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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May 16. 2021

현대 철학의 상징과 윤리적 실존의 문제

카시러, 엘리아데, 그리고 리쾨르의 '상징'






들어가며



일전에 쓴 글 《하이데거, 지젝,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 ( https://brunch.co.kr/@erasmut/17 ) 에서 은근히 많이 등장한 이름이 있다. 바로 라캉Jacques Lacan이다. 지젝은 라캉의 상징계 이론을 참고하여 그의 독창적인 변증법을 주장하고 있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프로이트와 라캉의 오이디푸스 개념을 중심으로 한 주체성을 탈영토화, 탈사회화하는 사색에 몰두한다.


그런데 이번 글에서는 그토록 구조주의 이후 유럽 철학자들을 어느 방향으로든(계승하든 반박하든) 매료시킨 라캉은 등장하지 않는다. 상징체계를 중심으로 간학문적인 연구 성과를 보인 대표적인 학자인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폴 리쾨르Paul Ricœur가 이번에 다룰 주제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이 상징을 통해 동시대에 소통하며 이를 통시적으로 전수한다’는 주장을 일관성 있게 밝힌다.


상징의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구분・구별의 문제가 된다. 심지어는 윤리적 실존의 문제에 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철학자도 ‘따라서 부정不淨하다고, 속俗하다고 분류되거나, 적어도 정淨하거나 성聖스럽다고 분류되지 않은 건 배제해도 무방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양자는 동시적이면서도 통시적으로 발현해 왔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서로와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선악의 진리성을 전면 부정해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특히 리쾨르를 다룰 단락에서 ‘악’의 상징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며 능동적인 윤리성의 작용을 생각해 볼 것이다.


그 전에 우선 근대 철학에서 칸트, 루소, 그리고 헤겔의 사상에서의 선악 문제를 간단하게 짚어볼 것이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탐구하며 경험론과 합리론의 화해를 모색한 칸트, 지식의 원천인 감각이 의식에 대해 독립적이라고 주장하고 독일 관념론을 예비한 루소, 칸트가 망각한 모순율을 변증의 과정에 끌어들여 이원론을 극복한 헤겔, 이들은 자연과 인간, 사회와 역사 가운데 ‘선’과 ‘악’을 어떻게 파악했을까?



(1) 칸트, 루소, 그리고 헤겔이 본 선과 악의 생성과 작용



한 국가 안에서의 보편적인 문화체계와 사회진보를 다루는 루소와, 역사발전의 선험적 틀을 마련한 칸트의 영향관계 속에서 선의 전개와 악의 심화는 동시에 작용한다. 예상과 달리 칸트는 악 자체가 선하다고까지 주장한다. 칸트는 자연의 역사는 신의 작품이라서 선에서 시작하지만, 자유의 역사는 이성의 전개이긴 해도 인간의 작품이라서 악에서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루소도 신의 작품으로서 자연은 선에서 시작하지만, 문화 발전 속에서 이루어지는 선의 심화는 동시에 악의 실현과 심화를 야기하기 때문에 문화와 역사 발전을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그렇다고 루소가 아예 원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건 아니다. 루소는 인간의 문화적 성과와 도덕적 자유를 역설했고, 교육의 목표를 노동을 존중하며 조국을 사랑하는 자각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루소의 문명관에 따르면 역사의 발전은 선의 전개이며 동시에 악의 전개이다. 이는 칸트와 헤겔에서도 나타나는 경과이다. 역사철학이나 종교철학에서 관련된 단초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칸트는 종교철학에서 인간의 소질을 동물성 소질, 인간성 소질, 인격성 소질로 나눈다. 인간성 소질에서는 비교욕구로서 동등욕구와 우월욕구가 있는데, 이 욕구가 발휘되는 과정에서 문화적 악이 발생한다고 한다.


문화적 악은 타인보다 우월해지고자 하는 일종의 경쟁심이며, 경쟁심은 개인과 사회의 발전을 낳기 때문에 그 자체로 악하다고만 할 수 없다. 실제로 칸트는 애덤 스미스와 비슷한 시대에 활동하며 시장경제를 정언명령이 지배하는 이상사회로 간주한 바 있다. 어디까지나 극단적으로 될 때 사회에 부정적 결과를 낳는 것이다.


칸트의 악은 그저 악과 대립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실현에 도움이 되는 악이다. 악덕에 대한 충동 또한 악의 원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악은 문화적 악덕, 반사회적 사회성으로 나타난다. 문화적 악의 긍정성은 칸트의 역사철학에서 반사회적 사회성과 맥을 같이 한다. 문화와 역사가 발전하는데 문화적 악이 작용한다. 문화적 악으로 인해 사회화, 문화화, 문명화가 진행되며, 칸트는 문화화와 동시에 도덕화가 가능한지를 타진한다. 악의 심화가 곧 도덕의 발전이라고 할 만한 측면이 나타난다.


물론 칸트는 역사철학에서 루소의 선악관을 비판하면서 문화적 악과 구분되는 도덕성과 선 자체를 강조한다. 그러나 상기와 같이 역사적 삶에서 악의 전개는 필수불가결하다. 문화적 악은 한 사회가 시민사회로 발전하는 원동력일 뿐 아니라, 세계사가 시민 사회적 삶의 질서를 만드는 힘이 된다.


세계사에서는 경쟁심이 전쟁으로 나타난다. 칸트는 이것을 자연의 전개로 간주한다. 헤겔은 역사철학에서 이를 이성의 전개, 절대정신의 전개라는 문맥에서 주장하기 때문에 논의가 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청년 헤겔도 루소의 문명관에서 나오는 선악관을 배태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감성적 장치를 통해 이성적 요소를 야기하는 것이며, 헤겔은 역사철학에서 영웅의 열정을 예로 든다.


헤겔은 악 자체에 천착하지도, 악을 선한 것으로 간주하지도 않지만, 청년기에는 악을 인간이 지닌 선입견, 편견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루소와의 사상사적 영향 관계 속에서 선악의 전개와 심화라는 틀이 헤겔에게 작용하고 있으며, 이성성의 심화를 위해 이와 모순되는 비이성적, 반이성적 대립항이 필요하다. 대립의 심화와 모순의 첨예화를 통해 새로운 통찰과 화해를 이뤄나가는 과정에서 헤겔도 루소적 모습을 내비치기는 한다. 그러나 악에 대한 이율배반적 태도를 해소하려고 하는 헤겔은 이성의 실현을 위한 반이성과의 대립, 반이성과 이성의 통일 및 새로운 지양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초합리적 지평을 마련하고 있다.


헤겔에게 역사를 발전시키는 개인은 역사적 영웅이다. 영웅은 철학자가 아니라 실천가, 정치가이므로 이념 일반에 관한 의식은 없다. 그러나 시대요구에 대한 통찰을 지니며, 그런 면에서 범인보다 탁월하다. 이때 정치가는 자신의 정복욕과 같은 일종의 열정, 성벽을 통해 변화를 야기하기 때문에 영웅을 도덕적 인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시대방향을 탁월하게 통찰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비도덕적 정열은 오히려 역사발전을 야기하며, 법과 제도 속에서 사회적 선이 실현되는 기제가 된다.


헤겔은 영웅에게 이러한 탁월함을 적용하지만, 그러나 영웅의 혜안은 선각자의 정신으로 나타나며, 선각자의 정신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내적인 혼이다. 즉 역사적 주체의 보편성을 지닌다. 각 개인은 역사적 주체의 보편성을 무의식적 내면성으로 지니며, 이것을 의식적 자각으로 끌어내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무의식적 내면성의 외화는 문화적 악처럼 개인의 열정의 강화이다. 이것은 세계사적 전개에서는 전쟁의 본격화로 나타나며, 새로운 제도와 법적 질서는 전쟁으로 인해 구축되고 전쟁은 새로운 세계를 열리게 한다. 새로운 세계는 신의 섭리나 자연의 전개가 아니라 이성의 전개다. 절대이성의 간사한 꾀는 개인들의 무의식적 내면성 안에서 악한 정열의 발휘를 기다려서 자신을 외화시킨다.


그래서 헤겔에게 선과 악은 동등하지 않으면서도 동등하다는 모순된 구조 속에서 전개된다. 선은 자기를 실현하는 자기의식이지만, 악은 정신의 직접적 존재의 내면화이며 자기타자화이다. 선과 악은 내면화와 타자화와 자기지양의 이중적 구조를 통해 초합리적 이성 개념으로 진행되는데, 헤겔은 그러한 이중적 구조를 역사의 문화적 양태를 통해 전개한다.



(2) 카시러의 상징형식 연구



➀ 상징에 대한 카시러의 독창적인 기획



에른스트 카시러의 《인문학의 구조 내에서 상징형식 개념Der Begriff der symbolischen Form im Aufbau der Geisteswissenschaften》은 그의 철학 기획 ‘상징형식 철학’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카시러는 그가 교수로 부임한 함부르크 대학의 바르부르크 도서관에서 이를 강연하고 1923년에 이를 『상징형식 철학Philosophie der symbolischen Formen』이란 책으로 출판했다. 이 도서관을 구축한 예술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는 철학이나 예술 뿐 아니라 점성학, 마술에 관련된 책, 그 외 그림이나 다양한 형태의 기록물을 수집했다. 여기서 카시러는 장서의 내용과 수집의 특이성을 이해하여 앞서 말한 철학 기획을 시도했다.


카시러는 독일 철학계에서 신칸트학파로 분류되는 학자이다. 신칸트학파는 칸트의 순수 이성에 의한 과학적 인식에 다시금 초점을 맞추어 철학을 주관적 관념주의에서 구출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흐름인 현상학, 실존주의 그리고 생철학에 의해 입지를 상실했고 철학 내에서 전통이 단절되었다. 한국에서 그에 대한 관심이 저조한 이유도 그런 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카시러는 1920년대 초 이미 순수 논리에 입각한 철학의 재구축이라는 과제를 확장하여 칸트가 ‘판단력’이라 부른 인간의 다른 정신적 능력에도 ‘비판철학적’ 방법을 통해 그 논리를 부여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이는 신칸트학파가 추구하던 외연을 넘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칸트에게도 이론의 중점은, 새로운 긍정적인 기본 통찰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론이 부정적 결과로 포함하고 있는 것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칸트의 핵심적 사고는 인식의 진정한 객관성이 어떻게 정신의 자유로운 자발성 속에서 기초하고 그 안에서 확실해지는가를 증명하는 것이기보다는, ‘물 자체Ding an sich’의 인식 불가능성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여기서 물자체의 인식을 단번에 끊어버린 그 날카로운 단면은 오히려 물자체의 인식이 그 인식의 확고한 근거를 자신 속에서 발견했다는 사실에 대한 다른 표현일 뿐이다. 헤겔에 따르자면, ‘물 자체’는 ‘무가치한 추상화caput mortuum der Abstraktion’일 뿐이다. 곧 인식이 방향지어질 수도 없고 더 이상 방향지어질 필요도 없는 목표의 부정적 표현일 뿐이다 ー 그러나 동시에 이 부정은 새롭고 독특한 관점을 포함하고 있는데, 인식을 그 형식 안에 그리고 그 형식 법칙의 중심에 놓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인식을 단지 일반적 규정으로만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과 내에서 고찰할 때, 인식의 철학적 개념뿐만 아니라 이 개념의 주조와 개별 학문의 구체적 형태를 주시할 때, 같은 유형의 전환점이 우리에게 나타난다. 각각의 개별 학문은 발전 과정에서 점점 더 세련되고 고유한 개념 도구를 창안해내고 그와 동시에 점점 더 개념 수단을 그 자체로, 지적 상징으로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 > - 《인문학의 구조 내에서 상징형식 개념》 (E. Cassirer 著, 오향미 譯) 中


『상징형식 철학』의 출간과 더불어 카시러는 과학적 인식뿐 아니라 언어와 신화, 종교, 예술의 가능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문화철학의 길을 본격적으로 가기 시작한다. 자연주의적 문화철학이 유럽 문화의 위기를 야기한 데 반해 인본주의적 문화철학은 인류 문화의 미래는 예견될 수 없음을, 인간에게는 단지 자신이 가진 ‘상징 형성’ 능력을 통해 미래의 문화를 자신의 의지대로 만들어 갈 가능성과 책임이 있다고 그는 역설한다. 한편 그는 자연과학이든 문화과학이든 결국 대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세계 인식의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통일적으로 다룰 수 있고, 통일적으로 다루어야 두 분과 간의 단절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헤르츠Heinrich Hertz는 이렇게 강조했다. “(…) 우리는 형상의 사고 필연적인 결과에 따라 다시 계속해서 모사된 대상의 자연 필연적인 결과 방식으로 외적 대상의 내적인 허상 또는 상징을 만든다.” 그러니까 이때 대상의 외적 모사의 자리에 대상의 ‘내적 허상’, 수학적-물리학적 상징이 나타난다. 그리고 물리학의 상징에 제시했던 요구는 이 상징들이 개별적이고 감각적으로 보이는 존재를 모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연결의 힘으로, 형상의 사고 필연적인 결합의 힘으로 경험 전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지배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서로 결합하라는 것이었다. 현대 물리학의 세계상을 들여다보면, 물리학적 인식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견해가 세계상을 위해 얼마나 생산적으로 작용하는지 알 수 있다. 철학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양하게 상대성 이론의 결과를 상당 부분 낯설어하고 당황스러워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상대성 이론 안에서 형성되어 나오는 물리학적 상징의 고유한 성질을 세련되고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철학이 여기에 사용된 상징들, 예를 들면 리만식 공간이라는 상징을, 직접 주어진 실재에 대한 표현이거나 단순한 허구로 보는 것 외에 다른 가능성을 알지 못하는 한, 철학은 상대성 원리의 방법적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 > - 《인문학의 구조 내에서 상징형식 개념》 (E. Cassirer 著, 오향미 譯) 中


카시러의 통일적 방법이란 과학을 유일한 객관적 인식의 형식이 아니라 여러 세계 인식의 형식, 즉 신화와 종교와 예술과 같은 형식들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것이다. 상징형식 철학에 따르면 신화와 종교와 예술도 내적 일관성과 법칙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과학과는 다르지만 엄연한 객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엄격히 말해서 우리는 자연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식에 의해 구성된 문화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이 문화 세계는 일정한 생성 법칙으로 구성된 다양한 상징형식들의 세계이다. 실증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최고로 발전한 어떤 하나의 방법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다양하게 분화되어 온 모든 상징 형식들 전체로만 이 세계를 더욱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상징형식’에 대한 철학적 고찰은 결코 개별 상징형식을 모두 일정한 정신적 구조와 특정한 표현 수단으로 서술하는 것에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오히려 이 형식들의 상호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다. 이 관계는 상징형식들의 대립만큼 대응에서도, 반발만큼 흡인력에서도 형성된다. 이 같은 방식의 고찰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범위에서 개별적인 문제를 하나 더 들어보겠다. 신화적인 세계 해석과 과학적인 세계 해석을 비교해보면, 이 두 가지는 한편에서는 사고의 최고 객관적 결정성에 의해, 다른 한편에서는 단순한 환상적 기분과 개인적 자의가 통용되는 것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신화도 내적으로 완결된 형식을 가지며, 형성되는 과정에는 온갖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성 자체에서는 일정한 법칙을 보여준다. 적어도 이 [신화]형식은 전적으로 환상이나 단순한 감정을 자극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그 밖에 매우 확실하고 지적인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 신화적 사고는 논리적-과학적 사고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범주Kategorie’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기본적이고 지배적인 범주는 신화적 사고 속에서도 유효하게 증명되는 인과성의 범주다. 신화에서 인과성의 일반적 개념, 곧 ‘원인’과 ‘결과’라는 단순한 관계의 사고가 절대로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은, 세계를 구분하여 ‘설명’하려는 지속적인 경향 속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우주진화론과 신의 계보학인 신화적 세계의 전체를 규정한다. 어떤 개별적 사물, 곧 해와 달, 인간 또는 동물과 식물의 종種의 신화적 ‘발생’을 증명하는 수많은 신화적 동화는 하위 단계에서도 이런 기본 성향이 얼마나 깊이 신화적 사고 속에 뿌리박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이 같은 인과성의 형식이 아니라 인과성의 특별한 방향과 형태가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존재와 생성의 신화적 개념을 과학적 개념과 원칙적으로 구분 짓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화는 아직도 인과적 사고에 머물고 있고, 특히 신화적 사고를 특징 짓고 결정하는 ‘복합적 사고’ 형식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 - 《인문학의 구조 내에서 상징형식 개념》 (E. Cassirer 著, 오향미 譯) 中


상징형식은 무한히 만들어지고 분화해가며, 남는 건 어느 형식이 어느 시대를 주도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문화의 방향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듯 어느 형식으로 시대를 읽어낼 것이냐 하는 것도 카시러에 따르면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이자 과제다.


과학적 인식은 분명 근대 서구 문화를 주도한 문화형식이지만, 그럼에도 종교와 예술의 역할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신화와 종교와 예술의 형식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하며 세계를 이루어 왔다. 상징형식 철학에 따르면 서구 중심적 문화형식의 서열화는 근거가 없다. 종교와 예술을 인정하듯 인도와 아프리카의 신화적, 종교적 문화에도 그 의의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 20세기 초 문화인류학이 비서구의 비문명적 문명에 찬사를 보냈다면 그것도 카시러에게는 서구의 과학지상주의만큼이나 지나친 것이다. 문화형식은 그렇게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강조점을 갖고 있을 뿐 우열의 문제가 아니다.



➁ 상징을 통한 인간 세계의 이해



카시러는 자신의 문화철학을 전개하면서 먼저 그 밑바탕이 되는 인간관을 정리하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인정되어 오던 인간에 대한 정의, 즉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고전적 정의를 새롭게 수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성’이라는 관점은 인간의 자기인식 문제를 해결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혼란과 위기, 사상의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카시러는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그는 ‘상징’이라는 틀을 통해 자기인식의 문제, 더 나아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답하려는 것이다.


카시러가 ‘상징’ 개념을 차용한 생물학자 야코프 윅스퀼Jakob von Uexküll은 해부학적 구조에 따라 모든 생명체에는 메르크네츠Merknetz와 비르크네츠Wirknetz, 즉 인지계통과 작용계통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두 계통의 협동과 평형이 없으면 유기체는 살아남을 수 없다. 카시러는 인간 세계도 기본적으로 이 두 계통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인간 세계에서만 나타나는 또 하나의 새로운 특징이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상징계통’이라는 제3의 연결물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더 넓은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고, ‘새로운 차원’ 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느리고 복잡한 사고 과정에 의해 지체되는 인간 반응은 상징 계통을 통해 한갓 물리적 우주를 넘어 상징적 우주에서도 살 수 있게 되었다. 언어, 예술, 종교, 역사, 과학은 이러한 상징적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들로, 이것들은 상징의 그물을 짜고 있는 가지각색의 실이자 인간 경험의 엉클어진 거미줄이라고 카시러는 말한다.


카시러에 따르면 인간은 언어적 형식, 예술적 심상, 신화적 상징, 종교적 의식에 깊게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인위적 매개물의 개입에 의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또 알 수 없다. 인간의 지식은 본성상 ‘상징적 지식symbolic knowledge’으로, 이것이 인간 인식의 힘과 한계를 특정 짓는다. 그리고 상징적 사고 안에서는 현실적인 것과 가능적인 것, 실제로 있는 사물과 이상적 사물 사이에 날카로운 구별을 짓는 것이 불가피하다.


인간의 자연적 타성을 극복하고 그에게 새로운 능력, 자신의 우주를 끊임없이 재형성하도록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 ‘상징적 사고’라 카시러는 역설하는 한편, ‘이성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정의, ‘합리성’ 개념의 고유한 인간 활동의 모습도 인정한다. 그러나 언어의 경우 가끔씩 이성이나 이성의 원천과 동일시되어 왔음을 카시러는 지적한다. 이것이 전 분야에 걸쳐 고루 들어맞지는 않는다. 개념적 언어가 있으면 정서적 언어도 있고, 논리적・과학적 언어가 있으면 시적 상상의 언어도 있다.


자기검토와 자기인식, ‘너 자신을 알라’, 개인적 인간을 문제 삼은 소크라테스에 대해 플라톤은 인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사회생활과 정치생활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본성은 개인의 경험 속에는 작은 글씨로 씌어 있으나, ‘국가’ 생활 속에는 굵은 글씨로 씌어 있다. 카시러는 한 발 더 나아가, 정치 생활이나 국가만이 인간의 공공적 생존 형태가 아니고, 오히려 ‘문화’를 통해 인간이 정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국가보다도 더 오랜 생명을 지니고 있고 인간의 생명력을 나타내고 있다. ‘문화의 본성’에서 비로소 ‘인간의 본성’은 파악된다.


상징형식의 철학은 만일 인간의 본성 혹은 본질에 관한 그 어떤 정의가 있다면, 이 정의는 오직 ‘기능적인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고 ‘실체적인 것’으로서 이해될 수는 없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기능적’이란, 관계, 작용, 행위의 측면에서 이해되고 규정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언어, 예술, 신화, 종교는 상징 개념이라는 하나의 공통적 유대에 의해 기능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모든 인간의 활동들을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서 이해할 때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온갖 형태의 상징들 배후 깊숙이 파고들어가 그 근본 기능을 밝히는 동시에 그 모든 기능의 공통되는 근원을 찾는 것, 이것이 카시러 상징형식 철학의 과제이다. 신화의 창작, 종교적 의식, 예술 작품, 과학적 학설의 고찰에서 자족해버리면 이를 하나의 공통분모로 환원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철학의 종합에서 추구할 것은 행동의 통일이며 창조적 과정의 통일이다. 동시적, 통시적으로 서로 다른 문화의 ‘인간성’에서 기대하는 것은 형식들의 차이와 대립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되는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믿음이다. 이들이 합일되고 조화되는 하나의 두드러진 모습, 하나의 보편적 성격을 반드시 발견하리라고 카시러는 기대한다.


카시러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 아닌 ‘상징적 동물’이다. 상징이란 첫째로 정신적 의미가 함축된 일체의 감각적 현상들을 말한다. 둘째로 관계적 사고를 근거로 하는 상징은 그것이 의미하는 대상의 총체적 경험 내용을 재현한다는 성격을 가진다. 카시러 문화철학에서 ‘상징적 기능’은 세계를 향한 우리의 객관화 관점이나 의미 실현 방향들의 차이에 의해 나타나게 된다. 의식의 상징적 기능은 ‘표현적 기능’, ‘직관적 기능’, 그리고 ‘개념적 기능’으로 구분되는데, 이러한 기능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 세계들, 즉 신화, 언어, 과학의 세계가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된다.


카시러의 상징이론은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요약되는데, 첫째, 인간의 세계 이해는 우리가 만들어 낸 상징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 둘째, 모든 상징은 우리 의식의 선험적 능력인 ‘상징적 기능’과 그 형식인 ‘상징적 형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여기서 상징적 기능이라 함은 우리의 의식에 주어진 경험 내용을 조직화하고 의미화하는 구성적 종합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상징적 형식은 상징적 기능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들, 예컨대 신화, 예술, 언어, 과학 등등을 말한다. 셋째, 모든 상징은 인간의 단순한 의사소통의 매개체가 아니라 인식 행위의 산물이고, 세계 이해를 향한 인간의 관점을 형성한다.     



➂ 인간의 근원을 환기하고자 하는 카시러 철학



카시러의 상징 개념에 기초한 ‘상징적 인간관’은 그의 문화철학 전체를 꿰뚫고 있는 핵심 관점으로서 신화, 예술, 언어, 역사, 과학에 대한 논의 속에서 시종일관 나타나고 있다. 카시러는 현대인이 이룩해 놓은 이성 중심의, 합리성 중심의 과학적 사고가 인간 삶의 질적인 변화와 풍요를 어느 정도 가져다 준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에 반해 현대인이 상실해 버리고 망각하고 있는 여러 근원적 측면을 이러한 관점을 통해 지적하고 있다.


즉 카시러는 현대인들의 사고 속에서 평가절하되고 있는 신화적 사고, 예술적 직관, 상징, 상상력 등을 통해 보다 다양하고 폭넓은 인간 이해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적 사고가 현실을 기술하고 설명할 때 대개 분류와 체계화의 방법을 사용한다. 이러다 보면 생명은 서로 확연히 구별되어 종種, 속屬, 과科 등으로 쪼개진다. 신화에서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신화에서의 생명관은 종합적이지 분석적이지 않다. 신화에서의 생명은 끊긴 데 없는 하나의 연속적 전체로서 느껴진다.


카시러는 신화적 사고를 했던 원시인들 심성의 특징을 ‘논리’가 아닌 ‘일반적 생활 감정’에서 찾고 있다. 원시인의 자연관은 한마디로 공감적이다. 그들이 사물들 간 차이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생명의 연대성에 대한 깊은 감정 내지 확신으로 말미암아 이 차이들은 망각된다. 이 속에서 인간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그저 다른 온갖 형태의 생명들과의 혈연의 일부일 뿐이다.     

이처럼 카시러가 신화적 사고의 순기능을 부각하는 이유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산물인 문화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고, 특히 이성 중심의 과학적 사고방식에 길들여져 있는 현대인의 인식 방식, 삶의 방식에 신선한 충격과 반성을 제공하리라는 기대에서 비롯된다.


물론 신화에는 부정적인 역기능 역시 존재한다. 정치는 항상 ‘신화적 사고’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런 점에서 신화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우리의 삶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국가의 신화Vom Mythus des Staates』에서 카시러는 파시즘과 같은 유형의 현대 전체주의 국가나 사회는 ‘정치적 신화’를 통해 인간을 정복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20세기 정치적 신화들은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불안전한 집단을 효과적으로 묶어서 함께 단단하게 결속시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고안되어 집단적으로 투입된 것이다.


얼핏 보면 철학은 정치적 신화를 파괴하는 데까진 힘이 미치지 못하는 듯 보인다. 『법철학Grundlinien der Philosophie』에서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ämmerung ihren Flug.)”는 유명한 문장을 남긴다. 철학자의 사색과 사변은 늘 현실의 생성, 변화, 소멸보다 한 발짝 뒤에 있다는, 어찌 보면 다분히 골계적인 통찰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에 쉽게 동조한다면, 그리고 헤겔의 이 말이 참이라면, 철학은 하나의 절대적 정적주의 즉 인간의 역사적 생활에 대해 전적으로 수동적 태도를 취하게 될 뿐이다.


그저 주어진 역사적 상황을 받아들이고 설명하는, 상황 앞에 굴복할 뿐인 철학은 일종의 ‘사변적 태만’을 범하는 셈이다. 카시러는 철학의 사변적 태만은 인간의 문화적, 사회적 생활에서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카시러는 인간의 다양한 문화 현상들에서 공통된 특징을 읽어 내는 문화철학의 논의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문화를 창조하고 향유하는 주체인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의 삶을 철저하게 억압하고 강제하는 ‘정치적 신화들’에 대해 그것의 기원, 구조, 방법, 수법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3) 엘리아데의 성聖과 속俗



➀ 일반적인 성과 속의 문제들



- 성과 속은 반대되는 개념이다. 인류 초기부터 있어온 성과 속을 구분하는 생각은 가장 원초적인 종교적 개념이자 종교적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성sacred은 sacrum을 어원으로 하여 나온 말이다. 로마 시대에 이는 신이나 신의 힘에 속해 있음을 뜻했다. 제의祭儀 등을 통해 막연하지만 강력하게 그 힘을 느끼는 데서 성의 실재를 인식함과 뜻이 통한다. 한편 속profane의 어원은 profanum인데, 이는 ‘성전 경내 앞’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나온 말로 경내fanum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는 관례와 어원상 관계가 있다.


즉 초기부터 속이라는 말은 장소를 나타내는 말과 관련되어 있었고, 성sacrum이라는 말도 일종의 종교적 행위를 하는 장소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으므로 sacrum과 profanum은 둘 다 특별한 의미의 장소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원시인들에게는 일찍부터 공간이 항상 균질적이지 않고, 접근하기 어려운 성스러운 공간이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시인이라 해도 인간인 한 종교적 인간일 수밖에 없다. 종교적 인간은 성과 속을 구분하고 가능한 한 성에 가까이 있고자 하며, 인간 조건의 한계를 느끼고 막연하지만 구원을 갈망한다. 고대의 인간들은 병이나 재난의 원인을 성 혹은 완전성(전체성)에서 분리된 결과라고 보고 있다. 이것은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의 운명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구원이란 속에서 성으로, 분열에서 전체성으로 회귀하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원래부터 있었던 완전성에서 분리되었으므로 그 시원(완전성)으로 복귀하는 것이 구원이 된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성의 현상은 대단히 다양하지만 속에서 성을 회복해 내려는 태도는 공통적이다.


- 성과 속은 보편적인 종교 현상이므로 인문학자들의 여러 해석이 축적되어 있다. 성과 속의 기원, 그 사회적 기능, 심리학적 근거 등의 입장에서 많은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에밀 뒤르켐David Émile Durkheim과 막스 베버Max Weber는 성의 발생을 설명할 때 개인보다는 사회적 실재성을 더 중요시한다.


뒤르켐에 의하면 모든 종교적 신앙은 하나의 공통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뒤르켐은 성을 창조하는 것은 사회 자체라고 말한다. 사람들의 기본적인 열망, 그들이 감동을 받는 기본적인 열망이나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수단은, 그것이 사람이든 대상이든 혹은 하나의 아이디어든 속과 분리되어 신격화되는 경향이 있다. 사회의 힘은 성을 발생시키는 원천이 되고 그 성의 가장 원시적인 시스템을 토테미즘이라고 부른다.


또한 뒤르켐에게, 성과 속이라는 분류의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고찰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어느 원시 민족이나 이러한 분류를 하는데, 하나는 성스러움과 힘의 원천으로, 다른 것은 속되거나 파괴의 원천으로 분류한다. 이렇게 분류를 하는 종족 내 사람들은 그것의 파괴를 마치 신성 모독처럼 생각한다. 종족 내에서 분류하는 모든 것은 그 종족 내에서 동일한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우주와 연결된 상태에서의 분류는 종교 시스템 안에서 신성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물이 우주와 연결되어 자동으로 성이 되진 않는다. 분류의 관념은 인간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고, 논리적 사고가 채택한 기본적인 패턴을 제공해 주는 것도 사회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이 분류를 통해 우주에 연결됨으로써 성스러운 것이 되지는 않는다. 속된 사물의 세계는 공간적・시간적으로 무한하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는 아직도 속적이다. 어떤 사물이 성이 되는 것은 인간이 그것을 일상적 사용에서 성으로 옮겨갈 때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속된 존재이므로 성스러운 사람을 접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터부의 침해는 결과적으로 탈신성화나 속화에 이르게 되고 병과 죽음을 가져오는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 종합하자면 결국 성의 기원은 사회 자체에 있다는 명제를 반영하는 사상이라 하겠다.


베버는 주관적인 종교 행위에서 성과 속의 의미를 보았다. 자신의 사회학의 초점을 행위의 ‘의미 연관’에 둔 베버는, 행위를 해석하기 위해서 사회학자가 개인적 측면에서 특별한 행위의 결과를 살피지만 그것과의 연관으로써 사회적 구조를 동시에 보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구조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행위의 표상이다.


어떤 행위에 대한 해석은 집단적인 구조가 매일의 사고에 스며들어 있음을 전제로 한다. 매일의 사고는 부분적으로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의 ‘개념’일 수 있고, 또한 부분적으로는 행위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그 행위 주체가 열망하는 어떤 것일 수 있다. 행위의 바탕이 되는 개념은 사회적인 것이지만 행위하는 주체의 방식에 의해 가장 강력히 수용되어 가끔 지배적인 인과적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은 속성은 종교적・주술적인 것이 동기가 된 공동 행위에 적용될 때 한층 분명해진다. 종교적 혹은 주술적인 것은 근본적으로 주관적인 개인의 체험일 수밖에 없다. 즉 의미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점차적으로 의미의 부富, 궁극적으로 상징적인 것을 획득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종교는 그들의 상징에서 혁신보다는 오히려 도그마를 굳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그 상징성을 위협하는 것은 주술적 효과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이 되고, 조상령의 분노를 사거나 신들의 분노를 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의례나 예술, 제스처, 춤, 음악, 글, 축귀逐鬼, 의료와 같은 행위에서 종교적인 전형典型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 덕택에 종교적 개념은 또한 행위에서 전형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뒤르켐과는 다른 각도에서 성을 해석하고 있지만 베버 역시 성의 사회적 근거를 이러한 상징성에서 찾고 있는 셈이다.


-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대상의 성격, 행위, 사건, 관계, 인물들 가운데서 성으로 변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영웅적이거나 호국적인 인물뿐 아니라 역사적 유물이나 사건 등 모든 것이 성의 차원으로 변모된다. 성은 형이상학적・영원적・초역사적인 것으로서 역사를 초월하는데, 상징을 만드는 힘으로부터 끊임없이 새롭게 형성된 성이 힘의 객관화마저 초월하는 경향을 갖기도 한다. 종교의 역사에는 속에서 생겨나온 성의 낡은 창조의 사례가 많이 있다.


 성과 속이 동시적으로 등장하느냐, 하나가 다른 하나의 계기냐 하는 문제는 역사적으로 답변하기 어렵다. 현상학이나 종교학도 형편이 크게 다르지 않다. 성이 인간의 등장과 함께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할 경우에도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우린 성의 기원의 문제를 다시 한 번 거론해보아야 한다. 가능한 답변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과 속은 동시적으로 생겨나온 것이라는 관점, 둘째는 성이 속에서 승화된 것이라는 관점, 셋째는 원래는 모두 성이었다는 범성凡聖적 관점이다. 범성적 관점이란, 성이 전세계를 감싸거나 통일된 전체성이었는데 일종의 원초적 속화를 통하여 점차적으로 속으로 전개되었다는 관점이다.


성과 속은 동시적으로 생겨나온 것이라는 관점을 뒷받침하려는 사람들은 중기 구석기 시대부터 보이는 동굴을 예로 든다. 동굴은 일상생활에서 격리된 성소이다. 접근성이 낮고 발견하기 어렵다. 동굴 속에는 예술 작품이라 할 만한 종교적 유물들이 남아 있다. 사람의 뼈나 해골이 있지만 음식 찌꺼기마냥 아무렇게나 버린 형태는 아니다. 굴 밖은 앉고 잠자고 먹는 공간이요 속된 곳으로서 한눈에 들어온다. 굴 안에 들어감으로써 속에서 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된다. 이를 보면 성과 속이 나란히 있으면서도 구분되어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 비유용성의 관점에서는 굴 안쪽에서 이루어진 것이 종교적 행위의 상징성 말고 어떤 실용적인 목적을 가진 행위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 전혀 없다. 실용성을 염두에 둔다면 비나 눈이나 맹수를 피할 곳을 그렇게 접근성이 낮은 곳에 정할 리가 없다.


성이 속에서 승화된 것이라는 관점은 인간이 아직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 때를 상정한다. 프레이저James George Frazer에 따르면 전과학前科學으로서의 주술은 결핍을 증명하고 인간은 종교에서 도피처를 찾아야만 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원래 인간의 사회적 실존이 매우 원시적이었을 때 의식은 전적으로 실재적 물질에 흡수되어 있었고 그 당시에는 종교적 추상을 낳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다만 사냥과 농경을 통해 음식을 얻으려 할 때 주술이 필요해졌는데, 그 주술과 함께 종교가 진화하였고 계층적 사회구조에 의하여 그것이 강화되고 지지되었다고 한다. 마르크스의 종교론은 물질적 토대가 기본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종교의 허구성이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분트Wilhelm Maximilian Wundt에 따르면, 성스러운 것의 기원은 불순의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처음에 일상생활은 속된 것과 성스러운 것이 구분되지 않았으나 어느 때 터부 혹은 손에 대는 것을 꺼려 하는 대상이 생겨났는데, 그것이 종교적 영역에 들어가고, 마침내 성의 현존 안에서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분화되고 악마적인 것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성스러운 신격에 거역한 모든 것은 불순한 것으로 생각하는 관념이 생겨났다. 점차적으로 불순은 성과 반대되는 것으로 기능하게 되고 성과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입장의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를 이전 글 《관능 소설의 인문사회학적 접근》( https://brunch.co.kr/@erasmut/41 )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터부는 근친상간을 거역하는 것에서 생겨났다. 터부는 원초적 아버지의 의지에서 유래한다. 그가 살해된 후에 아들은 그 원초적 아버지에 대한 관계에서 양극 감정이 형성되고 마침내 숭배의 감정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같은 숭배의 대상은 원초적 아버지의 변형이자 심리적 실재이다. 살해의 배후에 아들의 아버지의 거세라는 관념이 배태되었는데, 그것은 상징적으로 할례에 의해 대치되었다. 이스라엘에서 남성 자손에게 할례를 하는 것은 그 백성을 성별하는 실제적인 행동을 표상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원래는 모두 성이었다는 범성적인 관점을 살펴보자. 이 관점은 종교적 숭배, 마술, 의료, 그리고 예언, 법의 수여자, 윤리, 그리고 사제, 왕, 샤먼과 같은 것들이 하나의 성스러운 단일성 아래 통합된다고 본다. 랭Andrew Lang에서 슈미트Carl Schmitt에 이르는 사상가들이 이러한 관점을 표명하였다. 근본적인 관점은 원시 일신교에서 도출되어 나온다. 유일한 하느님이 모든 민족과 사회에 동일하게 계시했으므로 성 아닌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속된 것이 독립적으로 될 수 있는 것은 원래의 성성聖性으로부터 차별화 과정이 이루어진 결과이다.



② 성스러운 것의 현현(聖顯)과 종교적 인간



이상 성과 속의 일반론을 살펴보았다. 이를 토대로 엘리아데의 성과 속의 특성을 지금부터 하나씩 주제별로 살펴보도록 하자.


- 먼저 세계와 성의 관계를 살펴보자. 성의 기원 문제는 엘리아데에게 별로 중요한 주제가 아니다. 엘리아데에게 성은 이미 인간이 바탕으로 삼고 있는 세계 그 자체이다. 히에로파니Hierophany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가 고안한 어휘로 한자어로는 성현聖顯이라 읽는다.


<인간이 성스러움을 아는 것은 그것이 속된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서 스스로를 현현하고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성스러운 것의 현현을 여기서는 성현(hierophany, 그리스어 hieros=신성한, phainomai=나타나다의 합성어)이라는 말로 불러본다. 이 말은 성현 이외의 어떤 것을 내포하지 않기 때문에 적절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어원적인 내용 가운데 있는 말, 즉 어떤 성스러운 것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 - 『성과 속』 (M. Eliade 著, 이은봉 譯) P.49


성스러운 것은 예를 들면 돌이나 나무 가운데서 나타날 수 있다. 이는 돌 그 자체, 나무 그 자체의 숭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스러운 돌, 성스러운 나무를 숭배하는 것은 그것이 성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미 그것은 돌이나 나무가 아닌 전혀 다른 어떤 성스러운 것을 나타낸다.


<종교적 인간에게 자연은 결코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종교적 의미로 충만해 있다. 이 사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주는 신의 창조물이고, 세계는 신들의 손으로 완성된 것이어서 성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를 들면, 신의 현존에 의해서 정화된 장소나 사물에 머무르는 경우와 같이 직접 신들과 교류하는 신성성만의 것은 아니다. 신들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행했다. 그들은 세계와 우주적 현상의 구조 그 자체 안에서 다양한 성의 양태를 현현한다.> - 『성과 속』 (M. Eliade 著, 이은봉 譯) P.121


세계는 (성스러운)존재의 다양한 양태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실존이자 코스모스인 세계는 신들의 작품인 피조물로 자신을 드러낸다. 하늘은 신의 초월성을 계시하며, 대지는 우주적인 어머니이자 양육자로서 자신을 나타낸다. 우주는 전체로서 실재적이고 살아 있고, 또한 성스러움을 지닌 유기체이다. 우주는 존재와 신성성의 여러 양태를 계시한다.


세계에 대한 엘리아데의 본질적 규정은 ‘본질이 존재를 앞선다’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대표 명제 ‘실존(존재)이 본질에 선행한다’와 정반대이다. 엘리아데에게 세계는 태초부터 성스러운 것이다. 그 저변에는 인간은 원래 종교적 인간이라는 신념이 있다. 즉 위에서 말한 범성적 태도가 엘리아데의 기본 입장이라 말할 수 있다.


단 그의 입장을 ‘이 세계 그 자체가 성이다’로 받아들이면 크게 오해하는 셈이다. 이는 범신론적 입장이지 범성적 입장이 아니다. 상기했듯 엘리아데는 (종교적) 인간이 세계에 있는 자연물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물을 통해 현현하는 성을 숭배한다고 말하고 있다.


『성과 속』서문에서 엘리아데는 루돌프 오토Rudolf Otto의 『성스러운 것』을 소개하며 그가 종교에서 합리적・사변적 요소를 배척하고 무엇보다도 종교의 비이성적인 측면에 관심을 집중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오토는 그의 다른 저서 『자연주의와 종교』에서 신과 세계(자연)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참고할 겸 인용해 보자.


<세계와 자연은 장엄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스러운' 것은 아니다! '자연 또는 신natura sive deus'는 도식은 역사적 맥락에서 각 개념들을 사용할 경우 신이라는 개념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용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존재시다. 완전하시고, 전적으로 독립적이시고, 자신 안에 거하시고, 불가결하시다. 자연은 전적으로 의존적이고 조건적이며 모든 상황에서 인간에게 "왜?"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완성된 존재이며 자연은 다양한 결과물을 내놓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있고 그 가능성이 좁은 범위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과) 진정 구별된다. 하나님은 제한적이지 않고 지속적인 스스로 전능하신 분이시며 완전한 지혜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신이 아니라 반신半神demigod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자연 또는 신'이라는 범신론의 신경信經은 좌초를 발생시킨다. 여기서 자연과 신은 단순한 동어반복이며 '신'은 '자연'의 새로운 이름으로 오용된다. '하나님'의 이름 아래 신실한 마음들이 경애하는 모든 위대한 관념들과 감정들을 '자연'과 '세계'로 바꿔 부르는 건 불가능하다.> -『자연주의와 종교』(R. Otto 著) 中


- 다음은 공간과 시간에 현현하는 성을 중심으로 몇 가지 사항을 정리해 보자. 종교적 인간에게는 공간이 균질하지 않다. 그는 공간 내부의 단절과 균열을 경험한다. 성스러운 공간─즉 그것만이 실재적이고 현실로 존재하는 공간─과 그 밖의 다른 공간,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무형태적인 넓은 공간 사이의 대립을 경험함으로써 그는 공간의 비균질성을 파악한다.


성스러운 것이 성현 속에서 그 스스로를 현현할 때, 그것은 공간의 균질성을 파괴할 뿐 아니라 무한히 넓은 주위의 비실재에 대립하는 절대적 실재를 계시한다. 성스러운 것의 현현은 세계를 존재론적으로 창조한다. 어떤 목표도 없고 방향성도 없는 무한히 균질적인 공간 가운데 하나의 절대적인 고정점, 하나의 중심이 성현을 통해 드러난다.


<종교적 인간에게 이 성스러운 공간의 발견─즉 계시─이 어느 정도의 실존적 가치를 지니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선 앞으로의 방향성이 없으면 어떤 일도 시작할 수 없고 어떤 일도 행할 수 없다. 즉 방향성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고정점을 획득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종교적 인간은 항상 ‘세계의 중심’에 거주처를 정하려고 노력한다. 세계 안에 살고자 한다면 세계를 창조해야만 한다─속된 공간의 균질성과 상대성의 혼돈 가운데서는 어떤 세계도 탄생할 수 없는 것이다. 고정점(중심)을 발견하고 투사하는 것은 세계 창조에 대응한다.> - 『성과 속』 (M. Eliade 著, 이은봉 譯) P.56


그래서 전통적인 인간들은 성에 가까이 살려고 한다. 원시인 및 모든 전근대적인 인간들에게 성스러운 것은 힘이며, 궁극적으로는 실재 그 자체를 의미한다. 성스러운 것은 존재Sein로 가득 차 있다. 성스러운 힘은 실재를 의미하며, 동시에 영원성과 효험을 의미한다. 존재하고자 하는 갈망, 실재에 참여하려는 갈망, 그리고 힘으로 충만해 있고자 하는 갈망은 종교적 인간의 열망의 근간을 이룬다.


다음은 속된 세계에서 성스러운 세계로 이행하며 두 세계를 분리하는 공간 연속성의 단절에 주목해보자. 성역 안에서는 속된 세계가 초월된다. 초기 문화 단계에서는 이 초월의 가능성이 다양한 출구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많은 종교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것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교회, 절 등의 종교 사원은 위를 향한 출구가 되고 신들의 세계와의 교류를 보증한다.


성스러운 공간에는 반드시 성현이 결부된다. 이로써 특정한 영역이 주위의 우주로부터 분리되고 질적으로 다른 곳이 된다. 신현神顯theophany이 어떤 장소를 정화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그 장소를 위로 열리게 하여 하나의 존재 양식에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 가는 역설적 이행점으로서 천상계와 교류함에 의한 것이다.


<성스러운 것은 실재적인 것 자체이며 동시에 힘이 있는 것이고 효험이 있으며 생명과 번식의 원천이다. 성스러움 가운데 살고자 하는 종교적 인간의 욕망은 순전히 주관적 경험의 상대성 가운데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실재 가운데 주거를 정하고, 환상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효험이 충만한 세계 안에 살고자 하는 욕망이다.> - 『성과 속』 (M. Eliade 著, 이은봉 譯) P.60     


즉 성은 위를 향한 출구이다. 성현이 공간이든 혹은 시간이든 그것을 드러내는 곳에는 위로 향한 출구가 있다. 그를 통해 종교적 인간은 하나의 존재 양식에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 옮겨 가기를, 바꿔 말하면 천상계와 교류하기를 기대한다. 성은 그것이 공간이든 시간이든 한번 획득하기만 하면 하늘로 열린 통로가 된다.


<성현이 한 지평에서 다른 지평으로의 돌파를 가져오는 곳에는 동시에 위(신의 세계) 혹은 아래(하계, 죽은 자의 세계)로 가는 출구가 성립하고 있다. 세 개의 우주 차원ー지상, 천상, 하계ー은 서로 교류한다. 방금 말한 바와 같이, 교류는 가끔 천상과 지상을 떠받들고 결합시키는, 옛날 하계에 기초를 두고 있는 세계축이라는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우주의 기둥은 오로지 우주의 중심에서만 서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거주할 수 있는 모든 세계는 그 기둥 주위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 『성과 속』 (M. Eliade 著, 이은봉 譯) P.66


성스러운 장소는 공간의 균질성의 단절을 가져온다. 이 단절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하계로) 하나의 우주 영역에서 다른 우주 영역으로 이행할 수 있게 하는 출구로 상징된다. 천상과의 교류는 기둥(우주의 기둥 universalis columna), 사다리(야곱의 사다리), 산, 나무, 넝쿨 등 여러 형상으로 상징되는데, 그것은 모두 우주축과 관계한다. 이 우주축의 주위에 ‘세계’(=우리의 세계)가 놓여 있다. 따라서 이 축은 ‘중앙에’, 즉 ‘대지의 배꼽’에 있으며, 세계의 중심이다.


모든 신앙은 ‘우리의 세계는 천상에 가장 가깝게 있기 때문에, 그리고 여기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하늘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성스러운 땅이고, 따라서 우리의 세계는 높은 장소다’라는 동일한 깊은 종교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우주론적 관점에서 이런 종교적 개념은 ‘우리의 것’인 특권적인 지역을 우주산의 정상에 투사하여 표현된다.


가능하면 중심에 가까이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매우 뿌리 깊은 것이지만 거기는 그렇게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고대의 전통적인 인간들도 그 성스러운 곳에 접하고자 부단한 노력을 하였는데 마치 샤먼이 엑스터시를 통해 성에 접촉하는 것과 같다. 전통적인 인간들도 그와 같은 엑스터시를 하고 있다는 예로서 엘리아데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자바 보로부두루 사원의 거대한 구조도 동일한 상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인공의 산으로 건설되었다. 이 사원에 오르는 것은 세계의 중심을 향하여 가는 엑스터시沒我의 여행과 같다. 순례자가 가장 높은 계단에 오르는 것을 통해 한 지평에서 다른 지평으로 넘어가는 것을 체험하게 되고, 속계를 초월한 ‘순수한 영역’으로 진입하게 된다.> - 『성과 속』 (M. Eliade 著, 이은봉 譯) P.69


고대인의 종교적 의례는 여러 가지 진기한 것이 많지만 그것을 이처럼 보편적 상징의 지평하에서 설명하는 것은 엘리아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폐쇄적인 사회의 종족이 벌이는 진기한 의례도 엘리아데의 상징 해석 앞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성스러운 공간을 잃어버린 현대 산업 사회의 인간들은 불행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현대 산업 사회의 주거를 기능적으로만 정의하는 것에서 우리는 공간의 세속화를 볼 수 있다. 엘리아데는 다음과 같이 밝히며 성을 잃어버린 공간의 속화를 설명한다.


<현대의 유명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정의에 따르면, 집이란 ‘거주하는 기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은 산업 사회에서 대량 생산되는 수많은 기계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의 이상적인 집이란 무엇보다도 기능적이어야 한다. 즉 집은 인간에게 노동과 그 노동을 보장하기 위한 휴식을 주어야 한다.> - 『성과 속』 (M. Eliade 著, 이은봉 譯) P.76


종교적 인간에게는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역시 균질적이거나 연속적인 것이 아니다. 한편에는 성스러운 시간, 축제의 시간(대부분 주기적인 것)의 기간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속된 시간, 즉 종교적인 의미가 없는 행위가 자리 잡고 있는 일상적인 시간 지속이 있다. 물론 공간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연속성의 단절이 일어난다.


성스러운 시간의 탄생과 재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전통적 고대 종교에서의 시간관이요 다른 하나는 기독교에서의 시간관이다. (그리스도 이전의)전통적인 고대적 시간관은 원환적 시간 혹은 가역적 시간관이라 한다. 이 시기에 여러 종교에서 주기적으로 재현된 성스러운 시간은 신화적 시간, 즉 역사적 과거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원초적 시간이다.


고대 문화의 종교적 인간에게 세계는 매년 갱신된다. 바꿔 말하면 세계는 새로운 해가 될 때마다 원초의 신성성을 회복한다. 창조주의 손에서 나온 신성성을 갖는 것이다. 우주 창조가 모든 창조의 원형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주 창조에서 발생한 우주적 시간은 모든 시간의 모범적 모델이다. 시간은 모든 존재의 다양한 범주에 속해 있으며, 어떤 것이 존재하기 전에는 그것에 고유한 시간도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창조가 시간의 시초에, 태초에 생겨났다고 상상한다.


<이 상징은 성전의 건축 기술적 구조에서 명료하게 표현되었다. 사원은 가장 뛰어난 성소이자 세계의 모상이므로 우주 전체를 성화하고 동시에 우주의 생명을 성화한다. 이 우주적 생명은 원형 궤도의 형태로 상상되고 해年와 동일시되었다. 해는 닫힌 원이었다. 그것은 처음과 끝을 갖고 있지만 새로운 해의 형태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신년이 올 때마다 하나의 ‘새로운’, ‘순수한’, ‘신성한’─아직 소모되지 않았기 때문에─시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 『성과 속』 (M. Eliade 著, 이은봉 譯) P.94


우주 창조를 해마다 반복함으로써 시간은 재생한다. 시간은 세계가 처음 등장한 최초의 때illud tempus와 일치하기 때문에 성스러운 시간으로 새롭게 시작한다. 인간은 세계의 종말과 재창조에 의례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최초의 때에 있게 되었다. 그는 새롭게 태어나 그 탄생의 순간과 마찬가지로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생명력의 저장고와 함께 다시 생존을 시작하는 것이다.


종교적 인간은 많은 경우에 우주 창조를 재현하는데, 이는 가장 완전한 신의 현현(성현)과 가장 강력한 창조는 세계 창조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주 창조 신화의 의례적 낭송은 치료할 때, 즉 인간 존재의 재생을 추구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낭송을 창하는 자는 주술적으로 ‘세계의 시작’, 우주 창조와 동시대에 있게 된다. 이는 기원의 시간으로의 회귀이며, 그 치료적 목적은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것, 즉 상징적인 재생이다.


<종교적 인간은 신들이 작업을 수행한 원초적인 시간을 재현하는 한에서 신들과 주기적으로 동시대에 놓이게 된다. 원시 문화 단계에서는 인간은 무엇을 하든지 모두 초인간적인 모델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축제의 시간 이외에서도 그의 행위와 몸짓은 신들이나 신화적 선조가 정립한 모범적인 모델을 모방한다. 그러나 이 모방은 점점 부정확한 것이 된다. 모델은 왜곡되거나 잊히기까지 한다. 신적인 행위의 주기적인 재현─간단히 말하면, 종교적 축제─은 그 모델의 신성에 관한 인간적 지식을 회복시켜 준다. 선박의 의례적인 수선, 얌의 의례적인 재배는 더 이상 성스러운 시간 말고 그에 상응하는 일과는 어떤 유사성도 없게 되었다. 그 행위들은 더욱 정확하게 되고, 신적인 모델에 더욱 가깝게 되었다. 또 그 행위들은 의례적이다. 즉 그들의 의도는 종교적이다.> - 『성과 속』 (M. Eliade 著, 이은봉 譯) P.102


성스러운 시간은 항상 동일한 ‘일련의 영원성’이다. 종교적 인간은 주기적으로 역사적 시간─속된 개인적 및 인간 관계적 사건의 총화로 구성된 시간─에서 탈출하여 성스러운 시간으로 침잠하고자 한다. 그에게 다른 시간, 모든 인간의 생존이 영위되는 일상적이고 속된 시간 지속은 그 성스러운 시간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신화적 사건의 영원한 현재만이 역사적 사건의 속된 시간 지속을 가능하게 한다.


종교적 인간은 신적인 모델에 접근하여 자기 자신을 만든다. 세속적인 인간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인간은 자신을 역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종교적 인간에게 관심 있는 유일한 역사는 신화가 계시하는 성스러운 역사, 즉 신들의 역사이다. 이에 반해서 세속적인 인간은 자신이 오직 인간의 역사로써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신적인 모델이 전혀 없이 여러 행위의 총체 자체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세속적인 인간은 믿는다. 반대로 종교적 인간은 초인간적 지평, 신화로 계시된 지평을 모델로 삼는다. 그들은 인간이 다만 신화의 가르침에 순응함으로써, 즉 신들을 모방함으로써만 진정한 인간이 된다고 믿는다.


<원시 및 고대 사회의 종교적 인간에게 모범적 행위의 영원한 반복과 신들에 의해 성화된 동일한 신화적인 기원의 시간의 영원한 회복은 어떤 비관적인 인생관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성스러운 것과 실재적인 것의 근원인 이 영원한 회귀 덕택에 인간 실존이 무無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되는 것이다. 우주의 종교성의 의미가 상실될 때 그 관점은 완전히 변화하게 된다. 이것은 좀 더 진보된 사회에서 선발된 지식인 계층이 전통 종교의 유형에서 분리되었을 때 실제로 생겨나는 일이다. 우주적 시간의 주기적인 성화는 불필요하고 무의미하게 된다. 더 이상 우주적 리듬을 통하여 신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모범적 행위를 반복하는 종교적 의미는 망각되어 버린다. 그러나 종교적 내용을 잃어버린 반복은 필연적으로 비관적인 인생관으로 이끌려간다.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시간이 더 이상 태초의 상황, 신비로 가득 찬 신들의 현존으로 회복하는 길이 되지 못할 때, 즉 탈신성화될 때 순환하는 시간은 두려운 모습을 하게 된다. 즉 그것은 영원히 반복하여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원환 주기가 된다.> - 『성과 속』 (M. Eliade 著, 이은봉 譯) P.116


고대 종교, 인도 및 그리스에서 형성된 영원 회귀의 신화적・철학적 개념에 대해 유대교는 더욱 혁신적인 개념을 고안해낸다. 유대교의 시간은 천지 창조와 재림주의 심판이라는 처음과 끝을 가지며, 순환하는 시간의 관념은 폐기되었다. 야훼는 다른 신들처럼 우주적 시간에서 현현하지 않고, 불가역적인 역사적 시간에서 현현한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은 역사적 시간의 평가에서 더욱 전진하는 계기가 된다. 신이 육화되어 (역사적으로 제약된)인간 실존을 받아들인 이래 역사는 성화될 가능성을 획득했다. 현대 기독교가 의례적 시간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가 살았고, 수난 받고, 부활한 그때로 되돌아간다. 그 시간은 신화적 시간이 아닌 본디오 빌라도 총독 하의 유대라는 역사적 시간이다. 이 사건은 더 이상 시간의 기원, 태초의 사건이 아니다. 역사 자체는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의 새로운 차원이 된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의 철학이 아니라 역사의 신학으로 인도한다. 왜냐하면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간여,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인간으로의 육화는 인류의 구원이라는 초역사적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은 유대-기독교적 이념을 이어받아 그것을 총체로서의 우주적 역사에 적용하고 있다. 즉 세계 정신은 부단히 역사적 사건 가운데서 현현하고 오로지 역사적 사건에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역사는 그 전체가 신현이 된다.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세계 정신이 그렇게 하기를 욕구하기 때문에 그것이 행한 그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여 20세기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역사 철학에의 길을 열어놓았다.> - 『성과 속』 (M. Eliade 著, 이은봉 譯) P.119~120



③ 진정한 의미에서 '비종교적 인간'은 없다



위에서 돌이나 나무의 비유를 든 대목을 기억할 것이다. 성스러운 돌과 나무가 신성시되는 이유는 돌과 나무 자체가 신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종교적 인간이 세계의 자연적인 면을 통해 ‘초자연’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하늘에 대한 숭배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인간과 그 환경이 표상하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초월성을 갖춘 하늘은 거기에 신들이 거주하고 있고, 몇몇 소수의 사람들만이 상승 의례를 통하여 도달한다. 이는 논리적・합리적 작용이 아니라, 유한과 무한, 범상과 초월에 대한 총체적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천공 구조를 갖는 최고 존재자는 그 신앙숭배로부터 점차 사라져 가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인간으로부터 벗어나 하늘로 올라가서 멀리 있는 감추어진 신dei otiosi이 된다. 하늘로 은퇴한 그들은 창업을 완성하기 위해 그 아들 혹은 조물주를 지상에 남겨둔다. 차차 그의 지위는 신화적 선조, 모신, 풍요신 등과 같은 다른 신격들로 대체된다. 천공 구조를 갖는 최고 존재자가 본래의 지위를 지키는 건 유목 민족뿐이다. 그는 일신교적인 경향을 갖는 종교(조로아스터 교의 아후라-마즈다) 혹은 명확한 일신교(유대교의 야훼, 이슬람교의 알라)에서 특수한 지위를 얻는다.


단군 신화에도 이런 서사 구조가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휘하에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지상에 내려와 사람들을 다스리고,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는다. 환인의 역할은 사실상 환웅을 내려 보내는 데서 끝나고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신 가이아 사이에서 티탄들과 크로노스가 태어나고,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서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 제우스 등의 자식들이 나온다. 가이아 정도나 제우스와 헤라가 혼인하는 대목에서 축복하는 역할로 등장하고 데메테르와 엮인 이야기에서 간간이 언급되지만 우라노스는 제우스가 하극상을 성공한 이후 아무런 역할이 없다.


<원시 종교들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하늘의 최고 존재자는 종교적 통용성을 상실해 버린다. 즉 인간이 숭배하는 대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신화에서도 차츰차츰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결국에는 감추어진 신deus otiosus이 되어버린다. 그래도 인간은 그를 잊지 않고 다른 신들과 여신, 선조들과 혼령들에 대한 염원이 모두 공허하게 끝났을 때 마지막 간청의 대상으로 그를 부른다.> - 『성과 속』 (M. Eliade 著, 이은봉 譯) P.127


현대 철학에서는 대표적으로 하이데거가 이 ‘숨은 신’에 대한 탁월한 사색을 행한 바 있다. 하이데거가 바라본 신은 최고 존재자로서의 신이 아니라 은폐된 존재(진리)로서 형이상학적 사변 너머에 있는 신이며 그의 존재론(진리론)을 부정신학적이라 일컫는 이유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하이데거, 신학》 ( https://brunch.co.kr/@erasmut/37 )을 참고하기 바란다.


최고 존재자를 대신해 등장한 여러 신들은 가장 구체적으로 두드러진 힘, 즉 생명의 힘의 저장소였다. 그렇지만 그런 까닭에 생식의 ‘전문적 담당자’가 되고, 창조신의 정묘하고 고상하고 영적인 여러 힘을 잃었다. 인간은 생명의 신성성을 발견하고 차츰 그 자신의 발견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삶의 성현에 몸을 맡긴 인간은, 그의 직접적인 일상의 요구를 초월한 신성성에서 멀어져 간 셈이다.


농경의 발견은 기본적으로 원시인의 경제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성聖의 질서를 변화시켰다. 성性, 출산력, 여성과 대지의 신화와 같은 새로운 종교적인 여러 힘이 등장한다. 종교 체험은 더욱 구체적으로 된다. 즉, 삶과 훨씬 밀접하게 관련된 체험이 나타난다. 위대한 모신母神과 강력한 힘이 있는 신 혹은 풍요의 정령들이 창조신보다도 분명히 더 동적이고 인간에게 더 가까운 신이 된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극도로 곤란한 경우, 모든 시도가 허무하게 끝났을 때, 특히 가뭄, 폭우, 전염병과 같이 하늘로부터 오는 재난인 경우에 인간은 다시 최고 존재자에게 도움을 청한다.


중요한 사실은 하늘, 대지, 물과 같은 상징을 통해 그와 관련된 신화적인 창조와 계시를 완전하고 총체적으로 통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현의 다양한 의미를 평가하는 것은 전체로서의 상징이다. 예를 들면 한편으로 세례는 그리스도가 설립한 것이므로 기독교인들에겐 성사聖事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세례는 시련(=리워야단Leviathan과의 싸움)과 상징적인 죽음과 부활의 가입 의례를 재현한다. 유대교는 종교적 전사前史와 긴 종교적 역사를 물려받았으니 그 속에는 이미 모든 상징 구조가 존재했던 것이다.


<종교적 인간에게 세계란 늘 초자연적 가치를 드러낸다는 것, 즉 성의 양태를 계시한다는 것을 마음속에 새겨둔다면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우주의 단편들은 투명하다. 그 고유한 존재 양식은 존재의, 따라서 성스러운 것의 특수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종교적 인간에게 신성성은 존재의 완전한 현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주적 신성성의 계시는 어떤 점에서 원초적인 계시이다. 즉 그것은 인류에게 종교적으로 먼 과거에 일어난 것이고, 그 후에 역사에 의해 도입된 변혁들도 그것을 폐기시킬 만한 힘을 갖지 못하였다.> - 『성과 속』 (M. Eliade 著, 이은봉 譯) P.137


종교적 인간의 정신세계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도 원시 사회의 인간들을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그들의 종교 문화는 전적으로 상궤를 벗어났다고 까진 말할 게 아니지만 파악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낯선 정신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내부로 몸을 던져 거기서부터 그것이 가진 모든 가치를 향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고대 사회의 종교적 인간의 관점에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면 다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세계는 신들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현존한다’는 사실이다. 세계의 현존은 이미 무엇인가를 의미하고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한다. 세계는 막연히 덩그러니 주어진 게 아니다. 종교적 인간에게 우주는 ‘살아 있고’ ‘말을 하는’ 무엇이다. 우주를 신들이 창조하고, 신들이 우주적 생명을 통해 인간에게 계시하는 이상, 우주가 살아 있음은 그 자체가 신성성의 증거이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문화 단계 이후부터 자신을 하나의 소우주로 보기 시작하였다. 인간은 신의 창조물 가운데 한 부분을 이룬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우주 가운데서 인식하는 신성성을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발견한다. 그 결과 그의 생명은 우주적 생명과 일치하게 된다. 신의 작품으로서 우주는 인간 존재의 모범적인 형상이 된다. 종교적 인간의 삶은 하나의 차원을 실존으로서 더 소유하고 있다. 그는 인간적일뿐 아니라 동시에 우주적이다. 그의 삶이 소유한 초인간적 구조는 인간적 존재 양식에 국한되지 않으므로 열린 실존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떤 사물, 어떤 행위는 우주적 상징에 의하여 새로운 가치를 부가적으로 얻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래의 직접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를 향하여 열린 실존이란 ‘자연 속에 파묻힌’ 무의식적 실존이 아니다. 세계로의 개방성은 종교적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종교적인 것이요 존재와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귀중한 것이다.> - 『성과 속』 (M. Eliade 著, 이은봉 譯) P.156


비종교적 인간에게는 모든 생활 체험─성행위, 식사, 노동, 유희 등 무엇이든─이 탈신성화되고 말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러한 생리적 행위가 모두 정신적 의미를 상실하고, 따라서 진정한 인간적인 차원을 상실하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종교적 인간은 그에게 미리부터 점지된 모범적 상황 속에 의식적으로 순응함으로써 스스로를 우주화한다. 달리 말하면 세계를 특징짓고 구성하는, 즉 간단히 말해 모든 우주를 규정하는 주기적이고 상호 의조적인 체계를 그는 인간적 척도로 재현한다. 비종교적 인간은 이러한 체험에 접근할 수 없다. 왜냐하면 비종교적 인간에게는 죽음이 탈신성화되었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올바른 의미에서 현실적 우주 속에 살고 있지 않으며 우주 속에서 하나의 실존적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주거지는 우주론적 가치를 상실했으며, 현대인의 신체도 종교적・정신적 의미를 잃어버렸다. 현대의 비종교적 인간에게 우주는 불투명하고 둔하고 말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우주는 어떤 메시지도 전해 주지 않으며, 어떤 암호도 갖고 있지 않다.


<산업 사회의 기독교, 특히 지식인의 기독교는 중세 시대까지 지녔던 우주적 가치를 오래 전에 상실해 버렸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가 반드시 도시의 기독교가 타락했다거나 열등한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도시인의 종교적 감수성이 뚜렷하게 빈곤해졌다고 말하려는 것임을 덧붙여둔다. 우주적 제의, 자연의 기독교론적인 드라마에 참여하는 신비에 대하여는 현대 도시에 살고 있는 기독교도는 더 이상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종교 체험은 더 이상 우주를 향해 열려 있지 않다. 결국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적 체험이 되어버렸으니, 즉 구원은 인간과 그의 신에 관한 문제가 되었다. 기껏해야 인간은 신에게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해서도 책임을 느끼고 있음을 인정할 뿐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인간-신-역사의 관계망 속에는 우주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이렇게 되면 심지어 진정한 기독교도라도 더 이상 세계를 신의 창조물이라고 느끼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 『성과 속』 (M. Eliade 著, 이은봉 譯) P.164~165


근대의 비종교적 인간은 새로운 실존적 상황을 상정한다. 그는 그 자신을 오로지 역사의 주체 및 동인으로만 간주하며, 초월적인 것을 모두 거부한다. 그는 다양한 역사적 상황 하에서 인식되는 인간의 상태 이외에는 어떤 종류의 인간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만든다. 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과 세계를 탈신성화시키는 정도에 비례해서만 스스로 자신을 완전하게 만든다. 성스러운 것은 그가 자유를 획득하는 데 최대의 장애물이다. 그는 완전히 신비성을 잃어버릴 때에만 그 자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최후의 신이 살해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렇듯 근대의 비종교적 인간은 비극적 실존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비종교적 인간은 종교적 인간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며, 좋든 싫든 간에 종교적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비종교적 인간은 탈신성화 과정의 소산이다. 자연이 신의 작품인 우주의 점진적인 탈신성화의 산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인간은 인간 실존의 탈신성화 과정의 결과이다. 비종교적 인간은 모든 종교성, 모든 초인간적 의미를 ‘삭제하려는’ 시도를 통하여 그의 선인들에게 반역해 왔다. 선조의 ‘미신’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정화시키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 자신이 된다.


<세속적 인간은 비록 종교적 의미를 배제했다고 하더라도 종교적 인간의 태도의 흔적을 보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무슨 행동을 하든, 그는 계승자인 것이다. 그 자신은 과거의 산물이므로 과거를 전적으로 폐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일련의 부정과 거부를 통해 자신을 형성하지만 그가 거부하고 부정한 실재들은 여전히 그를 따라다닌다.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기 위하여 그는 자기의 조상들이 살았던 세계를 탈신성화시켰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기 위하여 선조의 행동을 거역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행동은 여전히 어떤 형태로든 그에게 정서적으로 현존해 있으며 가장 깊은 존재 속에서 재현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 『성과 속』 (M. Eliade 著, 이은봉 譯) P.184


무종교적 인간의 대다수는 종교적 행동, 신학과 신화로부터 해방되어 있지 못하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사적 유물론에 기반을 두고 공산주의를 제창한 마르크스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인간 역사로부터 유토피아가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마르크스 자신은 아시아-지중해 세계의 위대한 종말론적 신화 가운데 하나를 이어받아 계승하고 있다. 즉 그것은 세계의 존재론적 상태를 변화시킬 사명을 짊어지고 수난을 당하는 의인(‘구세주’, ‘사도’, 오늘날에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구원자적 역할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 없는 사회와 그 결과로서의 역사적 갈등의 소멸은, 많은 전승에서 역사의 시초와 종말에 두고 있는 황금 시대의 신화 가운데 이미 가장 가까운 전형적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유대-그리스 도교적인 메시아주의 이데올로기를 이 존경할만한 신화에 덧붙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여한 예언자적 역할과 구원자적 기능,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와 반그리스도 간의 묵시록적 투쟁 및 거기에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에 비유될 수 있는 선과 악 사이의 최종적 결투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역사의 절대적 종말을 기대하는 유대-기독교의 종말론을 계승한 셈이다.


<간단히 말하면, ‘종교가 없는’ 사람의 대다수도 여전히 유사 종교와 타락한 신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도 놀라울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세속적인 인간은 종교적 인간의 후예이며, 그는 자신의 역사를 지워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의 그를 있게 한 종교적 선조들의 행동을 지워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의 실존의 큰 부분이 그의 존재의 깊은 곳, ‘무의식’이라 불리는 영역에서 발하는 충동으로 키워진다고 생각한다면 이 점은 더욱 더 확실해진다. 순수하게 이성적 인간이란 하나의 추상일 뿐 현실 생활에서는 결코 그런 인간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의식적인 활동과 비합리적인 체험으로 구성된다. 이 무의식의 내용과 구조는 신화적 이미지 및 형상과 놀랄 만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신화가 무의식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화의 존재 양식은 정확하게 그것이 신화로서 스스로를 계시하는 것이고, 따라서 무엇인가가 어떤 전형적 양식으로 현현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 『성과 속』 (M. Eliade 著, 이은봉 譯) P.187


근대인의 무의식적 활동은 그에게 끊임없이 무수한 상징들을 제공해 준다. 이 상징들은 각각 마음의 평정을 보증하거나 회복하기 위해 어떤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어떤 특수한 사명을 다하는 역할을 한다. 상징은 단지 세계를 ‘열려’ 있도록 할 뿐 아니라 종교적 인간이 우주적인 것에 접근하도록 도와준다. 상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특수한 상황을 벗어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에로 ‘자신을 연다’. 상징은 개인적 체험을 일깨우고, 그것을 영적 행위, 형이상학적 세계 파악으로 변모시킨다.


오늘날 근대인의 무의식은 종교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나의 실존을 가치의 창조자로 만들기 전에 종교는 그 완전성을 보증한다. 자신이 비종교적이라 주장하는 근대인들에게 종교와 신화는 그들의 무의식의 어둠 속에 ‘은폐’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이러한 인간이 내면의 깊이 안에 생의 종교적 비전을 회복할 가능성을 감추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 세계에 대한 본래의 종교적 체험과 비전을 보여주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음도 자명하다.



(4) 폴 리쾨르의 『악의 상징』 중 악의 세 가지 차원



① 『악의 상징』의 배경



20세기 서양 철학계에선 모더니즘의 반성으로 크게 세 가지 방향이 제시되었다. 하나는 탈현대주의다. 데리다, 푸코, 리오타르 등이 그 대표 주자이다. 그들은 현대 정신이 고양한 인간의 주체성과 합리성을 제약하고 탈역사를 주장함으로 새로운 인간 해방을 모색한다. 맞은편에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있다. 하버마스는 계몽주의 정신 곧 현대의 합리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술 합리성에 치우친 것을 반성하고 획일화를 치유할 대안으로 상호 행위 곧 커뮤니케이션을 내세운다.


마지막으로 리쾨르의 해석학이 있다. 리쾨르의 해석학적 세계관은 항상 윤리력을 견지하고 있다. 윤리라 함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분출되는 새로움을 가리킨다. 이 책이 나오기 얼마 전까지 리쾨르에게 새 세상을 향한 역동성은 주로 언어의 상징성과 연관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발간을 전후하여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다루며 윤리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간다. 그리스 철학에 바탕을 둔 서구의 존재론의 윤리성과 책임성을 비껴가는 경향에 맞서 리쾨르는 기독교 영성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나 탈현대주의자들과 달리 리쾨르는 존재의 문제나 존재의 철학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레비나스 등이 독일의 관념론을 동일성의 철학으로 간주하며 폭력 취급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리쾨르는 정체성의 문제를 동일성la mêmeté과 자기성ipseité으로 나누어 폐쇄적으로 볼 수 없다고 본다. 리쾨르의 자기성은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형성되는 자기 정체성이다. 이는 타자와의 만남이 원초적으로 제외된 관념론적 정체성과, 정체성을 배제하고 전적 타자성만 말하는 레비나스의 견해를 모두 배격한다. 그러면서도 양자의 의중은 모두 존중하고자 한다.


리쾨르의 해석학은 항상 이런 식으로 주관 철학과 객관 철학을 넘는다. 양쪽을 인정하며 둘의 긴장으로 둘을 넘는다. 한편에선 데카르트 이후 모든 존재물음을 주체의 의미물음으로 바꾼 주체 철학이 있다. 그는 후설 현상학의 판단중지epoche에서 철저한 학문 방법을 배우고 지향성에서 주체 철학을 배웠다. 다른 한편에선 존재의 신비를 가브리엘 마르셀에게서 배웠다. 그는 주체 철학을 존중하되 주체의 의식(의식은 의지다)으로 좌우할 수 없는 무엇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체가 주관주의에 갇히면 결국 타자성이 배제되고 신비가 사라져 숨 막히는 동일성의 이데올로기로 빠져든다. 리쾨르의 존재 철학은 상징을 푸는 해석학에 바탕을 둔 것으로 주체를 중시하는 반성 철학의 자리에 서서 주관주의를 넘어서는 역동성을 지닌다. 소쉬르를 필두로 한 종래의 기호론에서 언어는 차이밖에 없어 한 낱말의 뜻은 다른 낱말과 차이로 이루어지므로 기의(시니피에)가 언어 바깥의 무엇을 가리키지 않는다. 리쾨르는 언어의 지시성référence을 인정하고 그것을 가리켜 언어의 존재론적 특성이라 부른다. 그의 언어의 존재론적 특성은 상징 이론과 연결되는 세상을 바꾸는 윤리성으로 연관된다.


『악의 상징』(1960)은 리쾨르가 본격적인 해석학자로 자리잡기 전 현상학에서 해석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악의 문제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 체험이다. 먼저 현상학적 되풀이를 통해 악의 고백을 찾아낸다. 그 고백들은 사유되지 않은 부르짖음이요, 탄식이요, 두려움의 외침이다. 고백을 통해 체험은 언어 속으로 들어온다. 언어는 상징 언어요 일차 상징들이며, 일차 상징의 해석이 신화다.


그러므로 신화는 2차 상징이다. 신화의 해석이 반성 철학의 합리적 진술이다. 언어와 신화라는 상징을 거치지 않고 바로 반성된 결론으로는 악의 현실을 이해할 수 없다. 악의 고백이나 신화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차 상징까지 거슬러 올라가 해석의 작업을 해야 한다. 그때 악의 가능성이 아닌 악의 현실성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인간의 현실은 해석학을 통해 얻어진다. 해석은 결국 상징을 해석하는 것인데, 이에 선행하는 전이해Vorverstandnis가 있다. 이는 ‘나’(해석자)가 이미 어디에 속해 있다는 해석학적 순환을 야기한다. 의도치 않은 방면으로부터 계시가 있고 해석자는 거기에 개입되어 있다. 전이해가 있어야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믿어야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지 못하면 믿을 수 없다. 내가 주체적으로 해석할 때 그 전이해가 작동하는 것이다. 해석학적 순환이란 결국 ‘믿어야 안다, 그러나 알아야 믿는다’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명제와 병행한다.


생각에는 ‘생각나는 생각’과 ‘생각하는 생각’이 있다. 근대 이후 주체 철학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재단했다. 그렇게 자율적 인간의 책임성을 고양하는 데 공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징의 해석은 생각나는 생각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상징이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일으키는 직접적인 생각 없이 생각하는 생각은 불가능하다. ‘생각나는 생각’은 믿음의 차원 곧 존재가 내게 말하는 차원이며, ‘생각하는 생각’은 반성의 차원 곧 존재 물음이 의미 물음으로 바뀌는 차원이다. 결국 리쾨르의 상징론은 근대 합리성의 역할을 중시하면서도 존재의 신비를 실존의 또 한 축으로 삼아 둘 사이의 역동적 순환을 본다. 결국 그의 해석학은 현대의 산물이지만 현대를 극복하게 해준다.



② 악의 세 가지 차원



악에는 흠le souillure, 죄le péché, 그리고 허물la culpabilité이라는 세 차원이 있다. 흠은 금기와 터부로 이루어진 원시 종교의 악체험이다. 죄의식은 인격적인 존재와의 관계 단절의 체험으로 누구에게나 ‘들어 있는 악’이다. 허물은 죄가 내면화되고 세분화되어 ‘저지르는 악’이다. 그것은 합리성의 차원에서 측정되는 악 곧 사회 규범을 어기는 문제다.


죄와 달리 허물은 개인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다. 윤리는 죄의식에서부터 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악의 문제를 주로 흠의 차원으로 이해한다면 아직 원시 종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때에는 자신의 깊은 회개 없이 겉에 붙은 때를 제거하는 주술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한편 허물은 죄의식의 발전이다. 그러나 죄의식 없는 허물 의식은 율법주의의 폐쇄성에 빠진다. 도덕 규범을 지킴으로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게 ‘들어 있는 악’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 사회, 국가, 민족 단위의 뿌리 깊은 회개가 가능하다.


<흔히 생각하기를 철학 쪽에서 악의 문제에 대해 손을 대려면 나중에 어거스틴이 정립한 ‘원죄론’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대부분의 고전 철학이나 현대 철학이 그처럼 신학에서 정립된 개념을 중시한다. 그래서 인간의 잘못을 철학 문제로 고찰하려 할 때 흔히 원죄론을 비판 검토하는 것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원죄의 개념만큼 곧바로 철학 사유와 연결시키기 어려운 것은 없다. 합리성을 띤 그 겉모습에 기만당하기 쉽다. 오히려 철학 쪽의 이성이 끼어들어 작업을 시작할 곳은 가장 덜 정립된 최초 고백의 표현이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18


원죄는 영지주의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반-영지주의 개념이다. 그러나 원죄론은 영지주의자들처럼 합리성을 따라 설명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영지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영지주의자들이 그들의 원초적 이원론, 지혜(sophia)의 타락 또는 인간 이전의 어떤 실체의 타락에 관한 생각 따위를 어떤 ‘앎’의 도식으로 체계화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독교의 뿌리 깊은 죄 체험을 이치에 맞게 설명해보려 한 것이 원죄론이다. 영지주의 같은 거짓 철학의 오염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원죄론 같은 합리화된 고백 형태에서 출발하지 않아야 한다.


오늘날 현대인에게 신화는 그저 신화일 뿐이다. 비판 정신을 따라 현대인은 신화의 시간을 실제 역사와 연결하지 않으며, 신화에 나오는 어떤 장소가 지금의 지리 공간 중 어떤 곳을 가리킨다고 믿지 않는다. 신화는 더 이상 어떤 사실의 설명이 될 수 없다. 신화에서 어떤 최초 사실에 대한 설명을 캐보려는 의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 비신화화démythologisation의 주제다. 그러한 비신화화는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설명의 기능을 상실해도 신화는 사람에 대해 무엇을 탐구하고 이해하게 하는 시각을 열어준다. 신화는 인간의 자기 이해를 가능케 하는 모든 사고와 행위의 틀을 결정한다. 신화에는 사람과 성스런 무엇le sacré과의 관계를 발견하고 밝히는 ‘상징 기능’이 들어 있다. 이처럼 신화는 과학 세계관 앞에서 비신화화되면서도 상징이라고 하는 엄숙한 기능을 가진다.


이렇게 사변의 산물인 원죄론에서 타락의 신화로, 다시 타락의 신화에서 죄의 고백으로 우리는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신화와 사변 밑에는 고백의 언어가 있다. 신화의 언어 그리고 사변의 언어는 고백의 언어가 2차, 3차 거친 것이다. 고백은 체험의 표현이며, 위에서 말했듯 허물・죄・흠 이 셋이 바탕에서 체험의 다양성을 이룬다. 따라서 죄의 경험은 갈피를 못 잡는데다 여러 가지 의미가 교차하여 까다로워진다. 이 때 언어가 다시 필요해지는데, 잘못을 느끼는 의식 밑에 흐르는 갈등을 밝혀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바빌론 유폐 당시 지은 시에서 성도는 이렇게 묻는다 : “주님 언제까지나이까? 도대체 내가 누구에게 죄를 지었습니까? 무슨 죄를 지었단 말입니까?” 죄는 나로 하여금 나를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은 숨었고 세상 돌아가는 일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바로 그 물음의 선상에서, 다시 말해 무의미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신화는 “어떻게 악이 시작되었나”를 얘기하는 것이다. (…) 사람의 가장 강렬한 체험 즉 죄를 지어 버림받았다는 그 체험이 의문투성이라고 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라도 죄의 문제는 다시 연구하고 이해되어야 함을 신화나 영지주의가 말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마치 칸트가 사람의 당혹감으로부터 오히려 이성의 무조건적 권능을 내보였듯이 말이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22


갈피를 모르고, 복잡하고, 의문투성이인 잘못에 대한 체험은 언어를 수반한다. 그 언어는 갈피를 못 잡는 체험이지만 표현해보고자 하는 언어요, 체험들 사이의 갈등과 변화를 드러내려는 언어이며, 소외의 체험에서 오는 놀라움을 밝히려는 언어다.


고백은 언어로 이루어지며, 언어는 본질상 상징성을 띤다. 반성된 사고에서 사용하는 상징을 이해하기 위해 원시 상징을 세 영역으로 나누자면, 성스러움이 드러나면서Hierophany 생기는 우주 상징, 밤에 꿈이 만들어내는 상징, 그리고 싯말詩語이 만들어내는 상징의 차원이 있다. 이 세 가지 차원은 모든 상징 안에 들어 있다.


앞서 엘리아데의 문단에서 언급했듯 해・달・물・나무 같은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상징이 된다는 것은 그 존재를 통해 무슨 의미 있는 의도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즉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전에 말로 하게 하려는 의도다. 그러한 사물을 통해 드러남은 끝없는 이야기를 낳는다. 드러남과 뜻함은 철저히 동시에 서로서로 발생한다. 사물로 된 상징은 말로 된 상징을 무수히 낳고 말로 된 상징은 다시 우주의 독특한 드러남 속에 뭉쳐 있다.


상징의 제2차원 곧 꿈의 차원에서는 반성 의식에까지 닿아 있는 우주의 소리가 덜 들리게 된다. 꿈속에서 가장 기본적인 상징들의 기능은 ‘우주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옮겨간다. 엘리아데 종교현상학의 히에로파니와 프로이트나 융의 정신분석학의 꿈의 차원(개인적인 삶의 투사를 넘어서고 한 주체의 사적인 고고학을 넘어서 문화라고 하는 공통의 장 또는 전인류의 민속 속에서 활동하는)은 이런 맥락에서 통하는 셈이다. 상징은 사람과 전체 존재의 연관을 뜻한다. ‘우주’에 성스러운 것을 드러냄은 곧 ‘영spirit’ 속에 성스러운 것을 드러냄이다.


<상징은 그처럼 ‘자기 자신이 되는 데’ 길잡이가 된다. 그런 상징 기능은 성스런 무엇의 드러남을 통해 작용하는 ‘우주적’ 상징 기능과 한데 묶여야 한다. 우주와 영은 표현의 두 기둥이다. 나는 세상을 표현하면서 나를 표현한다. 세상의 성스러움을 밝혀냄으로써 나는 내게 있는 성스런 것을 캐낸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26


우주적이고 영적인 ‘표현’은 제3차원인 시적 상상력을 통해 보완된다. 여기서 말하는 시의 상상력은 있지 않은 무엇을 그대로 그려내어 ‘있게’ 만들려는 사물 의존적인 게 아니다.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문장을 빌리자면 “시적 상상력은 우리를 말하는 존재의 본바탕으로 인도한다. (…) 그것은 새로운 언어 존재가 되어 우리를 그것이 표현하는 것이 되게 함으로써 우리를 표현한다.”(『공간의 시학』 中) 시 속에서 상징은 언어가 막 터져나오는 시점 즉 ‘언어 출현의 시점’에 존재한다.


상징은 서로 상치되는 용법 둘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상징논리학에서 가리키는 형식으로서의 상징이며, 또 하나는 내용이 있는 생각 곧 형식화되지 않은 생각이다. 우리는 여기서 후자를 말하고자 하는데, 상징의 1차 지향과 2차 지향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고 상징의 의미가 유비를 거쳐서만 밝혀짐을 볼 때 상징 언어는 본래 내용에 연관된 언어다. 여기서 의미 구조를 환기할 필요가 있는데, 의미는 무엇 없이 무엇을 말하는 ‘형식’을 가능케 하는 동시에 이미 있는 무엇을 뜻하는 ‘내용’ 즉 세상 사물을 지시할 수 있게 한다. 궁극적으로 의미는 언어의 전체성을 회복한다. 이를 염두에 두고 앞으로의 전개에서 상징의 역할을 가늠하길 권장한다.


 - 흠에 대해서 파헤쳐보자. 흠의 표상은 우리가 상상과 공감 속에서 ‘되풀이’할 수 없는 사고 형태다. 흠이 반성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그것이 무슨 물질 같은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얼룩과 같이 번지며 보이지 않게 더럽히는 것을 연상시키며 심리적・육적 실존에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깨끗함은 흠을 없앤 상태다. 깨끗하게 함, 즉 정결의 개념에는 이미 흠이라는 악이 선행하고 있는 셈이다.


흠은 이미 지나쳐버린 의식으로 보인다. 객관적 관점에서, ‘흠인 것’과 ‘우리에게 악인 것’은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흠의 목록의 변화는 동기 그 자체의 변화를 가리킨다. 옛날에는 부정 탄다고 생각했던 행위 중 많은 것이 악과 관련 없는 것으로 떨어져나갔다. 윤리적 신에 대한 모독이나 정의의 훼손이나 인격의 존엄성의 훼손 따위만 악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가령 밤에 고양이가 우는 걸 부정 탄다고 하는 옛날 어르신들의 관념은 인격적인 더러움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결국 부정은 책임적인 주체가 더러워지는 것과는 관계없이 금기를 객관적으로 훼손하는 것을 가리킨다.


<흠의 차원에서만 볼 때 잘못의 목록은 인격 주체의 의도와 관련된 것은 매우 적고 세상 사건과 관련된 것은 아주 폭넓다. 거기서 우리는 악과 불행이 나누어지지 않은 단계가 있음을 보게 된다. 악을 행한mal-faire 윤리 영역과 불행하게 된mal-être 우주적 생물학적 영역─고통・병・죽음・실패 따위─이 구분되지 않은 단계다. (…) 부정한 행위나 사건의 결과도 곧 부정한 것으로 되어 흠의 세계 속에 포함된다. 그리하여 차츰 모든 것이 부정하거나 아니면 깨끗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된다. 물리와 윤리의 구별이 없고 성과 속이 분리된다. 현대의 합리성에는 낯설지만 말이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39


우리는 이전 글 《관능 소설의 인문사회학적 접근》( https://brunch.co.kr/@erasmut/41 )에서 메리 더글러스를 알아보았다. 더글러스는 “깨끗함은 더러움에 의해 규정되는 상대적 개념”이라고 주장하며, 현대인의 깨끗함을 문화적으로 규정된 개념으로 보고 종교 문화와의 연속선에서 논의한다. 리쾨르의 해석학이 더글러스의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더글러스가 신체를 경계로 부정을 파악했듯, 리쾨르는 흠의 영역에서 ‘성과 관련된 금기의 훼손’을 엄하게 다룬다고 말한다. 그런데 금기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행위에 대한 규제이며, 거짓이나 절도 또는 자살에 대해서는 예배 의식에 어떤 규율도 들어 있지 않다. 그런데 금기는 주로 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로써 성과 관련된 흠은 신의 거룩함에 대한 고백에서 나오는 윤리와는 원래 무관하며 또 정의나 도덕적 인격성과도 무관함을 알 수 있다. 성의 흠은 윤리 이전의 어떤 신앙 형태다.


원래 흠은 성과 연관된 것임을 볼 때, 순결(흠 없음)과 처녀성이 일치됨을 알게 된다. 처녀성과 무접촉은 같이 간다. 마치 성교와 오염이 같이 가듯이 말이다. 이 이중의 대비가 우리 윤리의 배후에 어디나 자리잡고 있다.


물론 세련된 윤리 의식은 노동・소유・정치 따위 성과 관련없는 것들이 빚어내는 인간 관계에서 생긴다. 남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윤리 곧 사랑・정의 따위의 윤리 의식이 생기는 곳도 거기다. 그러나 그런 것도 알고 보면 성 문제로 되돌아가, 성을 재평가하거나 성의 가치 전환을 이루고 있다.


주관적 관점의 흠을 알아보자. 흠은 접촉을 통해 오염시키는 물질 같은 것인데, 더럽히는 접촉은 두려움이라고 하는 특별한 감정을 통해 주관적 사건이 된다. 사람은 두려움을 통해 윤리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지 사랑을 통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부정하다는 의식은 상상과 공감을 통해 되풀이할 수 없음을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그 후에 올 모든 계기의 싹을 품는다. 두려움이 자기 초월을 감행하는 비밀이 그 두려움 속에 있다. 두려움은 처음부터 단지 물리적인 무서움이 아니라 윤리적 두려움 곧 윤리적 위기 의식이었다. 그것은 이윽고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된다는 위기 의식, 목적의 왕국에서 죽은 자가 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 의식으로까지 발전한다.


두려움의 원인은 흠에 대한 응보에 있다. 부정 타는 행위에는 반드시 응보 곧 보복이 뒤따른다. 물론 보복은 어떤 의인의 수난을 거친 구원과 질서 회복이라는 관념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에도 흠의 의식과 관련된 최초 직관은 그대로 남아 있다. 수난은 질서를 침해한 데 대한 대가요, 그래서 순결을 회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응보를 매개로 모든 물리적 질서가 윤리적 질서로 둔갑한다. 고난이라는 악은 결국 잘못이라는 악과 결부된다. 여기서 비롯되어 오늘날까지 악이라는 말은 두 겹의 뜻을 지닌다. 고난 역시 악이다. 그것은 저지른 악의 결과다. 흠 있는 행위 때문에 받는 벌로 고난을 여기게 된다. 다시, 흠의 세계는 윤리와 물리가 나누어지기 이전의 세계다. 고난은 윤리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윤리가 육체적 고통과 혼동되고 있다.


<오랫동안 인간은 흠과 고난의 연관성에서 최초의 합리화의 도식을 추리해냈다. (…)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가 부정 탔기 때문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결백하다는 것이다. 윤리적 두려움 속에는 그런 모양의 ‘합리화’가 들어 있다. 죄라고 하는 윤리 세계와 고난이라는 물리 세계를 떼어놓기 위해서는 그 첫 번째 합리화를 쳐부숴야 했다. 바빌로니아의 욥과 히브리의 욥이 그 첫 번째 장본인이다. (…) 악이 흠에서 죄로 바뀌려면, 고난은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악이 되어야 했다. 고난당하는 의인 곧 부당한 고난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 불행에 대한 설익은 합리화가 무너져 내렸다. 이제 악을 행하는 것과 악을 당하는 것 사이에 즉각적인 연결고리가 끊겼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44


구약 성서 중 욥기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아무 죄가 없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가정을 꾸리는 부유한 사람 욥을 두고 사탄과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시험하고자 그의 재산을 모두 빼앗고 식솔들을 죽게 한다. 이에 욥은 자신의 의로운 행적들을 나열하며 "나는 의로우나 하나님이 나의 의를 제하셨다"고 한탄하고 그의 주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 누가 의롭다 하겠는가” 라며 그를 질책한다. 최후에 욥 앞에 나타난 하나님이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며 꾸짖자 욥은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 며 고개를 숙인다. 결국 그의 믿음을 확인한 하나님은 빼앗은 재산과 식솔들을 다시 돌려주고 원래 그의 소유보다 더 많은 것을 하사한다.


‘우리가 어떤 고난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기도하고 찬양하면 그분이 응답하세요’는 주일학교 수준에서나 통할 레퍼토리다. 여기서 괄목할 대목은 ‘악을 행함’과 ‘악을 당함’ 사이의 즉각적인 연결고리의 끊어짐이다. 최초의 합리화는 이렇게 붕괴되고, 불행(고난・병・죽음・실패)과 잘못은 갈라진다. 엉터리로 죄인이 되는 최초의 윤리 의식을 넘어설 단초를 여기서 짐작할 수 있다.


흠은 그것이 제의祭儀적 청소의 ‘대상’이 되는 한 그 자체로 악의 상징이다. 흠과 때의 관계는 정화와 세탁의 관계와 같다. 흠은 때가 아니라 때와 같다. 상징적 때다. 그리하여 오염의 표상 안에 암시된 상징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정화하는 제의의 상징성이다.


동작으로 이루어진 것인 한 제의는 벙어리이다. 그런데 흠이 인간 세계에 들어오는 것은 말을 통해서다. 걱정은 말로 전달된다. 전달되기 전에 무슨 걱정인지 정해지는 것도 말을 통해서다.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부정)의 대립도 말로 이루어진다. 깨끗함과 더러움에 대해 하는 말이 그 둘의 대립을 만든다. 말이 없을 때, 때는 그냥 때다. 그러나 부정함은 금기의 말을 통해 제시된다.


뭐가 부정한 것인지 말로 정하는 것은 일종의 ‘교육’이 되며 상당히 중요하다. 그것을 통해 제의와 갖은 동작만 상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고 정한 것 그 자체가 상징이 된다. 성스런 것의 체험을 전달할 수 있는 상징 언어가 된다. 그렇게 해서 부정함(더러움)과 정함(깨끗함)의 어휘는 ‘허물의 느낌’과 ‘죄의 고백’을 낳는 최초의 언어학적・의미론적 모태를 이룬다.


<기원전 7세기 사람들의 신앙이 어떠했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고전 시대의 연설가나, 역사가・시인들이 말한 흠의 표현들이 이룬 문화적 사건이 더욱 중요하다. 그리스 사람들이 그들의 과거를 표현하고 그들의 신앙을 말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우리가 악의 문제를 다루는 데 그리스 문화가 공헌할 점이 바로 그것이다. 바로 거기서 흠의 주제는 원류가 되는 어떤 문학을 이루어 로고스를 형성한다. 그 로고스가 곧 서양 문화의 논리가 된다. 흠을 그리스 문화를 빌어 읽을 때 우리는 철학의 비철학적 근원을 갖게 된다. 흠과 흠의 정화와 철학의 관계는 우리 문화사의 바탕이 된다. 흠의 문제는 의미의 모태가 된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50


한편 말은 흠 있는 자아를 의식화하는 도구도 된다. 금기와 마찬가지로 고백은 흠이 말의 세계에 들어오는 통로이다. 자기 행실에 숨어 있던 의미를 완전히 드러내는 총체적 고백은 아주 겸손한 ‘죄의 고백’으로 나타난다. 악을 말로 쫓아내는 데서 새로운 요소가 생기고 그 때문에 고백다운 고백이 탄생한다. 말해진 두려움은 고백이다. 말에 업혀 비로소 두려움은 물리적이기를 넘어 윤리적 차원의 문을 연다.


두려움의 윤리적 차원의 첫째 단계는 정당한 벌의 요청이다. 파괴를 감수하는 자세에는 그것이 정의요 정당한 대가라는 마음이 들어 있다. 두려움과 떨림 속 이 당위가 모든 벌의 원리다. 단, 모든 고난이 그러한 응보의 결과라는 믿음은 응보의 법을 이해하는 데 장애물이다. 사람들은 지금의 고난을 꼭 응보의 법이 지켜진 것으로 보지 않는 대신, 최후의 심판이나, 세상 죄를 짊어질 속죄양을 생각하거나, 내면의 고통이라는 말도 만들어냈다. 이처럼 사람이 당하는 악을 모두 저지른 악의 결과로 보는 고대의 관점은 응보의 법에 암시된 어떤 요청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고통의 끝에는 어떤 회복이 있다. 죽으리라는 두려움 속에는 어떤 질서든 질서가 회복되리라는 느낌이 있다. 파괴를 통해 질서가 선다. 벌을 받는 사람은 벌의 파괴력을 통해 원래의 온전성이 건재함을 과시하리라 예감한다. 이것이 바로 두려움의 윤리적 차원의 두 번째 단계 즉 질서에 대한 경외심이다. 플라톤 역시 『고르기아스』에서 “불의한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 “벌을 피하는 것보다 받는 것이 낫다”며 이를 옹호하고 있다.


정당한 벌의 요청은 벌을 통한 질서 회복의 기대와 맞물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 번째 단계는 승화를 통해 두려움이 아예 없어지기를 바라는 희망이다. 신약 성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요한일서 4:18, 새번역) 스피노자 역시 자신의 철학에서 이성을 통해 하나님과 자연과 자아를 순수하게 긍정하는 지혜를 모색하고 이로써 두려움과 슬픔을 제거하고자 노력한다.


<두려움을 직접 없애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는 없어지리라 믿고 간접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참된 교육 정신이다. 두려움은 여전히 존재한다. (…) 고통을 덜 주며 교정의 효과를 보는 벌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재의 위협 없이 법을 지키게 한다거나, 벌로 위협하지 않고 허가와 금지를 가르칠 수 있는 국가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 두려움은 새로운 세계, 이른바 초윤리적인 세계를 여는 데 쓰이는 독특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초윤리적 세계란 두려움이 완전히 사랑으로 되는 계기를 말한다. 두려움의 완전한 폐지는 윤리의 종말론적 지평이요, 종말론적 장래라고 할 수 있다. 두려움을 내몰기 전에 사랑이 두려움을 바꾸고 변화시킨다. (…) 사람은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꾸로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다는 두려움도 사라질 수 없다. 완전한 사랑만이 두려움을 몰아낸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56


 - 이제 죄에 대하여 파헤쳐보자. 죄의 관념이 생기는 범주는 하나님 ‘앞’이라는 범주다.  키르케고르가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울티마툼 장의 화자를 빌어서 표현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실존’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단 여기서 하나님 앞이란 전적 타자 앞이 아니다. 헤겔은 불행 의식을 분석하면서 하나님을 전적 타자로 보았지만 그런 분석은 상당히 위험하다.


최초의 계기는 실존이 그 의미를 상실하는 상태가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하나님만이 전부고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그런 상태가 아니다. 최초의 계기는 ‘불행 의식’이 아니라 ‘계약’, 유대 말로 베리트Bérit다.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 또는 그와 상응한 인간 실존의 위기와 공허 같은 것이 나타나는 것은 그 이전에 만남과 대화의 차원이 있기 때문이다. 죄 짓기 이전에 계약 관계가 있었고, 계약 관계의 침해가 곧 죄다.


우리가 금기의 말, 제의의 말, 고백의 말로써 흠을 철학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듯 계약 역시 말로써 반성의 세계에 들어온다. 구약성서에서 야훼의 루아흐ruah─그나마 근접한 번역어는 영spirit─는 계약의 비합리적 특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루아흐는 다바르davar 곧 말이다. 히브리어의 다바르에 맞는 어휘는 그리스어의 로고스밖에 없다. 당시 그리스에서 로고스는 이성ratio과 말oratio의 통일체였다. 다바르를 로고스로 푼 것은 하나님에게 붙잡힌 인간의 최초 상황은 언어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비슷한 번역에 불과하다고 해도 이는 사고할 만한 문화 사건이다. 이는 모든 언어가 서로 번역 가능하다는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을 찾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번역어로 최대한 적합한 것을 로고스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확신, 이는 모든 문화가 하나의 같은 인간성에 속해 있다는 확신이기도 하다.


<죄는 윤리적이기에 앞서 종교적이다. 죄란 어떤 규범이나 가치를 어긴 것이 아니라 인격 관계의 훼손이다. 죄의 의미를 깊이 알려면, 영이요 말인 그 최초 관계의 의미를 깊이 알아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 하나님이 아직 여러 신 가운데 하나의 신에 불과할 때, 그래서 백성과의 관계가 전쟁을 위한 연대성에 지나지 않아 하나님과 백성이 이기면 같이 이기고 지면 같이 지는 수준에 머무를 때, 그 관계의 훼손은 그 관계가 이룩한 것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처음부터 끝까지 죄는 종교적인 것이지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62


리쾨르에 따르면 먼저 있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현존이다. 우리는 엘리아데의 문단에서 정확히 정반대의 입장을 보았다. 엘리아데는 세계가 태초부터 성스러우며 인간은 원래 종교적 인간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리쾨르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라는 실존, 다른 말로 현존이 선행하고 이 관계에 흠집이 가며 죄의 문제로 후행한다고 주장한다.


히브리적인 죄체험을 알려면 법조문보다는 그들의 삶과 그들의 변화의 방향을 봐야 한다. 그들의 삶은 법문서가 아닌 다른 문서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죄와 죽음의 얘기를 그린 열왕기・역대기, 슬픔의 맹서와 탄원이 있는 시편, 예언자들의 고발과 경고와 위협이 있는 이사야서・아모스서・호세아서・예레미야서, 그리고 법전의 명령이나 시편의 애가나 예언의 포효가 지혜 속에 어우러져 있는 잠언 따위에 그들의 삶의 역동성이 들어 있다. 이것들이 죄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들이며 그처럼 방대한 말 속에서 계약이 이루어진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인식은 그리스 철학의 ‘사유’가 아니다. 이슬람 신학이나 기독교 신학의 사유도 아니다. 우리가 《하이데거, 신학》에서 보았듯 그런 신학은 철학적 사변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방법적 연구나 끝을 보려는 탐구로는 안 된다. 아모스가 외치고 이사야가 부르짖고 다윗이 노래하고 솔로몬이 훈계하는 대화의 상황, 바로 거기서 죄가 나온다.


우선 죄의 객관적 관점을 알아보기로 하자. 선지자의 예언에는 경고와 분개가 합쳐져 있다. 이는 즉각적인 공포와 윤리적인 고발의 혼합이다. 죄에는 노여움에서 오는 파괴와 분개하여 고발하는 행위가 뒤따른다. 어떻게 예언에는 윤리적 국면이 있을까? 악의 문제에서 죄는 두 번째로 겪는 종교적 인식이다. 그런 죄의 의미를 단순히 도덕이 제의祭儀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기면 성급한 일이다. 오히려 예언의 요청이 훨씬 멀리 나가므로 도덕이 지켜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풀어 말하면 윤리는 초윤리적인 비약의 효과물인 셈이다.


<악의 의식에서 예언의 순간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요청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바로 그 무한한 요청 때문에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거리가 생기고 비감함이 있게 된다. 그러나 그 무한한 요청은 빈 공간에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무엇을 향해, 곧 전부터 있던 셈족의 옛 ‘법전’을 향해 선포되는 것이다. 바로 거기서 히브리 특유의 윤리적 긴장 곧 무한한 요청과 유한한 계명 사이의 긴장이 시작된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65


무한한 분개와 세부적 규정, 이 둘의 변증법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아모스가 겨냥한 것은 모든 죄악의 근원인 악한 마음이었다. ‘살리라’ 또는 ‘죽으리라’는 표현도 정의와 부패에 따른 실존의 뿌리를 겨냥하는 말이다. 요청이 무한한 이유는 인간의 죄악의 뿌리 깊음이다. 아모스는 인간에게 짝(하나님)을 제시하는데, 모세 이래 계승된 제사법(제의)의 제한된 규정과 달리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한하다. 그러한 무한한 요청이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세부 사항을 통해 구체화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최초의 실존,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에 들어 있는 윤리적 거리다. 아모스는 실존의 부패에 대해 부분적인 교정이 아닌 총체적 회심을 촉구한다.


호세아는 부부 관계에 빗대어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성에 의한 사랑의 계약을 제시한다. 그러나 실은 아모스의 정의보다 더 처절한 게 호세아의 사랑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아내가 정부를 더 좋아하는 것을 질투하는 남편이다. 인간의 간음(죄)에 대해 하나님은 이혼을 선언한다. 호세아가 말하는 하나님의 부재는 곧 현대인의 절망일 것이다. 불안과 고뇌가 그에 동반한다.


정의의 하나님, 갈라진 부부 관계의 하나님 이후 이사야에게는 주권과 위엄의 하나님 곧 거룩한 하나님이 등장했다. 이제 죄는 교만, 오만, 잘난 척하는 것이다. 구원받으려면 유다는 자기를 믿지 않고 동맹국에게 기대지 않고 오직 무방비 상태로 야훼께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이사야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 곧 신앙이었다. 시대의 불안이 커지며 죄의식은 발전했다. 멸망의 그림자 속에서 죄의식은 무한히 확대되었다. 권세의 좌절이 이윽고 거룩한 분을 향한 성례전이 되었다. 무한한 불안은 무한한 요청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무한한 윤리성으로 인간을 무능하고 소외된 존재가 되게 짓누르는 건 결국 죄가 하나님을 전적 타자로 만드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생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하나님과 사람의 계약 관계를 다시 돌이켜봐야 한다.


아까 언급한 무한한 분개와 세부적 규정(유한한 계명)의 변증법을 환기해보자. 예언자는 구체적인 법규 위반의 문제에서 마음 속 뿌리 깊은 악에서 비롯된 죄의 문제로 끊임없이 올라가려 한다. 반면 율법주의는 죄의 문제에서 법규 위반의 문제로 내려가려 한다. 그런데 예언과 율법주의는 나눌 수 없다.


오랜 세월 율법주의는 그 동기가 고려되지 않은 채 예수의 ‘회칠한 벽’이란 비유와 함께 하나님의 뜻을 조각내는 것이라 경멸받았다. 그러나 형식 없는 절대 요청과 그 요청에 형식을 주는 유한한 율법 사이의 긴장은 죄의식의 바탕을 이룬다. 죄의식은 예언자들이 이룰 수 없는 완벽함과 이룰 수 있는 계율 사이에 유발한 긴장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율법은 사람의 죄의식을 환기시켜 죄인임을 확실하게 해주는 ‘몽학 선생’이다.


예언은 이미 있던 옛 법규를 취하여 무한한 요청과 세부적 계율의 변증을 작동시킬 때 유효해진다. 예언은 율법을 전제하고 율법으로 돌아간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계약도 예언자들과 레위인(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의 그 같은 교류 속에서 이루어진다. 세부적이고 유한한 죄과가 있기에 불의에 대한 예언자들의 분개도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부적인 옛 법령을 취하여 긴장이 느슨해지며 종교적 타락이 야기되기도 한다. 요시야의 개혁과 몰락은 이를 한 몸에 보여준다. 예레미야는 율법주의적인 경건이 퍼뜨린 거짓 안정을 고발하며, 향후 이스라엘의 인고의 디아스포라를 통렬하게 예고한다. 인간적 관점에서 이스라엘에는 아무 희망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한 정치적 허무주의가 히브리인들의 죄관념의 바탕에 있다. 역사적 실패를 겪고 비로소 인간의 유한한 계명 너머의 윤리적 요청을 발견한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패배주의 뒤에는 절대자 하나님의 무한한 요청이 숨어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아모스부터 예레미야와 에스겔까지 늘 윤리적 긴장이 계약의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편에는 악의 뿌리를 ‘마음’에서 찾는 무형식, 무조건의 요청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구체적 범죄 행위로써 죄인을 규정하고 구체화하는 유한한 율법이 있다. 이 둘의 변증법이 허물어질 때 하나님은 전적 타자가 되어 오직 부재와 거리만 남는다. 무한한 요청은 멀어지고 율법과 계명은 유한한 도덕심으로 전락하여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의롭다 일컫게 유혹한다. 이때 우리가 처음에 이야기한 범주인 ‘하나님 앞’을 두고 전제한, 부재하고 침묵하는 하나님과 실존으로서의 계약 상대인 하나님의 모순율은 폐기된다. 이는 우리가 살펴본 죄의 문제와 이미 멀어져 있다.


죄의 주관적 관점을 살펴보자. 이는 두려움의 문제이다. 흠의 의식에서 죄의 의식으로 발전하면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죄의식의 주관적 측면은 새로운 두려움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앞서 말한 ‘하나님 앞’과 ‘무한한 요청’과 관련시켜야 한다. 그를 위해 계약 안으로 들어가 대화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나중에 나오지만 죄의식이 내면화되고 개인화되면 허물이 된다. 내면화와 개인화를 막는 것은 역사적이고 공동체적인 죄관념이다. 공동체적 죄관념을 담고 있는 가장 뚜렷한 상징은 하나님의 분노와 야훼의 날이라는 상징이다. 이사야는 모든 교만이 으스러지는 날이 바로 야훼의 날이라고 선포한다. 예레미야는 유대 민족의 패배를 예언하며 하나님의 분노를 알리고자 하였다. 인간의 안정이 이처럼 위협받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손꼽을 만큼 잔혹한 적대일 것이다.


재미있는 건 계약 관계가 이로써 파기된 것이 아니라 확장되고 깊어졌다고 리쾨르는 이야기한다. 멸망을 예고하는 예언자는 역사 전체의 운동을 지적한다. 야훼의 유대 민족의 부족신의 성격은 이제 사라진다. 노아와 약속하고 아브라함과 약속하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윽고 역사의 주님으로, 더 초월적이고 폭넓은 존재가 되었다. 노여움은 이제 터부의 저주나 원초적 혼돈의 재현이 아닌 거룩성의 노여움이다.


그리고 예언자들이 말하는 야훼의 날의 위협은 시종일관 역사 안에서의 위협이다. 야훼의 날의 불행은 꼭 패배와 파괴의 사건은 아니다. 불행은 예언자들이 보는 의미, 벌로 보는 해석에 있었다. 야훼의 날은 단순히 역사 속에 존재한다기보다 역사의 해석 속에 존재하는 셈이다. 역사가 벌이 되는 것이 역사를 벌로 해석하는 예언자의 사역을 통해서라면, 사건 그 자체는 돌이킬 수 없어도 그 의미는 바뀔 수 있다.


<같은 예언자가 즉각적인 재앙을 경고하면서 동시에 약속을 전한다. 그러므로 예언의 핵심은 파산 선고가 아니라 재앙과 구원의 이중 현상이다. 그 이중의 신탁이 긴장을 유지한다. 그것이 계약의 특성이다. 물론 그러한 ‘변증법’은 ‘생각’되지 않는다. ‘사변’이나 ‘존재의 논리’로까지 가지 않는다. 그냥, 체험이요 삶이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77


불안과 고뇌로 하나님과 거리가 생기지만 하나님이 전적 타자가 되지는 않는다. 절대적 타자성이 관계의 부재가 되는 그런 단절 없이 불안은 계약을 활성화한다. 질투가 사랑의 슬픔이듯이 불안은 대화를 유도한다. 거룩성의 노여움은 말하자면 사랑의 노여움이다.


이제 죄의 상징을 알아보자. 우리는 흠의 단락에서 흠의 상징이 접촉을 통해 오염시키는 어떤 객관적인 힘이며 어떤 사물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죄는 앞서 보았듯 관계의 단절을 나타내니 흠의 구조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렇게 죄의 상징은 흠의 상징과 단절된다. 흠의 상징들이 어떤 공간 안에서 발생한 접촉 관계를 바탕으로 할 때 죄의 상징들은 방향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무’의 관념 역시 죄의 상징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 표현으로 ‘바람’과 ‘우상’의 예를 들어 보자. ‘바람’은 사라져버린다. ‘우상’은 가짜이다. 그에 따르면 죄란 뭔가 지지할 대상, 지향할 대상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은 바람이어 허탄한 것뿐이니라”(이사야서 41:29) ‘무’는 아무것도 아닌 우상의 상징일 뿐인데 야훼는 그 우상을 질투한다. 이유는 헛것이며 ‘무’인 우상이 사람에게 뭐가 되는 것처럼 행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생기게 하는’ 말씀일 뿐 아니라 악인과 우상과 모든 헛것을 없애버리는 부정의 말씀이기도 하다. 아담 신화에는 ‘선악과’와 ‘뱀의 형상을 한 사탄’이라는 대립 요소가 등장하는데 그럼에도 이는 총체적으로 완전히 긍정의 말이다. 아담과의 최초의 계약은 그것이 제약의 성격을 띤다고 해도 그 역시 사람을 이루는 요소이며, 아담과 이브가 건드릴 수 있는 곳에 선악과가 있다는 자유를 지니고 순수한 인간 실존의 모습을 이룬다.


선악과 사건을 시작으로 죄라는 게 성립하자, 죄의 ‘헛됨’, ‘무’는 이제 하나님을 징계의 하나님, 죄인을 정죄하는 데 급급한 하나님으로 만들었다. 사랑의 하나님과 공의의 하나님이 별개가 아닌 하나임을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만큼 죄의 문제가 모든 영역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죄는 헛된 ‘무’이면서도 어떠한 ‘실체’다. 여기서 죄와 흠의 상징 체계는 연속성을 가지고, 죄라고 하는 새로운 상징이 흠의 상징을 다시 취한다. 여기서 우리는 악의 세 번째 차원인 ‘허물’을 잠시 알아볼 필요가 있다. 허물은 죄인이 자기 자신에게 느끼는 의식이요 따라서 한 개인이 잘못의 대자對者가 된다. 죄의 ‘고백’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악의 실재를 바깥에서 본 것이다. 허물 의식의 ‘주관성’과 죄의 ‘실재성’은 대조된다.


죄의 상징의 첫 번째 차원은 ‘초주관성’이다. 죄는 주관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따라서 개인적인 차원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죄는 처음부터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이다. 이를 상실하여 죄에서 개인적인 허물은 빠져 버렸다. 남은 건 유전을 따른 생물학적 연관이다. 죄를 이야기하는 데 선행해야 할 것은 집단 예배에서 심심하면 튀어나오는 ‘우린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에요’ 하는 유전적 죄관념이 아니다. 민족의 죄의 고백을 사변적으로 풀이하려 하면 여러 가지로 이상해진다.


원죄 교리는 3차적인 작업의 결과다. 먼저 죄의 고백이 있었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관계를 설명해 본 2차적인 산물이 신화이고, 신화를 거쳐 다시 합리적으로 설명한 것이 원죄 교리다. 아담 신화는 어디까지나 죄의 고백 속에서 ‘인간’, ‘인류’라는 초생물학적, 초역사적 통일체를 표현할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생명나무의 접근을 금지 당했고 원죄로서 필멸자의 운명을 갖게 됐어요’는 후대 사람들이 사변을 통해 유추한 해석이며 양자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죄의 대자對者는 내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주체성을 박탈당하고 객체가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는 계약 관계 곧 대화의 관계다. 하나님의 눈길은 나의 상황과 진실을 밝히고 내 실존에 내려질 윤리적 심판과 정의를 드러내는 데 의미가 있다. 나를 더 잘 알게 되는 주체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윽고 하나님의 눈길은 ‘지혜’로 발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허무함’을 알게 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을 아시고 그것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시편 94:11)


그러나 그 눈길이 공의롭고 진실되었다고 믿지 못할 때, 하나님과의 원초적 관계가 무너질 때부터 사람은 객체가 된다. 고난 받는 욥은 어느 순간 하나님의 눈길에서 적대감을 느낀다.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 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신다”(욥기 16:9)


중요한 점은 적대적인 눈길조차 진실의 기초가 되는 절대적 눈길의 관계 내부에 들어 있다는 점이다. 눈길이 보여주는 실존의 현실이란 허물의 감정 너머 죄의 현실이다. 이처럼 죄는 실존의 내면에 있는 것으로, 밖에서 오염시키는 흠과 다르다. 죄는 내면적이면서도 객관적이므로 허물과도 다르다.


죄의 상징의 두 번째 차원은 죄의 상징 속에 흠의 상징이 재등장하는 것이다. 이 차원은 속죄의 상징까지 미친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계약을 파기한 유대 민족에게 ‘돌아올’ 것을 촉구한다. 이는 바꿔 말하면 ‘용서’라는 죄의 차원이다. 여기에 ‘깨끗이 씻는’ 흠의 차원의 상징이 재등장하는데, 바로 ‘구속’ 또는 ‘대속代贖’이다. 구속은 사람을 사로잡은 권세에게 몸값을 치르고 교환하는 것이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이 바로의 권세로부터 유대 민족을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자신의 이름 아래 구속한 것이 본질이다. 예수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온 인류를 대신하여 속죄해 사탄의 권세에서 구해내고자 했다.


<포로 상태(종살이)란 문자대로 볼 때 주체 상호간의 사회적 상황이다. 죄의 상징이 됨으로써 그것은 죄의 소외를 나타내는 것이 되었다. 히브리인들이 종살이 ‘안’에 있듯이 죄인은 죄 ‘안’에 있다. 그러므로 죄는 사람이 ‘그 안에’ 처해 있는 악이다. 그래서 죄는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이다. 양심을 초월한 것이며 하나님의 현실과 진실 편에서 인식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는 사람을 묶어두고 종살이시키는 권세다. 그처럼 종살이하는 무력감을 체험했기 때문에 흠의 구조가 ‘재등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종살이의 원인이 사람 ‘내면’의 마음에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어떤 포괄적인 상황을 이루어 사람이 빠져들어가는 함정 같은 것이다. 그와 같은 죄의 ‘포로됨’의 경험 속에 부정한 접촉(흠)의 구조가 스며들어 가는 것이다. 이제, 실존의 기본적인 문제는 자유─무한한 가능성 가운데 선택한다는 뜻의─보다는 해방의 문제가 된다.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은 해방되어야 한다. 구원이나 구속의 관념은 바로 거기서 나온 것이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100


 - 허물에 대해서 알아보자. 허물은 잘못과 동의어가 아니다. 둘을 똑같이 보면 잘못했다는 의식 속의 긴장이 허물어진다. 허물을 들여다보면 크게 세 갈래 방향이 있다. 첫째는 책임과 벌의 관계에 대한 반성에서 나오는 윤리적이고 법적인 방향이다. 이는 형벌 문제를 그리스 방식으로 합리화한 것이다. 둘째는 예민하고 세심한, 또는 꼼꼼한 의식에 대한 반성에서 나오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방향이다. 이는 윤리 의식을 유다의 방식으로 내면화하고 첨예화한 것이다. 셋째는 저주받고 심판받았다는 의식에 대한 반성에서 나오는 심리학적이고 신학적인 방향이다. 이는 율법 아래 인간의 고통을 바울 방식으로 의식화한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의 합리성은 유다와 그리스도의 종교성과 대립하며, ‘경건’의 내면성은 도시국가의 외면성과 은총에서 비롯된 구원의 외면성에 대립하며, 바울의 반율법주의가 법정의 법률과 모세의 율법에 대립한다. 그렇다, 허물 관념 안에서도 변증법이 작동한다. 이를 알기 위해 좀 더 큰 변증법, 흠・죄・허물의 잘못의 세 개의 계기 속에서 살펴볼 것이다. 이는 책임적이면서 노예 상태에 처한 인간이라는 개념 즉 노예 의지의 개념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앞서 죄는 잘못의 존재론적 계기임을 보았다. 죄는 실존의 문제 곧 즉자卽自이다. 하나님 앞의 인간의 실제 상황의 의식이 죄이다. 허물은 그 실제 상황을 대자對自로 의식화한다. 일반적으로 허물은 잘못의 주관적 계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흠에 수반되는 두려움은 벌에 대한 두려움이었는데 허물의 본질은 그러한 부담감 속에 들어 있다. 벌의 가능성이 내면화되어 의식을 내리누르는 게 허물에 수반하는 문제다. 허물의 계기는 흠과 동시에 생긴다. 단 이 단계에선 어디까지나 제의적인 부정 때문에 벌을 염두에 둘 뿐이다.


인간은 자기가 원인이요, 행위자요 주체라는 의식이 생기기 전부터 책임 의식을 가졌다. 인간을 책임적이게 한 것은 금기와의 관계다. 그리고 참된 허물 의식이 생겨나 악의 체험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에 따르면 자유는 남용되어 자아 가치가 하락하는 귀결을 낳았다. 이제 금기 침해에 대한 보복이 벌이 아니라 실존의 가치 하락 그 자체가 벌이 되었다. 허물 의식은 벌이 보복적인 것에서 교육적인 것으로 곧 교정의 과정으로 탈바꿈하기를 요청한다.


금기는 단지 제의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으로 된다. 심지어 그것은 모든 덕과 의무를 넘어서는 완전성의 요청으로 확장된다. ‘완전’을 향한 요청은 실존의 가능성의 깊이를 더해간다. 개별적인 여러 가지 의무들을 넘어선 어떤 완전성의 요청에 직면한 인간은 이제 스스로 자기 행위의 주인일 뿐 아니라 그 행위의 동기까지도 책임지는 주인임을 느낀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냐 아니면 무냐” 하는 단순하고도 분명한 선택 앞에 선다.


우리는 이러한 구조의 사변을 이미 이전 글에서 다룬 적 있다. 《서브컬처와 철학 (4)》 https://brunch.co.kr/@erasmut/23 )에서 살펴본 키르케고르는 ‘선택하지 않는’ 심미적 실존과 ‘선택하는’ 윤리적 실존을 넘어 ‘하나님이라는 무한한 기준과의 관계’라는 실존을 표명한다. 신명기의 “선을 택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는 선택의 요청은 응답자를 설정한다. 응답하는 주체는 삶 전체를 끌어안고 자기의 선택에 따라 삶을 이끌어갈 수 있다.


<‘너는 하느님과 다투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그대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대가 옳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 그것은 그대가 하느님 앞에서는 옳지 못하다는 것을 배움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대 자신이 원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하느님에 대하여 다투는 일이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은 곧 그대가 고상한 존재라는 증거이고, 결코 하느님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 『이것이냐 저것이냐』 (S. 키르케고르 著, 임춘갑 譯) 2부 中 《울티마툼ULTIMATUM》 P.661~662


마지막으로 죄의 고백이 변화의 마무리를 짓는다. 앞서 보았듯 허물의 계기를 통해 죄는 내면화되고 개인적인 허물로 바뀐다. 이제 잘못의 의식은 죄가 아닌 허물이다. 이제 악을 측정하는 것은 ‘양심’이다. 죄의 실재론이 허물의 현상론에 의해 완전히 대치되고, 그때에 죄의 종교적 의미는 완전히 사라진다.


그렇게 사람은 자기가 허물을 느낄 때만 허물이 있게 된다. 순수한 상태의 허물 의식에서 사람은 모든 것의 척도가 된다. 죄와 허물의 완전한 분리 가능성은 세 가지 유형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앞서 보았듯 ‘형벌과 관련된 범죄의 개인화’, ‘세심한(꼼꼼한) 의식’ 그리고 ‘저주의 심판’이 그것이다.


잘못에 대해 허물이라는 새로운 척도가 생기며 야기된 두 가지 결과가 있다. 첫째, 악은 이제 개인적인 잘못이다. 허물은 죄의 고백의 ‘우리 죄를 사하시고’와 단절된다. 앞서 말한 디아스포라를 겪으며 공동체적 운명을 바라볼 수밖에 없을 때 유대 민족이 희망을 가질 수 있던 것은 개인의 죄 곧 허물의 선포였다.


아버지의 죄를 아들에게 묻는 집단 응보는 의문시되고 흠의 체제와 죄의 체제를 지배했던 옛 응징은 힘을 잃는다. 세대 간 쇠사슬을 끊을 수 있듯 행위 간 쇠사슬도 끊을 수 있게 되었다. 초역사적 운명 대신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이 자리를 차지했다.


<잘못의 의식 속에 새로운 대립 구조가 생긴다. 죄의 구도에 따르면 악이란 인류 전체가 그 ‘안에 들어 있는’ 상황이다. 허물의 구도에 따르면 악이란 개개인이 ‘일으키는’ 행위다. 잘못을 이처럼 가지가지의 주관적인 허물로 잘게 부수어놓음으로서 ‘우리’라는 죄의 차원이 뒤로 밀려나고 허물 의식이 독자성을 확보한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112


허물이라는 척도의 등장의 두 번째 결과는 허물 의식에는 잘못의 많고 적음과 무게의 경중이 있다는 것이다. 죄가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로 나타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제 정의正義는 상대적 정의가 된다. 닿을 수 없는 무한한 완전과 연계하는 정의가 아니라 ‘적합하고’ ‘적절한’ 정의다. 물론 상대적 정의를 말하고자 하면 절대적 정의를 어딘가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는 아이러니는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조치’보다 ‘척도가 된 사람’이 우위에 선 허물 의식은 첫째로 윤리적이고 법적인 방향에서 싹튼다. 그리스인들의 허물 의식은 유대인들과 달리 도시민의 윤리에서 비롯되어 일리 있는 혐의라는 관념을 이루었다. 도시는 ‘거룩한’ 공간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불의한 자는 불경한 자와 동의어였다. 도시민의 윤리가 종교 의식과 맞닿아 있음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죄’를 묻는 배심원들에 맞서 자신을 변론하면서 “나는 신적인 의지에 따라 할 일을 했으니 인간인 나는 민주정의 판결에 승복할지언정 신이 시킨 일을 굽히지 않는다.” 고 밝히는 대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악은 점점 순수하게 도덕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도시의 재산을 훼손하거나 성소를 범하는 공적인 범죄 행위는 여전히 성스러운 공포심이 유발된 반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적인 범죄 행위는 적절한 응보에 의해 갚아진다고 봄으로써 좀 더 객관적인 관념이 형성되었다. 응보 행위는 형벌로 나타났고 형벌의 정도는 곧 허물의 정도를 가리켰다. 유대인이 공동체의 고백에 대한 개인적 실존의 측면에서 허물의 정도의 관념을 발전시킨 것과는 대조적이다.


허물 의식이 발전되어 나오는 두 번째 방향은 꼼꼼함의 의식이다. 꼼꼼함의 의식이 탄생하고 완성되는 장소로 우리는 주저 없이 바리새파를 들 수 있다. 바리새파는 얼핏 국수적이고 폐쇄적이란 인상이 있지만 사실 그들은 모든 민족 곧 만민을 염두에 두었다.


이스라엘의 유일신론은 윤리적이며 역사적이다. 무시간적인 도덕적 자연신론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유대인은 율법을 완전하게 합리화하거나 보편화할 수 없었다. 바리새인들의 특징도 유일신론의 역사적 특성에서 나온다. 역사는 시간의 경과를 반영한다. 역사 형태와 문화 주체의 상호 작용과 관련하여 율법은 발전한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새 시대가 열렸다. 새 시대는 토라 종교의 시대다. 어떤 영감을 받아 광야에서 외치는 시대가 지나고 학교에서 공부하고 율법을 해석하는 시대가 되었다. 생성의 시대가 아니라 해석의 시대가 되었다. 무한한 요청의 시대가 지나고 경우에 따라 조목조목 세심하게 실천하는 시대가 되었다.


<바리새인은 우선 그리고 본질적으로 토라의 사람들이다. 토라의 사람들이라고 할 때 즉각 우리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다. 율법주의, 도덕의 노예, 굳은 마음, 문자주의 따위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우리에게 바리새인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들을 표본으로 해 어떤 경험과 상징과 개념 형성을 살펴볼 까닭이 없어진다. 도덕기형학 정도에나 필요할지 모른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125


바리새인 안에는 굳어버리지 않은 순수한 윤리 경험의 유형이 있다. 거기서 사람됨의 가장 근본적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먼저 토라에 대해 알아보자. 현대인은 로마법 이후에 사는 사람들이다. 법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고 글로 써진 법이다. 바리새인의 토라는 모세 율법이요 모세 오경이다. 그 안의 법들은 주의 가르침이다. 토라는 가르침이란 뜻이며 법이 아니다. 토라의 법은 종교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바리새인의 문제는 한마디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였다. 그들은 예언자의 윤리를 꼼꼼한 윤리를 통해 실현하려고 했다. 예배와 윤리, 가족 생활과 공동 생활, 기타 아주 세밀한 상황까지 토라를 적용했다. 타율이 극단화되는 한이 있어도 일상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규범’ 밑에 두려고 했던 것이 바리새주의다. 그런 극단은 타율을 바꾸어 총체적이고 자발적인 복종이 되게 한다. 자유 선택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자발성을 입증한다고 본 것이다.


바리새인들 속에는 종교적 정열과 지적 객관성이 묘하게 결합을 이루고 있었다. 사두개인들과 달리 바리새인들에게는 관용이 있었다. 하나님의 규범에 대한 헌신은 이웃 사랑과 상부상조의 정신과 관련이 없지 않다. 한 연구가는 이를 바리새인의 ‘도시성’이라고 하였다. 이는 무식하고 오만한 제사장들과 권세가들의 교리에 대한 평신도 지성의 승리를 대변한다.


주의할 점은 이들이 토라를 ‘만드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려고 했다. 문서화된 토라는 묵묵부답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율법 학자는 토라를 연구하고 가르친다. 그 저변에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 의무를 비껴갈 경우란 하나도 없다는 신념이 있다.


<꼼꼼한 의식이 처한 상황은 모험적인 실존과는 완전히 다르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 자녀의 영광스런 자유”나 어거스틴이 말한 “사랑하라 그리고 행하라”와는 정반대이다. 그러나 끝까지 타율이라는 점, 어떤 상황에도 세밀한 경우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신의 가르침에 복종한다는 점에 그 위대함이 있다. 예외를 만들지 않고 철저하게 복종한다. 왕이 금해도, 이방 도덕이나 관습이 방해를 해도 또 박해를 당해도 복종한다. 큰 사건뿐 아니라 조그마한 일에 이르기까지 복종한다. 그 꼼꼼한 의식은 완전한 타율 속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가르침이라고 보이는 것을 총체적으로 행하며 행복해한다. 그것은 의존적이지만 소외되지는 않았다. 그 타율이 결과적인 것이요 또 합의된 것이므로 꼼꼼한 의식으로서는 ‘자기 바깥에’ 있지 않고 ‘자기에’ 있기 때문이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130


우리는 앞서 허물이라는 척도가 악의 개인화와 정의의 상대성을 야기했다고 짚었다. 꼼꼼함은 이 두 특징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따라서 바리새주의의 꼼꼼한 의식은 ‘자기’를 표현할 언어를 믿었고, 율법의 준수에 기초를 두고 가능한 정의의 수준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바리새주의와 ‘공적功績’ 개념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사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위기 19:2) 선의 실천은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 실천은 사람의 내면에 ‘공적’을 보탠다. 이는 정의로운 행위의 자국으로 선한 의지의 결과다. 이제 선한 행위의 가치로써 사람의 가치가 올라간다.


바리새적인 것은 ‘공적’ 관념에 집착하는 태도라 볼 수 있다. 이는 악의 개인화와 죄인과 악인의 양극화에 따라 그들이 새로 개발한 개념이다. 허물은 바리새인들이 볼 때 공적과 반대되는 것이다. 죄란 객관적인 범함인 반면, 허물은 주관적인 가치 상실이다.


꼼꼼한 의식은 어디서부터 왜곡되었을까? 이는 바리새인의 정비된 구전을 보아야 한다. 바리새인은 글로 써진 토라를 구전이 생생하게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모세에게 처음부터 주어진 영원한 토라의 하나로 여겼다. 그런데 토라가 법이기보다는 가르침이라 해도 역시 무엇을 결정하고 제정하는 작업과 결탁해 있었다. 그를 통해 구전은 써지지 않은 토라라는 이름으로 신격화되었다. 지혜자들은 도덕적 정의를 구분하고 심판하는 행위를 신격화해서 예언자들의 무한한 요청과 같은 차원으로 보았다. 그렇게 할라카halachah가 제정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평신도 실천가지 신학자가 아니었으며, 사변적인 신학과는 애당초 거리가 멀었다. 그런 그들의 만인에 대한 교육은 꼼꼼한 의식 즉 꼼꼼한 종교의 위대성과 한계를 보여준다. 바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지시 관계로 묶어두는 것이다. 지시 관계는 실천하는 종교의 핵심이다. 이것이 극단화되면 하나님과의 계약이 이루어지는 방대한 말 그리고 죄의 문제가 불거지는 대화의 상황은 간과되고 등한시된다. 오로지 그리고 본질적으로 행위의 ‘실천’만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계라 할 수 있을까?


꼼꼼함은 도덕 생활의 예배 의식儀式화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초윤리적인 예배 의식이 다시 등장한 까닭은 합의의 결과인 타율의 정립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윤리의 예배 의식화는 윤리적 타율성의 귀결이다. 꼼꼼한 의식은 어디에 기대어 정확해지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예배 의식은 그 정확성의 수단이다. 말하자면 윤리적으로 변형된 과학적 정확성과 같은 것이다.


<정확의 정신은 꼼꼼한 의식에 어떤 위험성을 초래하기도 한다. 모든 것을 판단하는 위험에 모든 것을 형식화하는 위험이 덧붙여졌다. 명령이 있게 된 의도를 생각지 않고 그 명령의 문자에 매달리면 그런 위험이 발생하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꼼꼼한 의식은 복종의 의도를 생각지 않고 그 형식에만 집착하기 쉽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위험성은 꼼꼼한 의식의 위대성에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잘못으로 여기지 않았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138


이제 꼼꼼한 의식은 복잡성을 띠게 되었다. 계명은 항상 더 자세하게 정립되고, 과거의 것은 아무것도 잃지 않은 채 새로운 의무를 끊임없이 덧붙여나간다. 과거가 축적되어 전통을 이루고, 새로운 상황에서 전통의 끄트머리에서 꼼꼼한 의식은 오직 그 관점에서 ‘해석해낸다’. 미미한 혁신조차 어려워지고 전통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꼼꼼한 의식은 ‘구별된’ 사람을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리새’란 말은 ‘구분되었다’는 뜻이다. 정함과 부정함의 분리가 인간관계에 적용되었다. 예식을 매개로 참여하는 자들과 참여하지 않는 자들을 분리했다. 그런데 인간 역사는 계속되는 마당에 자신들의 방법을 고수하자면 ‘광신’ 아니면 ‘자폐’밖에 선택지가 없다. 대부분 후자를 취한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준칙을 보편화하기를 거부, 혹은 단념하는 대신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다른 사람을 백안시했다. 그들은 그런 고립조차 하나님에 대한 복종의 열매, 곧 운명으로 보았다.


바리새인의 위대성에서 시작된 꼼꼼한 의식은 종국에는 이렇게 ‘위선’이라는 문제를 낳는다. 예수가 말한 ‘회칠한 벽’의 의미를 이제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정의를 구분하고 심판하는 결의론의 정신은 새로운 차원으로 뻗어가야만 했다. 그래야 그들이 원하던 대로 끝까지 충실할 수 있었다. 계시는 지나간 것이므로 끊임없이 실천하고 덧붙이고 탐구해야 했다. 그를 멈춘 순간 위선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행함은 없고 말만 남았다. 예수의 다음 말과 행동은 이에 대한 적절한 가르침일 것이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겼듯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본을 보인 것이다. (…) 이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 복음서 13장)


태초에 하나님의 영역이었던 저주와 심판을 인간이 판단하는 지경까지 온 허물의 문제는 최초의 기독교 사상가라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의 선에서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바울에 따르면 사람은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만족시킬 수 없다. 따라서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 심지어 그는 율법 자체가 죄에서 나온 것임을 통찰했다. 율법은 죄를 밝히려고 덧붙여진 것이다. 죄를 인식시킬 뿐 사람을 살릴 순 없으며 경악스럽게도 죄를 잉태하기까지 한다.


<율법은 범죄를 증가시키려고 들어왔습니다. (율법이 들어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신약 성서 로마서 5장, 7장


바울의 관점에서 율법과 죄는 동반되는 것들이다. 이런 순환 관계를 기초로 바울은 단호하게 계명과 율법의 정체를 따졌다. 율법과 죄의 변증법적 관계를 따지자 윤리적 행동과 제의적 행동 사이 대립이 무너지고 유대인의 율법과 마음속의 이방 율법이 별 차이가 없어지고 유대인의 선한 의지와 그리스인의 ‘지혜’와 ‘지식’의 대립이 없어졌다.


계명이 일으키는 문제는 그러한 이분법 너머에 있었다. 이 새로운 차원의 악은 어떤 계명을 어기는 문제가 아니라 율법에 안주하려고 하는 의지의 문제다. 바울은 이를 ‘율법의 의’ 또는 ‘율법으로 되는 의’ 라 부른다. 이전까지 율법을 지키려는 열정을 아무도 마이너스적인 탐욕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제 죄는 그 너머의 자기 의를 만들려는 의지, 죽음을 가져오도록 된 것에 바탕을 두고 살려는 의지가 되었다.


이것의 범주에는 도덕과 비도덕을 구분할 필요도 없다. 세상적인 어떤 욕망도 근심도 두려움도 이에 속한다. 자유로워 보이지만 오히려 노예 상태다. 이것이 율법에서 비롯된 죄와 죽음의 역사이다. 로마서 7장과 8장에 따르면 육肉을 따라 사는 것은 죽음이요, 육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생명이다.


로마서는 전반적으로 죄와 율법의 변증법을 그리고 있다. 그에 따르면 죽음은 성령과 육신의 분열이다. 단 이 구조는 처음부터 있던 게 아니라 율법으로써 의롭게 되려는 의지에서 나온 존재 구조이다. 새 신자 교육에서 자아가 완성된 성인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게 이 대목이기도 하다. 바울에 따르면 ‘나’는 이성의 나와 육신의 내가 같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육은 처음부터 저주된 게 아니다. 즉 악의 뿌리가 아니란 이야기다.


성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목회자들은 흠과 부정의 차원, 더글러스 이론을 차용하면 경계로서의 신체와 바울이 말하는 성령과 대비되는 육신을 혼동한다. 육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권세 안에 있는 소외된 나를 가리킨다. 육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영이 원하는 것과 반대다. 육은 악의 꽃이며, 문제의 결과이다.


바울 사상과 함께 우리는 허물 체험의 한계에 다다랐다. 허물 체험에서 분명한 것은 첫째, 그것은 이전 것을 모두 포괄하여 잘못의 역사를 넘어서며, 둘째, 그것은 스스로 인식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무엇을 통해 인식된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허물의 세 번째 방향인 저주와 심판에 대한 의식의 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반성을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자기가 자기의 심판자가 되었다. 그것은 소외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결국 자기 소외다. 마르크스와 헤겔과 니체와 프로이트의 생각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바울의 사상은 그 모든 윤리 사상보다 심오하다. 윤리적 소외를 다르게 해석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은 이미 가장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합리성에 입각해 범법을 따지는 허물 의식은 관계 단절의 죄의식에 대한 하나의 진보이면서 동시에 망각이기 때문이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145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의 문제를 다룬다. 그에 따르면 절망은 죄다. 규범을 어겨서 죄가 아니라 금지와 욕망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않는 절망의 의지의 죄이다. 육적으로 자유로운 의지는 실상은 구원받지 못하는 절망이다. 따라서 이는 죽음에로의 본능이다. 이는 허물 의식의 노예 상태와도 상통한다. 노예에겐 미래에 대한 약속이 없기 때문이다.


합리적이고 선한 의지의 이면에 자기 소외가 있고 죄와 죽음이 있다. 흠에서 죄로, 죄에서 허물로 따라가서는 눈치 챌 수 없던 게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서 시작하여 율법의 저주를 알아내며 명백해진다.


단 명심할 것이 한 가지 있다. 바울이 말하는 죽음은 앞으로 닥칠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지나간 죽음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의롭게 여김justification’이라는 상징을 알아보자. 여기서 의로움은 도덕적 자질도 덕망도 플라톤의 『국가』의 어떤 구성하는 덕도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의로움 곧 옳음은 저쪽에서 사람에게 오는 무엇이다. 그것은 사람의 지식과 의지와 능력과 관계없으며, 인간 이상의 것에 바탕을 두고서만 인간적인 것이 된다.


죄와 허물의 문제에서 보았듯 ‘정의롭게’ 되려면 누가 옳다고 해 주어야 한다. 그런 판단 행위는 종말론적 최후 심판의 상징과 연결되어 있다. 결국 정의란 무죄 판결을 받아 재판 법정이 마감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롭게 여김’의 초월적이고 법적이고 종말론적인 차원을 이해해야 그것의 내재적이고 주관적이고 현재적인 의미도 이해할 수 있다.


신자인 바울에게 종말 사건은 반드시 일어날 사건인 만큼 어떤 면에선 이미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에 따라 인간 이상의 낯선 정의가 인간에게 가까이 활동하는 일도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미래의 정의, 아니 공의가 지금 믿는 이들에게 임한다. 의롭다고 여겨진 사람은 실제로 의롭게 되리라. 이 문제에서 초월적이고 종말론적인 정의내재적이고 현재적인 정의는 충돌하는 게 아니다. 전자는 후자의 원인이요 후자는 전자의 표현이다.


이렇게 외면의 절정과 내면의 절정은 일치한다. 이를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 또는 자유라고 불렀다. 궁극적으로 자유는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선한 성품이나 의지도 아니다. 훗날 헤겔이 그랬듯 바울에게 자유는 자기 안에 있는 것, 그리스도를 되새기며 온전히 자기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정의의 상징에 따라 잘못에 대한 최후의 경험(허물)은 지나간 과거로 받아들여진다. ‘의롭게 되고’ 나서야 죄를 돌아다보고, 스스로 의롭게 됨의 허무함과 죄악을 깨닫는다.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로마서 3장)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노력이 실패하고 나서야 죄의 총체가 드러난다. 윤리와 제의 행위가 똑같고, 도덕과 비도덕이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한편으로 죄는 즉자적으로나 대자적으로나 허물 의식이 부딪치는 질곡이다. 저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의롭게 여김’의 각도에서 볼 때 율법의 저주는 큰 몽학 선생이 된다. (…) 허물 의식이 커 가면서 인간은 저주의 순환 궤도에 들어간다. 그리고 나중에 ‘의롭게 된’ 후에나 그것이 저주였음을 안다. 그때 그 지나간 저주를 교사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그러한 사실들을 모른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149~150



③ '창조적 해석'으로의 발돋움과 인간 존재의 실존의 회복



가장 다양하고 세밀하고 내면화된 악의 경험은 허물 의식이다. 허물 의식은 노예 의지에 가깝다. 노예 의지란 일차적인 악의 상징들이 집약되는 개념을 우리가 잠정적으로 부르는 용어이다. 그런데 의지라는 말은 항상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하는데 노예는 어디에 예속되어 있는 상태이다.


상징들 사이에 순환 관계가 있어 나중에 생긴 상징들이 그 앞의 상징들로부터 의미를 취하고 앞의 것들이 뒤의 것에 상징력을 전달하는 장면을 여러 번 봤다. 노예 의지는 포로된 자유 의지로 문자적으로는 모순되어 있다. 그래서 사변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포로됨’은 죄를 표현하는 말이다. 죄 때문에 갇힌 어떤 백성 공동체는 구원 받아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 예배는 그 역사적 사건을 되풀이하며 기린다. 죄가 개인적인 허물이 되며 포로됨은 역사적 기억에서 멀어지고 허물의 상징이 되어 나의 자유 의지를 볼모로 잡는다.


유대인들에게 구약 모세오경 중 출애굽기는 포로됨에서 구원 받는 역사적 사건으로 성서에서 비롯된 모든 구원론의 출발점이다. 자유란 노예 상태로부터 구원되는 것이며, 최종적으로는 성령에 속한 나 자신을 노예로 부리는 죄와 죽음의 육인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자유로운 나’로부터 구원되는 것이다. 단 이를 직접적인 방식으로는 말할 수 없고, 상징의 변증법을 통해 처음으로 구현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상징의 변증법을 통해 완성할 수 있다.


노예 의지의 단서는 흠의 단계에서부터 있었다. 죄와 허물의 단계에서 노예 의지는 의미를 취하고 흠은 후발 상징들에게 상징력을 전달한다. 흠이 때나 얼룩이 아닌 노예 의지를 가리키고 있다면 그 시점에서 흠이라는 말은 본질의 의미보단 순수한 상징 효과만 있는 셈이다.


흠의 상징에 비추어볼 때 노예 의지를 구성하는 첫 번째 축은 ‘뭔가 있는 것’이다. 악은 무가 아니다. 어떤 결여가 아니다. 악은 어둠의 권세로서 돌출된 것이다. 때나 오물처럼 ‘제거해야 할’ 무엇이다. 악을 단순히 존재의 결핍으로 보는 건 흠의 상징과는 무관한 주장이다.


두 번째 축은 ‘외부성’이다. 허물은 내면적이지만 외부성의 상징 속에서만 허물에 대한 생각이 가능하다. 악은 자유의 ‘바깥’ 측면으로 사람에게 다가온다. 악은 사람 밖에서 사람을 유혹한다. 칸트는 그러한 악의 외부성을 악의 중요한 본질로 보았기에 절대적 죄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흠은 부정한 것의 접촉에서 생긴다. 즉 외부적이다. 유혹에 의한 것이라면 어떤 면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악을 파토스πάθος 곧 ‘감정’과 동일시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감정은 외부의 사물에 의해 수동적으로 흔들리는 일시적인 쾌락과 고통에서 비롯된다. 외부성의 축을 없애면 흠의 상징은 제거되고 전염이나 오염 등의 주술적 개념은 신비성을 잃을 것이다. 그래도 내면 속 가장 깊은 곳에 노예 의지에 속한 유혹의 ‘바깥’ 구조는 남아 있겠지만 말이다.


세 번째 축은 ‘오염’이다. 이는 노예 의지의 상징이며 스스로 속박되는 그릇된 선택을 상징한다. 밖에서 오는 시험은 자기를 오염시킨다. 그렇기에 속박되어도 속박의 행위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오염의 구조는 자기에 의한 자기의 속박 이상을 개시開示한다. 오염은 퇴색시킬 뿐 파괴하진 않는다. 오염의 상징은 악과 사람의 관계가 그만큼 뿌리 깊음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악이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할 수 없음도 나타낸다.


악은 선의 대칭물이 아니고, 악함이란 선함의 대체물이 아니다. 다만 인간 안의 순결과 빛과 아름다움이 퇴색되고 희미해지고 추해진 것일 뿐이다. 악이 아무리 뿌리 깊다고 해도 선만큼 근원적이지는 않다.


이제까지 우린 잘못의 현실을 상징의 관점에서 알아보았다. 이는 이성으로 하는 합리적 반성이 아닌 감정에 따른 죄의 고백이다. 죄의 고백은 반성과는 다른 경험에서 나오며 상징 언어를 사용한다. 문제는 감정이란 연속성이 없이 단절되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그럼 악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풍부하게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젠 합리적 반성을 끌어들여야 할까?


철학적으로 논의하다가 갑자기 환상적인 설화를 투입하는 일도, 악의 상징이나 신화를 형이상학적인 철학으로 변형시키는 일도 어불성설이다. 남은 길은 이제 ‘창조적 해석’이다. 상징이 제공하는 ‘의미의 충격’에 충실하면서도 일관된 이해에 충실해야 한다.


<“상징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위 문구는 다음 두 가지를 말한다. 먼저, 상징은 무엇을 불러일으킨다. 그 다음, 상징이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은 생각이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322


전제 없는 철학은 없다. 상징들에 대한 생각도 이미 있는 언어에서 시작된다. 모든 것은 그 언어로 이야기된 상태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상징들에 대한 생각도 자기 전제가 있는 생각이 되고자 한다. 그러한 생각의 첫 번째 과제는 생각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말들에서 뭔가 생각나는 것, ‘생각나는 생각’이다. 생각을 시작하기 위해 먼저 생각나야 한다.


현대에는 언어가 잘게 나누어지고 빈곤해지고 기술화되고 심지어 상징논리학이라는 형식 속에 말려들게 되었다. 그러자 언어를 재충전하고, 충만한 언어에서 다시 출발하기 위해 종교현상학과 언어 정신분석학은 성스런 무엇과 인간의 관계에서 충만한 의미를 찾아 언어의 공백을 채우려 했다.


현대의 상징 철학의 이러한 움직임의 골자는 모든 것이 ‘이미’ 수수께끼처럼 이야기되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생각의 차원에서 시작하고 또 다시 시작하고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두 번째 과제인 ‘생각하는 생각’이다. 단 이는 우의적으로allegory 하는 게 아니라, 상징의 원초적인 신비를 존중하며 해석하는 것이다. 책임 있는 자율적 생각은 필수불가결하다.


<만일 상징이 철학 언술과 전혀 별개의 것이라면 우리의 시도는 희망이 없으리라. 그러나 상징은 이미 말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 (…) 상징은 두려움 같은 느낌으로 하여금 침묵과 혼란을 벗어나게 한다. 상징이 언어를 주어 고백을 낳는다. 상징을 통해 인간은 언어이기를 계속한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324


우리의 언어는 상징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는 상징들로 사유하고 상징들을 사용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생각나는 상징’을 전제로 믿지 않고서는 이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다시 처음부터 생각하며 비판 작업을 거친다. 참으로 순환적이라 할 수 있다.


단 우리는 비판을 통해 ‘비신화화’를 할 수 있을지언정 ‘신화의 제거’는 불가능하다. 비신화화를 하며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을 가리는 작업은 미토스mythos에서 로고스logos를 찾아내려는 것이다. 이로써 현대적인 신실성과 지적인 정직성, 나아가 객관성을 얻는다. 다른 한편 비신화화에 열을 내면서 성스런 무엇의 상징 차원이 빛을 보게 되었다. 상징과 만나 철학은 생기를 되찾았다. 비신화화는 생각을 상징에 미치게 한 것이다.


상징의 세계는 정적이지 않다. 상징은 스스로는 우상 숭배의 벽을 쌓으면서 다른 상징의 우상을 파괴하길 계속한다. 철학자가 할 일은 이를 필사적으로 관망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상징의 작용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해석학의 순환에 따라 결국 이해하기 위해선 믿어야 하고, 믿기 위해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우린 유대적인 죄의 고백과 그 상징에 대해 전이해Vorverstandnis와 각도, 즉 믿음을 갖고 말해왔다. 그렇기에 그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이제 이 순환의 단계를 넘어설 차례이다. 안이한 중립성을 떨치는 걸 넘어서서 상징들을 출발점으로 다른 것을 생각해내야 한다. 바로 순환을 확신으로 바꿈으로써 말이다. 상징에 대해 확신할 때 비로소 상징으로부터 의미를 형성하는 사고 활동인 ‘창조적 해석’이 가능해진다.


칸트의 선험적 연역은 한 개념이 어떤 객관 영역을 가능케 함을 보임으로써 그 개념을 정당화하는 작업이다. 앞서 보았듯 악한 존재의 신화를 통해 노예적 자유의 현실을 보일 때 악의 상징을 연역했다고 말할 수 있다. 상징을 인간 현실을 간파하고 드러내는 것으로 여기고 취할 때, 그 상징은 인간의 경험과 고백의 영역을 밝히고 들추어내는 힘으로 앞서 말한 역할을 감당한다. 단 이 방법으로는 반성 영역이 확장되는 데 그친다. 우리의 목표는 반성 의식의 질적인 변화이다.


리쾨르에 따르면 사실 모든 상징은 성현으로 인간과 성스런 무엇과의 관계를 표현한다. 상징의 존재론적 기능에 따르면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는 반성 차원의 문제이기보단 존재 안에 자리를 잘 잡으라는 충고다. 플라톤은 『카르메니데스』에서 “‘지혜를 가지라’와 ‘스스로 네 자신을 알라’는 같은 얘기다. 사람들은 지혜롭게 된다는 것을 ‘지나치지 말라’든가 ‘보증을 서면 불행이 닥친다’고 이해하는 등 하나의 조언으로 알 뿐 신의 구원으로 알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상징이 말하는 것은 삶의 터인 존재 한가운데 처한 인간의 상황이다. 그러므로 상징의 인도를 받는 철학자는 자아 인식의 담을 헐고 반성의 특권을 제거해야 한다. 상징은, 코기토Cogito가 존재 안에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 코기토는 상징 안에서 존재의 부름을 듣고 이미 존재에 참여하고 있다. 허물의 상징들은 모두 세계 존재 안에 있는 인간 존재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징들로부터 실존의 개념들을 정립해야 한다. 반성의 구조뿐 아니라 인간 존재로서의 실존의 구조를 정립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인간 존재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의 유한성이 어떻게 무로 나타나는지 그리고 인간의 악이 어떻게 반은 있는 것(존재)이고 반은 없는 것(무)인지 알게 된다.> - 『악의 상징』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324


다시 말하지만 철학은 언어에서 출발하므로 전제를 지닌 철학이다. 중요한 것은 그 전제를 분명히 하고, 그것을 자기의 믿음으로 제시하고, 믿음을 확신으로 정립하고 그 확신을 이해시키는 활동이다. 리쾨르는 이러한 믿음을 기조로 ‘나’의 삶을 세계에 드러내어 그를 인정받아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주체의 능동성을 평생에 걸쳐 역설한다.



마치며



이렇게 우린 카시러, 엘리아데, 그리고 리쾨르의 상징 문제를 살펴보았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상징 개념의 연구를 통해 과학만능주의와 허무주의로 점철된 인간의 언어 세계를 환기하여 근원에 있는 생명력을 불어넣고자 했다. 세부 내용은 다르지만 이는 마치 이백여 년 전 계몽주의가 폭주하여 인간이 객체화된 끝에 소외될 것을 우려한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를 필두로 한 표현주의 운동을 연상케 한다.


리쾨르도 말했듯 우리는 이미 상징에서 생각나고, 상징을 생각한다. 특히 성선설과 성악설의 대립 등 선악이라는 근원적 문제를 통찰하기 위해 우리는 부득이하게 신화의 문제까지 내려가 상징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Image from 「劇場版 魔法少女まどか☆マギカ ~叛逆の物語~」Copyright by (C) シャフト / (C) アニプレックス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극장판 : 반역의 이야기』에서 호무라는, TV판에서 우주 보편적인 신과 같은 개념이 되어 세계에서 존재가 말소 당했던 마도카의 인격을 끌어내려, 카나메 마도카라는 인간을 성립시키는 대신 자신은 신(마도카)에 대한 영겁의 반역자인 악마가 되었다. 마법소녀로서 같이 싸웠던 자신에 대한 기억은 없던 게 된 전학생 마도카에게 호무라는 묻는다.

“욕망과 질서,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에 마도카는 “그래도 질서를 어기면 안 되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그러자 호무라는 “언젠가 너는 나의 적이 될 지도 모르겠네. 그렇지만 괜찮아. 나는 마도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겠어.” 라 말한다.


이 장면을 우리는 다양한 시각으로 풀어낼 수 있다. 위 본문처럼 악의 차원의 문제를 상징들을 이용해 변증법적으로 풀어나갈 수도 있고, 기존의 형이상학적 사변을 이용할 수도, 신학의 카테고리에서 고민할 수도 있다. 거듭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세계에 표현해내는 일이다.


단 여기서 굳이 첨언하자면, 우리 인간이 자연 언어를 사용하는 이상 그를 구성하는 상징들은 대부분 중립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다. 그리고 학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어느 상징 체계를 축으로 삼아 말하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어차피 인간의 경험을 어떤 보편적인 것으로 총괄할 순 없다. 나는 칸트의 세계 보편적 윤리에 대한 고민을 칭송할지언정 현대 사회에 이를 꺼내들어 전가의 보도마냥 휘두르는 데에는 반대한다.


우리는 현실에 살고 있는 인간이다. 현실에는 헤게모니란 게 있고, 정치적 입장이란 게 필연적으로 따라붙는다. 완전히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논의를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의 윤리를 넘어선 또 다른 윤리를 추구하는 게 아닌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위험에 대한 담론이 정치화되지 않은 사회를 상상한다는 것은 요즈음 너무 순진한 일일 것이다. 그 같은 사회에서는 가치에 대한 자유 논쟁이 없을 것이다. 공유된 이데올로기를 만들기 위한 공개토론의 장도 없을 것이다. 그 같은 사회에서는 소외된 개인들만이 위험 인지의 심리학이론에 나타나는 인간의 이상을 충족시킬 것이다. 다행히도 그 같은 인간은 매우 비현실적일 것이다. (…) 선의의 위험분석가는 편견에서 자유롭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는 편견의 종류를 분류하는 것으로 자신을 손상시키기보다는 차라리 편견이 중요하지 않은 척 할 것이다. 표준화된 비난의 발생이 위험을 인지하는 것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자신의 편견을 극복할 동기도 개념적 연장도 갖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일을 자신의 옹졸한 편견에 잠기게 한다. 인종차별주의로 비난받지 않기를 바라며, 문화적 우월주의 혹은 정치적 좌우파를 의미하지 않기를 바라며 자신의 문화의 헤게모니를 순진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가 순진성을 위한 시대는 아니다.> - 『순수와 위험』 한국어판 서문 中


자신이 세계에 발을 걸친 실존이라면 발이 닿은 그 지점에서부터 표현하고 이야기하기를 주저하지 말자.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우린 세계를 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참고 문헌



《헤겔의 문화-역사 발전과 악의 관계》 이정은 著

『Philosophie der symbolischen Formen』 E. Cassirer 著

《Der Begriff der symbolischen Form im Aufbau der Geisteswissenschaften》 E. Cassirer 著, 오향미 譯

『Vom Mythus des Staates』 E. Cassirer 著

『카시러의 문화철학』 신응철 著

『Das Heilige und das Profane』 M. Eliade 著, 이은봉 譯

『La Symbolique du Mal』 P. Ricœur 著, 양명수 譯

『Purity and Danger』 M. Douglas 著, 유제분 譯

『Enten – Eller』 S. Kierkegaard 著, 임춘갑 譯

『Sygdommen til Døden』 S. Kierkegaard 著, 임규정 譯

『성경전서 개역개정 / 새번역』 Copyright by 재단법인 대한성서공회

『Naturalism and Religion』R. Otto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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