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hoo Kim Feb 22. 2021

허무주의 그리고 존재사유

윙어의 소설과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에로》를 중심으로



들어가며     



Image from『Spec Ops: The Line』Copyright by (C)Yager Development



Yager Development에서 개발한 밀리터리 TPS 장르 게임 『스펙 옵스 : 더 라인』은 델타 포스 요원인 주인공 마틴 워커와 동료 두 명이 모래 폭풍이 휩쓸고 있는 두바이에 파견되어, 구조 활동을 위해 남았다가 연락이 두절된 존 콘래드 대령과 휘하 제33차량화보병대대와 접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사태의 실상에 다가가며 주인공 일행은 백린탄을 사용해 33대대와 민간인을 몰살시킨다든지, 두바이에서 미군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묻기 위한 CIA 요원의 계략에 넘어가 물탱크를 파괴하는 데 일조한다든지 하고, 워커는 끊임없이 ‘임무 중에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합리화한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콘래드에게 돌린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미 자살한 콘래드의 환영과의 설전에서 그는 그 모든 학살이 자신의 선택으로 자행되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플레이어의 마지막 선택을 통해 스스로를 쏘아 벌하거나, 진실을 모래 속에 묻어둔 채 집으로 돌아가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기를 결정한다.     


그리고 제작자가 플레이어에게 남기는 마지막 메시지가 떠오른다. “아직도 당신이 영웅이 된 것 같습니까?” 종래의 밀리터리 액션 게임이 적과 아군을 구별해놓을 뿐 주인공 진영이라는 인물에 집중하느라 전쟁의 광기 속 인간을 등한시했음을 꼬집는 문장이다. 그러나 이런 제작자의 의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시종일관 제작자의 의도대로 리니어하게 플레이하게 한 끝에 반전反戰 메시지나 주입시켜 유저들을 가르치려 드는 맹도견 RPG”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일단 나는 게임의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선형적인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제작자의 의도를 존중한다. 사실 아무리 게임에서 전쟁의 비극을 실감나게 묘사해도 실제 전쟁의 비극에 비하면 당연히 새 발의 피일 것이다. 어떤 비극의 서사도 그것이 참조하는 현실의 비극을 뛰어넘을 수는 없고, ‘전쟁에서 진정한 의미의 영웅은 없다’는 제작자의 생각 역시 그런 현실의 규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작가가 만든 인물들Charaktere은 어느 만큼 객관적인가?” 라고 물으면서 헤벨은 “인간이 신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운 만큼”이라고 말한다. 신비주의자는 자신을 포기하고 신과 완전히 일체가 되었을 때 자유롭다. 영웅은, 그가 루시퍼처럼 반항하면서 자기 자신 속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완성했을 때, 그리고 자신의 파멸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로부터ー자기 영혼의 행동을 위해ー어중간한 것을 모두 다 추방했을 때 자유롭다. 규범적 인간은, 작품들과 실체적 윤리의 높은 규범들이 모든 것을 완성한 신의 존재 속에, 구원의 이념 속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규범들이 가장 내적인 그 본질에 있어서는 현재의 지배자에 의해 건드려지지 않은 채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해 자유를 획득했다. 그러나 영혼이나 작품에서 규범성의 현실화는 그 기반, 곧 현재적인 것에서 분리될 수가 없다. 만약 그럴 경우 자기 대상과의 형성적인 부딪침이라고 하는 규범의 가장 고유한 힘은 위태롭게 되고 말 것이다.> - 『소설의 이론』(G. Lukacs 著, 김경식 譯) 中


‘전쟁은 무고한 희생을 낳는다’ ‘어떤 대의명분으로 치장해도 전쟁의 본질은 무력에 의한 학살이다’ …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고 나서 현대인들에게 학습된 통념이자 규범이다. 제작자가 선형적인 서사를 통해 이를 환기하고자 했다면 굳이 ‘훈계 받았다’며 정색할 생각은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남은 후반세기 동안에도 베트남, 중동, 동유럽, 중국 내 소수 민족 거주지 등에서는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있었고, 그 이면의 어떤 명분이나 실리도 앞서 말한 현대인의 통념이자 규범을 뒤집을 수는 없다.     


서구의 후반세기엔 서구 사상의 가장 격렬한 과도기였던 전반세기를 식민지 다툼, 기계 전쟁, 총력전, 홀로코스트, 맨해튼 계획, 리틀 보이, 팻 맨 등의 키워드로 대표시키고, 전쟁으로 인한 인류의 상처를 추모 내지 기념하는 데 치중하는 태도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그 당시 분명히 일어난 여러 정신사의 시도를 ‘합리성의 근대는 전쟁을 통해 스스로 예견한 종말을 맞았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도매금으로 관에 넣어 성급하게 뚜껑에 못질하려는 마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 단위의 트라우마에 대한 의사의 임시처방은 될 수 있어도 ‘합리보다는 자기보존하는 정념에 지배 받는 인간’임을 뼈저리게 통감하면서도 또 다시 내일을 긍정하며 자신의 격률을 고민하는 현대인으로서는 미숙함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독일에는 전쟁에 참전한 당사자이면서도 전쟁을 두고 능동적 허무주의의 미학으로써 시대를 초극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를 주제로 블로그에서 『근대 독일 지식인들의 허무주의적 이상』이란 제목으로 한 번 다룬 적이 있다. ( https://brunch.co.kr/@erasmut/6 ) 거기서 언급한 에른스트 윙어Ernst Jünger의 작품들을 이번 글에서 소개하려 한다.     


뒤이어 소개할 하이데거의 논문 《존재물음에로》는 윙어의 기념논문집에 기고하였던 글 《‘선線’에 대하여Über Die Linie》를 손질하여 후기 저작 『이정표』 에 수록한 것이다. 《‘선線’에 대하여Über Die Linie》는 하이데거 탄생 60주년(1949)을 맞아 윙어가 헌사한 동명의 제목의 글(단 윙어의 경우 Über를 ‘넘다’는 의미에서 사용하였다)에 대해, 윙어 탄생 60주년(1955)을 기념하여 하이데거가 답한 글이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대한 물음을 극복하고, 존재로서의 존재가 드러나는, 바꿔 말해 무無가 무화無化하는 본질장소에 대한 논의해명을 통해 허무주의의 본질에 대해 근본적으로 숙고하고자 한 하이데거의 사유의 편린을 독자 여러분의 존재사유의 또 다른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에른스트 윙어, 1986년 9월 15일 바트 고데스베르크에서 촬영


(1) 에른스트 윙어의 허무주의의 여정


<질서는 공동의 적이다.> - 『일기』 (E. Jünger 著) 中     


윙어는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작가이자 20세기초 독일 보수 혁명의 선봉에 있던 사람이다. 보수 혁명은 근대적 혁명 이념들이 지향했던 ‘역사적 진보’가 아닌, ‘서구화 이전의 원초적인 독일 정신’으로 회귀하고자 한, 또는 그를 복원하고자 한 움직임이었다. 윙어에게 참전 경험을 살려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전쟁의 파괴력을 통해 서구 문명에 은폐된 민족 본연의 생과 정신을 일깨우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으로써 자신과 민족의 전쟁 트라우마와 패전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계몽의 시대는 끝났다. 전쟁은 그 종말을 완성시키며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감정을 복구시켜주었다.> - 『작은 숲 125』 (E. Jünger 著) 中     


그의 처녀작 『전쟁 폭풍 속에서』는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서부 전선에 복무한 작가 본인의 경험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 하나로 1920년대에 작가로서의 윙어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후대의 비평가들의 평은 본 작품의 양면성을 보여주는데, 이는 전쟁의 잔혹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도 그에 대한 적극적인 비난이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진 않는 데서 비롯되었다.     


<현상의 홍수로부터 한 가지는 점점 더 명확해졌다. 바로 물질의 중대한 필요성이다. 전쟁은 물질의 싸움으로 치환되었다. 기계, 강철, 폭발이 물질의 요소였다. 심지어 인간조차 물질로 치환되었다.> - 『전쟁 폭풍 속에서』 (E. Jünger 著) 中     
<부상을 당해 붕대를 피로 물들인 무리가 우리 옆을 지나쳤다. 그들의 창백한 얼굴은 싸움의 흥분에 물들어 있었다. 힘든 시간이 닥칠 예감이 우리를 엄습했다. “조심해라, 제군들!” “내 팔! 내 팔이!” “이봐, 정신 차려!”> - 『전쟁 폭풍 속에서』 (E. Jünger 著) 中   


윙어는 여기서 이 전쟁을 ‘무無에 의한 대숙청’으로 묘사하고 있다. 전쟁은 어떠한 이상과도 거리가 멀었으며 단지 미증유의 공포 그 자체였다. 윙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체험이 19세기를 지배했던 ‘모든 가치의 전도’를 초래했다고 보았다.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다. 제군들, 그대들의 가치는 불멸이며 그대들 옆에 나란히 선 형제의 마음 깊숙이 새긴 기록은 불타는 고리를 두르고 있다. 우리는 그대들의 상처를 하얀 리본으로 동여매고, 그대들의 파괴하는 눈에 영원의 막이 엄습하는 것을 들여다보지 않았는가?> - 『전쟁 폭풍 속에서』 (E. Jünger 著) 中     


전후 새로운 보수주의 담론 지형의 형성에 선도적 역할을 수행했던 것은 무엇보다 윙어의 전쟁 문학이었다. 문학비평가 카를 하인츠 보러Karl Heinz Bohrer가 그의 초기 작품들을 ‘전율의 미학’이라 특징지은 건 매우 적절했다. 윙어의 전쟁 문학은 참혹함, 기괴함, 무의미와 혼돈, 절망과 냉소, 그리고 병적 쾌감과 묵시록적 환영으로 가득 차 있다.     


1922년 윙어는 수필 『내적 체험으로서의 전투』를 발표한다. 이미 『전쟁 폭풍 속에서』에서 그려낸 경험을 추상적・반성적으로 서술하는 이 작품은 ‘피’, ‘공포’, ‘참호’를 비롯한 전쟁의 양상들을 각 장의 주제로 다루며 1차 세계 대전의 물질성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윙어는 수없이 흘려진 피는 단지 승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밝힌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좁은 틈새에서 춘 춤”ー생사를 건 전투ー은 모든 합리적 판단을 중지시키고 인간 내면에 잠재해 있던 ‘동물적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것은 19세기의 낙관적 휴머니즘을 거부하는 20세기적 인간론ー전쟁으로 체험하게 된 원초적 폭력성에 기반한ー의 대두였다. 패배에 절망하지 않고 그것을 직시하며 끝까지 투쟁하는 정신 자세를 윙어는 ‘영웅적 현실주의’라 명명했다.     


1923년에 발표한 저작 『폭풍』은 특히 프리드리히 니체의 ‘동일자 영원회귀’ 사상을 짙게 반영하고 있다. 작중에서 이야기의 시점이 현실에서 미적이고 불합리한 꿈의 세계로 이동하는데, 이는 시대정신과 윙어 세대 젊은이들의 삶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에 반영된 것은 현대성의 우연성에 대한 공포이다. 전쟁을 미화하여 무섭고도 부조리한 극작품처럼 투영하는 ‘순간’과, 전쟁이 분명히 드러내는 존재를 위협하는 무서운 표현인 ‘현대 세계’, 윙어는 『폭풍』을 통해 양자를 동시에 비판하고 있다.     


『폭풍』에서 그는 전우들의 죽음과 그들의 포기된 청춘을 무의미 속에 사장시키지 않기 위해 그것에 나름의 내적 필연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여기서 윙어는 역사적이고 문명적인 “시간에서부터 탈출”하여 자연의 영원성으로 시점을 바꾼다. 전쟁의 파괴는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현대 총력전의 공포는 그를 자연적인 파괴와 탄생의 순환으로 심미화시킴으로써 비로소 잠식될 수 있었다.     


1925년 융어는 소설 『불과 피』를 발표한다. 똑같이 1차 세계 대전을 다룬 처녀작인 『전쟁 폭풍 속에서』와는 다른 문체와 세부적인 설명 방식을 도입한 이 작품은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었다. 1935년에 개정판을 내며 융어는 편집상의 변경을 가하며 특히 텍스트를 압축하는 데 신경을 썼다. 1933년 이후 그는 국가사회주의 이념과 더욱 거리를 두며 히틀러와 나치 정권과의 충돌을 피하는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행보를 신중히 하려 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작가적 상상력을 통해 제1차 세계 대전을 묵시록적 환영으로 묘사해나갔다. 가공할 첨단 무기가 내뿜는 화염은 피의 희생을 통해 세상을 정화시키는 의미를 갖는다. 불과 피의 조응이라는 이 보수주의 작가 특유의 전율의 미학은 근대성ー현대 기술ー과 신화ー미적 승화ー의 결합을 의미했다.     


<비로소 우리 세대에 와서 기계(문명)와의 화해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그 속에서 단지 유용성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의미로운 일보一步이다 (…) 아마도 이 전쟁은 우리에게 거대한 가능성일 수 있다. 이러한 방향의 가능성에 비하면 수백만의 죽음은 오히려 값싸게 치러진 셈이다.> - 『불과 피』 (E. Jünger 著) 中     


제1차 세계 대전 중 러시아에서 발발한 공산주의 혁명을 시작으로 종전 후에는 서구권 역시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우익 지식인 중 보수주의적 성향을 지닌 자들은 범우익적인 ‘민족 운동völkische Bewegung’에 가담했다. 독일 보수주의 지식인들은 ‘서구적인’ 정치 지배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 대안적으로 상정된 ‘민족Volk’에 대한 정치적 담론을 고무시켰다. 근대적 의미의 민족Nation과는 달리 민족Volk은 혈연에 기반한 일종의 자연적 공동체를 의미한다.    

 

당시의 보수주의 지식인들은 미래에 대해 그다지 밝은 전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몰락에서 자신이 속했던 (구)시민 계층과 그들이 이루었던 한 시대 전체가 기울어져 감을 느끼고 있었다. 유례없는 절망적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그들 중 일부, 특히 젊은 세대는 전통으로의 복귀를 단념하고 ‘앞으로의 도주’를 감행했다. 더 이상 보수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닫고 좌파보다도 급진적으로 ‘혁명’을 부르짖은 것이다.     


다음 장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1932년 윙어가 발표한 이론서 『노동자 ~지배와 형상~』은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그는 노동자의 형상을 두고 서구 시민 사회를 파괴할 근본적인 힘으로 간주했다. 새 시대를 지탱하는 원칙은 ‘총체적인 노동성격’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개인주의의 추앙’, ‘민주주의적 자유주의’, ‘사회적 모순’으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세계관을 전복시키는 것으로 각각 ‘노동의 유형’, ‘노동자의 상태’, ‘노동 계획’과 대립한다.    

 

이러한 급진적인 발상은 국가사회주의 이론에 일부 참조되기도 하였다. 나치 정권과 파시즘이 대부분의 노동자에게 우호와 기대를 얻은 덴 윙어의 발상이 기여한 부분도 적지 않을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윙어의 작품군이 ‘파시스트 예술’로 논의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출구가 전혀 없다. 옆길도 퇴로도 없다. 가능한 것은 오히려 우리가 직면해 있는 과정의 비중과 속도를 상승시키는 것이다.> - 『노동자 ~지배와 형상~』 (E. Jünger 著) 中     


보수 혁명론자들은 수구적 대안을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미 진행되고 있는 변혁의 과정을 더 끝까지 밀고 나아가고자 했다. 오로지 부정적 현실의 절대적 파괴 속에서 이들은 모든 보수주의적 가치들의 부활을 전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수 혁명 담론은 독일 문화비관주의의 후예였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것은 독일 지식인 특유의 허무주의적 이상이었다.     


윙어의 『노동자 ~지배와 형상~』은 보수 혁명 담론이 극대화된 예이다. 그의 ‘노동자’는 공장 노동자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오직 부르주아적 인간형의 반대상이었다. 개인적 자유의 의식이나 감정이 철저히 배제된 일종의 로봇과 같은 이 이질적 존재는 현대 기술・산업사회 메커니즘에 의해 억압된 대중의 자화상이었다.     


집단주의와 기능주의, 반인본주의적 경향성을 놓고 보면 영락없는 파시스트 예술이지만 사실 윙어의 이론은 파레토나 마르크스처럼 최종적으로 사회구조의 전복을 종용하는 유물론이 아닌 극한의 관념론이라 할 수 있다. 윙어가 형상화해낸 노동자의 미학은 그의 문학 특유의 ‘전율의 미학’의 발로이다. 그의 노동자는 신시대의 창조자라기보다는 허물어져가는 낡은 세계의 총체적 파괴자이다.     


<이러한 유의 파괴는 너무나 깊고 너무도 근거가 명확하기에 이 파괴를 통과해 지나가지 않고서는 이를 멈추게 하거나 새로운 조화를 이룰 방도가 없는 것이다.> - 『노동자 ~지배와 형상~』 (E. Jünger 著) 中     


『서구의 몰락』에서 헤겔적인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한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Arnold Gottfried Spengler가 ‘서구 문명의 몰락의 전조’로서의 전쟁과 ‘사후경직’으로서의 사회주의를 두고 이를 순환론적 운명으로서 받아들이라 할 때, 윙어는 종말에 다다른 역사가 초월적인 영웅에 의한 신화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근대 문명의 총체성에 대한 슈펭글러와 윙어의 논의에서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의식이 동일하게 나타난다.     


윙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체험을 통해 ‘모든 가치의 전도’를 예고했다. 그의 전쟁 문학에 등장하는 제반 기호들, 즉 불과 피, 무無, 새로운 인간 등에서는 20세기 총력전에서 비롯된 정신적 충격의 징후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정신적 충격이야말로 20세기의 최전방 전사들을 부르주아적 의미의 ‘역사’와 단절시킨 계기였다.     


전장의 전사와 마찬가지로 노동자 역시 윙어에게는 더 이상 부르주아적 ‘역사’의 주체가 아닌 역사의 종말의 징후를 나타내는 기호이자 그가 바라 마지않는 영웅이었다. 오직 그들ー전사와 노동자ー만이 현대 기술을 수단으로 하여 신화적 세계의 부활을 앞당길 수 있었다. 여기서 분명 니체의 ‘동일자 영구회귀’ 사상의 반향이 느껴지긴 한다. 그러나 윙어는 노동자에게서 인간적인 정서적 친밀감을 느낀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비인간적인 근대 문명의 화신인 동시에 문명의 부패를 정화하는 창조적 원시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곳은 동화와 같은 풍경을 지니고 있다. 가끔 열차를 타고 대도시로 진입해보라. 기술이란 식물로 가득한 무한한 마법의 정원을 통과해 달리면서 일하는 남녀의 금속성 환영을 보고 이 도시들 중심부의 이글거리는 아크등이 연출하는 인공 하늘 아래에서 수없이 울리는 기계의 광란과 비명소리에 도취되고 나면 이 세계가 특수한 것이며 사실상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종결부에서 아직 매우 전원적인 분위기로 공업에 관해 말한 바 있었다. 그 이래로 우리는 과연 어디에 이르렀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 『불과 피』 中     


이처럼 윙어는 서구의 근대성, 부르주아의 역사를 비관한 극한의 관념론자이면서도 현실 정치에 대한 감각은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몰정치성 혹은 정치적 단순성은 존재의 역사를 전복하려 한 하이데거 역시 공통적으로 가진 성향이었다. 윙어가 자신이 추구하는 노선과 다름을 빨리 깨닫고 진작 나치를 멀리하여 정권 당시 견제를 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하이데거는 나치를 고무 찬양하는 연설까지 여러 번 했지만 말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1960년 촬영



(2)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에로》     



앞서 말했듯 이 논문은 하이데거가 윙어에게 헌사한 글 《‘선線’에 대하여Über Die Linie》을 다듬고 고쳐 『이정표』에 게재한 것이다. ‘존재물음에로’ 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는 “허무주의Nihilismus의 본질에 대한 숙고는 존재(X)로서의 존재를 논구하는 가운데 비로소 유래한다”(『이정표 Ⅰ』 p.321)는 말이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물음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대한 물음die Frage이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때마다 각각 어떤 존재해석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하여 물음 없음das Fraglose의 상태에 빠진 형이상학은 그 자신의 근본바탕 속으로 귀환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실은 존재의 망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막다른 길에 다다른 형이상학이 허무주의에 빠지는 귀결을 낳는다.     

윙어가 처음 하이데거에게 헌사한 동명의 글에서 제시한 ‘선’은 완성된 허무주의이다. 윙어는 선과 더불어 ‘영점Nullpunkt’을 말하기도 한다. 하이데거의 해석에 따르면 “영零은 무無를, 즉 텅 빈 것을 가리키며, 모든 것이 무로 치닫는 곳에서는 허무주의가 지배한다.”(『이정표 Ⅰ』 p.322) 그는 윙어가 허무주의를 “최상의 가치가 무가치해지는”(프리드리히 니체 『힘에의 의지』 단편 2, 1887년)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선線은 또한 허무주의의 운동이 공허한 무das nichtige Nichts 속에서 비참하게 종식될 것인지, 아니면 그 운동으로 말미암아 존재가 새롭게 증여되는 영역으로 이행하게 될 것인지 가늠하는 경계이다. 선의 장소로부터 허무주의의 본질의 유래와 그것의 완성의 유래가 밝혀진다.     


당초 윙어가 ‘선을 넘어서trans lineam’의 관점에서 상황판단을 했다면 하이데거는 ‘선에 관하여de linea’의 관점에서 논구를 했다. 허무주의의 운동과 관련하여 인간의 상황을 판단하고자 할 땐 모종의 충분한 본질규정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러한 앎이 결여된 게 현실이고, 상황판단이 미흡해짐에 따라, “우리는 허무주의에 대해서 경솔하게 판단하게 되고, 그것이 ‘모든 손님들 가운데 가장 섬뜩한 손님’(『힘에의 의지』中)이라는 현실을 전혀 바라보지 못한다.”(『이정표 Ⅰ』 p.323) 허무주의는 의지에의 무조건적인 의지로서 고향상실 그 자체를 의욕한다. 윙어는 이에 대해 자신의 글에서 지적했다.     


<허무주의를 잘 정의한다는 것은 아마도 암의 발병원인을 명확히 보여주는 일과 흡사할 것입니다. 허무주의를 잘 정의한다고 해서 그러한 좋은 정의가 곧 치료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인류 전체가 그 일에 다 같이 힘쓴다면, 그것이 치료의 전제는 될 수도 있겠지요. 실로 문제가 되는 것은, [허무주의가]역사를 광대하게 뒤덮으면서 침식하고 있는 그 과정입니다.> - 《선을 넘어서》(E. Jünger 著) 中      


하이데거는 허무주의의 본질이 치료될 수 있거나, 혹은 치료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못 박는다. 허무주의는 ‘건강함을 상실한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을 통해 유일무이한 ‘건강함das Heile’을 지시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하이데거는 선線의 논구를 두고 정의定義를 유예 혹은 포기할 수 있다는 심중을 내비친다.     


이러한 포기가 있고 나서야 사유는 긴장된 숙고의 길로 접어든다. 이러한 숙고를 통해 우리는 사태에 합당한 사유의 엄밀함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경험한다. 윙어의 사례에서도 봤듯 형이상학적 이성의 끝은 허무주의라는 극한의 관념론이다. “허무주의의 본질을 사유하는 엄밀함은 이성의 심판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이정표 Ⅰ』 p.325) 이성과 이성의 표상행위는 단지 사유의 한 가지 양식에 불과하다.      


<이성은 결코 이성 자신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유로 하여금 이성의 방식으로 사유하도록 명하여왔던 그것(그 자신의 고유한 진리 속에서 사유가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말 건네고 있는 존재 자체의 부름 - 역자)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입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25,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이성의 지배 속에서 유럽의 허무주의는 진행되어 왔고, 종국에는 독일 보수주의자들의 그것처럼 비합리적인 것 속으로 도피해 들어갔다. 결국 허무주의에서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는 상호작용 속에 얽힌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하이데거가 제시한 길은 이러한 양자택일의 기로를 벗어나 있는 어떤 명령(Geheiß, †존재의 불러모음, 존재의 명命) 앞에 사유가 도달될 가능성이다.     


윙어의 『노동자』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식 이후 만연한 유럽의 허무주의의 형세를 서술한다. 여기서 ‘노동자’는 니체가 말한 ‘능동적 허무주의’, 즉 영원회귀를 수용하고서도 자신의 격률로써 형이상학적 인간을 초월하려는 초인Übermensch의 자세를 지향하는 단계에 속해 있다. 작품이 지니고 있는 활동성은 현실적인 모든 것의 ‘총체적인 노동 성격’을 노동자의 형태로부터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존립하는데, 이러한 활동성은 변화된 기능 속에 여전히 존립한다.     


쉽게 풀이하자면 이제는 현실적인 것을 그 자체로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서술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떤 예리한, 특이한 서술도 존재자 전체의 근본경험으로부터 내맡겨진 인간의 표상행위의 부분집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윙어가 작중 ‘광학Optik’이라고 말한 봄의 방식과 시야영역 역시 그러한 표상행위에 내맡겨진 채 맹종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근본경험에 앞서 이미 선행하고 있는 것은, “존재자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선행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존재의]환한 밝힘Lichtung이며, 이러한 환한 밝힘은 인간에 의해서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이정표 Ⅰ』 p. 327)  윙어가 니체의 동일자 영구회귀 사상을 기반으로 파악한 존재자 전체는 (니체의)힘에의 의지의 형이상학의 빛과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다.     


<에른스트 윙어의 저작인 『노동자』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여태까지 니체의 모든 문헌들이 할 수 없었던 작업을, 즉 존재자를 힘에의 의지로서 기투하였던 니체의 시각 속에서 존재자 및 존재자의 존재방식에 대한 모종의 경험을 중개하는 작업을, 슈펭글러와는 다른 방식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28,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그러나 아직 이 당시의 니체 형이상학은 기성의 학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사유를 통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상황 자체마저 니체가 주창한 ‘힘에의 의지’에 부합했다. 힘에의 의지, 즉 존재자의 본질은, 그것이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현실적인 것을ー힘에의 의지(존재자)가 바로 그런 것으로서 본원적으로 존재하는ー그런 현실성 속에서 나타나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 헤겔의 역사의 종말,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은 그를 비관할 뿐 소극적으로 담담한 채 있으려는 존재자의 본질이 이미 선행하여 현실로서 적극적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윙어의 서술은 이미 잘 알려진 현실적인 것을 단지 모사하고 있지 않다. 거기에선 ‘새로운 사상이나 새로운 체계가 거의 문제시되지 않는’ 어떤 ‘새로운 현실’에 접근하고 있다. 『노동자』 이후, 『고통에 대하여』 같은 서술 활동 중 윙어 자신은 이미 ‘선을 넘어Über Die Linie’ 있었다. 그가 허무주의를 벗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극복의 방향 속에서 사유하였던 능동적 허무주의의 작용에 참여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의 저작들을 통해 “아직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허무주의의 본질과의 논쟁이 새롭게 불타오를 수 있다.”(『이정표 Ⅰ』 p.329)     


하이데거는 허무주의의 운동이 전 세계로 만연되어 다양한 형태로 노골화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들은 허무주의의 본질과 논의대결을 하려고 시도하기보다, 허무주의에 반대하여 종래의 것을 복구하려는 결정적으로 반동적인 시도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형이상학적 지위의 의문스러움을 통찰하려고 하기보다는 이러한 통찰 앞에서 도피하는 가운데 피난처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관장하는 총체적 조직에의 의지는 니체가 능동적 허무주의라고 특징지은 것과는 다른 식으로 존재하는 힘에의 의지의 고양을 의미한다.     


윙어는 『노동자』에서의 기본적인 전망을 포기하지 않은 채, 완성된 허무주의의 영역으로부터 독자들을 구해내고자 의도했다. 인류가 비축하는 모든 것ー각 개인의 인격들, 인간이 이루어낸 각종 작품들, 그리고 시설들ー은 이러한 비축이 완성된 허무주의의 영역에서 벗어날 경우에만 선을 가로지를 수 있다. “완성이란, 전체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힘들게 통찰될 수 있을 뿐인 허무주의의 모든 본질가능성들의 집결을 의미한다.”(『이정표 Ⅰ』 p. 331) 허무주의의 완성은 곧 비축품이 정상상태로 되어 예외 이외에 더 이상 아무것도 주장될 수 없게 되는 상태이다. 선을 가로지르는 것은 선의 본질장소를 논의하여 해명함을 전제로 한다. 허무주의에서 그것의 본질로 되돌아가zurück 사유할 때 우린 비로소 허무주의의 본질가능성을 사색할 수 있다.     


<허무주의의 완성Vollendung은 이미 그것의 종말Ende이 아닙니다. 허무주의의 완성과 더불어 비로소 허무주의의 최종단계는 시작합니다. 최종단계의 영역은 추정하건대, 그것이 정상상태 및 이러한 상태의 고착화에 의해서 철저히 지배되기 때문에, 기이할 정도로 드넓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성이 종말에 이르는 그 영도선은 최후에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32,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하이데거는 윙어의 언어가 선을 ‘넘어가고’ 있을 때에도, 즉 선의 이편에서나 저편에서나 동일함을 지적한다. 여기서 언어는 단순한 표현의 수단이 아니다. 『노동자』의 부제 ‘지배와 형상’에서 윙어는 ‘형상Gestalt’이라는 말을 당시 형태심리학의 의미에서 ‘자신의 부분을 다 합친 총합 이상의 것을 포괄하고 있는 어떤 전체’로서 이해한다. 단 그는 형상에게 문화적인 지위를 부여하면서 이를 ‘단순한 이념’과는 분리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이념’ 역시 근대적 의미의 ‘주체에 의한 표상’이 아니라 ‘이데아적(불변의 존재의) 관조를 통한 봄’이다. 그에 따라 윙어의 ‘형상’은 플라톤적으로 ‘고요히 머무르는 존재ruhendes Sein’이다. 플라톤 이래 계승되는 존재론의 구조는, ‘존재자(현존하는 것)에 대해 존재(현존)가 통찰됨’이다. ‘고요히 머무르는’ 존재와 ‘변화하는’ 존재자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초월로서 즉 형이상학적인 것das Metaphysische, 자연적인 것을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존재’를, 즉 현실적인 것의 현실성을 순수한 생성과 절대적인 운동으로서 사유한 헤겔과 니체 역시 ‘변화하는’ 존재자를 ‘고요히 머무르는’ 존재로부터 표상하는 플라톤 형이상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윙어의 작품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또한 윙어의 ‘노동자의 형상’으로서의 형상이 개별화된 인간의 자아성, 즉 주체적인 이기성이 아니라, “인간유형의 미리 형성되어 있는 형상적 현존이 근대적 형이상학의 완성과정에서 출현하여 그러한 사유를 통해 묘사된 극단적인 주체성을 형성하고 있다”(『이정표 Ⅰ』 p. 335)고 말한다. 앞 장에서 보수 혁명가들의 특징으로 ‘개별적, 주체적 인간’이 아닌 ‘집단적, 운명적 인간’을 염두하는 스탠스를 유지했다는 대목을 상기하기 바란다. 윙어의 ‘형상’은 인간의 본질구조 속에 깃든 것으로 존재자 일반의 근저에 놓인 주체이다.     


<인간존재의 이데아가ー처음으로 존재자에게서 [현존의]“재현Repräsentation”을 허락해줌으로써 이러한 것을 존재자로서 존재하도록 (존재자에게) 정당한 자격을 부여해주는ー그런 현존Praesenz으로서 이미 모든 현존자의 근저에 놓여 있는 그런 것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이 무엇보다 먼저 ‘[모든 것에게 척도를 부여하는 식으로]표준적으로 근저에 놓여 있는 것das maßgebende Zugrundliegende’이라는 의미에서 표상되어야만 합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36,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전통적인 존재론의 기본 도식을 이해하는 중요한 문장이므로 적어 뒀다가 두고두고 사색하길 권장한다. 후학을 위해 다소 미흡하고 거칠게 정리하자면, ‘형이상학에서 현존하는 것(존재자)으로서의 인간을 표준으로 표상하여 존재자는 존재자로 있도록 정당한 자격을 부여 받는다. 그리고 인간존재의 이데아는 이를 부여하는 현존으로서의 지위에 비로소 도달한다.’ 데카르트의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ergo sum cogito’ 역시 이의 연장선에 있다.     


인간의 형이상학적 형상이 의미부여의 원천으로서 나타난다는 사실은 인간을 표준적인 수브엑툼Subjectum(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집약하면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 즉 근거로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으로 설정한 최후의 결과이다. 이에 따라 흔히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초월transcendenz은 변화하는 여러 가지 본질근거들로 인해 다의적인 의미를 갖고, 이 다의성을 고려하지 못하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난다.     

이상의 내용이 인간존재의 형상이 의미부여의 원천으로 나타날 때 형이상학의 형이상학적인 것ー즉 초월ー이 변화하는 경과이다. 하이데거는 초월(존재자로부터 존재에게로 넘어감)이 그에 상응하는 귀환Reszendenz(존재로부터 존재자에게로 되돌아감)으로 전환되며 그 속으로 사라진다고 간주한다. 이에 따라 현존하는 것으로부터 현존으로 넘어간 형상은 다시 현존하는 것에서 재현된다. 노동자의 형상의 현존은 힘이다. “이러한 현존의 재현은 ‘새로운 양식의 특별한 힘에의 의지der neuartige und besondere Wille zur Macht’로서 노동자의 지배이다.”(『이정표 Ⅰ』 p. 337)     


<기술에 대한 모종의 현실적인 관계를 점유하기 위해서, 사람은 기술자 이상으로 존재해야 한다. 기술은 노동자의 형상이 세계를 움직이는 양식이자 방식이다.> - 『노동자 ~지배와 형상~』 (E. Jünger 著) 中     


하이데거는 윙어의 ‘현실적인’이란 어휘를 ‘참된’이라 간주했다. 기술의 본질에 상응하는 것은 참이다. 이러한 본질관계는 국지적이고 특수한 노동성격이 아닌 총체적인 노동성격에 대한 관계 속에 존립한다. 이렇게 이해된 ‘노동’은 힘에의 의지라는 의미에서의 존재(현존)와 동일하다. 따라서 기술의 본질규정은 ‘노동자의 형상의 상징’이다. 이러한 기술은 니체 철학에서 말하는 반그리스도적인 힘이다.     


기술은 힘에의 특이한 인간적 의지의 형상으로 각인하는 현존을 통해 일어난다. 그리스 시대 이래 존재는 현존Anwesen을 의미한다. 모든 종류의 현존Praesenz과 현존성Praesentation은 현존성Anwesenheit의 고유한 발현에서 유래한다. 바꿔 말하면 대자적인 존재자(인간)를 주체로 하여 포착한 이데아의 초월적이고 변하지 않는 본체이자 진리인 존재에서부터 존재론을 이야기해 왔다는 뜻이다. 그러나 ‘힘에의 의지’는 현실적인 것의 현실성으로서 존재자의 ‘존재’가 나타나는 한 방식이다. 노동자의 형상은 ‘노동’으로부터 그 스스로 의미를 수용하며, 여기서 ‘노동’은 ‘존재’와 동일하다.     


<이데아의 본질유래는 또한 그것과 친근한 형상의 본질이 유래하고 있는 동일한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일까요? 혹은 몰아세움은 단지 (노동자라는) 한 인간의 형상의 기능에 불과한 것일까요?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존재의 본질과 더 나아가 존재자의 존재는 인간의 표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표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40,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현실적인 것의 근대적인 표상행위는, 즉 그 안에서 무엇보다 먼저 개념 파악하여 장악하는 행위das Be-greifen가 자행되고 있는 대상화는, 현실이 공격적인 표상활동의 시야영역 속에서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도록 도발적으로 요청되고 있는 한, 어디에서나 현실을 공격한다. 그리고 이런 공격적인 표상활동에 대해 현실성 역시 반격을 계속해 왔다. 자연과학 역시 그 반격의 대상 중 하나였다. 반격을 받은 학문은 그 충격을 학문적 접근방식 내에서의 독자적 발견들을 통해 확실한 인식으로 접근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형이상학의 어둠으로서의 공격적인 표상활동, ‘개념 파악하여 장악하는 행위’를 두고 윙어와 하이데거가 주시한 문제는 현존과, 현존을 단순히 없애지 않고 현존의 부재로서 ‘무화하는’ 무無이다. 무가 ‘무화하는’ 한, 그것은 오히려 일종의 탁월한 현존으로서 확증된다. 즉 무는 이러한 현존 자체로서 스스로를 위장한다. 형이상학적 표상에서나 위장한 현존으로서의 무에서나 파악행위 자체가 근원적 의미에서 동일하다고 해도, 파악한 개념들은 본질적으로 다른 양식으로 존재한다.     


이런 까닭에 사유의 근본어들의 영역에서는, 사람들이 그것들을 망각하고 있든, 그것들을 확고히 아무런 검토도 하지 않은 채 재사용하든, 완성된 허무주의의 영역 속에서 사용하든 거의 아무런 상관도 없다. 여기서 우린 하이데거가 일평생 ‘진리를 보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존재(X), Seyn 표기라든지 전회Kehre를 지향한 내막을 들여다볼 수 있다. 본질 양식에서 형이상학적 초월의 다의성을 포착하지 못한 사유는 결국 위장된 현존으로서의 무로 다시 끌려갈 수밖에 없다.     


<형이상학의 언어와 형이상학 자체는ー그것이 살아 있는 신의 언어이든 혹은 죽은 신의 언어이든 간에ー형이상학으로서 선을 넘어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즉 허무주의의 극복을 방해하는 그런 울타리를 형성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요? 사실이 그렇다면, 그때 선의 가로지름은 반드시 말함의 변화로 진행되면서 언어의 본질에 대한 모종의 변화된 관계를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45,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하이데거는 허무주의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존재의 본질을 논의하며 해명해 들어가는 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식으로만 숙고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도상에서만 무에 대한 물음은 논구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형이상학의 언어부터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형이상학적 표상은 존재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사유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허무주의는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위장함으로써 모든 결정적인 논의 대결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윙어는 이에 맞서 “허무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존립하기 위해 아직 온전히 남아 있는 모든 힘의 원천들을 흐르게 하고 모든 도움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낼 필연성을 지적한다. 하이데거는 이에 동감하면서도, 윙어가 주장한 ‘(선이 통과되는 순간 개시하는)존재의 어떤 새로운 전향eine neue Zuwendung’이 경험되는 영역을 예비하는 데 조력할 것을 밝힌다.     


이전 글들 《하이데거, 예술 그리고 신학》(1), (2)에서 보았듯 하이데거의 존재, 바꿔 말해 진리의 대표적이며 본질적인 양상은 은폐, 숨음이며, 시, 예술 작품 등을 통해 존재의 비은폐성(알레테이아)의 단서를 구하거나 부정신학의 방식으로 진존재를 포착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본질 또한 전향(다가옴)과 등돌림(스스로 물러섬sich entziehen) 속에서 보존되고 거주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부르는 명命 즉 현-존An-wesen에 속한 인간의 본질은 그 자체가 귀 기울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속의 동일성은 존재 역시 갖고 있지 않은가?’ 하는 추론이 나온다. 그러나 인간 ≠ 존재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추구하는 숙명적으로 올바른 말함이 형이상학에서 유래한 논리학과 변증론을 통해 그 본질을 경험할 수 없는 로고스임이 암시된다. 형이상학적 표상행위라는 의미에서의 사유함의 오래된 습관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선을 가로지르는ー허무주의의 비판적 영역을 통과하는ー순간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게 되리라.     


<무는 허무주의의 완성과 더불어 사라질까요, 아니면 적어도 허무주의의 극복과 더불어 사라질까요? 겉으로는 하찮아 보이는 무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전부터 ‘존재’와 친밀한 사이로 있는 무의 본질이 도래하여 사멸할 자인 우리들 가운데서 머무를 수 있다면, 아마도 그때 비로소 무는 극복될 것입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51,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허무주의의 본질에 접근할 때의 양식과 방식의 차원에서 그것이 ‘좋은 정의’라면, 우리가 정의하려는 욕구를 포기할 때에야 그 참다운 면모가 나타난다. 정의하려는 욕구는 반드시 진술명제들로 확정될 것이며, 그 안에서 사유는 자신의 신선한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이러한 부정적인 양식을 유념할 때에야 모종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존재(X)의 십자형 교차선은 사방세계의 만남을 뜻하기도 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존재를 홀로 존립하는 것으로 표상한 후 그것이 비로소 가끔씩 인간에게 다가오는 대상인 것처럼 표상하는 습관을 거절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마치 존재에 의해 배제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은 배제되지 않고 존재 속으로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존재 역시 인간의 본질을 필요로 하면서 저 홀로 존립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포기하도록 지시되고 있다.     


인간은 그의 본질에 있어서 존재를, 그러나 존재(X)로서의 존재를 기억하는 자das Gedächtnis des Seins이다. 인간의 본질은 십자형으로 교차선을 그은 존재의 표식 속에서 좀더 시원적인 명(불러모음)의 요구 속으로 사유를 받아들이는 발현 속에 존재와 함께 속해 있다.     


허무주의 안에서 무가 특이한 방식으로 지배하고 있다면 인간은 허무주의의 엄습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것에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본질은 그 자체가 허무주의의 본질에 속해 있으며, 따라서 허무주의가 완성된 단계에 속해 있다. 인간은 존재 속으로 필요시되는(†즉 존재의 부름 또는 명에 의해 존재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 존재를 위해 사용되는) 그런 본질로서 존재(X)의 영역을 이루는 동시에, 이와 더불어 무의 영역을 이루고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선’이 완성된 허무주의의 영역을 가리키는 표식으로서 사유된다면, 이러한 선은 결코 어떤 경우에도 그저 넘어설 수 있는 어떤 것처럼 인간 앞에 놓여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선에 대해 숙고하면 할수록, 처음의 선의 모습은 그만큼 사라진다. 그런데 윙어는 선의 형상을 통해 나타난 허무주의의 장소를 고려하는 가운데 인간의 운동 가능성과 상황을 판단하였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윙어의 시도에 필요한 “허무주의와 그 진행과정 그리고 그것의 극복에 관해 상세히 기술하는 지지학地誌學”(『이정표 Ⅰ』 p. 354)이 선행하고서야 “존재와 무를 양자의 본질 속에서 모아들이는 그런 장소를ー즉 허무주의의 본질을 규정하고, 그리하여 거기에서 허무주의가 극복될 수 있는 방식들이 뚜렷이 식별되는 그런 길들을 인식하게 하는 바로 그런 장소를ー논의하여 해명하는 위상기하학”(위의 책)이 뒤따른다고 밝힌다.     


<더 이상의 여분은 없다. 인간은 단지 경제적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자기가 착취되는 대상이라고 느끼고 있다. (…) 소멸이 정말로 단순히 소멸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감소)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점차적으로 증대되는 권력의 신장 및 관통력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는다.> - 《선을 넘어서》(E. Jünger 著) 中


윙어는 허무주의적 사조의 주된 특징으로서 ‘감소’를 언급한다. 여기서 존재자 전체 내에서 점점 더 충만감과 근원적인 것이 감소해 들어가는 운동은, 힘에의 의지의 증가를 통해서 동반되고 규정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존재자 내에서 확증될 수 있는 감소는 존재의 어떤 생산에, 즉 힘에의 의지가 의지에의 무조건적인 의지로 전개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소멸하는 모든 것에 선행하며 또한 넘어서는 어떤 현존Praesenz이 있다. 존재자가 소멸해가는 곳에서도 이러한 존재자가 그 자신을 위해 편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이전에 먼저 어떤 다른 것이 편재하고 있다. 

    

이러한 어디에서나 존재자에게로 귀환하는 넘어섬 즉 ‘초월 자체transcendens schlechthin’는, 존재자의 ‘존재’이다. 넘어섬은 형이상학 자체이다. 여기서 말하는 ‘형이상학 자체’는 철학의 한 이론이나 분과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넘어섬이 ‘(주어져)있다es gibt’는 사실을 의미한다. 『존재와 시간』에서의 es gibt의 사태적 의미를 끌어들여 하이데거는 ‘넘어섬의 증여geben’의 주체es가 존재의 발현이라는 사유를 전개한다.     


넘어섬의 역사적 운명Geschick에 따라 인간적인 표상행위 자체가 형이상학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존재자에 대한 형이상학적 표상들이 곧 존재의 역사는 아니다. 존재의 역사는 넘어섬의 역사적 운명으로서 편재한다. 존재자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과 방식은 어디까지나 형이-상학Meta-Physik이다.     


<비록 우리가 무를 단지 ‘현존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의미에서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는 현존의 여러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부재적으로ab-weisend(부재하는 식으로) 현존Anwesen에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허무주의에 무가 편재하고 있고 또 무의 본질이 존재에 속해 있되, 이러한 존재는 넘어섬의 역사적 운명이라고 한다면, 허무주의의 본질장소로서 형이상학의 본질은 드러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오직 우리가 형이상학의 본질을 넘어섬의 역사적 운명으로서 경험할 때에만, 그리고 그렇게 경험하는 한에서만, 말해질 수 있습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56,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허무주의의 극복Überwindung은 어디에 존립할까? 바로 허무주의를 감내하여 초극하는 과정Verwindung에 있다. 이 말이 썩 달갑지 않다면 기억할 것은, 허무주의의 본질은 허무주의적인 것이 아니며, 형이상학의 고유한 본질이 허무주의를 자기 안에 간직하고 있는 한 이로 인해 형이상학의 오래된 지위가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판적인 선의 영역 즉 완성된 허무주의의 본질의 장소성은 형이상학의 본질이 자신의 가장 극단적인 가능성들을 전개하면서 이러한 가능성들 속으로 스스로 집중해 들어가는 그런 곳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의지의 의지가 도발적으로 요청하는 즉 (몰아)세우는stellt 곳에서 일어난다. 허무주의의 본질이 완성되어 드러나는 그런 장소에서 존재(X)는 스스로 몰아세움으로서 출현하여 발현한다.      


존재자(현존자)가 소멸(부재)해도 현존, 즉 존재(X)는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현존은 스스로 물러서며 내뺀다sich entziehen. 이러한 물러섬Entzug은 허무주의적으로 규정된 표상함에게는 은닉된 채로 남아 있다. 완성된 허무주의의 단계에서는 마치 존재자의 존재, 바꿔 말하면 형이상학의 역사적 운명 같은 것이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즉 존재는 공허한 무라는 의미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존재(X)는 묘한 방식으로 밖에 머무르고ausbleiden(부재하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 은닉한다. 이 은닉 속에는 그리스적으로 경험된 망각의 본질이 거하고 있다. 자신의 본질이 시작되는 그런 시초로부터 살펴보았을 때 그것은 궁극적으로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감싸주는-은닉Ver-bergung으로서 아직도 탈은폐되는 것을 참답게 간직하여 감싸주는 일종의 간직ein Bergen이다.     


일전의 하이데거 관련 글들에서 다룬 ‘존재망각’이란 개념을 이야기해보자. 흔히들 망각을 오로지 일종의 태만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존재망각’을 누가 깜빡하고 찻집에 두고 온 모자 정도로 생각하곤 한다. 문제는 여기서의 망각은 존재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본질을 엄습하고befallen 있을 뿐 아니라 존재 자체의 사태에 속해 있으며 존재의 본질의 역사적 운명으로 편재하고 있다.     


올바로 사유된 망각ー존재(X)의 여전히 탈은폐된 본래하는 은닉ー은 미처 발견되지 못한 지고의 재보를 반드시 발견하리라는 굳은 약속과도 같다. 이를 예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떤 예언가적인 재능이나 고지하는 자의 세련된 기교가 아니라 서양의 형이상학적 사유 속에서 스스로를 알려왔던 기존의 것에 단지 주목하는 것뿐이다. 비은폐성은 현존, 즉 존재의 은닉성 속에 고요히 안주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은닉성을 회상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을 감내하여 초극함은 존재망각을 감내하여 초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극은 형이상학의 본질을 향해 스스로 다가옵니다. 형이상학의 본질이 자신의 진리의 자유로운 터전 속으로 자신의 본질을 드높여주는 그런 영역을 향해 [간절히 소망하여]부르고 있는 한, 이러한 본질 자체가 도달하길 염원하는 바의 그것( * 형이상학의 본질이 그 본질의 진리에 도달하는 근원적인 장소, 즉 무가 무화되는 발현의 장소 – 역자)을 통해서 이러한 초극은 형이상학의 본질을 휘감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유가 형이상학을 감내하여 초극하기 위해서는 먼저 형이상학의 본질을 명확히 해명해야 합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59,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이때 나타나는 양상은 얼핏 사유를 형이상학의 초극된 본질의 자유로운 터전 속으로 안내하기 위하여 철저히 형이상학적인 표상행위를 단지 억누르기만 하는 어떤 극복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초극에서 겉으로 제압된 것처럼 보이던 형이상학의 상주하는 진리가 이윽고 자기 것으로 동화된 형이상학의 본질로서 비로소 고유하게 되돌아온다. 이는 단순한 형이상학의 복구Restauration와는 다르다.     


이 대목에서 하이데거는 과거 『존재와 시간』에서 나온 ‘해체Destruktion’를 두고 비판자들이 의미에 대한 숙고 없이 ‘형이상학을 파괴하려는 시도’라고 공격한 데 대한 설움을 드러낸다. 해체는 통속화되고 공허해진 표상들을 허물어뜨리는 가운데 형이상학의 근원적인 존재경험을 다시 획득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을 그것의 본질에서 구원하고자 한다면, 사멸할 자( * ‘죽을 자’, 즉 현존재로서의 인간 – 작성자)가 이러한 구원에서 마땅히 가져야 할 그의 관심은 이제 비로소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한 번쯤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다른 곳에서 말한 것을 장황하게 되풀이할 위험이 있지만, 그래도 나는 그 물음의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설명하고자 이번 서신을 적절한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당신의 관심이 당신 나름대로 허무주의의 극복을 위해 조력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극복은 형이상학을 감내하여 초극하는 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60,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사람들이 흔히 ‘본질’을 캐묻고자 할 때 사용하는 그런 물음의 방식을 지시한다. 그러나 그 물음이 존재자를 넘어서는 존재의 넘어섬, 바꿔 말하면 형이상학적 초월, 형이상학의 본질을 넘어섬의 역사적 운명으로써 형이상학을 논구해 들어가는 그런 물음이라면, 그때 그 안에서 예전부터 형이상학의 여러 이론들이 움직이고 있는 그런 구분에게는 이렇게 넘어서는 ‘존재’와 더불어 그 즉시 구분된 것은 의문스러워진다. 여기서 말하는 구분은 곧 본질과 현존, 즉 본질존재와 현상존재의 구분이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우선은 이러한 구분을 아무 저의 없이 사용한다. 그러나 이윽고 이 물음의 정체가, 사유가 메말라 죽지 않고 변화되어 살아나기 위해서 필연적인, 존재자를 넘어서는 존재의 넘어섬에 대한 숙고임이 드러난다.      


예나 지금이나 여러 학문들은 존재자, 특히 존재자의 개별 영역에 편중되어 있다. 학문의 관점에서 이런 식의 존재자 표상의 양상을 따르며, 명백하다고 여겨지는 의견에 복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탐구될 수 있고 물음으로 제기될 수 있는 모든 권역들은 존재자를 표상하는 이러한 생각에 의해 모두 파헤쳐질 것이고, 이러한 존재자를 벗어나서는 그 밖에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고 학문들은 생각한다.”(『이정표 Ⅰ』 p. 362)

     

존재자만을 알고 있는 학문적인 표상활동의 시야 영역에서는 결코 어떤 경우에도 존재자가 아닌 그것, 즉 존재는 오로지 무로서 제시될 수 있을 뿐이다. 반면 오직 형이상학의 본질에 대해 묻는 행위만이 넘어섬, 즉 존재자의 존재를 통찰할 수 있고 이로써 형이상학의 주된 특징이 뚜렷이 나타난다.     


여기서 존재를 오직 무로서 제시할 수 있는 자도, 형이상학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숙고하는 자도 인간이다. 인간은 존재자와는 아주 다른 것에게 장소를 마련해줌으로써, 결국 이러한 장소의 개시성開示性Offenheit 속에서 현-존과 같은 것 즉 존재가 주어질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블로그 예전 글 중 《하이데거, 지젝,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 https://brunch.co.kr/@erasmut/17 )의 ‘존재론적 탈구축’에 대한 문단을 참조해보자.  

   

<하이데거는 사고대상의 총체 또는 세계, 즉 존재자의 집합 속에서 사고대상과 사고형식이 포개어지는 특정한 존재자를 발견한다. 하이데거는 자주 그런 상태를 이중주름Zweifalt이라고 부르고 있다. 독특한 이중구조를 가진 그런 특이한 존재자를 통해 한계에 대한 사고가 간접적으로 가능하게 된다. 그런 존재자에 대해 사고하는 것, 즉 그것을 사고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대로 동시에 사고형식(존재)에 대한 물음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하이데거는 그것이 바로 인간, 그의 술어로 말하자면 ‘현존재Dasein’라고 주장한다(『존재와 시간』 제4절). 논리형식은 인간에 의해 산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인간은 한 사물로서 논리형식을 따른다. 그러므로 세계=사고의 한계에 대한 물음Frage은 세계=사고 자체를 산출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실존론적 구조’에 질문을 던짐으로써 탐구된다.> - 《하이데거, 지젝,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 中     


인간의 터-있음은 ‘이러한’ 무無 속으로 들어가 머무르고 있다. 무無는 존재자가 아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존에 속해 있다. 존재와 무는 서로 병렬적으로 나란히 주어져 있는es gibt nebeneinander 것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위해 스스로 헌신하면서 친밀하게Verwandtschaft 공속한다. 터-있음의 터는 본래 그 근원에서 무가 무화하여 드러나는 자리, 즉 존재의 열린 장이다. 참다운 인간이란 이러한 터를 숙고하는 가운데 그 터를 참답게 보존하며 열어-밝혀 나가는 인간이다.     


<무는 아무런 중앙도 가지고 있지 않다. 무는 자신의 경계들이다. (…)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위대한 사물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무의 존재다.> - 『일기와 메모』(L. Davinch 著) 中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 물었을 때, 그것은 오직 여러 학문들이 필연적으로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자와는 완전히 다른 것을ー즉 무를ー존재자를 다루는 가운데 만나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숙고해보도록, 그 학문들을 이러한 숙고 속으로 이끌어 오는 것을 시도한다. 학문들은 이미 존재와의 연관 속에 있는 줄 모른 채 그때그때 편재하는 존재의 진리로부터만, 자신들에 의해 표상된 존재자를 그러한 존재자로서 비로소 주시하고 관찰할 수 있기 위한 빛을 받아들여 왔다.     


우리가 존재자의 존재를 사유할 때, 겉으로 공허해 보이는 ‘존재’라는 낱말은 퓌시스와 로고스로부터 ‘힘에의 의지’에 이르기까지 어떤 근본특성을 어디에서나 가리키는 그런 규정들의 본질적인 충만 속에서 언제나 사유되고 있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처음부터 넘어섬을, 초월을, 즉 존재자의 존재를 사유하고 있기 때문에 오직 이런 이유에서만 그 물음은 존재자가 아닌 것을, 즉 존재와 동근원적으로 동일한 것인 그런 무를 사유할 수 있다.     


<형이상학에 대한 물음이 어떠한 근본방향에서 제기되는지, 또 그러한 물음의 길은 어떠한 결말에 이르는지, 그 물음을 언제 전개해야 하는지, 그 물음이 문제삼는 학문들의 권역은 어떠한지를 결코 진지하게 전체적인 맥락에서 사색한 적이 없는 사람은 누구든지 필연적으로, 여기서는 [부정적인 허무주의라는 의미에서]무의 철학이 강연되고 있다는 피상적인 앎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66,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허무주의의 본질이 존재망각 속에 거하고 있는 한, 우리는 모든 존립과 더불어 여전히 허무주의의 영역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의 현재진행형이다. 하이데거는 당초에 선을 가로지르려는 시도 역시 존재망각의 지배영역에 속해 있는 어떤 표상행위에 사로잡혀 있다고 논한다. 선의 모습이든 그 무엇이든 형이상학적으로 표상된 것은 존재망각의 감내하는 초극을 설명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장담할 수 없다는 의심이, 모습들 자체가 밝혀주고 있는 해명하는 힘, 즉 근원적이면서도 직접적인 현재를 침해할 수는 없다.     


완성되는 허무주의의 본질은 존재망각 속에 거하고 있다. 존재(X)의 은닉성으로서의 망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의할 때, 우리는 허무주의의 본질 속으로 진입해 들어가고자einkehren 시도해야 한다는 필연성을 경험하게 돈다. 허무주의의 극복은 의욕하고자 해서가 아닌, 그 본질 속으로 진입하는 최초의 걸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진입은 일종의 귀환으로 귀결되는데, 여기서의 귀환은 고대, 중세 등 옛 시대의 인위적인 소생이 아니라, 형이상학이 유래를 간직하고 있는 그런 터전ー존재망각의 본질장소ー로 향하는 것이다. 그 단서는 존재를 오직 무로서 제시할 수 있고, 형이상학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숙고할 수 있는 인간에게 있다.     


여기서 주의할 사실은 형이상학은 그 본질상 인간이 터전에 고유하게 정주하는 것을, 인간적인 거주에게는 전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유함Denken과 시지음은 그것이 분명히 언제나 이미 존재해왔던, 하지만 단 한 번도 집을 지은 적이 없었던 곳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오로지 집짓기Bauen, 즉 몰아세움으로서의 존재사유를 통해서만 앞에서 언급한 그런 터전에 거주함Wohnen을 준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집짓기는 기존의 형이상학적인 신이나 인간이 거주할 곳을 설립할 필연성은 거의 느끼지 않는다.     


형이상학을 감내하여 초극하는 그런 터전으로 되돌아가되, 이러한 초극을 통해서 허무주의의 어떤 극복eine Überwindung이 숙명적으로 정처 없이 방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길에서 집을 짓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런 발언을 공적인 자리에서 하면 ‘허풍선이의 거만한 으름장’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배움을 구하는 자는 회상하는 사유의 참말die Sage des andenkenden Denkens을 좀 더 근원적으로 그리고 좀 더 신중하게 검토해보아야 한다.”(『이정표 Ⅰ』 p. 368) 어느 날 문득 이러한 말함이 최고의 선물이자 가장 큰 위험으로서, 신비로운 가운데 보존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허무주의의 본질에 대한 논구가 필연코 모든 도상에서ー우리가 아주 엉성하게 사유의 참말이라고 부른ー매우 사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기이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참말은 사유의 표현이 아니라, 사유 자체이고, 즉 사유의 진행Gang이며 노래Sang입니다.> - 《존재물음에로》(『이정표 Ⅰ』 p. 369,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中     



마치며     



헤겔이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고, 니체가 동일자 영구회귀를 선언하고, 슈펭글러가 『서구의 몰락』을 쓴 이후 20세기의 지식인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근대의 종언에 따른 전율에 대처했다. 존재의 근원을 다시 규명하려는 사람도 있었고 본질에 선행하는 실존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여 생산수단을 공유해야 한다는 사상을 실천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특정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무력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사람도 있었고, 모나드 이론과 다원주의를 현실 사회에 극단적으로 투영해 종국에는 근대적인 개인을 말살하게 되는 사상을 지닌 사람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21세기에 들어선 지 이십 년이 지나고 있다. 하이데거 이후에도 여러 철학자와 학파가 등장했지만 거칠게나마 그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하이데거 사상의 독단성을 비판한 것 외엔 그의 존재사유를 수용하여 형이상학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동일성을 회의한 학자들이고, 둘째는 하이데거를 사기꾼이라 비난하며 여전히 실천적・분석적 사유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고 심지어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학자들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결국 하이데거의 존재사유의 영향권에 들어 있는 셈이다. 단지 그걸 수긍하느냐, 부인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이 블로그에 쓴 글들에서 기본적으로 허무주의에 대한 나의 태도는 부정적이다. 그것은 허무주의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 게 아니라, 허무주의라는 자신의 능력 밖의 고무공을 갖고 있다가 어느새 손을 떠난 공이 이리 튀고 저리 튀는 궤도에 스스로 갇혀 버리는 종래의 인간들의 양상을 부정적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허무주의를 두고 긍정적 내지 부정적이라 가치 판단을 하는 것부터 어불성설이다. 본문에서 봤듯 허무주의에 대한 물음은 결국 존재자인 인간의 존재물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것이 세계에 대한 냉소에 그치는 수동적 허무주의이든, 모종의 초극을 꾀하는 능동적 허무주의이든, 그 근원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흡인력이 작용한다. 그 흡인력의 중심에 있는 게 ‘무’로서의 존재가 아닐까. 그것은 몇몇 사람의 특권이 결코 아니다. 전 지구적인 사유를 지배하고 있는 몰아세움으로서의 존재와의 만남이 도래함을 사색하기 위해 우리는 “아무런 예언적인 재능이나 몸짓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유럽의 언어에 대해서 타당할 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언어에 대해서도 그와 마찬가지로 타당하며, 또한 그 무엇보다도 이 양자의 가능한 대화의 영역에 대해서도 타당하다.”(『이정표 Ⅰ』 p. 370)     


그러니 벌써부터 지레 겁먹고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인간상을 절실히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든, ‘진정한 의미의 근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든, ‘어차피 인간은 여러모로 한계를 맞았다’고 생각하든, 조급해할 것 없이 ‘회상하는 사유의 참말’을 좀 더 근원적으로 좀 더 신중히 검토해 보는 것으로 족하다. 숙고는 언제나 단지 사유의 언어사용에 유념하고자 애쓰기에, 아무런 이득도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숙고하는 사유가 사유해야 할 존재 자체가 필요로 하는 인간 본질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만일 혹자가 낱말과 표현을 신성한 증인으로 여기면서, 마치 잔돈이나 지폐를 사용하듯 그것을 단지 재빨리 순간적인 소통의 수단으로 삼으려 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것이 정신적 행위와 변화 속에서 그에 버금가는 참다운 것으로 바뀐다는 것을 알고자 한다면, 아무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전승된 표현들이 어떻게 해로운 영향을 주기도 하고, 의견을 흐리기도 하며, 개념을 일그러뜨리기도 하고, 또 모든 전문분야를 왜곡시키기도 하는지, 그가 이러한 점에 관해 주의를 환기시킨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에게 화를 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 『Vollstandige Ausgabe letzter Hand』 (J. W. Goethe 著) 中          




참고 문헌     



『Die Theorie des Romans』 G. Lukacs 著, 김경식 譯

『보수 혁명 ー 독일 지식인들의 허무주의적 이상』 전진성 著

『Kriegstagebuch 1914-1918』 E. Jünger 著

『Das Wäldchen 125』 E. Jünger 著

『Der Kampf als inneres Erlebnis』 E. Jünger 著

『Sturm』 E. Jünger 著

『Feuer und Blut』 E. Jünger 著

『Der Arbiter. Herrschaft und Gestalt』 E. Jünger 著

《Über Die Linie》 E. Jünger 著

『Codex Atlanticus』 L. Davinci 著

『Vollstandige Ausgabe letzter Hand』 J. W. Goethe 著

『Sein und Zeit』 M. Heidegger 著, 소광희 譯

『Wegmarken』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Zur Seinsfrage》 M. Heidegger 著, 신상희 譯

이전 15화 하이데거, 예술 그리고 신학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