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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Mar 22. 2022

사랑이 좌절될 때

프랑수아 코페의 『앙리에트』와 『젊음의 로맨스』

Image from 『Love Affair』Copyright WARNER BROS. 1994 All Rights Reserved



들어가며



남녀 간의 사랑에 난이도가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보통은 서로의 신분 차이, 성격 차이, 상대에 대한 호감의 차이 등으로 점점 인내하지 못하거나 시작조차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요즘 시대에는 ‘썸’이란 단계를 통해 상대와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가계약을 치른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간 보는 거다. 그를 통해 시뮬레이팅한 사랑의 양상이 험난하리라 예측하면(난이도가 높다 예상되면) 썸을 해제한다. 거꾸로 (대체적으로 외적 조건이나 얕은 단계의 프로필로 미루어)해볼 만하다 싶으면 비로소 연인으로 발전한다. 타산적인 보신주의가 한껏 느껴진다.


요즘은 픽션조차 개연성 떨어지는 난이도가 높은 사랑 같은 건 시청자의 피로감을 높일 뿐이라고 생각하는지 만만한 상대끼리 꽁냥대는 수준에서 그친다. 역경을 이겨낸 주인공과 같이 눈물을 흘리는 카타르시스는 ‘아프고’, 이미 현실에서 충분히 아픈 마당에 화면 속의 쟤의 승리를 보는 건 페이스북과 인스타의 ‘가진 자’들을 보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제는 역전의 카타르시스를 대리만족하는 단계도 지나고, 자신이 확실하게 이룰 수 있는 소소한 형태의 성취를 얻고자 한다.


분명 사랑이든 일이든 뭐든 인생에는 성공의 장면보다 실패의 장면이 압도적으로 많다.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선 타인의 승리만큼 나의 패배가 있다는 극단적이고 냉소적인 견지를 내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실패를 의연하게 마주할 수 있는 용기다. 지금 이 사랑이 끝나도 나의 인생은 계속된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는데, 이를 ‘다들 힘들게 산다(그러니 너 혼자 불행하다고 불평하지 마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보단, 비극이란 인간의 숙명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각자의 인생을 아름다운 인간찬가로 얼마든지 변모시킬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프랑수아 코페는 19세기말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로, 그의 문장은 젊은 연인들의 사랑이나 가난의 애처로움 같은 대중의 담백한 일상에 집중하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그 중 소설 『앙리에트Henriette』『젊음의 로맨스Romance of Youth』의 주인공들을 통해 사랑의 좌절을 거쳐 발휘되는 영혼의 빛남을 엿보고자 한다.



『앙리에트』



바깥에선 명망 있는 군인이자 애국자였지만 집에서는 가정에 무관심한 주정뱅이였던 베르나드가 마흔 두 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젊고 아름다운 베르나드 부인은 하루아침에 미망인이 된다. 십오 년 전 집안의 안정과 아버지의 노후를 위해 어린 나이에 고향 코르시카를 떠나 파리에 온 베르나드 부인은 남겨진 재산만으로 어린 아들과 단둘이 버텨나가야 하는 현실에 맞닥뜨린다.


처녀 시절의 미모를 간직하고 있던 베르나드 부인은 얼마 뒤 보리스 대령의 열렬한 구애를 받는다. 그의 인품과 덕성, 지위와 재산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 아르만드를 지켜주고 길러내기에 충분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대령을 낯설어하는 아르만드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녀는 생각을 고쳐먹고 대령의 청혼을 뿌리친다. 이날 부인은 평생 재혼하지 않고 혼자서 아르만드를 길러내겠다고 결심한다.


어머니의 지성과 미모를 물려받은 아르만드는 훌륭하게 성장하여 법학 전문학교에 다니는 예비 엘리트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르만드는 집안의 침모 일을 하게 된 처녀 앙리에트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앙리에트는 아르만드만큼 빼어난 외모를 지닌 밝고 화사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베르나드 부인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친척 아주머니와 단둘이 살며 허드렛일로 생계를 꾸리는 앙리에트를 못마땅해 했고, 아르만드는 아들의 연애 문제에 한없이 차가운 어머니에 마음 아파한다.




그리고 그녀가 손에 든 이 편지 – 영국 공원에서 떠낸 모래에서 발견한 두꺼비 같은, 사람들 마음 상하게 하는 편지 – 는 잡화점에서 산 종이에 휘갈겨 쓰여 있었다. 글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 수준의 조잡한 편지는 진심을 숨기는 데 서툰 그녀의 입에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중 돌연 아르만드가 팔에 학생용 파우치를 낀 채, 눈에는 아름다운 젊음의 불꽃이 빛난 채 태평하게 들어왔다. 어머니를 보자마자 그는 놀람과 그리움에 끌어안을 듯 다가가며 외쳤다.     

“저 왔어요, 엄마!”     

그러나 베르나드 부인은 매우 창백한 얼굴로 훌쩍이며 일어섰다. 책상에 앙리에트의 편지를 던지고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들에게 말하는 목소리는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쇠를 긁는 듯한, 모욕감과 분노로 충만한 목소리였다.     

“보이기에 읽었다.”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앞으로 또 다시 네가 어울리는 계집의 편지가 방에 굴러다니지 않게 신경 쓰려무나.” 그리고는 거친 숨을 토하듯 내뱉었다.     

“몹쓸 년 같으니.”     

부끄러움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채 얼어붙은 아들을 내버려두고 화가 난 부인은 방문을 쾅 닫고 나갔다.




흔한 이야기다. 홀몸으로 아들을 키우면서 보통 이상의 감정을 투영한 끝에 장성한 아들의 연인에게 질투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어머니.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들은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면서도 마음이 가는 여자를 놓지 않는다. 아르만드와 앙리에트가 서로의 마음을 애절하게 고백하는 이하 단락은 요즘 연애 소설에 견주어도 꿇리지 않을 정도로 감성적이다.




그리고 그는 굳이 자신의 팔을 그녀에게 건넸다.     

앙리에트는 그를 붙들었다. 그녀는 기절할 것처럼 기뻤다. 속삭이면서 앙리에트는 자신의 비밀을 고백했다.

“행복해요! 옆에 있는 게 늘 생각하는 단 한 사람, 당신이라니!”

가련한 아이 같으니! 십오 분 동안 둘은 스스럼없이 서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의 무구한 진심 속에서 어느새 고백을 주고받았다. 행복으로 넋이 나간 채 그들은 모르는 거리를 지났다. 이윽고 두 사람은 몽파나세 거리에 다다랐다. 여러 행인들이 지나다니고 있었고, 그들은 이 잘 어울리고, 실로 젊고도 기품 있는 선남선녀 단짝을 돌아보며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정작 두 연인은 사람들의 친근한 환희의 품 안에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쑥스러움과 어색함의 나날들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앙리에트는 말했다. “그 동안 난 살아 있는 게 아니었어요. 당신이 작은 살롱을 방문할 때, 열리는 문의 손잡이를 볼 때의 찰나를 제외하면 말이에요. 그게 당신이란 걸 알았다고요. 아, 당신은 아나요?”

“그게 가능한 일이오? …난 아무것도 몰랐단 말이오!”

“아! 저는…” 거의 동시에 앙리에트가 아주 조금 장난기 띤 눈으로 말했다. “저는 당신이 자주 제 옆을 지나가는 걸 알았어요.”

“그러니까…” 아르만드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의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 “그런 순간이 영원히 이렇게 반복될 수도 있었구려. 오늘 저녁에 우리가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으면 말이오. 하지만 운 좋게도 그런 일들은 모두 끝났소. 끝났단 말이오! 당신을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오!… 헛되게도 나는 그대에게 말 한 마디 없이 지나치려 했소. 너무나도 겁쟁이었소! 하지만 당신의 눈을 똑바로 보고 해야 할 말이 있었소. 당신은 행복해져야 하오. …이제 우린 서로를 알게 되지 않았소. 앞으로 또 만나야 할 겁니다, 자주, 가능한 한 자주 말입니다! …그리고 나면 내 연인이 되어 주겠소?”

회의주의자가 보면 뻔뻔하다고 할 소녀의 익히 알려진 솔직함조차 아르만드에겐 사랑스러웠다. 작고 낮은 목소리로 그녀는 대답했다.

“…제가 바라던 바예요!”




얼마 후 아르만드는 앙리에트와 그녀가 친척 아주머니와 단둘이 사는 단칸방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두 사람은 자신들만의 보금자리를 갖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아르만드는 절친 테오도르를 통해 자신의 장학금으로 앙리에트와 자신이 지낼 수 있는 방을 구하고, 앙리에트는 베르나드 부인의 눈이 미치지 않는 다른 마을에 일자리를 얻는다. 이전까진 거의 밤에 외출을 하지 않던 아르만드는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꾸며내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새로운 둥지에서 행복한 나날만 계속될 것 같았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아들의 석연찮은 변화를 베르나드 부인은 민감하게 감지했고, 이윽고 모든 걸 알고야 말았다. 그녀는 아들이 자신의 연인을 위해 거짓말까지 했다는 사실에 배신감과 질투심이 치밀었다. 어느 날, 일상처럼 하던 모자母子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결국 일이 터진다.




이 집의 저녁식사는 두 사람에겐 언제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일상 소사를 이야기했고, 다음 날의 계획을 세우고, 달콤하면서도 확신에 찬 대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날은 분노와 수치라는 보이지 않는 두 손님이 가족의 식탁에 함께하고 있었다. 모자는 앞에 놓인 음식을 거의 건드리지 않았으며, 서로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작은 방으로 돌아왔다. 너무 일찍 켠 두 개의 램프가 길었던 낮의 슬픈 황혼 속에서 가냘프게 빛나고 있었다. 시종이 커피를 대령하고는 다시 둘만 있게 되자, 베르나드 부인은 갑자기 침묵을 깨고 아들에게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저녁에 회의가 있지 않니?”

사실 그는 앙리에트와 만날 약속을 했었다. 혼란에 빠진 그는 그늘 속에서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그러자 베르나드 부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울부짖었다.

“가거라!” 그녀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네 계집을 찾아가거라! 이젠 더 이상 거짓말할 필요도 없다. 거짓말 때문에 저열하게도 나를 속이지 않았느냐! 하! 그놈의 잘난 사랑! 그년이 너를 벌써 비열한 사람으로 만들었구나! 그 가증스러운 년이 널 어떻게 만들지, 얼마나 네 존재를 지배할지 궁금해서 오한이 드는구나! 그년한테 가려무나, 아들아. 붙잡지 않으마.”

부인은 그러나 아들의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말을 멈추었다.

“우는 거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청년은 어머니의 발 앞에 엎드려 두 손에 입을 맞추고 눈물을 떨어뜨렸다.

“용서하세요, 사랑하는 어머니.” 그가 속삭였다. “아프게 한 걸 용서하세요… 하지만, 저는 그녀를 사랑합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부인이 아들에게 방금 전까지 품고 있던 연민의 감정은 그치고 말았다.

“사랑한다고!” 부인의 어조는 거친 조소로 떨리고 있었다. “우리 집 재봉사를 사랑한다고! 가련한 것아.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냐. 미치지 않고서야! …한때는, 그래, 한때는 내가 멍청하게도 너를 믿었다. 네가 순수하고 떳떳하게 젊은 시절을 보내고 나면 내가 짝지어주는 아름답고 어린 여자와 결혼할 거라고 말이다. 인정하마, 내 환상이었다. 네가 오늘 그걸 잔인하게 부셔주는구나.

그래도 내가 분별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성장통이라고, 정념의 폭발이라고 애써 이해할 작정이었다. 스무 살은 다 그런 거라고, 나 역시 겪어 본 시기라고… 그런데 너는, 너는! 처음으로 좋아한 여자란 게, 이런 잡일이나 하는 별로 예쁘지도 않은 계집이라니! 정말이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역겹구나! …됐다! 어머니로서, 정직한 여인으로서 내 존엄을 내려놓아 주마. 이런 비열한 행위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으마. 네가 원한다면 이 문제에 대해 두 번 다시 말을 나누지 않을 거다. 흥분해서 너를 나무라는 것조차 내 도리를 넘어선 짓이었다.

네가 잘못을 시인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길 빌겠다. 그때 나보다 덜 고통스럽길 빌겠다. … 내가 이런 도둑고양이 년에게 동정을 베풀었다니! 이런 잔꾀나 부리는 딱한 년을 보호해 주고 내 집에 머물게 해 줬더니 내 아들을 홀려? …아르만드, 이건 안 된다! 이건 제정신으로 할 말이 아니다! 네가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게냐? 얼마 안 가, 아마 내일이라도 조금만 반성하면, 증오스런 변덕이 지나가면, 감히 그년을 사랑한다고 내게 말한 게 부끄러워질게다!”

이 얼마나 못된 여인인가, 딱하기 짝이 없다! 그의 사랑을 왈가왈부하며 공격하다니 이 얼마나 큰 잘못인가! 이미 청년은 어머니의 무릎에서 떨어져 있었다. 더 이상 아이가 칭얼대듯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지도 않았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는 일어났다. 그리고는 어머니에 대한 존중을 담으면서도 메마른 눈빛과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부탁합니다!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어머니는 그 불쌍한 아이에 대해 몰라요! 그 아이에게 이러시는 건 옳지 않아요! …그 아이를 지키려면 이렇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그 아이의 가장…”

그러나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베르나드 부인은 모욕적이고 끔찍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몸을 꼿꼿이 세우고는 아들을 노려보았다. 거만하고 도도한 눈동자에는 어둠과 적의가 가득 차 있었다.

“그딴 말 하지 마.” 그녀는 명령했다. “알아들었어, 당신?” 생전 처음 어머니에게서 듣는 ‘당신’이란 말은 비수가 되어 청년의 가슴에 꽂혔다. “그딴 말 하지 말라고! 당신 내 예상보다 훨씬 얼간이에 장님이었어! 그딴 자부심은 당신 가슴에나 품고 내 앞에서 사라져. 분명 그 계집이 기다리고 있겠지. 신사가 숙녀를 기다리게 하면 안 되잖아?”

아르만드를 상처투성이로 만들고는 베르나드 부인은 침실로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아주 오래 있었다. 심장이 가파르게 요동치고 머릿속에는 앙리에트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아무것도 아닌 여자, 아들의 순수함과 – 부인의 생각으로는 – 사랑을 가져가 버린 여자. 그리고 부인은 그 침모 소녀의 예쁘장한 용모와 부드러운 분위기와 타고난 기품을 떠올렸다. 그렇다! 꼬마 계집은 못생기지도, 상스럽지도 않았다. 그녀는 사랑받을만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자기본위적인 어머니, 한때 남편에게 경멸받던 과부의 마음에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앙리에트를 경쟁 상대로서, 연적으로서 미워하고 있었다.




이날 저녁의 일로 베르나드 부인과 아르만드 사이에는 씻을 수 없는 앙금이 남는다. 깊은 사랑이 등을 돌리면 깊은 증오가 된다. 세 사람의 일상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앙리에트와 아르만드는 꿋꿋이 사랑을 이어나갔고, 별 일이 없으면 베르나드 부인과 아르만드는 같이 식사를 했다. 그러나 그날 아르만드가 받은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위안이 되어준 건 삐뚤빼뚤한 글씨와 틀린 철자로 수줍게 연애편지를 건네는 앙리에트의 순수한 마음이었다.


전문학교의 학기가 끝나자 부인은 아들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코르시카로 휴양을 간다. 물론 진짜 목적은 어떻게든 두 연인을 떼어놓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안 그래도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아르만드의 몸과 마음은 앙리에트가 없는 낯선 땅에서 견딜 수 없었고, 그만 티푸스가 발병하고 만다. 베르나드 부인의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아르만드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닥쳐오고 있었다.




병세가 심각해지자 아들이 정말로 죽게 될 것을 부인은 실감할 수 있었다. 착란 증세는 계속되었다. 푹푹 찌고 울적함이 가득한 병실, 증기를 내뿜는 것 같은 고열과 끙끙 앓는 신음을 내며 약하게 몸부림치는 환자의 침상 옆에서 베르나드 부인은 하루 종일 두려움에 깨어 있었다.

특히 밤이 되면 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피곤과 고통에 절은 불쌍한 여인은 의자에 앉아 종종 등을 구부린 채 기도하곤 했다. 무엇보다도 눈앞의 위기에 처한 아들을 위해, 그녀의 어릴 적 기억에 깃든 모든 이탈리아식 헌신을 코르시카가 환기시켰다. 상 토마 다퀸Saint-Thomas d'Aquin의 여러 사람들은 아르만드에 대해 이야기했고, 레옹틴은 파리를 쉼 없이 뛰어다니며 모든 특별한 제단에서 특별한 성자들 앞에 태워진 양초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서약조차 9일 기도조차 아무것도 이루어주지 않았다. 간절한 순간에 베르나드 부인은 멍하니 교황이 축복했다는 묵주를 손가락 사이에 굴리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신에 대한 반감과 신성에 대한 모독으로 떨리고 있었다.

때때로 환자가 진정되면 병실은 장례식장처럼 밤길의 창백한 빛만이 겨우 비추었고, 어둡고 짙고 깊은 고요함이 맴돌았다. 선반 위 작센 산 시계만이 빠르게 똑딱거렸다. 똑, 딱, 똑, 딱, 그리고 베르나드 부인은 기계적으로 그를 들었다. 시간은 참으로 쏜살같구나! 초침은 숨이 차도록 달려간다, 맹렬하게 달려간다! 그 앞의 알 수 없는 종착지를 향해! 똑, 딱, 똑, 딱. 그들이 그토록 도달하려는 숙명의 시간은 무엇인가? 똑딱, 똑딱, 똑딱, 격렬한 기차처럼 질주하는 그들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자는 누구인가? - 죽음일까?

갑자기 베르나드 부인은 눈을 떴다. 아들이 살짝 움찔거렸다. 부인은 그가 가볍게 앓는 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다. 아들에게 몸을 기울이고는 걱정에 사무친 자세로 물었다.

“아르만드야, 기분은 괜찮으냐?… 목이 마른 게냐, 원하는 걸 말해주렴… 얘야, 제발!”

환자의 핼쑥한 얼굴의 턱수염은 까끌까끌했고, 콧구멍은 쪼그라들어 있었다. 아무것도 응시하지 않은 채 뜬 눈은 고열로 인해 비대칭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착란에 빠진 채 간신히 알아들을 정도의 중얼거리는 소리로, 여전히 온화함이 남아 있는 한숨과 같은 소리로 그는 한 여인의 이름을 내뱉었다.

“앙리에트!”

베르나드 부인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외침을 억눌렀다. 앙리에트! 그는 아직도 그년의 앙리에트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악몽 가운데서도 또 그 계집을 만나고 있었다, 그 고통 속에서도 그 계집을 부르고 있었다! 만약 그가 죽으면 그건 그년 때문이다, 그렇다! 이 불쌍한 아이의 제정신을 앗아가 버리고, 미치게 만들고, 사랑으로 소진시키고, 힘없이, 황폐하게, 텅 비게 해서, 끝내는 전염병에 걸리게 한 도둑고양이, 탕녀! 의사는 아르만드의 상태가 병이 자리 잡기 지나치게 적합했다고 단언했다. 열이 올랐을 때 그는 빈혈이었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이미 나았을 것이다, 치유되었을 것이다, 살았을 것이다! 이제 어머니는 죽어가는 아들이 그년의 앙리에트를 중얼거리는 것을 들어야만 했다! 그 계집이 아들의 열을 끓게 하는 게 아니겠는가! 빌어먹을 년! 아들을 죽게 한 암캐 년!




결국 아르만드는 코르시카에서 요절하고 만다. 아들만을 바라보고 산 베르나드 부인에게 이는 더할 나위 없이 절망적인 사건이었다. 실의에 빠진 부인은 매일 일과처럼 몽파나세에 있는 아들의 무덤에 헌화하러 찾아갔다. 그리고 일요일마다 무덤 앞에 새로운 꽃이 놓여 있는 걸 보았다. 보나마나 앙리에트가 놓고 간 것이 틀림없었다. 베르나드 부인은 분노가 일면서도 그녀를 가소롭다고 생각했다. 일 년도 안 된 연인의 사랑 놀음은 뱃속에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곁에 있던 모자의 연에 비할 바가 아니라며.


몇 주 안 되어 무덤 앞에는 새로운 꽃이 놓이지 않게 되었다. 부인은 그럴 줄 알았다며, 아르만드에 대한 사랑은 자신이 단연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혹을 앞둔 여인의 슬픔과 외로움은 여전히 사무치게 다가왔다. 이즈음 젊은 시절 자신에게 분명 마음이 있던 보리스 대령이 위로를 빌미로 또 다시 구애를 시작한다. 부인은 못 이기는 척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사랑에 대한 희망은 앙리에트에 대한 미움도 누그러지게 했다. 그렇게 대령 부인의 삶을 상상하며 결혼 예복을 만지작거리는 베르나드 부인에게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된다. 그것은 앙리에트가 보낸, 사실상 유서나 다름없는 편지였다.




5월 28일, 파리 넥케르 병원

베르나드 부인께


저는 넥케르 병원에서 투병 중입니다. 몸이 너무 약해져서 펜을 들지도 못합니다. 친절하게도 병실 옆자리의 사람이 제 말을 받아 적어 주었습니다. 만약 제가 죽게 되면, 네, 제가 죽을 경우에만 그녀가 이 편지를 부칠 겁니다. 그리고 그 순간은 머지않아 닥칠 것입니다.

저는 부인에게 고통을 안겨드렸습니다. 그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 않고 생을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들의 관계에 대한 부인의 진노와 불만은 아르만드에게서 전해 들었습니다. 저의 잘못을 시인합니다. 한때 부인께선 저를 당신의 집에 들이셨고, 정말 친절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제가 아르만드의 친구가 된 것은 그러한 신뢰를 욕보인 일일 것입니다. 부인께서 제게 매우 화가 나셨고, 저 때문에 심사가 불편하셨음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편지를 보시고 제게 자비를 베푸셔서 용서하시길 소망합니다. 슬프게도 저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의사가 말하길 간에 병이 생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르만드가 죽고 난 후 저는 살아 있는 느낌이 없었습니다. 진심입니다.

부인,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은 거짓을 고하지 않습니다.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맹세컨대 아르만드는 저의 첫 번째 친구이자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저는 곧 그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사랑 앞에서 저는 불쌍한 미친 여자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이상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말입니다. 하지만 장담컨대 그를 쥐고 흔들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의아할 지경입니다, 그는 정말로 다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저처럼 무지하고 단순한 여자친구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부인, 이제 그만 관용을 베풀어 주십시오, 저희들은 너무나도 어렸습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저희들의 관계가 오래 가지 않을 것을, 한 가정의 청년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의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 것을, 그렇기에 늦든 빠르든 부인께서 저에게서 아드님을 떼어놓으셨을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결국 전 운명에 순응했습니다. 부인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아르만드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악당 행세를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았을 것입니다. 구석에 몰려 외톨이가 되더라도, 젊은 시절의 소중하고 특별한 기억을 간직한 채, 적어도 아르만드가 아름다운 젊은 아내와 예쁜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할 거라는 생각으로 저를 지탱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스무 살의 나이에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입맞춤 한번 못 한 채. 저는 그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부인 집안의 지배인의 거처에서 전해 들었을 때 사신의 숨결이 저에게 불어왔습니다. 그 끔찍한 일 이후 제 심장은 얼음 속에 갇힌 것 같았습니다. 순식간에 몸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아르만드가 떠나고 두 달 뒤 연로하셨던 아주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저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일을 했습니다. 그래야만 했습니다! 기계처럼 몇 날 며칠을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일을 했습니다, 제 속을 갉아먹는 슬픔을 끌어안고. 유일한 위안은 일요일 아침마다 아르만드의 무덤에 꽃을 들고 가는 일이었습니다. 참, 부인의 꽃 옆에 제가 둔 꽃을 남겨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조금이라도 저에 대한 화가 누그러지셨다고, 이미 저를 거의 용서하셨다고 희망을 갖기조차 했습니다. 결국 저는 몸이 매우 나빠졌습니다. 더 이상 일을 할 수도 없었고, 의지할 곳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곳에서 고통 속에 보낸 첫 번째 일요일 이래 부인은 제자리에서 시들어가는 똑같은 꽃다발만 보셨을 겁니다. 제가 아르만드를 잊었다고 믿으시겠죠! 이것이 이 편지를 쓰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이젠 아시겠죠, 죽어가는 제 입술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걸.

부인. 저는 어제 고해성사를 갔다 왔습니다. 이 편지를 대필해주는 사람이 신앙이 있어 제게 교구의 성직자를 만나기를 권했습니다. 처음으로 다녔던 교회 이후 전 교단에 돌아간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곳의 성직자들은 다소 저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제게 오신 분은 제게 매우 조용히 말씀하셨고, 제 죄가 용서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부인께서도 그처럼 친절한 분이 아니신지요. 제가 당신의 아들을 너무나 사랑한 데 대해 화를 내지 않으시겠죠.

안녕히 계십시오, 부인. 그리고 감히 한 가지 더 빕니다. 몽파나세에 가신다면 묘지 입구에서 제철의 꽃다발을 사 주십시오. 더도 말고 2센트짜리면 됩니다. 그것을 부인의 꽃과 함께 아르만드의 무덤에 헌화해 주십시오. 제가 그랬듯 말입니다. 라베 씨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천국에서 만날 거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걸 알겠습니까. 저는 생각합니다, 관 속에 있는 가엾은 아르만드는 여자친구가 남긴 기억을 받고 여전히 행복할 거라고 말입니다. 너무나도 관대하신 부인. 저의 마지막 소망을 기억하시고 이루어 주십시오.


당신의 충직하고 겸손한 하녀

앙리에트 페린 올림


편지를 다 읽은 베르나드 부인은 눈물을 터뜨렸다. 유월의 태양이 한순간에 창백해졌다! 이 화창한 날이 이렇게나 음울하다니! 소파 위에 열려 있는 상자 안, 라일락 가지로 장식한 예식용 모자! 내일 당장 신부가 될 생각에 빠져 있던 부인은 그걸 보고 오히려 민망함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분명 그녀는 앙리에트를 용서했고 지금도 그렇다! 분명 그녀는 죽은 앙리에트의 소망을 이루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앙리에트 페린의 서명에 고정되어 있었다. 죽어가던 소녀가 자신의 손으로 쓸 수 있던 단 두 어절이었다. 아르만드의 어머니는 억누르듯 낮은 목소리로, 원한과 질투를 가득 실어 중얼거렸다.


“내 아들을 나보다 그 계집이 더 사랑했다니!”




일전에 나는 『서브컬처와 철학 (4)』( https://brunch.co.kr/@erasmut/23 )에서 키르케고르의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다룬 바 있다. 심미가의 친구이자 유부남인 판사는 결혼 생활의 영속성과 성실성에서 오는 윤리적 미덕을 예찬하며, (선택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인간의 결단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앙리에트는 언젠가 끝날 사랑임을 알면서도 아르만드에 대한 성실함을 지켰다. 외톨이가 되고 중병에 걸려서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천국에서 다시 만나리라’는 막연함보다는 땅 속에 잠들어 있는 아르만드가 기뻐하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실천했다. 가장 달갑지 않은 상대인 베르나드 부인에게 저주를 퍼붓기보다 용서를 구하며 자신이 아르만드를 위해 하던 일을 대신 해줄 것을 부탁했다.


우리는 이러한 앙리에트의 모습을 두고 비범하다고 쉽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범함이 드러나는 건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거나 물리적 제약을 넘어선 사건을 통해서만이 아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박한 성품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쉬워 보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다. 베르나드 부인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남겨진 사람들이 살아나가기 위해 열락을 구하는 것을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지극히 인간적이고 건강한 양태라 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인간적인 열락조차도 내려놓고 누군가를 사모하는 결단은 분명 니체가 말하는 초인übermensch의 그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까. 윤리와 이성을 넘어선 무언가로서 말이다.



『젊음의 로맨스』 



주인공 아메디 비올레트의 유소년기는 따스함으로 가득하면서도 몇 페이지 정도가 누락되어 있다. 어머니 루시를 여읜 슬프고도 충격적인 사건 때문이다. 상처喪妻한 비올레트 씨는 절친한 이웃 제라드 부부의 호의를 받아들여 자신이 관청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아메디가 제라드 가의 딸들과 함께 보살핌을 받게 한다.


비올레트 씨의 아버지는 나라의 근간으로 민주주의가 자리잡아가는 시대 상황을 읽고, 자신은 물론 부인에게도 삯일을 시키며 사려 깊고 똑똑한 아들에게 비싼 신식 교육을 시켰다. 그를 보고 자란 비올레트 씨는 홀아비가 되었을지언정 자식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빨리 아메디를 학교에 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아메디는 더할 나위 없이 제라드 가에 잘 녹아들어 있었다. 특히 둘째 딸 마리아는 언니 루이즈보다 나이가 가까운 아메디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조각가인 제라드 씨의 집에는 아이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림과 기구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메디에게는 이곳이 배움의 장이자 놀이터였고, 이때부터 이미 남다른 미모의 마리아를 아메디는 이성으로 느끼고 있었다. 제라드 부인은 퇴근하고 아들을 데리러 와 자신에게 황송해하는 비올레트 씨를 만류했다.




“정말로, 내가 보장해요. 아메디는 조금도 우리를 방해하지 않아요. 학교를 바로 보내지 말고 조금만 더 있어 봐요. 마리아가 옆에서 부추기지만 않으면 – 내 딸이지만 사내애보다 더 해요 – 아메디는 늘 그림을 보고 있어요. 루이즈가 말하는데 매일 두 쪽씩 우화를 소리 내어 읽고, 어제는 바깥양반이 걔가 들려주는 은혜 갚은 코끼리 이야기를 재미있어하더라고요,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학교는 천천히 보내도 돼요.”




그러나 비올레트 씨는 심사숙고 끝에 아메디를 집 근처의 바티폴드 기숙학교에 보내게 된다. 점심을 학교에서 해결할 수 있고 제라드 자매와도 여전히 놀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하지만 학교란 곳은 세상의 놀랍고 재미있는 사실들을 딱딱한 교보재와 천편일률적인 교수법에 가두어 주입하는 곳이었고, 아메디는 학교보다는 혼자만의 독서와 루이즈의 피아노, 마리아와의 놀이, 그리고 제라드 씨의 작품들을 통해 영혼을 풍성하게 해 나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는 시인이 되는 꿈을 꾸게 된다.


세월이 흘렀다. 비올레트 부자父子의 절친 제라드 부부도 어느새 중장년의 모습이 되어갔다. 제라드 씨의 얼마 안 남은 머리칼은 희끗희끗해져 불그스름한 얼굴과 퍽 잘 어울리게 되었다. 비올레트 씨는 회색 머리숱의 힘이 약해지고 여러 가지를 잊기 시작하며 스스로 쇠퇴해감을 느꼈다. 아내 루시를 잃고 홀로 버틴 슬픔과 고독함을 독한 압생트 술로 달래며 그의 몸과 마음은 더더욱 피폐해져갔다.


아메디는 어느새 열여덟 살이 되어 헨리 4세 국립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모리스 로저라는 친구를 사귀게 된다. 그는 곱슬한 금발에 솔직함과 탁월함의 오라를 두른 잘생긴 청년이었다. 아메디는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모리스에게, 자신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가족이나 다름없는 제라드 가(특히 든든한 누나 루이즈와 소꿉친구를 넘어 한 명의 여인으로서 마음속으로 사모하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하며 친교를 쌓게 된다.


순직 군인의 아들이자 명문 로저 가의 적남이었던 모리스는 하인이 딸린 저택에서 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메디는 로저 저택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할 것을 권유받는다. 자기가 갖지 못한 외모, 성격, 재산, 그리고 어머니가 있는 모리스를 내심 질투하던 아메디는 부담스러웠으나, 거절을 못하게 하는 모리스의 밝은 분위기에 마지못해 승낙한다.




아메디는 1845년식 긴 자락의 코트를 입고 사자 두상 두 개로 장식된 칼띠를 두른 잘생긴 포병 중위의 초상화에 곧바로 눈이 이끌렸다. 그림 속에서 행진용 의상을 입은 장교는 사막 한가운데서 야자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우리 아버지야.” 모리스가 말했다. “나랑 닮지 않았어?”

둘은 경악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따뜻하고 상냥한 웃는 얼굴에 곱슬머리 금발까지. 감탄하는 아메디의 뒤에서 똑같은 말이 메아리처럼 들렸다.

“모리스는 아버지를 닮았죠, 그렇지 않나요?”

로저 부인이 조용히 들어왔다. 아메디는 부인을 바라보았다. 기품이 느껴지고, 높은 콧대를 가졌고, 희고 깨끗한 용모를 한 부인은 슬픈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부인은 아들을, 그리고 남편의 초상을 번갈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아메디는 모리스가 어머니의 우상임을 알게 됐고, 미망인의 시선에 매료되었다. 회색 머리칼과 너무 울어 붉게 튼 눈꺼풀을 한 그녀는 젊은 시절엔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메디는 저녁식사 초대에 대한 감사 인사를 더듬더듬 말했다. 부인은 아메디에게 말했다.

“아들이 그러더군요. 친구들 중에서 가장 아끼는 게 아메디 군이라고요. 아들에 대한 호의, 나야말로 고마워요.”

그들은 자리에 앉아 담소를 시작했다. 로저 부인이 말할 때마다 나오는 ‘우리 아들… 우리 아들 모리스’에는 자부심과 자상함이 담겨 있었다. 아메디는 그런 어머니를 둔 친구의 삶이 얼마나 행복할지 실감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슬픈 유년기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서글픈 저녁 식사시간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수년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메디는, 술에 취한 채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버지의 눈과 마주치지 않고자 접시에 코를 박다시피 해왔다. 모리스는 로저 부인의 자식 자랑을 잠자코 들으며 자신의 어머니를 행복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아메디는 그를 보고 있자니 소소한 슬픔이 느껴졌다. 마침내 모리스는 어머니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맞아요, 엄마. 저는 완벽한 불사조예요.”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유쾌한 듯 끌어안았다. 이때 미모의 하녀가 손님의 내방을 알렸다.

“란츠 중령과 영애분들께서 오셨습니다.”

로저 부인은 허둥지둥 일어나 손님을 맞았다. 공병대의 란츠 중령은 로저 대령이 마멜론 베르트의 참호에서 전사할 당시 옆에 있었다. 검정 벨벳으로 덮은 가슴받이가 있는 제복을 입은 그는 젊은 시절에는 아마 보기 좋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에 승진하여 사무실로 가서는 자와 컴퍼스가 널린 긴 책상에서 계획서와 설계도의 산과 씨름을 하는 사이 폭삭 삭고 말았다. 솎아낸 새처럼 생긴 두상, 황제와 같은 잿빛의 우울한 수염, 단추로 질끈 여민 군용 외투를 더욱 왜소하게 만드는 구부러진 어깨… 그의 용모 어디에도 군인다움이 없었다. 불쌍한 중령의 머릿속은 그때그때의 기분만으로 가득했다. 그는 재산도 없었다. 적령기의 딸이 셋 있을 뿐이었다. 일 년에 두세 번 공식 석상에서 입을 때를 빼면 그는 자신의 제복을 장뇌를 동봉해 보관했다. 매주 일요일 저녁 중령과 같이 정찬을 드는 로저 부인은 남편의 이 훌륭한 절친을 마음에 들어 했다. 같이 초대한 세 영양은 서로 정말 똑같이 생겼다. 오똑 솟은 코, 발그레한 안색, 작고 까만 구슬 같은 눈망울… 셋은 늘 조심스러운 옷차림을 했는데 한번은 누군가 본의 아니게 세 자매를 결혼식이나 축하 행사용 케이크 세 조각으로 비유한 적 있다.

그들은 식탁에 앉았다. 로저 부인은 우수한 요리사를 고용하고 있었다. 아메디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많은 양의 훌륭한 음식을 먹었다. 그것들은 제라드 아주머니의 소소한 튀김 요리보다도 세련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그저 쾌적하고 멋진 저녁 식사일 뿐이었지만, 청년에겐 예상치 못한 기쁨의 발견이었다. 치장한 테이블보의 부드러움이 올려놓은 손에 전해졌고, 요리들은 식욕을 동하게 하고 또 충족시켰다. 다양한 맛의 와인은 꽃처럼 향기가 났다. 참으로 새롭고 기분 좋은 감동이었다! 미모의 하녀는 그것들을 신속하고도 조용하게 날랐다. 모리스는 부인의 맞은편에 앉아 우아하면서도 유쾌하게 정찬을 주관했다. 로저 부인의 창백한 얼굴은 모리스가 탁월한 본바탕에서 우러나오는 농담을 할 때마다 웃음으로 달아올랐고, 세 명의 처녀는 일제히, 조심스럽게 작은 소리로 웃었다. 애처롭기 그지없는 중령조차 어느새 졸지 않고 경청하고 있었다.

두 잔째 부르고뉴를 들이킨 중령은 활기가 넘치고 매우 재미있었다. 그는 크림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투가 중지되는 동안 적이었던 양군의 장교가 정중하게 담배를 교환했다는 기사도가 있던 전쟁이었다. 로저 부인은 재밌는 군인 기담을 듣는 아들의 얼굴이 흥분에 들끓는 걸 보고는 이내 우울한 안색이 되었다. 가장 먼저 그를 눈치 챈 건 모리스였다.

“진정하세요, 중령님.” 모리스는 입을 열었다. “엄마가 겁을 드셨어요. 제가 아직도 생시르 사관학교에 입교하고 싶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사랑하는 엄마, 침착하세요. 엄마의 바람대로 존경스럽고 순종적인 아들은 변호사가 될 거예요. 의뢰인을 안 받고, 남는 시간에 그림을 그리는 변호사요. 사실은 말과 검과 경기병 전대를 훨씬 더 좋아하지만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엄마를 더 이상 좌절시키지 않는 게 최우선이니까요”

그의 말에는 따뜻함과 상냥함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로저 부인과 중령은 온화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세 처녀 역시 패스트리를 베어 문 듯 무척 감동했다. 그들의 작고 까만 여섯 개의 눈은 모리스에게 고정되었다. 갑자기 온화해지고 부드러워진 처녀들의 시선에 아메디는 그들 모두 모리스에게 이성의 감정을 갖고 있음을 확신했다. 저 세 조각의 예쁜 디저트에 둘러싸여 선택할 수 있는 모리스는 행운아다, 아메디는 그렇게 생각했다. 

누가 이 매력적이고 단아한 모리스를 사랑하지 않겠는가, 누가 모리스보다 사랑받는 법을 잘 알겠는가! 




모리스는 아메디에게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 다정함까지 갖고 있었다. 그것은 아메디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비올레트 씨는 술에 절어 살았고, 연락이 되는 유일한 인척인 돌아가신 어머니의 삼촌 거프 씨는 이기적인 속물이었다. 이웃 제라드 일가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정 넘치는 사람들이었지만 가장인 제라드 씨가 자리에 누운 뒤 가난에 허덕이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제라드 씨가 세상을 떠나고 한 달 뒤 비올레트 씨는 아메디가 없는 사이 면도칼로 손목을 긋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힘든 시기에 절친 모리스는 로스쿨을 졸업한 기념으로 어머니와 유럽 여행을 떠나 있었다. 스무 살이 된 아메디는 이제 혼자서 두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우선 비올레트 가와 제라드 가의 집을 처분하고 값싼 아파트를 얻었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창작 활동에 몰두하고, 연재 지면에 시를 올리고 얼마 안 되는 원고료 대부분을 제라드 가에 썼다. 제라드 부인은 남편의 조각물과 그림 대부분을 처분하고 자신 역시 남의 집 바느질을 하기 시작한다. 루이즈는 피아노를 가르치며, 마리아는 어느 부자의 의뢰로 명화名畫를 베껴 그리며 생계 전선에 돌입한다.




이사카르 신부는 공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림틀, 종이, 파스텔, 그리고 후작 부인 그림 한 점당 15프랑을 마리아에게 지불할 것을 약속했다. 더욱 다행인 사실은 첫 번째 의뢰가 만족스러우면 르미르몽의 열두 수녀와 여섯 명의 황실 근위병 그림을 그녀에게 의뢰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마리아가 이 소식을 들고 집에 왔을 때 숙녀들의 반응을 보지 못해 유감이다. 마침 루이즈는 시내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돌아와 있었다. 그녀와 불쌍한 제라드 부인의 눈이 기쁨의 눈물로 가득 찼다.

“세상에, 얘야.” 딸을 껴안으며 부인이 말했다. “우리 생계를 위해 고생을 하겠다는 거니?”

“우리 여동생 정말 대견하다.” 루이즈가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혼자 일하며 돈을 산더미처럼 벌겠구나, 마리아. 언니는 네가 부러워, 그림을 그릴 줄 아니까. 피아노를 치면서 원하지도 않는 개인 교습을 하지도 않고, 이웃에게 시끄럽다고 욕을 먹지도 않고, 나이를 먹고 ‘난 아무에게도 피아노를 쳐주지 않았어요’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마리아는 그런 농담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그녀를 머리카락을 꼬며 드레스를 나풀거릴 줄만 아는 인형이자 응석꾸러기 취급했다. 그래, 이제 두고 볼 일이다!

일요일에 아메디가 케이크를 들고 오자 부인과 루이즈는 모든 전말을 몇 번이고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마리아가 이미 작업을 마친 후작 부인 그림 두 점을 보여주었다. 그림 속 후작 부인은 성당에서 쓰는 성체만한 천을 덧대고 있었다.

그날 마리아를 본 아메디는 이제까지보다 훨씬 큰 매력과 호감을 느꼈다. 그 순간 처음으로 아메디의 가슴은 야망을 품었다. 자신의 무명無名과 빈곤에서 벗어날 만한 재능이 있어, 유명한 작가가 되어 생계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으면! 어찌됐든 그것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면 기꺼이 이 아름다운 아이에게 아내가 되어 달라고 청하리라! 그녀가 내 곁에 있음을 기뻐하고 또 자랑스러워함을 일상에서 인지하고 있다면 얼마나 달콤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면 안 되었다. 그들은 너무 가난했다. 그리고, 마리아가 과연 그를 사랑할까? 

그는 수시로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는 이내 근심에 빠졌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는 아이의 친밀함이 진작 진지한 감정으로, 진정한 사랑으로 변모했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같은 양상이 어린 소녀의 마음에서도 일어났다고 기대할 근거는 없었다. 그녀는 늘 그를 아주 호의적으로 대했지만 그것은 좋은 친구에 가까웠다. 낡은 녹색 소파 뒤에 누워 제라드 아저씨의 해진 털모자를 노리며 아메디를 기다리던 시절처럼 그의 존재에 들뜨는 일도 이제 없었다.

예전부터 아메디는 누구보다 제라드 일가와 함께 있을 때 스스럼없이 자신의 작업을 노출했다. 일요일 정찬을 들고는 식탁에 모여 앉으면 곧바로 제라드 아줌마가 커피를 끓여 온다. 청년은 친구들에게 엄숙하고 느릿느릿한 어조로 한 주간 써낸 시를 낭독한다. 내면 묘사를 음미하고 애호할 줄 아는 화가(제라드 씨 – 역자 주)였다면 네덜란드 학교의 늙은 교장처럼 네 사람의 침울한 분위기를 환기시켰을 것이다. 시인은 오른손에 원고를 들고 왼손으로 운율에 따라 시어를 짚으며 두 자매 사이에 앉아 있었다. 루이즈는 - 조금 심하게 마르고 나이가 겉으로 드러나는 - 화자를 똑바로 보며 열심히 경청하는 반면 예쁜 마리아는 귀찮은 듯 살짝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 멍하니 식탁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제라드 아줌마는 시선을 코끝에 두고 진지하게 바느질을 했다.

그렇다! 이 낭독 시간에는 루이즈만이 정서에 동하여 한숨을 내쉬는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때때로 그녀의 속눈썹에 굵은 눈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도 했다. 그녀만이 알맞고 섬세한 단어로 시인을 칭찬할 수 있었고, 그의 시를 이해하고 그에 감동받았음을 보여줄 수 있었다. 마리아는 낭독을 마치고 여운에서 미처 못 벗어난 젊은 시인에게 기껏해야 이따금 성의 없이 “정말 아름다워요!” 라며 진부한 감사의 미소를 띨 뿐이었다.

그녀는 시 같은 건 안중에 없었다. 그렇다면 훗날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그녀는 남편의 지적인 삶에 무관심한 채로 이윽고 그가 도약할 영광 역시 데면데면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아메디는 그를 자문하고는 더할 나위 없는 슬픔에 빠졌다.

머지않아 마리아는 아메디에게 새로운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모리스와 그의 어머니가 이탈리아에 간 지 벌써 세 달이 지났다. 여행 시작 무렵 처음 정열에 불타오른 모리스가 밀라노에서 보낸 편지 두 통을 제외하면 아메디는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아메디는 이게 다 게으른 모리스의 출발 전날 웃으면서 “꼬박꼬박 연락할 거란 기대는 마라”고 선언할 정도의 자유분방함 때문이라 생각했다. 제라드 가를 방문할 때마다 마리아는 아메디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친구 모리스에 관한 새로운 소식은 없나요?”

아메디는 처음에는 이에 대해 별 신경을 안 썼다. 하지만 그녀의 끈질김은 마침내 그를 경악하게 했고, 그의 마음에 의심과 경고의 작은 병균을 심었다. 모리스 로저는 아메디의 아버지 생전 제라드 가를 몇 번 방문했을 뿐이고 그때마다 아메디가 동행했다. 그는 늘 마리아를 가장 존중하는 매너를 유지했고 둘 사이에 말이 오간 건 스무 단어 정도일 터였다. 어째서 마리아는 거의 남이나 다름없는 그에게 그런 특별한 인상을 갖고 있는 걸까? 모리스는 그렇게나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게 가능했던 걸까? 사랑의 감정까지 촉발할 정도로? 그녀는 마음 깊숙이 그를 생각하는 조용한 바람을 숨기고 있는 걸까? 그녀는 그를 바라보고 있던 걸까? 그가 돌아오길 바라는 걸까?

이런 두려움이 들자 아메디는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마음 역시 심란해졌다. 모리스는 정말이지 행복한 사람이다! 누가 그를 보고 좋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곧바로 이타적인 시인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이 질투하는 감정을 떨쳐냈다. 그럼에도 매주 일요일 제라드 가를 방문할 때마다 눈을 내리깔고 살짝 허둥대는 목소리로 똑같은 질문 - “모리스 씨에 관한 새로운 소식은 없나요?” - 을 하는 마리아를 보는 아메디의 마음은 잔인하게 주저앉았다. 깊은 슬픔과 함께 아메디는 생각했다.

‘날 사랑할 일은 결코 없을 거야!’          




아메디는 마리아가 자신을 결코 남자로서 사랑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고 좌절한다. 하지만 이내 ‘나는 이제 스무 살이다. 유년기의 소꿉장난은 그 시절에 내버려두고 내 인생을 즐기자’고 생각을 전환한다. 그는 더욱 창작 활동에 몰두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메디는 그의 시를 눈여겨본 한 사교계의 유력 인사의 지지를 받게 된다. 그의 시는 정치계와 사교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 앞에서 유명 희극인에 의해 낭송되고 단숨에 주목을 받게 된다.


때마침 모리스가 오랜 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다. 이탈리아에서 감명을 깊게 받은 모리스는 로저 부인에게 자신의 화실을 갖고 싶다고 졸랐고, 졸업도 했겠다 딱히 집안에 돈이 궁하지도 않았기에 부인은 모리스가 화가의 삶을 사는 걸 허락한다. 여전히 난봉꾼인 모리스는 아메디를 데리고 여자를 꼬시러 클럽에 간다. 그곳에서 아메디는 어린 시절 제라드 자매와 함께 놀던 소꿉친구 로진 콤바리우를 만난다.


어느 날 아버지가 말없이 데려간 로진은 도제 수업을 받기 위해 중년 플로리스트에게 보내졌었다. 그러나 그는 어린 로진을 끔찍하게 학대했고, 이후에도 로진은 여러 남자를 만나며 자신의 성욕과 외로움을 달래며 살아왔다. 성숙하고 아름다워진 그녀의 외모를 칭찬하는 아메디에게 로진은, 자식처럼 아껴준 정 넘치는 제라드 부부를 그리워했으며, 어린 나이에도 사려 깊고 올곧은 아메디를 좋아했었다고 고백한다. 술이 들어간 두 사람은 괜찮은 분위기가 되고, 로진의 집 앞에 도착하자 아메디는 그녀의 방에 같이 들어가려 한다. 그러나 로진은 다음과 같이 아메디를 밀어내는 동시에 격려한다.




“내가 집까지 바래다줘도 될까?”

그녀는 기꺼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클럽을 나왔다. 젊은 시인은 팔짱을 낀 예쁜 처녀의 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 그러나 은색 달빛이 가득한 큰길에 다다르자 로진은 발걸음을 늦추며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아메디가 멍하니 바라보자 로진은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젊은 남자의 번뇌를 자극하는 새로운 욕망은 이 얼마나 달콤한가! 그 욕망에는 약간의 감정도 들어 있었다. 아메디는 정념으로 심장이 뛰었고 로진 역시 그보다 덜하진 않았다.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 그저 의미 없는 이야깃거리를 입에 올렸다.

“아름다운 밤이네!”

“그러게!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건 좋은 일이야!” 

그들은 말없이 계속 걸었다. 나무들 아래를 둘이서 걷는 공기는 참으로 신선하고 달콤했다!

마침내 둘은 로진의 집 문 앞에 도착했다. 로진은 느릿느릿 초인종에 손가락을 대었다. 아메디는 큰 용기를 내어 떨리는 쉰 목소리로 “같이 들어가도 될까?” 하고 물었다. 로진은 그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눈에는 조용한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안 돼, 이건 아냐. 분별력 있게 행동하자. 오늘 저녁 너를 봐서 기뻤고, 내가 너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걸 너는 알고도 남았을 거야. 우린 어릴 때 서로를 알았고, 이렇게 다시 만났어. 우리가 서로를 정말 사랑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있겠니. 하지만 내 얘길 들어. 지금 이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고, 아마 잘못된 일일 거야. 장담하는데 오늘 클럽에서 마르고트 언니와 나를 만난 일을 잊는 게 좋을 거야. 그 옛날 제라드 가에서 같이 놀던 소꿉친구만을 기억해줘. 순수했던 시절을 일시적인 변덕으로 훼손하는 것보다는 마음속에 간직하는 게 나을 거야. 아메디 군, 우리의 유년기의 추억을 망치지 말자, 좋은 친구로 남자.”

청년이 무언가 말을 하기도 전에 화답하듯 벨이 울렸다. 로진은 이별의 미소를 띠며 가볍게 손끝에 입맞춤을 했다. 그녀가 사라지자 문이 꽝 하고 닫혔다. 시인의 마음속에 제일 먼저 일어난 건 분노였다. ‘경박하고 제멋대로인 여자 같으니!’ 그러나 돌아서서 걸은 지 채 스무 발짝도 되기 전에 그는 후회하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옳아!” 그는 이 불쌍한 여자아이가 마음 한 귀퉁이에 정숙함과 겸손함의 자취를 남겨 놓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숙녀에 대한 신성한 존중을 지킨 스스로가 대견스럽다는 생각에 그는 흐뭇해졌다!




아메디는 창작 활동과 사교계 활동을 병행하면서 점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여러 동문들은 시인으로서 활약하는 그를 시샘하여 모임 등에서 아메디가 없는 틈을 타 뒷담화를 하곤 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아더 파피용이라는 친구는 아메디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있었다. 이 파피용 덕분에 아메디는 그토록 원하던 사회적 성공의 기회를 잡게 된다. 그가 알고 지내던 귀부인의 영애가 아메디의 시를 마음에 들어 했는데, 이에 흥미를 가진 귀부인에게 파피용이 아메디를 적극 추천한 것이다.


창백하면서도 단정한 전형적인 예술가의 풍모를 한 아메디를 본 귀부인은 한눈에 마음에 들어 했고, 그날 이후 아메디는 고관대작들의 행사에 숱하게 초청받게 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허례허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귀족 나리들의 정서가 아메디와 맞을 리 없었고, 아무리 회장에 사람이 많은들 그는 늘 마음 한 켠에 이방인의 외로움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날 정찬은 즐거웠다. 본 적 없는 연어부터 시작해서, 루이 필립을 틀림없이 실각시켰다는 솔 모양 머리의 정치가가 ‘내 충고를 들었으면 헌법상의 왕정이 여전히 존속했을 것’이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애처로운 집사가 자신의 가장 독한 와인을 따르는 순간 귀걸이를 한 단봉낙타같이 생긴 노부인이 아메디 – 불행하게도 옆에 있던 – 에게 19세기의 시인들에 대한 새 구두시험을 치르게 했다. 그리고는 라마르틴의 매력적인 빚, 빅토르 위고의 어리석은 자존심, 알프레드 드 뮤세의 냉혹한 습성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지 물었다.

명사 아메디는 전성기를 맞았다! 그는 하도 불러 세워진 나머지 소화불량에 걸릴 지경이었다. 이 ‘부인’이 이야기를 끝내면 저 ‘부인’이 붙잡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삼십 분을 숙맥 아메디는 끌려 다녔다. 그제야 아메디는 잿날 빈소와 마찬가지로 이곳을 들락거리는 건 약삭빠른 족속들뿐이란 걸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교우들이 목과 어깨에 벨벳 코르사주 혹은 새틴 의복을 치장한 걸 보고 역겨움과 수치에 등을 돌렸다. 이번에는 부인들이 의자 가장자리에 걸터앉아서는, 그날 할 만한 혹은 당연히 할 뻔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그 가엾은 장군께서 돌아가시다니!” 아니면 “프랑스어로 나온 새로운 연극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그렇게 인상 깊지는 않지만 잘 만든 공연이더라고요!” “이거 맛있겠군요.” 등등. 아메디는 무엇보다도 G부인이 B부인의 딸이 C부인의 조카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 안주인의 표정 변화에 찬성했다. 그녀는 이들을 대부분 몰랐지만 마치 그들이 자기 집 가구를 갈아치우려고 그녀의 돈을 움켜쥔 늙은 할머니의 죽음을 발표한 듯 활기찬 기쁨을 드러냈다. 거꾸로 D부인이 E부인의 어린 아들이 백일해에 걸렸다고 밝히자 갑자기 중간 단계 없이 표정을 바꿀 땐 여배우의 소질마저 엿보일 정도로 안주인은 경악의 분위기를 연출했는데 마치 간밤에 할레스 가에 콜레라라도 터진 듯 했다.

(…) 아메디는 이 모든 것들을 탐닉했으나 한편으로 그의 서민적인 정서와 투박한 천성은 이를 석연찮아했다. 그가 이 세속적인 군상극의 공허함과 허무함을 깨달은 순간 자연의 본성을 간직한 사람들을 향한 전적인 연민이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난롯가에서 열변을 토하는 정치가나 황궁의 유리창처럼 섬광을 발하며 카리브 사람처럼 문신을 한 고문헌학자보다 가장 낮은 곳의 노동자 – 목수나 조종사釣鐘師 - 들에게 한없는 경외를 느꼈다. 나이 육십이 되도록 하얀 모자를 끄고 괭이질을 하며 작은 감자밭을 일구는 주름살 가득한 마을 할머니가 오히려 더 정감이 갔다.




아메디의 심란함과는 별개로 시 창작의 주요 소비자들은 생업에 매달리며 빠듯하게 살지 않는 귀족들이었고, 일 년 정도 지나자 아메디는 자신의 낡고 좁은 아파트를 떠나 넓고 깨끗한 독방을 얻을 수 있었다. 그즈음 아메디는 극 대본을 의뢰받아 쓰고 있었다. 모리스는 화실에서 모델을 불러 그림을 그리거나 친구들을 불러 놀거나 여자를 불러들여 뜨거운 밤을 보내는 속 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제 아메디의 유일한 근심은 여전히 가난하게 사는 제라드 가의 세 모녀였다. 그 중 마리아에 대한 연심을 아메디는 아직까지도 누구에게 말하는 일 없이 간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메디는 루이즈를 기다리고 있었다. 옛날부터 그녀는 좋은 상담역이자 두 집안의 정신적인 버팀목 역할을 해 왔다. 아메디는 그녀에게 오랫동안 간직해 온 마리아에 대한 연심을 털어놓으며 결혼을 통해 두 집안이 합쳐지는 데 대한 의견을 묻고자 했다.




어떻게 해야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들을 그토록 힘든 일상으로부터 구할 수 있을까? 아! 마리아에게 그럴 마음만 있으면 다른 가난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데 돈 쓸 필요 없이 하얀 드레스만 입혀서 당장이라도 결혼할 수 있다. 그리고 한 지붕 아래서 다 같이 살 것이다. 그는 급료로 번 이천사백 프랑에 다른 데서 얻은 수입 천 프랑까지 있었다. 루이즈의 수입까지 합치면 이 정도 금액으로도 거의 먹고살 만 했다. 그러고 나면 아메디는 자신의 작품을 팔고자 전력투구할 것이다. 그는 열심히 일할 것이고, 가족들은 든든한 조력자가 될 것이다. 물론 그의 수입으로 모든 가족을 먹여살리는 건 상당한 각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둘 사이에 아이들이 태어날 것이다. 그는 명성을 얻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그에겐 장래가 있지 않은가. 그의 작품은 공연될 것이고 성공할 것이다. 이는 그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렇다, 네 사람이 함께 행복한 인생을 누릴 것이다! 마리아가 조금이라도 그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녀에게 용기가 있다면, 아메디가 포기 않고 희망을 붙든다면, 한 발짝만 내딛으면 될 일이다.

이러한 열의를 한가득 안고 아메디는 그가 완벽하게 신뢰하는 선善과 진실의 화신, 현자 루이즈와 일을 의논하기로 결심했다. 매주 목요일 6시에 그녀는 로셰슈아 골목의 기숙학교에서 어린 숙녀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나왔다. 그날 저녁 그는 그곳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그리고 일을 마친 루이즈를 만났다. 불쌍한 루이즈! 치마 상태는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었고 안색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피곤함과 우울을 온몸에 두른 것 같았다! 

“세상에, 아메디!” 그를 본 그녀의 얼굴은 기쁨에 환해졌다.

“오랜만이야, 루이즈.” 그는 한쪽 팔을 내밀었다. “같이 돌아가자. 걸으면서 할 얘기가 있어. 네 조언이 필요해. 너한테만 할 수 있는 정말 진지하면서도 허심탄회한 이야기야.”

그리고서 시인은 자신의 고백을 시작했다. 그는 모두가 함께 어울려 놀던 노틀담 데 샴 가街에서의 유년기를 꺼내들었다. 그가 어린 마리아에게 처음 매료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청년이 되자 곧바로 그는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고, 언젠가 온화한 정으로 그녀의 마음을 움직여 부부의 연을 맺는 꿈을 항상 꾸어 왔다. 그 자신이 너무 가난해서 더 빨리 말하지 못했지만, 그는 언제나 그녀를 사랑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밖에는 다른 어떤 여자도 사랑할 수 없다.

아메디는 이어서 자신의 인생 계획을 간단하고 감동적인 말들로 설명했다. 그는 제라드 부인의 사위이자 친애하는 루이즈의 제부가 될 것이다. 두 집안이 합치면 빈곤의 문제도 대부분 안심하게 될 것이다. 간결하면서도 타당하지 않은가. 루이즈가 이에 동의할 것임을 아메디는 굳게 확신했다. 그녀는 지혜의 현신이자 집안의 가장이 아닌가.

아메디가 이야기하는 내내 루이즈는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발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격하게 떨리는 것을 아메디는 눈치 채지 못했다. 아메디, 이 눈 뜬 장님 같으니! 그는 전혀 모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루이즈야말로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임을 결코 깨닫지 못하리라!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그녀는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메디보다 연상이었고, 예쁘지도 않았다. 그의 눈에 루이즈는 언제까지나 어릴 적 자수를 놓으며 바늘로 알파벳을 가리켜 보여주던 옆집 누나인 채일 것이다. 오랫동안 그녀는 마리아에 대한 그의 감정을 의심했고, 마침내 들이밀어진 진실은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아메디를 도울 것이다. 그처럼 심지가 굳은 여자였다.

하지만 이 고백은, 귓가에 그처럼 사랑스러운 어조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에게 한 고백은, 그의 기교 없는 자기본위에서 비롯된 행복한 꿈은, 자신을 사랑해 온 여자에게 자신과 여동생의 아이를 키우는 유모의 역할을 예비한 미래의 청사진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이다지도 모질 수 있는가!

두 사람은 볼레바 피가유에 다다랐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은 청록색으로 맑게 빛났고, 가을의 싸늘한 바람은 마지막 마른 잎사귀를 나무에서 떨어뜨리고 있었다. 아메디는 말없이 있었지만, 그의 근심스런 시선은 루이즈의 대답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루이즈는 솔직하고 순수한 눈으로 아메디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착한 아메디. 네 마음은 누구보다도 관대하고도 드높은 뜻을 품고 있구나. 네가 마리아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은연중에 생각했었어. 안심해, 마리아도 너를 사랑한다고 단언할게. 우린 앞으로 한 가족이 될 수 있을 거야 - 하지만 솔직히, 난 거기 들어갈 수 없어.

우리 공주님이 조금 경박한 데가 있지만, 여자의 본능으로 자신에 대한 너의 감정을 틀림없이 눈치 챘을 거야. 한 번도 엄마나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한 적은 없지만 말이야. 자신감을 가져. 그 점에 관해 네가 속을 앓을 부분은 없어. 그 애는 너무 어리면서도 순수하니까 자기의 감정을 의심하지 않고 너를 사랑할 거야. 심지어 네가 고백하면 아마 틀림없이 그 애도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될 거야. 내가 보장할게, 마리아는 너의 사랑에 감동할 거야. 네가 우리 가족 모두를 위해 헌신했을 때처럼 말이야. 아메디, 일이 잘 되길 진심으로 바래. 왜냐면 정말로, 불쌍한 마리아의 삶에 이제 무언가 행복이 있어야 하니까. 때때로 그 애가 끝없는 슬픔에 빠져 울기 시작하면 어떨 때는 나도 감당이 되지 않아. 그 애가 따분함에 짓눌려 있다는 건 너도 눈치 챘을 거야. 우리가 꾸리는 고된 생활을 나나 엄마보다 그 애가 더 힘들어한다는 걸 알아. 이상할 것도 없지, 마리아는 예쁘고 매력적이고, 행복이 어울리는 아이니까. 하지만 눈에 보이는 광경은 지금도 앞날도 슬픔뿐이고! 자, 이해하겠니. 내가 얼마나 이 결혼이 성사되길 바라는지.

너는 정말 착하고도 고귀한 아이야. 너는 마리아를 행복하게 해 줄 거야. 단 네가 직접 나를 두고 집안의 지혜를 대표한다고 했으니, 우선 며칠간 마리아를 지켜볼게. 그 애가 자신감을 얻고, 미처 깨닫지 못한 마음 속 감정을 발견할 수 있게 말이야. 잊지 마, 난 네 확실하고 믿음직한 우군이야.”

시인은 대답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돼, 루이즈 선생님. 전부 너에게 맡길게. 뭐든 네가 한다면 그게 최선일 테니까.”

그렇게 감사를 표하고, 레픽 거리 언저리에 다다르자 그들은 각자 갈 길을 갔다. 하찮은 대우에 익숙하던 그녀는, 젊은 남자에게 내민 빈약하고 휜 피아니스트의 손이 희망과 감사의 마음으로 쥐어짐을 느끼고 씁쓸한 기쁨을 떠올렸다.

루이즈는 이 혼담을 원했고 또한 서둘러야 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북적이는 번잡한 거리를 걸으며 그녀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아냐, 그렇지 않아! 마리아는 아메디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루이즈는 이를 굳게 확신했다. 하지만 어찌됐든 그녀는 여동생을 빈곤의 절망과 악의로부터 끌어내도록 노력해야만 했다. 아메디는 마리아를 사랑하고, 그녀가 어떻게 자신을 사랑하게 할지 알 것이다. 그들의 행복을 반석 위에 올리기 위해 두 젊은이는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루이즈 자신은? 무슨 상관이랴!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결과적으로 그녀는 상냥한 이모이자 나이 든 대모의 역할을 받아들이리라. 물론 마리아 역시 엄마의 역할을 배우거나 최소한 그녀가 언니의 개입에 동의할 경우에 한해서. 그녀는 너무 예뻤기에 사소한 허영심이 강했다. 아마도 루이즈는 아무도 모르길 바랐을 것이다. 여동생이 자신의 아름다움과 젊음을 근간으로 해서 어떤 공상이나 헛된 희망을 품고 있는지 말이다. 루이즈는 깊은 두려움에 빠졌다. 그녀는 천천히 몽마르트 언덕으로 몸을 이끌었다. 깡마르고 굽은 어깨를 낡은 검정색 숄로 덮은 이 불쌍한 여인은 이미 자신의 실연의 슬픔을 잊고 다른 사람의 행복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이야기를 돌려서 『해리 포터』의 스네이프, 제임스 포터, 그리고 릴리 에반스의 관계를 환기하고자 한다. 스네이프는 제임스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고, 릴리를 오랫동안 짝사랑하고 있었다. 릴리는 소꿉친구 스네이프를 괴롭히는 제임스를 볼 때마다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릴리는 제임스와 결혼한다. 어떤 팬의 “릴리는 제임스를 싫어했잖아요?” 라는 질문에 롤링 작가는 “릴리가 정말 제임스를 싫어했을까요? 당신도 여자잖아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텐데요?” 라고 대답한다.


지적이고 감수성 풍부한 사람이 반드시 마찬가지로 지적이고 감수성 풍부한 이성에게 끌린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이성에게 매력을 느낄 수도 있는 법이다. 마리아는 시니 예술이니 하는 것에 소질도 영감도 없다. 그녀가 관심 있고 또 자신 있는 분야는 대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영역이다. 그녀가 아메디의 시적 세계를 이해할 일은 앞으로도 요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마리아가 아닌 루이즈를 선택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메디와 루이즈가 간과한 게 있었으니 바로 마리아의 행동력이었다. 석 달 전, 명화를 모작하는 일을 하는 와중에도 마리아는 시간을 내어 모리스의 화실을 찾아갔다. 못 본 새 더욱 탐스러운 여성이 된 마리아를 모리스가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모리스는 아메디가 자신에게 질투해서 제라드 가에 데려가지 않고 있던 걸 눈치 채고 있었다. 그렇게 마리아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모리스에게 바친 것이다.


모리스 역시 한량 기질이 강할 뿐 근본이 악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결혼하자는 마리아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어머니의 허락을 받으러 본가를 찾아가지만, 오랜만에 뵌 어머니의 늙고 힘없는 모습을 보고는, 금지옥엽으로 키운 아들이 언덕 위의 작은 집에서 근근이 벌어먹고 사는 가문의 딸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가 드러낼 분노와 실망을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며 그저 마리아와 몸을 겹치는 즐거움에 빠져 그녀와의 약속을 유예했지만, 어느 날 그녀가 강하게 추궁하자 결국 체념한 듯 말한다. “불쌍한 마리아. 너한테 굳이 말 안 하려 했지만,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 어머니가 우리 결혼을 승낙하지는 않을 거야.”


모리스는 마리아를 끌어안으며 “언젠가 때가 되면 정식으로 결혼할 수 있을 거야. 이미 넌 내 아내야.” 라 달래지만 마리아는 이를 뿌리치고 “나중에 얘기하죠.”라 남기고 화실을 나온다. 반쯤 미치광이의 몰골로 몽마르트 언덕을 올라간 그녀는 누이와 어머니의 발 앞에 쓰러져 모든 걸 고한다. 자신의 뱃속에 모리스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까지 전부. 루이즈는 지금껏 가족이 쌓아올린 평판도, 결혼을 통해 비올레트 가와 합치는 행복한 앞날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이 엄청난 비밀을 고백할 사람은 가족의 버팀목이자 유일한 친구이자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아메디 뿐이었다.




그녀는 잔인한 내막을 전부 밝혔다. 시인은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듣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절망으로 갑작스레 수척해진 주름진 얼굴이 드러났다. 루이즈는 두려웠다.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그를 상처 입혔어! 저 아이가 얼마나 마리아를 사랑하는데!’

그러나 루이즈는 아메디의 눈동자가 침울하면서도 결심에 빛나는 걸 보았다.

“알았어, 루이즈.” 이를 꽉 깨문 채 그는 나지막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부탁이야, 더 이상 말하지 말아 줘. 모리스가 이 시간에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일 아침에 그 녀석을 만날 거야. 안심하고 있어. 녀석의 악행을 바로잡을 거야, 당장!”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슬픔과 분노로 목소리가 흐트러진 채 서두르듯 그는 자리를 떴다. 루이즈는 자신이 할 일을 하고자 애써 몸을 일으켰다.

아니다. 모리스 로저는 악한이 아니었다. 마리아가 떠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움과 한심함을 느꼈다. 어머니! 불쌍한 마리아!

분명 그는 마리아와 그녀의 아기를 책임질 수 있다. 신사답게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적나라하게 말하면 이제 그는 예전만큼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의 변덕스러운 천성은 이미 이 연애에 질려 버렸다.

이번 연애는 지나치게 눈물바다였다. 하! 대체로 그는 운이 따랐고 이 지루한 연애도 늘 그랬듯 무사히 끝날 것이다. 정말이지, 이건 그저 나쁜 사고 같은 거다. 구멍에 빠져 다리가 부러지는 그런 사고. 하지만 누가 쉽사리 단정할 수 있겠는가? 우연과 시간은 많은 것을 정리해 준다.

아기는 아마 살아남지 못하리라. 아마도 말이다. 어찌 되었건 잠자코 기다리며 일의 경과를 지켜본다 해서 이상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튿날 아침 무정한 모리스가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모델을 기다리며 조용히 팔레트를 배치하고 있자, 아메디 비올레트가 화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눈에 그는 시인이 모든 사실을 알았음을 직감했다.

“모리스.” 아메디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어제 저녁 루이즈 제라드 양이 내 집을 방문했어. 나에게 전부 다 말해 줬지. 전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겠지? 오늘 여기 온 목적은 내가 아는 ‘모리스 로저는 정직한 남자’라는 사실이 착각이었는지 알기 위해서야.”

젊은 예술가의 두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지난 밤 잠들지 못하고 눈물을 적신 아메디의 잿빛의 초췌한 안색은 보기가 안쓰러웠다. 아메디야말로, 가녀린 아메디야말로 모리스가 진정 사랑한 사람이었다. 아메디야말로 모리스가 대학 시절부터 그의 허영심, 관대한 애정 그리고 우월함의 비호를 충족시키는 보다 소중한 감정의 대상이었다.

“이야, 벌써부터 멜로드라마 찍는 거야?” 탁자 위에 팔레트를 놓고 그는 말했다. “아메디, 이 친구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따라서 오랜 친구에게 설명을 바라는 거라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어. 네가 말했듯 제라드 양이 전부 털어놓았겠지. 그 집 숙녀들에게 네가 헌신해 온 건 알아. 네 감정도 이해한다. 넌 충분히 중재역을 할 만하지. 하지만 이봐, 내가 지금 차분하게 친구로서 이야기하고 있잖아. 진정하고, 잊지 말자고. 그 집 숙녀들에게 네가 아무리 열과 성을 다 해도, 너의 젊은 시절 최고이자 최애의 동반자는 나야. 그래, 나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심각한 상황 중 하나에 처해 있어. 그걸 얘기하자고. 나에게 조언해 줘, 너는 그럴 권리가 있어. 하지만 지금 너의 목소리는, 그 분노와 위협에 찬 목소리는 내가 감당할 수 있지만 날 아프게 해. 나에 대한 너의 사랑을 혹시라도 의심하게 한다고.”

“어! 난 너를 사랑해, 잘 알고 있네!” 언짢은 채 아메디가 대답했다. “근데 내 충고가 왜 필요하지?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을 정도로 너는 충분히 솔직한 사람이잖아. 너도 인정하지? 넌 어린 여자애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었어.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 양심이 일러주지 않냐?”

“그녀와 결혼하라고? 나도 바라는 바야. 하지만 아메디, 우리 어머니는 어떡할 거냐? 이 혼담을 들으면 좌절하실 거야. 그저 아들만 바라보던 희망도 야망도 산산조각날 거야. 나도 어머니의 승낙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나 스스로 준비될 시간이 필요해. 나중 일이지만, 굳이 말하자면, 아기가 살아서 나온다면 말이야.”

모리스에게서 튀어나온 이 자기본위에서 예외 없이 비롯되는 냉소주의로 가득한 말은 아메디를 분노케 했다.

“네 어머니 말이냐!” 그는 외쳤다. “적과 싸우다 전사한 군인 남편을 가슴에 묻은 과부인 네 어머니 말이냐. 내가 보장하는데, 자당께선 이해하실 거다. 명예와 의무의 문제로서 말이다. 찾아뵙고 말씀드려라, 이 몹쓸 자식이 불쌍한 아이의 신세를 망쳤다고 말이다. 자당께서는 너보고 결혼하라고 조언하실 거다, 아니, 그렇게 명령하실 거다.”

아메디의 질타는 강력하고도 직설적이라, 모리스를 뒤흔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절친의 폭언은 그를 자극했다.

“주제넘게 말하지 마라, 아메디. 경고한다.” 그는 언성을 높였다. “너한테 내 어머니의 의견을 예단할 권리는 없어. 그리고 난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아. 무엇보다, 누가 이런 식으로 선을 넘어도 된다고 했지? 그렇게 마리아를 사랑했던 거냐--”

분노에 찬 울부짖음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메디는 살기등등한 눈으로 주먹을 부들거리며 모리스에게 다가가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사랑했어! 그 애를 아내로 맞고 싶었어. 넌 이제 더 이상 그 애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여자들처럼 한때의 변덕으로 그 애를 안았고, 내 미래의 꿈을 모두 부수고 말았어. 하지만 마리아가 좋아하는 건 너지. 이해해라, 모리스. 난 자존심이 세서 그에 대한 불평은 말하지 못하겠고, 돌려 말할 줄 몰라서 너에게 악의를 품을 수도 없다. 난 어디까지나 네가 불명예를 저지르는 걸 막기 위해 온 거야. 내 명예를 걸고 말이야! 네가 나를 밀어내면 우리 우정은 영영 끝이야.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하지 않으련다. 하지만 그런 끔찍한 일도 없겠지. 이런! 내 불찰이다. 이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모리스, 아직 시간이 있어! 오직 네 마음의 소리를 들어. 내가 아는 한 배포와 다정함으로 가득한 마음 말이야. 너는 순진한 아이에게 잘못을 저질렀고 가난하면서도 훌륭한 일가를 절망에 빠뜨렸어. 네가 저지른 악행은 아직 돌이킬 수 있어. 너 역시 그러길 바랄 거고,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 부탁이다, 너 자신과 네가 짊어진 이름의 명예를 위해서야. 용기 있게, 신사답게 행동해! 너를 너무 사랑한 잘못밖에 없는 여자애한테, 네 아이의 엄마한테 네 이름을, 네 마음을, 네 사랑을 바쳐. 너는 그녀와 함께 행복할 거고 그녀를 통해 행복할 거야. 가라! 네 행복을 질투하지 않으마. 다만 내 친구를, 고귀한 모리스를 되찾을 수 있어서, 예전처럼 앞으로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어서 너무나 기뻐할 뿐이야.” 

따뜻한 말들에 마음이 흔들리고, 논쟁과 다툼에 지친 화가는 친구에게 손을 뻗어 그를 밀쳤다. 순간 모리스는 마주친 아메디의 눈이 눈물로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한편으론 슬픔을, 그러나 의지에 대한 갈망과 도덕의 쇠퇴를 더 강하게 실감하며 마침내 그는 외쳤다.

“그래, 결국 네 말이 맞아. 지체 없이 이걸 수습하자고.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아메디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리스, 넌 내 친구고 내 자랑이야! 서둘러서 몸단장을 해. 숙녀들을 찾아가서 그 아이를 끌어안고 위로하자. 그래! 역시 넌 날 이해하는구나. 네 마음이 제자리를 찾았구나. 그 가련한 여인들이 얼마나 기뻐할까! 그럼 오랜 친구, 임무를 수행해볼까?”

그렇다, 모리스는 그게 옳은 일임을 이제 깨달았다. 흥분해서 몰입하는 친구의 독려를 받으며, 축하 파티와 같이 그에게 부여된 옳은 행위를 향해, 그는 서둘러 옷을 입으며 외출 채비를 했다. 그는 말했다.

“결국 어머니는 승낙할 수밖에 없으실 거야. 그분은 늘 내가 원하는 걸 들어 주시니까, 우리 마리아를 아껴 주시게 될 거야. 맞아, 너한테는 대들 수 없어, 비올레트. 네 이름은 곧 선함과 설득력이니까. 자, 손수건 챙겼고, 모자도 챙겼고, 이제 가자!”

그들은 밖으로 나와 마차를 잡았다. 그리고는 몽마르트로 향했다. 태평한 모리스는 그의 장래를 조정하며 인생 계획을 그렸다. 결혼하면 그는 진지하게 일할 것이다. 우선 식을 치른 직후 그는 아내와 함께 남부의 겨울을 보내러 출발할 것이다. 아내는 그곳에서 산달을 채울 것이다. 모리스는 안티베스 근처 코니슈의 아름다운 장소를 알고 있었다. 거기서 바다와 풍경의 스케치를 그려올 수 있으므로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겨울이 지나면 또 다시 새로운 인생 계획이 펼쳐진다. 이사 예정인 화가 라쥴에게서 아파트를 빌리는데 “친구, 그곳은 최고의 화실이야. 창 밖으로 룩셈부르크가 보인다고.”라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작업에 몰두하여 전람회에 뛰어난 그림을 출품한 끝에 메달을 거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아름다운 나날을 보내는 동안 마리아와 간병인은 정원에서 유유자적하며 보낼 수 있으리라.

한참 떠들던 도중 별안간 모리스는 아메디의 슬픈 표정을 발견했다. 그는 마차 뒷좌석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는 말했다.

“용서해라, 친구야.” 그와 함께 아메디의 손을 애틋하게 쥐었다. “내가 너를 잊고 있었어. 아! 운명은 참으로 터무니없구나. 내가 행복이라 생각한 게 너에게는 유쾌하지 않겠지.”

시인은 친구를 한참 동안이나 슬픈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마리아와 행복해. 그녀를 행복하게 해줘. 너희들에게 바라는 건 그게 전부야.”

마차는 몽마르트 기슭에 도착하자 가파른 길목을 천천히 올랐다.

“친구.” 아메디는 말했다. “곧 도착할거야. 혼자서 숙녀들을 만날 수 있지? 아, 겁먹을 것 없어. 내가 아는 루이즈와 아줌마는 비난의 말 한 마디 안 할 거야. 네가 올바른 행동을 했다고 고마워할 거야. 어쨌든 나는 같이 가지 않겠어. 이해하지? 나한텐 견디기 힘든 장면일 테니까.”

“알겠어, 아메디, 불쌍한 친구야. 그게 너를 위한 거겠지. 용기를 내라, 그것도 다 아물 거다. 시간은 모든 걸 잊게 해 주니까.”

모리스가 대답했다. 그는 모두가 자기처럼 변덕스러운 사람이라 생각했다. “네가 나에게 베푼 헌신을 늘 기억하마.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맞아, 난 악당 짓을 하려 했어. 아메디, 한 번 안아 다오.”

그들은 팔을 뻗어 서로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윽고 마차가 멈췄다.

도로에 내려선 아메디는 친구가 제라드 일가의 집을 보며 얼굴을 찡그리는 걸 보았다. 도처의 싸구려 여관을 방불케 하는 빈약한 집은 정면의 회반죽이 금이 가 있어 가난한 남자의 얼굴에 난 주름을 연상케 했다. 정문 우편과 좌편에는 각각 정육점과 과일 가게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아메디는 섬세한 모리스의 비위가 상하는 걸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길 끝에 작은 정원 보이지? 저기로 가면 돼. Au revoir(잘 가).”

그들은 마지막으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시인은 모리스를 지켜보았다. 그는 어두운 샛길을 지나고 좁은 공터를 통과해 문을 열고 정원으로 들어가서는 수풀 너머로 사라졌다. 그 길은 지금까지 아메디가 마리아를 생각하며 수도 없이 걸어 왔던 길이었다. 모리스는 오늘 그의 인생 처음으로 이 문턱을 넘어 마리아를 데려가 버릴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길 바랬다! 자신의 사랑을 그는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라이벌에게 매달렸다, 거의 강요했다! 무엇을? 자신의 비할 데 없는 희망을 훔쳐가라고! 이런 슬픔이 또 있을까!

아메디는 마부에게 자신의 주소를 알려주고 다시 마차에 탔다. 차가운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메디는 하는 수 없이 창을 닫았다. 파리 거리를 종종걸음으로 지나는 마차가 심하게 흔들리는 와중 젊은 시인은 몸에 오한을 느꼈다. 물에 떠내려가는 마차, 이리저리 흩어지는 우산을 쓴 보행자들,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중후한 암흑이 떨어지는 것을 시인은 보았다. 아메디는 슬픔에 멍해진 채 누군가에게 마음을 강탈당하기라도 한 듯 이상한 공허함에 빠졌다.

그는 방에 들어왔다. 자신의 가구, 조각, 책장의 책들, 종이로 뒤덮인 책상을 보자 그는 피로를 느꼈다. 이 등불 아래 공부하던 기나긴 저녁도, 몇몇 작업을 하며 치른 장시간의 사색도, 그곳에서 보낸 금욕적이고 쓸쓸한 세월도, 모두 마리아에게 바친 것이었다. 그가 부단하면서도 집요하게 일해 온 건 그녀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였다! 이제 경박하고 흠이 있는 그 아이는 틀림없이 앞으로 남편이 될 모리스의 품에서 기쁨에 흐느끼고 있지 않겠는가?

아메디는 책상에 엎드려서는 머리를 파묻고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 그의 인생은 실패했다, 그의 운명은 파멸이다, 미래는 암울하고, 아무 의욕도 나지 않고 외롭다, 그 순간만큼은 생의 용기가 티끌만큼도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연민을 담아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것 같아, 순간 그는 뒤돌아보고픈 소망과 공포가 일었다. 그는 이 손이 사자死者의 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딱히 유골의 섬뜩한 손길을 상상하지는 않았다. 대신 차분하고 슬프고 그러면서도 아주 온화한 얼굴로, 어머니의 상냥함으로 그를 품에 끌어안으며, 그와 그의 슬픔을 잠재우는 - 꿈에 빠지지 않는, 심원하면서도 영원한 잠 - 손길을 떠올렸다. 별안간 돌아본 그는 공포에 울부짖었다. 그 순간 그가 본 건 두 발을 늘어뜨리고 여전히 면도칼을 손에 쥔 채 목에는 끔찍한 상처가 나 있는, 가는 회색 머리칼을 피로 흠뻑 적신 불행한 아버지의 시신이었다!

누군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메디는 여전히 이 끔찍한 환영에 부들거리고 있었다. 관리인이 두 통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첫 번째 편지는 저명한 단체의 이름이 인자되어 있었다. “Comedie Francaise, 1680” 단체의 간사는 편지에서 그의 극 ‘라트리에L'Atelier’를 매우 즐겁게 읽었음을 가장 우아한 말로 표현하며, 심사위원단이 이 작품을 통과시키길 원한다고 적었다.

“너무 늦었어!” 젊은 시인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봉투를 뜯었다. 파리 공증인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시도르 거프 씨가 유언장을 남기지 않고 작고했으며 고인의 조카인 아메디 비올레트 씨에게 재산의 일부를 증여한다는 게 서한의 골자였다. 값을 매기긴 힘들지만 적어도 25만에서 30만 프랑은 될 것이었다.

부와 성공! 모든 것이 한 번에 들어왔다! 아메디는 처음에는 놀라움에 압도되었지만 기대에 없던 이 모든 부의 축복은 그의 불행을 돌이킬 힘이 되지 못했다. 고결한 시인은 뼈저리게 통감했다. 부와 영예는 위대한 사랑이나 아름다운 꿈과 동등하지 않다. 자신의 운명의 얄궂음에 완전히 화가 치밀어, 그는 미친 듯이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렇게 아메디는 기나긴 짝사랑을 자신의 손으로 끝낸다. 모리스와 의절한 채 마리아가 아기를 낳든 못 낳든 자신이 품는 길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메디는 자신이 상처받는 한이 있어도 친구들을 내버릴 수 없었다. 태생이 나르시시스트인 모리스는 결코 자기 자신보다 마리아를 사랑할 수 없다. 그가 정말로 자기 자신과 동등하게, 어쩌면 자신보다 더욱 사랑한 사람은, 그가 흉내 낼 수 없는 고결함과 순수함을 가진 절친 아메디 뿐이었다. 마리아에게 외면당했을 때 모리스는 반나절 만에 자기합리화를 마쳤지만 아메디에게 반대 당했을 땐 이성을 잃고 을러대지 않았는가.


하지만 마리아의 마음이 예전부터 모리스에게 있던 것은 명백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VS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의 문제에서 아메디는 애써 마리아에 대한 마음으로 자신을 합리화하지 않았다. 재미있게도 이는 그가 높이 사는 루이즈가 내린 결정과 똑같았다. 사랑하는 상대의 마음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데 그를 자신의 사랑으로 전부 포용할 수 있다는 건 오만한 생각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둘은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한 쌍이었고,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행동을 했다.


이런 아메디였기에 보불 전쟁에서 전사한 모리스가 임종을 지키던 그에게 유언으로 과부가 될 마리아와 결혼해달라고 기꺼이 말할 수 있었으리라. 모리스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마리아는 당연히 그 유지를 따랐지만 모리스를 보던 사랑의 눈길을 아메디가 받는 일은 죽을 때까지 없었다. 시인으로서 부와 명예를 얻었고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여인까지 아내로 맞았지만, 가장 갈구하던 연인으로서의 사랑은 끝끝내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이를 그저 ‘실연의 비극’이라고만 매듭지을 순 없다. 소설 『어린 왕자』에서 여우의 명대사 ‘정말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야’는 아직까지도 회자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눈에 보이는 것들에 연연함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몇몇 사람들이 나머지 전부를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린 왕자가 자신이 길들인 여우와 자신이 돌본 꽃에 책임을 느끼듯, 고결한 아메디와 루이즈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놓지 않았다. 개인으로서의 사랑은 좌절되었을지언정 성품에서 비롯된 타인에 대한 사랑은 명백히 실천되었다. 여기서도 또한 나는 초인의 면모를 본다.



마치며


   

서사시와 이를 토대로 한 비극이 예술 문화로서 성행하던 시기, 플라톤은 주저 『국가』에서 예술을 ‘비합리적인 원천을 지니고, 시민들에게 이성을 함양시키기보단 격정을 쏟게 하여 불량하게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는 한편 『파이드로스』에서는 뮤즈 신에게 사로잡혀 광란 상태의 시인이 합리적으로 시를 쓰고자 하는 건전한 사람보다 더욱 훌륭한 시를 창작할 수 있다고 말하며, 시의 영감이 일종의 신적인 연결고리를 가짐을 동시에 인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비극이 주는 효과에 대해 플라톤보다 훨씬 호의적이다. 그에 의하면 비극은 관객의 연민과 공포를 정화catharsis시켜 주며, 관객은 그러한 정서로부터 해방되어 극장문을 나서게 된다. 안타깝게도 소실되지 않고 남아 있는 『시학』에는 정화에 대한 논의조차 없고, 위와 같은 정화의 해석은 『정치학』의 한 구절에 겨우 입각해 있다.


비극을 다루는 이번 글에서 우리는 명백히 플라톤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을 발휘했다. 이성과 논변으로 설득하기보단 정서를 표현하고 마음을 움직이고자 했다. 그러한 정념pathos의 작용은 카타르시스를 유발하여 결과적으로 우리를 정념으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시킨다. 그것이야말로 브런치라는 플랫폼의 의의에 적합한 방향성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획책하는 방향성은 일시적이고 강렬한 카타르시스가 아니다. 결국 그런 것으로는 세계를 온전히 담아낼 수도 없고, 세계를 변화시킬 수도 없다. 카타르시스는 소소하면서도 다양하게,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일어나야 한다. 이윽고 그것은 민족 단위, 나아가 세계 단위의 정신ethos이 된다. 그리고 그 근간은 오늘 다룬 코페의 작품처럼 풍속적이고 일상적인 비극일 수도 있다. 민족을 구원하고 세계를 구원하는 정신의 단서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참고 문헌   



『Henriette』 F.Coppee 著

『Romance of Youth』 F.Coppee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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