 없던 피츠제럴드는 헐리우드에서의 권유로 영화 각본을 썼지만 흥행에 실패하고, 그를 호의를 갖고 돌보던 언론인 그레이엄의 곁에서 급성 심장질환으로 마흔네 살의 나이에 요절한다. 폭음이 초래한 정신이상으로 젤다는 자신의 옷을 태우다 건물에 불을 지르고 빠져나오지 못한 채 정신병원에서 그녀의 삶을 마감했다. 『밤은 부드러워』는 피츠제럴드의 마지막 주요 장편 소설로 젤다의 정신병 경력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다.


로렌스의 폐렴이나 피츠제럴드 부부의 정신이상처럼 질병에 의해 예술가의 새로운 관점이 열릴 수 있다는 암시는 값싼 감상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질병에 의한 고통은 재생적인 제의의 성격을 띨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술가는 질병의 고통을 통해 세상의 고통을 자의식의 프리즘으로 흡수・확대하고, 엑소시즘의 형태로 표출할 수 있는 것이다.


<로렌스처럼 피츠제럴드의 작품에도 자신이 직접 사랑한 여인이 소설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지만, 그 여인은 작품의 소재가 되는 것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프리다 위클리와 젤다 세이어는 로렌스와 피츠제럴드가 내뿜는 작가로서의 매력에 빠져들었지만, 이 두 여인 모두 자신이 남편 못지않은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은연중에 믿고 있었다. 프리다는 전 남편과의 결혼이 진부한 실망에 불과함을 인지할 때까지 자각 없는 나날을 보냈으며, 최고의 신랑감을 찾도록 교육 받아 온 젤다로서는 피츠제럴드의 집안이 부유하지 않기 때문에 그와의 결합을 고려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프리다의 경우, 지적으로 막힘이 없이 해방된 상태이지만 의지할 전통은 거의 없었다면, 젤다의 경우는 기존 관습으로부터의 해방이 프리다보다 훨씬 덜 했다. 젤다는 여성 문제를 거의 항상 남자와의 관련 하에서 생각했다. 젤다는 여자는 기본적으로 남자를 방해하거나 하찮은 꿈과 안정에 취해 있는 남자를 자극해 잠에서 깨우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을지 모른다.> - 『열정적인 너무나 열정적인』 ( J. Tytell 著, 장경렬, 윤혜준, 강규한, 전수용, 이철 譯 ) p. 202~203


이제 『욕망의 로맨스』로 돌아가 보자. 벤슨 부인은 남의 집 침대에서 남편과 운우의 정을 나누고 열다섯 살 소년 찰리에게 섹스를 가르치는 유부녀이다. 남편 벤슨 씨가 장기 출장을 간 틈을 타 찰리와 매일같이 질펀한 밀월을 즐기고, 그 사실을 친구 에거튼 부인과 편지로 공유한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는 품행 문란으로 동네방네 욕먹을 일이었겠지만 어느 의미에선 사실 그녀는 시대를 앞선 신여성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 벤슨 부인의 사상과 관능적 본성이 담긴 편지를 조금 인용해보도록 하자.


<너와 나같이 본능에 솔직한 여자들은 절대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결혼하고 싶어 해서도 안 돼. (…) 너나 나나 모두 완전히 순진한 처녀라고 말하기는 힘들잖아. 손가락이나 다른 물건을 질에 넣어 이미 열렸으니까 말이야. 처녀막이 붙어있기에는 이것저것 너무 많이 해봤잖아. (…) 학창 시절에 진짜 남자 물건 한번 봤으면 했잖아. 남자아이들 힘없이 늘어져 있는 물건을 보고 뭘 하면 커질까 궁금해 하기도 했고 말이야. (…) 캐리야, 애널 섹스 해봤니? 안 해봤으면 당장 해봐. 우선 질에 먼저 섹스하고 해야 해. 그러면 그 옆의 항문도 흥분하거든. (…) 이 아이랑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어. 이미 여러 차례 황홀한 시간을 보냈고 찰리는 이제 선수가 다 됐어. 남편의 섹스도 끝내주지만 찰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 같아. 멈출 줄 몰라서 내가 말려야 해. 나를 애무할 때는 아직도 애 같지만 내가 가르쳤기 때문에 나한테 배운 게 전부야. 그래서 더 매력적인 거 있지. 어쩌면 좋니. 남편이 그렇게 기다려지지 않아. 그가 돌아오면 이 황홀한 순간들을 다시 할 수 없을지도 모르잖아. (…) 바로 답장해 줘, 캐리야. 이 이야기는 너와 나 사이의 비밀이야. 네 이야기도 길고 화끈했으면 좋겠다. 찾지 못해서 그렇지 너도 나처럼 외간 남자는 어떤지 궁금해하는 걸 알아. 하지만 나처럼 운이 좋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 숨기지 말고 다 말해줘야 해. 너와 나는 사랑과 육체의 향연을 모두 나누는 진실한 친구잖아.> - 『욕망의 로맨스』 4장, 벤슨 부인이 에거튼 부인에게 보내는 서신 中


<내 친구 엘리자베스가 이런 짜릿한 편지를 보내다니 정말 좋다. 꼼꼼하게 열두 번도 더 읽었어. 편지를 젖가슴에 숨겨놓고 틈날 때마다 천천히 읽으면서 달콤한 쾌락에 다시 빠지곤 했어. 너무 기냐고? 그런 가슴 떨리는 내용이라면 오십 페이지는 넘게 써줘야지! 섹스를 그렇게 기교 넘치게 묘사한 건 처음 봤어. (…) 우리 모두 섹스에 대한 호기심 넘치고 진짜 남자는 어떤지 너무 알고 싶었던 때 누구라도 애인이 생기면 서로 공유하자고 했던 그 오래된 약속 기억하지. 네가 묘사한 찰리 로버츠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그 약속이 생각났어. 내가 그 녀석을 공유하자고 하면 너는 화를 내거나 질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 (…) 남편과는 네가 경험한 색기 넘치는 관능적 기교를 시도조차 해 본 적이 없어. 기교면에서는 그냥 실망이야. 하지만 남편은 애정도 넘치고 내가 모든 걸 잘했으면 하는 거 같아. (…) 우리 이태리어 선생님은 포튜니오 백작 가의 롤렌디였잖아. 아주 잘생긴 데다 재미있어서 너랑 나랑 그 선생님을 정복해야겠다고 계획도 했었고. 그 계획은 초기 단계에서 불발됐지만 말이야. (…) 롤렌디 선생님이 나를 보자마자 아는 척할까 봐 두려웠어. 너한테는 비밀이 없으니까 롤렌디가 선생님이 되면 (그리고 그렇게 됐으면 하고) 믿을 수 있는 애인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 그날 이태리 어 수업은 시작도 못 했어. 일을 한 번 더 치렀거든. 롤렌디 선생님은 나를 완전히 채워주고 남을 정도로 온 정성을 다했어. 내가 아니 우리가 기대했던 섹스는 바로 이런 거라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어. (…) 너무 음란해서 남편과는 차마 할 수 없었던 체위란 체위는 다 해볼 수 있어. 흡족하게 일이 끝나면 택시를 타고 세인트제임스 거리에서 내린 후 걸어서 가게로 돌아가 이미 사 놓은 물건을 받아 들고 자동차로 가는 거야. 이렇게 하면 집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의심받을 염려가 없어. (…)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그가 형언할 수 없는 격렬한 환희로 나를 이끈다는 거야. 우리 선생님이랑 셋이 함께 해보자. 그때는 딴소리하기도 질투도 없는 거다. 아니야, 내가 네 신랑을 유혹해서 우리의 비행을 덮는 건 어때? 내 남편 너 줄게. 선생님도 너보다 더 매력적인 여자를 찾긴 어려울 거야.> - 『욕망의 로맨스』 4장, 에거튼 부인이 벤슨 부인에게 보내는 서신 中


고전 『안네의 일기』를 보면 은둔 생활 전 안네가 학교를 다니며 각별히 친해진 동성 친구에게 우정의 증표로 서로의 젖가슴을 만져볼 것을 권한 적 있다고 적고 있다. 20세기 초 유럽에 살던 유태인 소녀 안네의 사적 기록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빅토리아 시대 당시 소녀들의 관계성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은밀한 가운데 육체와 정신에서 상호간 존재의 전적인 동조를 방불케 하는 면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에거튼 부인과 벤슨 부인의 관계 역시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에 있다. 유부녀 두 명이 서로의 간통 상대와의 섹스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서간으로 공유하는 일은 이미 관습이 어쩌고저쩌고 할 차원을 넘어섰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결혼을 해선 안 되는 본능에 솔직한 여자’가 결혼을 해 버린 이상 본능을 충족시키는 외간 남자를 안는 건 예정조화였음을. 그러지 않았다가는 요세피네의 말마따나 ‘비루한 청교도 여편네’로 죽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실의 시선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죄악으로 규정되는 일탈은 문학의 시선에서는 제목 그대로 로맨스가 된다. 프리다와 젤다가 순종적이고 정숙한 아내로 남지 못하고 끊임없이 남편의 뮤즈에서 탈출하려 했듯, 엘리자베스 벤슨과 캐리 에거튼도 자신들의 본능으로 점철된 몸과 정신을 연주할 남자를 끊임없이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며 -­ 허영과 교양의 관계



이상이 관능 소설을 읽으며 내 나름대로 연계해 본 사색이었다. 깨끗함과 부정의 구분, 낯설게 하는 비체로서의 여체와 피의 사색을 통해 시대와 사회를 막론하는 관습성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관습과 규율을 전복하는 무도덕적이고 자기본위적인 자연의 사유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19세기말 20세기 초 예술가들의 보헤미안적 낭만주의를 더듬어 보기도 하였다.


독자 분들 중에는 이번 글을 읽고 ‘억지로 이어붙인 현학’이라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수 있다. 이 글은 소위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고, 그것의 가장 큰 원인은 필자의 한미한 지적 내공과 깔끔하지 못한 문장력에 있다. 관련 전문교육을 받은 적 없는 딜레탕트의 한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관심사는 예전부터 마이너 취향에 속했다. 그러다보니 소비자로서나 생산자로서나 나는 몇 안 되는 표본 케이스였다. 지금도 원숙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어릴 땐 분명 그러한 사실에 대해 일종의 선민의식도 있었다. 물론 그때도 ‘중2병’이라든지 ‘스노비즘snobbism’ 같은 개념이 인터넷상에서 생경하지 않았고, 그래서 별로 아는 사람이 없는 문화를 향유하는 데 대한 자부심만큼 소비 대상의 기호를 통해 나를 규정하는 데 대한 경계도 늦추지 않았다.



Image from 『인간, 공간, 시간, 그리고 인간』Copyright by Kiduk Kim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교양의 영역에 진입하려면 어느 정도의 비효용적인 수고는 불가피하단 것이다. 예를 들어 난 故 김기덕 감독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이미 알려져 있듯 그는 페르소나인 조재현과 더불어 여배우에 대한 성적 학대로 대중의 지탄을 받았다. 그의 영화들에 대해 세간에서는 ‘여성을 아주 하찮게 다루는 감독의 마초적인 시선이 드러나 있다’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영화를 통해 본 김기덕 감독은 오히려 여자를 두려워하고 있다. 김기덕 영화의 히로인들은 늘 최종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며, 상황에 수동적으로 휘둘리며 그저 소리 지르고 주먹을 휘두를 뿐인 남자를 포용한다. 단지 그 양상이 창녀냐, 성녀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 누군가 반박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조를 하려고 하든, 반박을 하려고 하든, 김기덕의 작품군을 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작품이나 작가가 지닌 난해함이든 불쾌함이든 그 진입장벽에 부딪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는 말이다. 물론 오늘날 서가에는 교양 분류 책장이 따로 있고, 소비자들은 그 이상으로 콘텐츠별로 자신의 취향이 어느 분류에 들어가며 어떻게 자료를 검색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교양을 위해 어느 정도의 허영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우리가 ‘예술’이라 상정하는 분야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에게 낯설면서, 입문 지침이 미비하고, 그것이 당장 실용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무엇이든 교양으로서의 담론의 영역이 될 수 있다. 그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감상을 말하려면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비실용적인 대상에 개척자 정신으로 무장하고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일말의 허영과 더불어 내가 강조하고픈 덕목은 ‘표현’이다. 표현은 세계와 대화하는 것이며, ‘나’를 드러내는 것이다. 허영을 발휘해 얻은 대상을 표현하는 ‘나’는 하나뿐인 인간상이지만, 그 행위로써 세계에 펼쳐지는 인간의 삶은 무궁무진하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런 생각을 갖고 글을 써나가려 한다.





참고 문헌



『Josefine Mutzenbacher oder Die Geschichte einer Wienerischen Dirne von ihr selbst erzählt』 Anon. 著

『Romance of Lust』 Anon. 著

『Purity and Danger』 M. Douglas 著, 유제분 譯

『Power of horror』 J. Kristeva 著

『La Philosophie dans le boudoir』 D. A. F. Sade 著, 정해수 譯

『Passionate Lives』 J. Tytell 著, 장경렬, 윤혜준, 강규한, 전수용, 이철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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