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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Feb 13. 2021

하이데거, 예술 그리고 신학

(2) 하이데거, 신학



들어가며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메스키르히의 가톨릭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스승으로 현상학의 개척자 후설을 사사하면서,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과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깊은 관계에 있었다. 말년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철학은 플라톤, 데카르트 식의 형이상학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신학을 참조한 부정신학의 성격을 띠었다.     


서양철학에 대해 잘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쉽게 가지는 편견 중 ‘철학자는 결국 무신론자이다’가 있다. 그런데 나는 이에 대해 이렇게 반문해 본다. “무신론은 결국 신이 없다는 또 다른 교조dogma가 아닌가?” 그렇다면 오히려 저 편견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경험주의의 후계자를 자칭하면서 인식 가능한 세계를 맹신하는 일부 열화된 실증주의자들을 제외하곤 그런 교조를 가진 철학자는 없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니체가 무신론자라 말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죽은 것은 지상과 사후 세계의 이분법이며, 영원한 불변의 세계이며, 그렇게 인간을 노예로 부려 온 신성한 도덕이다. 이는 하이데거의 철학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그의 철학에서 플라톤은 죽고 데카르트는 죽었다. 죽은 것은 로고스의 동일성이며, 존재의 망각이며, 형이상학이다. 그렇기에 인간 실존에 앞선 비인간적인 존재에 대한 사유는 아직 유효한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우선 불트만을 비롯한 20세기 성경 해석학에 하이데거를 비롯한 20세기 철학자들이 미친 영향을 가볍게 파악하고, 뒤이어 하이데거와 신학의 관계를 차분히 짚어 볼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하이데거가 생전 꾀한 새로운 사유의 지평의 계기가 있었으면 한다.          



(1) 20세기 성경 해석학과 철학     



① 새로운 해석학의 바람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가 그의 문학 텍스트 연구를 바탕 삼아 해석학에서 선구적 연구를 펼쳐 보이고, 뒤이어 딜타이Dilthey가 슐라이어마허의 연구를 인문학 전반(역사학, 사회학, 예술, 종교)에 적용하고, 그 후 루돌프 불트만이 신약성경에 적용한 것은 해석학 문제가 텍스트뿐 아니라 해석자와도 연관이 있는 이중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 『두 지평』(Anthony C. Thiselton 著, 박규태 譯), J. Torrance의 서문 中     


철학에서 끌어낸 개념들은 해석학의 과업을 서술하고 비판적 시선으로 평가하는 일도 수월하게 해 준다. 이는 신약학자인 에른스트 푹스Ernst, 조직신학자인 게르하르트 에벨링Gerhard Ebeling, 특히 철학자 한스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저작에서 볼 수 있다. 이 중 가다머는 해석학 분야에서 핵심 인물이다.

가다머는 철학과 해석학의 전문 개념인 이해Verstehen라는 개념을 검토하면서, 해석자와 텍스트가 주어진 역사 전통 속에 어떤 식으로 서 있는가를 묻는다. 그는 해석학의 목표를 지평 융합fusion이라 했다. 어떤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가다머의 표현을 사용하면) 두 지평의 상호 교통, 곧 고대 텍스트의 지평과 현대 독자 혹은 청자의 지평 사이에 교통이 일어나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마주한다.     


<역사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전통과의 모든 만남에는 텍스트와 현재 사이의 긴장을 경험하는 일이 따른다. 해석학의 과업은 순진하게 동화를 시도하여 이 긴장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이 긴장을 드러내는 것이다.> 『진리와 방법』(H.-G. Gadamer 著, 이길우, 임홍배 등 共譯) 中     


가다머는 어떤 역사 텍스트를 보더라도 우리가 그 텍스트의 의미를 원저자의 마음속에 있었던 의미로 국한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철학 및 해석학의 원리를 이렇게 단언한다. “어떤 시대에서든 전해 내려온 텍스트를 자기 시대의 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 텍스트가 해석자에게 말하는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는 저자와 저자가 본디 염두에 둔 이들이라는 우연한 요소에 의존하지 않는다. (…) 텍스트의 의미가 저자를 넘어서는 일은 비단 가끔씩 일어나는 게 아니라 늘 일어난다.(『진리와 방법』 中)     


그러나 신학자 불트만이 자신의 신약 연구에서 슐라이어마허, 나아가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 때부터 줄곧 철학 개념과 범주를 사용하는 것이 성경 기록을 ‘순수하게’ 이해하지 못하게끔 변질시킨다고 여겨 온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서는 자칫 이단으로 경계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자신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대고 불트만은 순순히 자신의 신약 연구가 철학에 대한 관심과 아주 긴밀히 결합해 있음을 인정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친우 하이데거를 당당히 옹호한다. “나는 하이데거의 실존 분석이 해석학에, 곧 신약성경 해석에 풍성한 열매를 안겨 주었다고 본다.” (…) “나는 그에게서 신학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를 배웠다.”     


푹스나 에벨링이 신학자로서 성경 해석에 대해 그래도 일종의 다른 층위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불트만은 성경을 해석하는 지침은 여타 분야의 문건을 해석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하기사, 성경이든 사서삼경이든 텍스트text 자체는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시대에 텍스트를 둘러싼 맥락context은 해석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고, 자연스럽게 이해Verstand도 늘 동일하리란 보장은 없다. 어느 한 분야, 한 작가만이 ‘순수하게’ 이해될 특권은 몇몇 해석자의 정념에서 비롯된 떼쓰기에 지나지 않다.   

  

<전통적으로 해석학은 고대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특히 언어와 역사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필요한 규칙을 정립하는 일을 동반했다. 해석자는 문법과 단어, 문체를 포함한 텍스트의 언어에서 해석을 시작해야 했다. 해석자는 텍스트의 언어 맥락, 문학 맥락, 역사 맥락을 검토했다. 다시 말해 전통적 해석학은 텍스트가 주어진 역사 맥락에 의해 규정됨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했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의미를 갖게 된 최근 해석학은 역사가 텍스트를 규정한다는 말이 양면성을 지녔음을, 곧 현대에는 해석자도 텍스트 못지않게 주어진 역사 맥락과 전통 속에 서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 『두 지평』(Anthony C. Thiselton 著, 박규태 譯), p.40     


하이데거 자신이 되새기듯, 현상학의 구호는 사태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였다. 탐구자는 이론상, 자신이 사전에 갖고 있는 이해를 사실들에 투사하지 않고, ‘사태들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게 한다.’ 하이데거의 더 복잡한 언어로 표현하자면, 현상학의 목표는 “나타나는 것이 그 자체에서 나타나는 그대로 그 자체에서 나타나게 하는 것”(『존재와 시간』 中)이다.


하이데거 사상의 양면성은 위와 같은 ‘철학적 서술’을 단언하면서도 다른 한편 사람이 세계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정황 속에서 바라보는 대로 해석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신학자 제임스 스마트는 “모든 해석은 첫 단계에서 본문이 하는 말과 더불어 처음에 본문을 말하거나 기록했을 때 본문이 가졌을 의미에 숨어 있는 뉘앙스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순수한’ 서술이 이상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또한 스마트는 “성경을 해석할 때 철저한 과학적 객관성을 요구하면 해석자는 자기 자신이 객관성 안에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고 밝힌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유한성’ 혹은 ‘역사의 실존’이 지닌 한계 밖으로 우리가 도약할 수 없다고 인식했던 칸트의 연장선상에서 실존을 사유했고, “나는 영원한 것을 영원히 혹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실존하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는, 그저 불쌍하게 실존하는 인간”이라 선언한다. 이에서 모티브를 얻은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를 분석한다. 현존재는 역사 바깥의 관점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현상학이 해석학이다”라고 강조한다.     


<해석Auslegung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eines Vorgegeben을 어떤 전제도 없이 이해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 『존재와 시간』(M. Heidegger 著, 소광희 譯) 中      


나의 존재 이해는 나 자신의 구체적 실존에 관한 나의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후자가 전자를 규정한다. 불트만도 철학이 자신의 해석학 프로그램에서 하는 역할은 순전히 서술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신학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하이데거에게 배웠다고 당당히 말한 것이다. 불트만에 따르면 철학이 신학적 해석학에 제공하는 것은 실재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개념 체계이다. 신학은 존재적이고 실존적이지만 철학은 존재론적이고 실존론적이다.     



② 하이데거와 불트만 그리고 신약성경     



<하이데거는 인간이 구체적 사물이 제공하는 사이비 안전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 그는 쓸데없는 이야기와 수다를 죽음을 향한 궁극의 불안에서 달아나려는 시도라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그의 말은 바울이 육신을 따라 인간을 규정했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사실 하이데거가 던져지고 넘어진 인간을 묘사한 내용은 바울이 καυχασθαι(뻐기다, 으스대다)라는 헬라어를 사용하여 인간이 자신을 높이고 자랑함을 이야기한 것과 아주 비슷하다.> - 『마르틴 하이데거』 (에리히 딩클러 著) 中     


<나는 신약학도로서 바울이 설명하는 바로 이 자유와 예정의 상호 관계 및 상관관계를 (…) 여기서 철학의 눈으로 다시 발견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 위의 책     


딩클러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은 운명과 자유 사이에 자리한 인간의 긴장을 바라보는 하이데거의 시각이 신약성경의 인간 묘사와 흡사하다고 여긴다. 그 중 에른스트 푹스는 실존주의 뿐 아니라 전회Kehre로 대표되는 후기 하이데거 사상에도 자극을 받았는데, 『존재와 시간』에서 말하는 거짓 실존과 참된 실존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나온 해석학 논의를 그와 비슷한 후기 하이데거의 구분, 곧 주체-객체 딜레마를 지닌 일상 언어와 타락하지 않은 존재의 언어라는 구분으로 가장 먼저 바꿔 놓은 이가 푹스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존재에서 떨어져 나오는 바람에 인간의 언어도 시시해지고 원자처럼 잘게 변해 버렸다고 본다. “인간은 (…) 늘 자신이 설계한 길로 다시 던져진다. 인간은 길을 가다 진창에 빠지고, 세상의 관습에 사로잡히고 만다. (…) 그는 스스로 존재에서 떨어져 나온다. 그는 자신의 원을 돌고 또 돈다.”(『형이상학입문』 中) 하이데거와 새 해석학 옹호자들은 새롭게 ‘말에 다가가기coming-to-speech’를 적극 추구한다. 하이데거는 진정한 언어사건 속에서 존재가 드러나길 기다린다. 푹스의 저작을 보면 예수의 메시지는 언어사건Sprachereignis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앞서 이 단락을 개시할 때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라는 이름이 나왔다. 이 단락의 핵심 주제인 20세기 신학적 해석학과 철학적 해석학이 조우하는 쟁점을 거슬러 올라가면 슐라이어마허의 전이해Vorverständnis 개념이 있다. 이에 대한 존 맥쿼리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우리 자신과 텍스트 사이에 적어도 어떤 최소한의 공통점이 존재하지 않으면, 텍스트 이해는 결코 불가능할 것이다. (…) 만일 텍스트가 어떤 지점에서도 우리 경험과 연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연결점이 해석자의 전이해라는 문제다. 그는 이미 갖고 있는 이해 범주에 따라 텍스트의 의미를 파악하며, 이 이해 범주가 텍스트에 가져가는 전이해를 형성한다.     


하이데거는 이 개념을 다음과 같이 다룬다. “이 해석은 언제나 우리가 이미 가진 것─앞서 가진 것Vorhabe─에 근거한다.”(『형이상학입문』 中) 이해는 늘 특정한 ‘관점’에 의존한다. 이해는 ‘앞서 본 것Vorsicht’에 근거한다. 이렇게 앞서 보려면 그 전에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어떤 방법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앞서 본 것은 앞선 이해Vorgriff에 근거한다.”(위의 책)


하이데거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해석은 우리에게 주어진 무언가를 전제 없이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위의 책) 인간은 모든 것을 주어진 맥락 속에서, 주어진 관점을 따라 이해한다. 인간의 ‘세계’와 인간 실존은 함께 결합해 있다. 따라서 “세계를 이해하면 언제나 그와 더불어 실존도 이해하며, 반대로 실존을 이해하면 언제나 그와 더불어 세계도 이해한다. (…) 이해에 이바지할 해석은, 그것이 어떤 해석이든, 해석해야 할 것을 틀림없이 이미 이해하고 있다.”(위의 책)     


<우리가 이 순환을 악순환으로 보아 이를 피할 길을 찾는다면 이해 행위를 근본부터 오해한 것이다.> - 『형이상학입문』(M. Heidegger 著, 박휘근 譯) 中     


슐라이어마허의 테마를 이어받은 딜타이Wilhelm Dilthey가 그를 인문학 전반에 적용하고, 딜타이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그 전에 ‘삶’과 관련을 맺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제와 사회가 대개 무슨 의미인지 그 개념도 모르는 이가 경제사를 이해할 수 있을까? 종교와 철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가 종교사와 철학사를 이해할 수 있을까? (…) 자본주의 원리와 사회주의 원리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1848년의 공산당 선언을 이해하지 못한다.”(『전제 없는 해석이 가능한가』 中) 불트만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텍스트의 주제에 관한 구체적 이해는 텍스트에 대한 ‘삶-관계’에 근거하며, 주해는 늘 이런 이해를 전제한다.”(위의 책)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겠지만, 후기 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에서 종래의 인식론의 주체-객체 도식을 맹렬히 회의하며, 이는 동시대 신학자들의 해석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식이 주체와 세계의 사귐commercium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인식은 세계-내-존재에 기초한 현존재의 양식이다. 따라서 근본 구조인 세계-내-존재를 먼저 해석해야 한다.


불트만 역시 주체-객체를 가르는 시각이 그리스 시대부터 계몽주의 시대까지 철학을 지배해 왔다고 주장하며, 객관화하는 언어에 적대감을 표현한다. 이런 전통 속에서는, 그 시대를 지배하는 철학이 관념론이었든 유물론이었든, “두 견해에서 인식하는 세계상은 우리 자신의 실존unserer eigenen Existenz과 아무 관련이 없다. 이런 세계상은 우리 자신을 다른 객체들 가운데 있는 한 객체로als ein Objekt unter anderen Objekten 본다.”(《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 中)     


그러나 전기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주체-객체 도식의 극복보다는 현존재의 세계성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 점이 신학에서 가지는 의미는 불트만의 해석학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불트만은 자신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며 객관성이 다만 ‘주체에게 적합한 지식’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라고 단언한다.     


<객관적 지식이라는 개념이 자연과학에서 가져온 것이라면(더구나 오늘날에는 자연과학 안에서도 전통적 의미의 객관적 지식이 골칫거리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할 때), 역사 현상을 이해할 때 그런 객관적 지식 개념은 타당하지 않다. 역사 현상은 자연 현상과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 그 자체로 역사 속에 존재하고 역사와 관련이 있는 어떤 주제에 의미가 있는 것이 되어야 과거 사실들은 비로소 역사 현상이 된다. (…) 따라서 어떤 객관적 지식을 얻으려면 해석자가 자신의 주관성을 잠재우고 개성을 꺼버려야 한다는 요구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요구 가운데 가장 터무니없는 요구다.> - 《해석학의 문제》 (R. Bultmann 著)     


<텍스트를 탐구할 때는 탐구자 자신이 텍스트의 점검을 받게 하고 텍스트가 제시하는 요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 - 위의 책     



③ 불트만 해석학에 대한 하이데거 철학의 역할     



불트만의 논문 《현존재의 역사성과 믿음》에는 하이데거 사상이 그의 해석학에 공헌한 두 가지 역할이 등장한다. 불트만은 이 논문에서 쿨만Gerhardt Kuhlmann이 자신에게 제기한 비판에 꼼꼼히 답한다. 쿨만은 불트만이 하이데거의 세속 철학에 의존하면서 결국 그의 신학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의 상황을 분석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불트만은, 존재 혹은 실존의 결단이나 만남, 경험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기독교 신학에서는 철학의 범주보다 위에 있는 독특한 무언가를 말한다는 데 동의한다.     


<신학에서는 (…) 구체적 ‘어떻게’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때 철학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의 총체 속에 혹은 과학 체계 속에 열린 채로 남겨 놓은 어떤 구멍 속으로 뛰어드는 방법을 쓰지 않는다. (…) 철학에서는 (…) 특별한 구체적 ‘어떻게’라는 ‘것’이 인간에게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을 지적하면서도, 구체적 ‘어떻게’에 관하여 실상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철학의 진짜 주제는 실존이 아니라 실존성이며, 사실이 아니라 사실성이다.> - 《현존재의 역사성과 믿음》(R. Bultmann 著) 中     


다시 말해, ⅰ) 비록 철학자와 신학자가 존재 차원에서는 갈라서 있지만, 존재론 차원에서 철학적 분석은 여전히 타당하다.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사람이다. (…) 모든 신학에서는 개념을 설명하고자 보통 어떤 철학 전통에서 결정해 놓은 신학 이전의 인간 이해에 의존한다.> - 위의 책     


여기 천애 고아가 있다. 그러나 그도 사랑의 개념은 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을 바랄 수도 없으리라. 그러나 사랑을 보여 주는 ‘사건’은 다른 차원에서 작동한다. 사랑을 보여 주는 사건을 통해 연인을 알면 내 삶의 사건들이 새로워지겠지만 여기서 ‘새롭다’는 건 내게만 타당하다. 내가 사랑의 개념을 알고 사랑의 사건을 겪고 삶의 사건들이 새로워진들, 내 연인이 내게 무엇인지는 미리 알 수 없고 대략이라도 알 수 없다.     


<믿음의 사람이 ‘더 많이’ 아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 곧 계시가 실제로 그를 만났다는 것, 그가 정말로 살아 있다는 것, 그가 사실은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다. (…) 그는 자신의 삶의 사건들이 계시 사건을 통해 새로워진다는─‘새롭다’는 오직 믿음의 사람에게만 유효하고 타당하다는 뜻이다─것을 안다.> - 위의 책     


ⅱ) 불트만이 철학에서 빌려 온 개념들을 끌어다 써도 계시에 담긴 진리가 손상될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철저히 타자wholly other’이며 모든 인간 지식 체계 밖에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계시 자체는 엄밀히 말해 하나의 사건이자 말 건넴이며 만남으로서, ‘이 세상의’ 존재론으로 서술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존재한다. 믿음 역시 하나님의 산물이지, 인간의 노력도 심지어 인간 의식의 내용도 아니다. 그러나 신학은 서술 행위로서 여전히 사유와 인간이 만든 개념들의 영역 속에 자리해 있다. 이것은 이성이나 사유의 역할을 헐뜯는 말이 아니다.     


<이성을 아주 충분히 생각하기는 불가능하다. 이성이 제 길을 가서 그 목적지에 이르렀을 바로 그때, 위기의 순간이 도래하고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큰 물음을 던지게 된다.> - 위의 책     


마지막으로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불트만은 ⅲ) 개인의 책임과 결단을 힘주어 강조한다.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의 본래 존재seines eigentlichen Seins를 얻거나 잃음은 (…) 어느 순간에 이루어진 그의 결단Entscheidung 속에 존재한다. 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이, 그의 깊은 사유가 저 위로 날아가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세계에 이르렀을 때가 아니라 바로 여기서 결정을 내릴 때이기 때문이다. 요구하시고 심판하시며 용서하시는 분인 하나님은 구체적 역사 사건 속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 (R. Bultmann 著)     


불트만은 하이데거를 떠올려 주는 언어로 ‘인간이 자신을 위하여 무언가를 고르지 않고 가능성으로서 자신을 고르는sich als seine Möglichkeit wählt 결단’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불트만은 ‘인간 존재의 역사성die Geschichitlichkeit des menschlichen Seins’과 ‘존재가능ein Sein-Können’인 그의 존재를 바로 이렇게 이해한다.     


<결국 우리는 인간 실존의 가능성die Möglichkeiten menschlicher Existenz을 끝까지 밝혀낸 뒤에야 비로소 본문을 끝까지 이해하는 데 이를 것이다. 이것들은 인간의 가능성으로서 동시에 우리의 가능성이기도 하므로 (…) 우리 자신의 실존을 이해할 때라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 위의 책     



(2) 하이데거와 신학     



존재와 신을 대표 테제로 삼는 하이데거의 철학적 사색은 기독교 신학을 원천으로 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데카르트 이후 존재신론으로서의 형이상학과 맞서기 위한 원동력이 되었다. 다른 한편 동시에 하이데거는 기독교 신학과 대결하며 그에 내재한 형이상학에 따른 존재망각과 맞서기도 한다.


현대의 대부분의 신학은 존재신론으로서의 형이상학을 전제로 한다. 생전 하이데거가 로고스의 형이상학을 회의하여 철학사의 해체 작업을 행하였듯 이는 신학에도 필요한 과정이 아닌가. 오늘날 기독교 신학자든 신도든 하이데거를 읽는 데는 현대 기독교가 다다른 여러 한계점을 타파할 단서를 찾을 수 있다는 의의가 있다. 전 세계가 근대 서구 문화를 주류로 받아들이며 사회 전반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이상 기독교 사상은 단순한 서방의 종교가 아니다. 즉 근대적 이성 전반의 차원에서 오늘날 현실의 모습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사색하는 데도 의미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초극超克의 원동력은 기독교 신비 사상의 전통 중 부정신학 그리고 ‘숨은 신’의 신학을 사유하는 데 있다. 그밖에 여러 시인과 철학자와의 대결을 통해 하이데거는 바로 그러한 신학과 맞섰고 필생의 과업을 수행해냈다.


인간의 사유는 존재와 신에 대한 사유로 이는 존재에서 생겨난다. 존재에서 생겨나는 존재와 신에 대한 사유는 결국 존재 자신의 사유이다. 여기서 결국 사유의 유한성이 나타난다. 다른 한편 그 사유에서 나타나는 존재나 신은 단순한 유개념도, 사물존재자나 대상존재자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 존재나 신은 어떻게 사유되어야 하는가? 그를 드러내는 것이 신학과 철학의 공동 과제이며 이 글의 목적이다.     



1) 하이데거 사유의 여정에서의 신학     



 하이데거의 ‘숨은 신’ 사색     



하이데거의 원시 기독교 신앙의 철학을 지탱하는 신적 사상은 ‘숨은 신’의 신학이다. ‘영광의 신학’은 신을 최고선, 최고존재자, 제1원인으로 간주,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 가능한 신을 문제 삼았다. 즉 그리스 형이상학의 개념을 빌려 신을 표상한다. 그 신은 이성의 질서의 최고점에 위치하며 그를 상회하는 변증의 왕국이 된다. 그것은 이성의 관상觀想으로 즐기는 일, 향수하는 일이 되며 그러한 이성은 정숙주의로 한정되는 귀결을 맞는다.     


대조적으로 ‘십자가의 신학’은 그러한 이성의 질서와는 연이 없다. 하이델베르크 논의에도 명시되어 있듯 십자가의 신학은 ‘숨은 신’이 수난과 십자가로써 현현함을 사색한다. 신의 부재와 인간의 결여를 표현하는 것이다. 즉 역사성과 개별성으로 나타나는 신이 문제가 된다. 루터는 그리스 철학의 존재의 질서보다도 기독교의 실천적 생 안에 정위定位하여 신학을 수행하고자 했다. 생을 크로노스(계열로서의 시간, 객관적으로 파악, 계산, 예측 가능한 시간)가 아닌 카이로스(순간Augenblick으로서의 시간, 자신과의 관계성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본래적인 차원으로 돌연 끌려들어가는 시간)로서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사도 바울의 불안, 고뇌, 불확실함 안에 있던 생의 사실성이나 역사성을 이해하려 했다. 불안의 분석을 통해 인간의 본래의 생의 차원이 보이기 시작한다. ‘눈을 뜸’, ‘각성’이 요구된다. 바울의 불안이나 불확실성을 지탱하는 것이 ‘숨은 신’과의 공동 작업이다. 그 신은 정숙주의에 한정된 최고존재자로서의 이성의 신이 아니다. 영원히 머무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계산 불가능, 예측 불가능한 신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숨은 신’ 사상을 좀 더 자세히 고찰해 보자. 루터의 ‘숨겨진 신deus absconditus’‘나타난 신deus revelatus’과 대립하는데, ‘숨겨진 신은 수난과 십자가를 통해 전부 계시되는 게 아닌가?’라는 유추에 대해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는 십자가를 두고 ‘나타난 신’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신적 사상은 ‘숨은 신’의 신학으로선 모자란 게 아닌가 하는 이론異論이 성립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숨겨진 신’의 사상에는 두 개의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십자가의 신학’에서 나타나듯 ‘계시에 관해 은닉된 신이다’는 것, 즉 ‘우리들 인간이 직접 파악할 순 없지만 수난과 십자가를 통해 계시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 단계에선 ‘숨겨진 신’은 ‘나타난 신’과 상호 매개한다. ‘숨겨진 신’은 동시에 ‘나타난 신’이다. 그에 반해 두 번째 단계는 ‘숨겨진 신’으로서 ‘숨겨진 신’과 ‘나타난 신’의 대립을 초월하여 신 자신이 ‘숨는다’는 종말론의 측면이다. 그리스도의 배후에 그리스도를 넘어 신 자신이 존재한다. 즉 우리들의 인식이 털끝만큼도 닿지 않는 차원이 있다는 의미이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하시고 공급하시고 예배 받으시는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의지를 논함과, 말씀하지 않으시고 계시하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을 논함은, 논의의 방식을 달리 하지 않으면 안 될지어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스스로를 숨기시고 우리에게 알리지 않으시기를 원하시는 한 그분은 우리와의 접점이 없다. … 당신의 본성의 장엄하심 가운데 계시는 분으로서 예배 받지 않으시고 말씀하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의 위에는 그 누구도 스스로를 높일 수 없다.> - 『노예의지론』(M. Luther 著) 中     


이러한 단계의 ‘숨은 신’은 ‘숨겨진 신’과 ‘나타난 신’의 대립을 초월한 ‘숨은 신’이다. 이와 같이 ‘숨은 신’ 사상은 두 개의 단계를 포함한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숨은 신’ 사상은 ‘인간에 대해 숨겨졌다’ 는 의미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딱히 루터의 연구에서 양자의 구별을 문제 삼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에게 ‘숨은 신’ 사상은 단순히 ‘나타난 신’과 대립하며 십자가를 통해 전부 나타난다는 사상만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숨은 신’이었음을 알기 위한 변이었다. 거기서부터 생의 불안, 불확실함, 불확정, 약함을 고찰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성의 질서의 최고존재자로서의 신으로부터는 그러한 생의 고찰은 결코 할 수 없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사실적 생을 지탱하는 신적 사상은 ‘숨은 신’ 신학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 ‘숨은 신’ 사상은 하이데거의 사실적 생의 경험을 산출하는 또 하나의 태도를 포함한다. 그는 사실적 생을 분석하는 데 ‘형식적 고지’의 태도를 사용한다. 이는 주관・객관・관계에 기초한 객관화라는 태도를 비판하여 나온 방법이다. 왜냐하면 객관화라는 방법으로는 생을 다룰 때 죽은 사물로서 다루게 되어 생동성으로서의 생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신에 대해서도 똑같은 주장을 할 수 있다. 인간을 대상화・객관화하는 태도로는 신을 포착할 수 없다. 인간이 명명하는 방식으로 신을 명명할 수 없다. 신은 그러한 조작에 대해 숨어 버린다. 하이데거가 이 당시 초기에 명료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숨은 신’ 신학에는 인간을 대상화・객관화하는 태도를 넘어서는 계기를 포함하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신약 성서에서 하이데거가 신앙의 사실적 생의 경험을 고찰한 배후에는 ‘숨은 신’의 사색이 숨어 있으며, 형이상학 비판의 모티브와 사물을 대상화하여 파악하는 데 대한 비판의 모티브가 그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신은 인간의 이성의 영위로부터 벗어나 숨은 신임을 알 수 있다.     



② 철학과 신학     



앞 장에서 이미 다루었듯 철학자 하이데거와 신학자 불트만은 평생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동세대 신학자들이 걱정하듯 철학과 신학이 혼동되는 일은 단연코 거절했다. 한쪽에 철학, 다른 한쪽에 기독교 신학으로 철저히 구분함으로써 오히려 서로의 내실을 풍부히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신학 잡지에 철학에 관해 공동 저술하는 일을 제안 받았지만 꿋꿋이 거절했다.”고 밝힌 적도 있다.     


예를 들면 하이데거는 1928년 10월 23일에 불트만에게 보낸 편지에 ‘신학 룬트샤우’지의 공동 집필을 그만두고 싶다는 뜻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단 이 서신과는 별개로 실제로는 1944년까지 공동집필자로 하이데거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학과 철학의 원칙상의 물음에 대해 동시에 유럽 정신사의 근본 운동과의 대결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즉 두 학문의 경계지음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나는 다만 어느 정도 근거지어지고 또한 원칙적으로 파악된 표명에 그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 역자) 의견을 말하기를 자제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잡지에서의 공동연구를 그만두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것이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라는 표명은 단지 일종의 공격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공격이 언젠가 룬트샤우의 분열을 표명하는 일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나의 책에 관해 많든 적든 표층적인 비평밖에 없는 걸 보며 더더욱 나는 얼마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어려워하는지 보다 분명히 알았습니다. 말인즉슨, 기독교 신학의 간접적 정신사의 기능에 대한 통찰과 철학에서의 기독교 신학의 간접적인 성과는 신학과 철학의 불명료한 혼동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만약 내가 단지 공동편집인으로서 신학 룬트샤우가 간행된다면 이 과제를 명료히 하는 건 좀처럼 가망이 없을 것입니다. ─ 실천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말입니다.>     


위 문단에서 알 수 있듯 하이데거는 신학의 역할과 철학의 역할을 완전히 구별하려 했다. 그리고 실제로 하이데거는 그러한 생각 아래 신학자와 실제 연구활동을 행했다. 신학은 신앙의 생의 학문으로서 존재자적이며, 철학은 존재론적 차원에 정립하여 신학까지도 포함한 제諸 학문의 기원과 근거를 묻는 의미에서 초월론적 차원을 다루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양자는 분리되며 그러한 토대 위에서 공동작업이 가능했다. 그 결과 『존재와 시간』(1927)에서 실존론적 분석이 성과로서 간행된 것이다.     


<신앙은 결코 존재의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만약 신앙이 그를 필요로 한다면 그건 이미 신앙이 아닙니다. 루터는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루터의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잊어버린 듯합니다. 나는 스스로 신의 본질을 신학적으로 사색하고자 고려하며 아주 얌전하게 존재를 사유하고 있습니다. 존재에 대해 이 자리에서 정리하여 말할 수는 없습니다. 존재가 결코 신의 근본이나 본질로서 사유될 수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과 그 (신이 인간과 조우하는 한)개시성開示性의 경험은 존재의 차원에서 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결코 존재가 신의 가능한 술어로서 타당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제 구별과 다양한 한계지음이 필요합니다.> - 하이데거, 1951년 취리히 강연 中     



③ 신에 대한 사색     



하이데거는 『철학에의 기여』에서 최후의 신과 신들의 사색을 전개한다. 하이데거의 신의 특징은 ‘사라짐’이다. 이 ‘사라짐’은 인간의 근거지음이나 증명의 거절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사라짐은 절대자나 무한자, 무제약자 등 형이상학의 신의 규정을 거부하며 형이상학이 신을 명명하는 것을 거절한다. 그랬다가는 신을 인간의 수중에 두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라짐의 신 그리고 미지의 대상으로서의 신은 신의 자존성Selbständigkeit을 의미하며 ‘숨은 신’ 신학의 전통에 자리 잡는다.


이후 그는 형이상학의 존재신론의 체제에 대해, 존재신론으로서의 신에 대해 말하기를 그치고 침묵하며 신이 없는 사색을 전개한다. 이 역시 인간 측에서 안이하게 신에 대해 무언가를 논평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신에 대해 무언가를 논평함은 본래의 신을 사색하지 못하고 신의 자존성을 해치는 귀결을 낳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굳이 신에 대해 침묵하기를 선택한다. 그래서 이 입장 역시 ‘숨은 신’ 사상 권역에 있을 수 있다. 이 입장은 결코 단순한 무신론이 아니다.     


이렇게 보니 하이데거가 초기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교편을 잡던 시절 ‘방법적 무-신론’을 수행한 일도 수긍이 된다. 방법적 무-신론이란 신의 영역에 대해 굳이 인간의 입장에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종교와 철학의 영역을 구분하는 방법이다. 그에 따라 오히려 ‘신으로서 합당한’ 신과 마주서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종교와 철학, 또는 신학과 철학을 분리함으로써 존재신론의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그 비판을 축으로 ‘신으로서 합당한’ 신, 가당한 신을 사색하는 차원을 확보하려 했다.     


따라서 이 방법적 무-신론은 후기 하이데거의 신 없는 사색과 근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사색은 이러한 철학과 신학, 철학과 종교를 분리하여 양자를 혼동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존재신론처럼 신을 이야기하면 철학도 신학도 살아있는 신과 만날 수 없다. 인간의 논증이나 증명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신이 있으며, 실제로 『철학에의 기여』에서 행한 최후의 신에 대한 사유는 ‘사라짐’이 특징이다.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숨은 신’ 앞에 올바로 서는 것이다. 존재신론으로서의 신에 대해선 침묵함이 올바른 태도이다.     


하이데거는 이에 따라 결코 그저 무신론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신에 대해 사색했으며, 그 신은 초기 프라이부르크 재임 시절 신앙의 구체적・사실적 생 경험의 고찰의 배후에 있던 신의 사색과 근접하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오히려 ‘숨은 신’ 앞에 설 수 있게 된다.     


동시대에 활약한 철학자 사르트르는 “하이데거는 무신론자다”라는 테제를 밝힌 바 있는데, 이상의 내용을 보면 그것이 오독일 뿐 아니라, 하이데거 자신이 “유신론도 무신론도 아니다”라 말한 배후에서 그가 신을 두고 밀접한 긴장관계 속에서 사유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에 그는 종교와 철학, 신학과 철학을 엄밀히 구별하여 철학적으로 방법적 무신론을 취하였고, 후기에는 존재신론으로서의 신에 대해 침묵했다. 그것은 신 앞에서 올바르게 서 있기 위해서였고, 살아 있는 신, 신으로서 걸맞은 신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사라짐의 신’, ‘숨은 신’은 그러한 사색의 결과이다. 그는 평생 신학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존재를 사유했다.     



④ 하이데거 철학의 부정신학성     



하이데거 철학은 신비 사상의 전통 중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테스 등이 효시가 되고 셸링, 에크하르트 등이 영향을 받은 부정신학의 성향을 짙게 띠고 있다. 하이데거는 초월론적 시니피에(기의), 순수한 본질의식으로 세계를 파악하고자 한 후설의 현상학과 세계의 전체성을 오브젝트레벨과 메타레벨의 이분법으로 준별한 비트겐슈타인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현존재’로 존재자(오브젝트레벨)와 존재(메타레벨)를 매개하려 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발행한 브런치 글 『하이데거, 지젝,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 https://brunch.co.kr/@erasmut/17 )에서 다룬 적이 있다.     


<논리형식(존재)은 실존론적 구조를 매개로 하여 어떤 특이한 존재자, 즉 현존재와 연결되어 있다. (…) 하이데거는 사고대상과 그 조건과의 관계를 클라인의 병甁의 뒤틀림 속에서 파악했다. 그가 ‘논리학’의 유효성을 단호하게 거절한 것은 그런 학문이 ‘뒤틀림’을 소거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 괴델과 하이데거는 각각 “페아노 공리계를 포함하는 어떠한 공리계도 무모순인 동시에 완전할 수 없다. 또한 무모순일 경우 그 공리계로부터 그 공리계 자신의 무모순성을 도출할 수 없다”는 불완전성 원리와 클라인 관의 ‘현존재’를 주장한다.> - 『하이데거, 지젝,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 中     


하이데거는 『언어로의 도상에서』 등의 저서에서 시인의 언어를 이용한 존재 사유를 드러냈는데, 그 중 게오르그 트라클의 시 『겨울 저녁』에서 “아픔은 문턱을 돌로 바꾼다Schmerz versteinerte die Schwelle”는 시구를 두고 다음과 같이 사색한다. 아픔은 갈라진 틈(문턱)으로서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 존재론적 차이를 의미한다. 그러나 아픔은 동시에 갈라짐의 봉합이기도 하다. 존재와 존재자는 구별되지만 어느 시점에서 형이상학의 작용으로 그 구별은 망각되었다. 하이데거는 이를 존재망각이라 부른다.     


하이데거는 존재Sein란 어휘에 굳이 X표를 치거나 Seyn으로 바꿔 쓰는데, 이는 첫째로 존재를 주관・객관・관계의 객관으로 파악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의미이다. 존재를 대상존재자, 사물존재자로 파악하면 존재를 일종의 존재자로 파악하는 게 된다. 존재는 인간의 표상 능력으로 포착할 수 없다. 표상을 통해 포착한 존재는 사물존재자로 전락하고 이때 존재망각이 일어난다. 그러나 둘째로 존재 자신이 스스로를 은폐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늘 불완전하게밖에 파악할 수 없는 존재는 시인의 언어에서조차 포착할 수 없다. 거기서부터 존재망각의 역사 즉 형이상학의 역사가 전개된다.     


시인은 언어에 깃든 존재를 구하고 또 놓쳐 왔다. 존재란 포착한 순간 놓쳐버리는 것이다. X표를 치거나 Seyn이라 적는다 한들 지식으로서 표상될 때 이미 불완전해진다. 표상할 수 없다고, 포착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야 비로소 성립하는 존재, 이것이 하이데거를 ‘부정의 철학자’라 하며 그의 철학이 부정신학의 면모를 띤다고 하는 이유다.     


하이데거는 생전 자신의 사유의 도정이 ‘근거 없는 신비주의’ ‘유해한 비합리주의’ ‘이성의 부정’이 아닌지 자문한 적 있다. 확실히, 위와 같이 시어를 차용한 분석은 결코 이론적이고 객관적이라곤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비합리적’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애당초 이러한 분석은 이성이라는 것의 근거가 되는 형이상학적 사유가 막다른 길에 들어선 근원이나 유래의 차원을 다루고 있으며, 표상 능력에 따른 이성의 파악의 유래의 차원을 다루고 있으며, 합리적이냐 비합리적이냐 하는 판단을 내리는 근원의 차원을 문제 삼고 있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의 신비 사상은 단순히 근거 없는 신비주의가 아니다. 신비 사상은 형이상학이 존재망각에 빠져 빈껍데기로 전락한 지점, 원인, 유래를 탐구할 수 있는 차원을 시사해 왔다. 하이데거의 의도는 존재망각의 형이상학을 초월할 수 있는 지점을 나타내어 기독교 사상에 끊임없이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것이다. 신비 사상은 기독교 사상과 나란히 흐르며 비제도적, 비형이상학적 지知 혹은 경험으로서 형이상학을 극복하는 차원을 시사한다. 


하이데거의 부정신학은 교회라는 제도로서의 지知도, 형이상학의 회복도 아닌, 니힐리즘으로 대표되는 당시 형이상학의 존재망각에 대해 이를 해체・탈구축하려는 선구자적인 시도였던 것이다.     



⑤ 횔덜린 ~신을 뛰어넘는 자연~     



헤겔의 벗이자 하이데거가 극찬한 시인 횔덜린의 시는 조국에의 귀환을 갈망하며 최종적으로는 고대 그리스 정신으로의 회귀를 노래한다. 하이데거는 몇몇 강의에서 횔덜린 시작詩作의 원류를 고대 그리스에서 찾는다. 그러나 그의 시작이 기독교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가령 ‘온유한 자’라든지 ‘독생자’ 같은 기독교 색채가 묻어나는 내용의 시가 있으며 또한 젊은 시절 경건주의 전통에 투신하며 친해진 부목사 나타나엘 케스트린에게 “지금이야말로 제가 진정한 기독교도라 생각했습니다.”라 말하기도 했다. 이렇듯 기독교 사상이 흐르는 횔덜린의 시는 헬레니즘 사상의 전통과 헤브라이즘 전통 양자를 계승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글에서 알 수 있듯 이는 하이데거에게도 적용되는 사항이다. 고대 그리스 사상을 연원으로 하면서도 헤브라이즘에 뿌리 깊게 근거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말하는 헤브라이즘 전통 ≠ 기독교 사상임을 말해 둔다. 하이데거는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을 기저로 하는 기독교 사상을 철저히 비판한다. 그러나 그의 사유가 기독교 사상과 나란히 흐르는 신비사상의 전통 중 부정신학을 내재하고 있음을 기억하면 그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횔덜린 이론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하며 마저 이야기를 해 보자.     


하이데거는 1930년대 이래 말년까지 계속 횔덜린의 시를 논한다. 그는 횔덜린의 시에서 존재나 신에 대한 사색을 전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얼핏 보면 여기서 논하는 신이 그리스의 신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러나 실은 그 사색 속에 기독교 신학의 요소, 구체적으로는 기독교 사상과 나란히 흐르며 기독교 사상에 숨결을 불어넣어 온 부정신학의 계기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철학에의 기여』에서도 “장-래의 것들”의 접합Fuge 중에 횔덜린이 언급되고 그 뒤의 “최후의 신”의 접합으로 이어진다. 전개의 골자는 하이데거가 횔덜린에게서 존재와 신에 대한 사색의 원천을 보고 있다는 내용이다. 『철학에의 기여』를 해제解題하고자 하면 최후의 신, 존재와 장래의 것들, 이들을 대표하는 횔덜린이라는 삼자의 관련성을 해제하는 게 불가결하다.     


횔덜린은 존재의 진리와 신에 대해 시작詩作하면서도 동시에 신의 부재를 노래한다. 횔덜린의 송가 『귀향Wanderung』에서 시어 ‘귀향’은 ‘근원의 곁으로 귀환함’의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원에 다다른다는 건 아니다. 근원이란 오성悟性으로 분석하여 설명해내어 자신의 소유물로 삼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시인조차도 끝내 언어로써 귀향을 완수할 순 없다. 신성한 대상의 이름이 결여되어 있는 건 사실은 신 자신이 부재하기 때문이었다. 신이 부재하므로 시인이 부를 이름이 결여된 채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1) ‘사라진’ 신들의 ‘이제 없음’ 과 (2) ‘도래할’ 신들의 ‘아직 없음’ 이라는 두 개의 부정으로 파악한다. ‘사라진’ 신들이 ‘이제 없고’, ‘도래할’ 신들이 ‘아직 없는’ 이 시대는 빈곤한 시대이다. 주의할 것은 하이데거도 횔덜린도 이 부재를 ‘결함’이나 ‘부족함’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국민들은 책략으로 신을 작성해서도, 인력으로 추측상의 결함을 제거하려 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신의 부재를 인내함으로써 ‘신성한 대상의 자취’를 드러냄이 요구된다.


시인은 신의 부재를 인내한다. 그 인내하는 군상을 지지하는 자는 없다. 신의 부재란 자신을 지지하는 근거조차 부재함을 나타낸다. 그 근거의 부재를 ‘연원・탈근원・탈근거’라 하는데, 바로 그 지점에서 인내함이 요구된다. 그를 통해 신성한 대상의 자취를 계속 추구한다. 따라서 시인이야말로 ‘신이 필요로 하는 자’라 할 수 있다.     


한편 하이데거는 또 다른 작품에서 횔덜린이 퓌시스physis(양적인 증가가 아닌 나타남Hervorgehen으로 열리는Aufgehen 성장, 자기를 드러냄과 동시에 자기에게 회귀하는 작용)로서의 자연‘일체의 생명Allebendige’의 원천이자 ‘만물의 창조자Allerschaffende’로 보았음을 논한다. 하이데거는 횔덜린이 이 자연을 신성한 것das Heilige으로 보았다고 말한다. 퓌시스로서의 자연은 형이상학적으로 사변된 신 혹은 신들을 넘어선 것이며, 심지어는 신 혹은 신들은 퓌시스로부터 성장해 왔다. 횔덜린에 따르면 신성한 자연은 모든 시대보다 앞서 있고, 신 혹은 신들의 근거이다.


무엇보다 자기를 드러냄과 동시에 자기에게 회귀하는, 즉 존재의 비은폐와 은폐를 동시에 행하는 자연은 그 안에서 신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자연의 혼돈은 단순한 무질서가 아니며, 인간의 오성으로 분석・정리하고 포착할 수 있는 작용이 아니다.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 인간이 영위하는 일체의 근거・근원의 작용이 자연의 혼돈이다.     


이렇듯 하이데거가 본 횔덜린은 ‘(사라진, 숨은)신의 부재’, ‘(존재신론의)신을 뛰어넘은 퓌시스로서의 자연’을 노래했으며, 이를 ‘형이상학을 극복하고자 한 부정신학’이라 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⑥ 셸링과 ‘무근본’의 신학     



하이데거는 평생의 저작에서 여러 시인과 철학자들의 글을 다루며, 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보다 깊은 관점 즉 존재의 물음이란 관점에서 그 글을 파헤치는 작업을 행하였다. 그의 셸링 이론은 셸링의 자유론에 관한 저작과 대결하며 대화를 행하고 자기 자신의 사유에 몰두한 결과물이다. 하이데거는 “어떤 면에서 셸링은 동기인 헤겔보다 훨씬 앞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개념 면에서는 헤겔보다 무질서하다는 평을 받아도 말이다.”며 그를 호평한다. 특히 셸링의 자유론을 높이 평가하며 몇 번이고 그 저작을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유론은 하이데거의 사유의 주요한 원천이 되었다.


셸링의 자유론과 하이데거의 진리론은 유럽 사상사 중 신비사상의 전통인 부정신학에 자리잡고 있다. 앞서 말했듯 하이데거는 이로부터 형이상학을 초극할 모티프를 얻었다. 하이데거는 셸링을 논하며 자유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단순히 무엇을 해도 된다는 인간의 자의적인 자유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 근거가 되는 존재자 전체에 대한 자유의 이야기다. 바꿔 말하면 단독의 인간의 자유를 논하는 게 아니라 존재자 전체와의 관계에 따른 자유를 논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본래의 의미에서의 자유이리라.


존재자 전체란 곧 ‘전체’라는 체계의 문제이므로, 애당초 ‘체계’와 ‘자유’가 동시에 성립하는 게 모순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셸링은 제기한다.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 자유와 체계의 관계를 인간과 존재자 전체의 관계로 바꿔 포착한다. 관념론에서 양자의 관계의 지知는 감성적인 경험으로 성립하지 않으며 비대상적인 절대자의 지知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인식에서는 모든 것이 감성적, 대상적인 지知가 되어버리므로, 존재자 전체의 문제는 우선 절대자의 문제를 물음이 타당하다. “적어도 체계는 최초에 그곳에 있으므로 온갖 진존재Seyn의 근거에 대한, 즉 근원존재Urwesen, 다시 말해 신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존재자 전체의 지知는 필연성의 지知로서 신이 엮인 문제가 되므로, 체계의 문제는 범신론의 문제가 된다. 세계 전체의 필연성을 묻는 건 세계 전체와 일치한 신을 묻는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체계와 자유의 문제는 신의 무제약성과 인간의 자유의 무제약성의 상극相克의 문제가 된다. 체계와 자유의 문제는 필연성과 자유의 문제이며 동시에 범신론과 자유의 문제가 된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범신론은 필연성을 이야기하는 숙명론이 아닌가, 자유를 이야기할 계제인가?’


여기서 셸링과 하이데거는 똑같이 “범신론과 자유는 배반 관계가 아니다. 그건 범신론을 이상하게 파악했기 때문이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체계라면, 진정한 필연성이라면, 진정한 범신론이라면 인간의 자유는 근원존재로서의 신에 종속할 것이다. 필연성으로서의 신과 양립하는 상극相克의 자유야말로 본래의 자유이다. 바꿔 말하면 인간의 자유와 양립하는 한에서의 필연성이야말로 본래의 (신의)필연성이다. 이러한 자유를 ‘유한한 무제약성endliche Unbedingtheit’ 혹은 ‘의존적 비의존성abhängige Unabhängigkeit’이라 부른다.     


이처럼 셸링의 자유론은 자유를 신의 필연성에 귀속시키는, 바꿔 말하면 진리에 구속시키는 사유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셸링의 자유론에서 모티프를 얻은 만큼 그의 존재론과 진리론은 한 몸이나 마찬가지이다. “존재를 이해하는 일은 존재자 자신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일이다.”(『진리의 본질에 대하여』 中)


한편 셸링은 “의욕은 근원존재다”라 하며 의욕에 대해 자유의 문제로 편입시키며 “인간의 자유는 선과 악의 능력이다. (…) 악은 인간의 자유가 존재하는 하나의 방식이다.”고 말한다. 여기서 또 의문이 발생한다. 근원존재로서의 신, 필연성에 종속된 자유라면 악이 파고들 여지는 없어야 하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철학사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변신론弁神論이라 불리는 문제이다. 물론 셸링은 어디까지나 악의 원인은 인간에게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자유와 필연성의 관계로 묶여 있는 신은 어떻게 된 걸까?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 “신 자신이 존재자의 유일한 근거로 있지 않으면 안 된다면 이 신으로부터 고립된 악의 근본은 오직 신 안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악의 기원은 인간에게 있지만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신으로부터 근거하므로 악의 가능성의 기원도 그런 의미에서 간접적으로 신에게서 기원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셸링이 신을 두고 실존Existenz실존의 근본der Grund von Existenz을 구별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실존은 ‘스스로 걸어나오는 것das aus sich Heraus-tretende’을 의미한다. 그와 대조하여 신에 내재한 근본은 ‘신에 내재해 있지만 본래 신 자신이 아닌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근본이란 ‘신 안의 자연’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신의 안쪽에서 근본은 ‘걸어 나오는 것을 감당하며 스스로를 끌어들여 엮으려 하’고 실존은 ‘그 자신을 근본 위에 근거 짓고 또 명명백백히 근본 자신을 근본으로서 근거 짓’는다. 이 근본과 실존은 서로 속한다. 바꿔 말하면 근본은 중력Schwerkraft이며 실존은 빛Licht이다. 양자는 자연이라는 영역 안에서 서로 속한다.


셸링에 따르면 신의 근본의 본질은 동경憧憬Sehnsucht이다. 동경은 근본의 힘이지만 스스로 떨어져나가 확장해가는 노력이면서 스스로에게 회귀하는 노력이라는 이중배반의 운동이다. 근본이라는 중력은 실존이라는 빛으로 확장해가면서도 다시 자기에게 회귀하여 중력 운동을 한다. 원심력과 구심력인 셈이다.


인간은 동경을 가진다. 인간 안에 갇혀 있는 동경은 신 안에 있는 신 자신이 아닌 근본이 의욕하는 데서 비롯된다. ⅰ) 인간의 근본의 의지가 오성의 빛으로 고양되어 언어가 된다. 그것이 ‘의욕이 보편적 의지가 되는’ 상태이다. 인간의 의지가 신의 보편적 의지에 합치合致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의욕이 오성과 언어가 되어 필연성과 자유의 통일, 다시 말해 범신론과 자유의 통일이 생겨난다. ⅱ) 그러나 이 아욕我慾Eigensucht이 아집Eigenwille으로서의 자유가 되어 보편의지Allgemeinwille에 반항하는 경우가 있다. 거기서부터 “아집이 보편의지를 넘어 자신을 높임으로써 스스로 보편의지가 되고자 의욕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건 그야말로 두 의지가 전도轉倒한 셈이다. 신과 인간의 전도, 여기서 악이 발생한다.     


앞서 셸링이 신을 두고 근원존재Urwesen라 했는데, 이에 대한 전체 문장을 보도록 하자. “신은 항상 근본과 실존에 의해 규정된 근원존재이다. 그 자신은 온갖 근본과 실존자에 앞서 있고 온갖 이원론에 앞서 있는 본질존재 그 자체이다.” 셸링은 그를 두고 근원적 근본Urgrund 혹은 오히려 무근본Ungrund이라 명명한다. 그것은 또한 절대적 무차별absolute Indifferenz이기도 하다. 신의 작용이란 근본과 실존에서 비롯되었는데 그에 대한 근거가 없다는, 근본이 없다는 의미에서 무근본에 의해 지탱된다는 말이다. 이는 기초 지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셸링의 신은 자기원인도, 자기 근거 지음의 신도 아니다.


하이데거는 셸링의 신의 이런 무근본성을 건져 내어 자신의 진리론의 원천으로 삼은 게 아닐까. 셸링의 신론에서의 무無어떤 명제도 언표도 닿지 않는 지점을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 역시 『철학에의 기여』에서 심연・탈-근본Ab-grund으로서의 시・공을 말하고 있다. 이는 그의 진리론을 전개하는 지점으로서 은폐성과 비은폐성의 관계 이전의 근거・근본이 없는 장, 근거・근본을 명시할 수 없는 장을 의미한다.     


이렇듯 셸링과 하이데거의 부정신학적 사유는 원리상 존재의 본질을 거슬러 올라가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한 신 앞의 단독자의 치열한 사투였다. 필연성과 자유, 진리와 자유, 신과 존재자 전체의 상극 관계의 사색, 이 역시 니힐리즘에 빠진 형이상학을 환기하는 데 지금도 유효할 것이다.     



⑦ 존재와 신을 잇는 것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차이를 현존재의 초월Transzendenz에 기초를 둔다. 존재자가 명제 안에 나타나는 근거로서 존재자가 술어에 앞서 개시開示되는 존재자적 진리ontische Wahrheit와 그 존재자의 나타남을 가능케 하는 존재의 진리를 사색하는 존재론적 진리ontologische Wahrheit의 구별을 현존재의 초월에 기초를 두고자 한다. 즉 현존재의 초월이란 현존재 자신이 세계로 초투超投Überstieg하는 것이며 이 초투를 통해 현존재가 존재자 전체로 들어가 존재자와 교섭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존재는 세계를 기투企投하는 존재자의 초투에서 자기 자신을 초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를 통해 자기를 이 고양에서 제일 먼저 심연・탈근본으로서 이해하게 된다.> - 『근거의 본질에 대하여』 中     


이 초투 즉 기투를 철저히 한 끝에 자기 발밑의 심연・탈근본을 엿보게 된다. 현존재의 세계에의 초월에 일체를 기초 지으려 할 때 그 시도가 붕괴를 맞는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초월론 철학을 철저히 한 끝에 그것이 좌절된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기투와 피투성의 힘겨루기의 근원에 심연・탈근본이 숨어 있다. 기투를 철저히 할수록 피투성의 힘이 강해진다. “모든 세계의 기투는 그러므로 피투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원천으로서 심연이 확대된다. 기투와 피투성의 힘겨루기의 긴장관계는 결국 발밑의 붕괴를 야기한다. 심연・탈근본이 잠재된 까닭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두고 무력Ohnmacht하다고 한다.     


하이데거가 사유하는 최후의 신은 존재에 드러난다. “존재는 결코 신 자신의 규정이 아니다. 존재는 신 자신이 신이 되는 것Götterung을 필요로 함을 말한다. 완전히 신으로부터 구별된 채 머무르기 위해서다. 존재란 (형이상학의 존재자성처럼) 테이온이나 데우스 또는 ‘절대자’의 최고이자 가장 순수한 규정이 아니다. (…) 진존재Seyn는 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신을 말할 때 반드시 존재의 차원에서 말하고자 했다.     


<진존재의 언어에 따라 신성은 ー 인간존재에 맞서 ー 인간존재와 함께 대지와 세계의 투쟁에 돌입한다. (…) 온갖 신보다도 진존재는 시원始原적이다.> - 『존재의 역사』 中      


존재의 사유가 근본이 되며 그곳에서 신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 존재는 바로 심연・탈근본이다. 신 또는 신들이 나타나는 건 심연・탈근본에 대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어느 저작에서도 신은 개인적으로 혹은 대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진존재 자신의 심연・탈근본의 공간에서만 (신이-역자) 나타난다.” 또한 이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들은 그들 자신에게 되돌려 던져짐으로서의 심연・탈근본의 진존재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신이 바로 하이데거의 ‘사라짐Vorbeigang’의 신이다.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신, 주관성에 따른 자기근거지음을 거절하는 신, 죽음으로서의 심연・탈근본의 존재에 나타나는 신, 존재와 존재자의 사건・발현ereignis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신… 이런 양태는 오직 ‘사라짐’의 신에 부합한다.     



2) 하이데거 사상과 종교철학 ~ 상처를 통한 용서의 종교철학 ~     



신앙을 논한다는 건 일종의 모순이 따르는 일이다. 신앙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를 믿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사실성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은 일종의 언어화・이론화를 거부하며 관찰로써 대상화하여 분석해낼 수 없는, 우리가 생을 영위하는 근거가 되는 신비이다.


종교철학의 운용에는 신앙의 구체적 생의 경험이 선행한다. 신앙의 구체적 생의 경험이라는 신비가 있고 나서야 그에 대한 성찰로서의 종교철학이 가능해진다. 지금까지 철학의 역사에선 형이상학적 사변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의 구체적 생의 경험을 분쇄해 버렸다. 이제 신앙의 구체적 생의 경험을 객관화・이론화하지 않고 가능한 한 그대로 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종교철학의 과제이다.     


하이데거는 젊은 시절 사도 바울의 몇몇 서간을 읽고 신약성서의 신앙의 구체적 생의 사실성을 끌어내려 했다. 그 분석 중 하나는 후에 『존재와 시간』의 불안이나 죽음이나 양심의 실존론적 분석으로 활용된다. 그러나 또한 그와 별개의 분석들도 있는데, 신약성서의 생의 경험이 후에 그리스 철학을 거쳐 이론화되었을 때 한번 상실되었다는 분석이다. 이로부터 하이데거는 형이상학 비판과 그 초극의 모티프를 얻었다고 사료된다.


신앙을 사유할 때 중요한 건, 신앙이란 결코 인간의 언어와 인식으로 대상화하여 분석해낼 수 없으며, 이론화하지 않는 방법으로 신앙의 구체적 생의 사실성을 끌어내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향한 신앙이 최종적인 신앙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 신은 결코 철학으로 논증할 수 있는, 혹은 제1원인으로서의 신일 수 없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말 “신은 죽었다”를 논하며 그의 기독교 이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형이상학을 기초로 하는 기독교 교설, 교회라는 제도로서의 기독교이며, 또 하나는 기독교인의 신앙의 구체적 생의 경험이다. 니체가 비판한 것은 전자의 형이상학을 전제로 한 기독교의 교설이며, 제도로서의, 교회로서의 기독교였다. 그는 결코 신앙의 구체적 생의 사실성 혹은 기독교인의 신앙의 구체적 생 다시 말해 기독교인의 성질Christlichkeit을 비판하지 않았다. 이는 하이데거도 마찬가지로,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와 신약성서의 신앙의 구체적 생・기독교인의 성질은 같지 않다.”고 말한다.     


우선 ‘이미 용서받은’ 생의 사실성을 이야기해 보자. 신약에서 유명한 탕자의 이야기이다. 어느 거부의 아들 중 하나가 어느 날 “아버지, 전 이 집에서 유유자적하며 양떼나 치기 싫습니다. 저의 몫의 유산을 미리 받아 나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몫을 받아 그를 돈으로 바꾸어 먼 타국에서 방탕하게 생활했다. 그러던 중 돈이 고갈난데다 그 나라에서 기근이 들어 먹고 자는 데 곤궁해진 그는 돼지우리에서 잠을 자고 밥을 빌어먹었다. 그제야 뉘우친 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가 죄를 고백하며 하인으로 받아달라고 하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멀리서부터 아들을 보고 반가워하며 달려가 입을 맞추었다. 아들의 고백에 아버지는 좋은 옷을 입히고 어린 송아지를 잡아 축연을 연다.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없어졌다가 찾은 자이다.” 라며 아버지는 기뻐한다.


여기서 아버지는 물론 신을 가리키며 탕자는 우리 인간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아버지가 아들이 집을 나간 뒤로 끊임없이 아들을 생각하고 걱정하며, 아들이 돌아올 때 이미 그의 존재를 용서했다는 점이다. 즉 ‘아버지 되는 신의 용서의 선행성’이 이 이야기의 전제이다. 그렇기에 아들은 죄를 고백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귀향할 때 ‘멀리서부터 아들을 보고 반가워하며 달려가 입을 맞추’는 아버지의 태도로 나타난다. 보통 아버지는 집 안에 있으며 아들이 들어와 용서를 구하기를 기다리는데 그는 아들이 언제 돌아올지 늘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들의 탈선을 처음부터 용서할 셈이었던 것이다. 이는 신이 인간을 용서하는 선행성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버지. 나는 하늘에 대해서도 아버지에 대해서도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신의 용서가 없이는 고백조차 할 수 없다. 용서받으리란 전망이 없으면 핑계나 변명을 생각하려 한다. 아버지가 달려오고 입 맞추었기에, 즉 먼저 용서받았기에 고백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무엇을 용서받았는가. 이를 그저 윤리적인 죄과가 용서되었다고 보면 모자라다. 법률상의 벌을 거쳐 죄를 구제받았다는 관점이라도 마찬가지로 부족하다. 바로 존재를 상실한 상태에서 회복되는 것,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 신의 용서가 아닐까. 이 이야기에서 탕자는 딱히 법률상의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죄가 굳이 있다면 유산을 챙겨들고 집을 나온 것이다. 성서가 본 관점에서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끊는다’는 죄이다. 부자 관계에 균열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가 훼손되고 상처 입은 것이며 존재 자신이 상실된 것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죽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용서란, 죽음에서 재생하고 부활함이 아닐까.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위해 축연을 열며 한 말을 돌이켜보자.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없어졌다가 찾은 자이다.”


이를 존재가 상실되었다가, 상처입었다가, 다시 존재로 돌아온다고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존재의 부활은 마술처럼 있던 걸 사라지게 하고 다시 꺼내는 것과는 다르다. 상처 입은 존재, 부서진 존재 자신을 받아들여 주는 용서에 의해 처음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상처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흉터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상처 입은 채의 존재를 포용하는 용서에 의해 존재는 재생한다. 그때 비로소 상처는 치유된다.


우리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능력의 한계가 있어, 실패를 범한다든지 판단을 잘못한다든지 좌절한다든지 한다. 또 자신의 역량 밖의 부조리한 원인 때문에 존재가 상처입기도 한다. 그래서 지인에게 오해를 받는다든지,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든지, 병에 걸린다든지, 지진이나 인재에 말려든다든지 한다. 심지어는 사는 것 자체에 회의와 우울함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함을 용서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단순히 죄라는 윤리 상 문제만이 아니라, 존재 자신의 상처에 선행하여 우리는 그럼에도 살아가는 것을 용서받았고, 그렇기에 살아있는 데에 의미가 있다. 이 아들은 그러한 아버지의 용서 안에서 살아있었기에 회복하여 다시 사는 게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존재의 상처가 그대로 용서받았다는 건 무엇보다도, 존재하는 것보다도 앞서 발현하고 있다. 우리가 올바르게 살기에 용서받는 게 아니다. ‘이미 용서받은’ 신비 안에 살게 될 때, 그 신비를 믿는 신앙 안에 살게 될 때, 우리는 신과 올바른 관계를 수복할 수 있으며 인간관계를 쾌활히 할 수 있다. 용서받음의 선행성은 과거에 이미 일어났으며 지금도 또한 계속되고 있다.     


용서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자. 용서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이를 미야자와 켄지宮沢賢治의 『쏙독새의 별よだかの星』이란 작품을 통해 고민해보자. 미야자와 켄지는 정토진종淨土眞宗(일본 불교 유파)과 기독교 중 신교와 구교 양쪽을 모두 접했으며 마지막에는 법화경에 입신했으나 ‘특정 종파나 종교를 넘어선 우주적인 세계’를 표현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앙의 구체적 생의 사실성을 접할 수 있다.


옛날 옛적에 쏙독새, 다른 말로 밤매라는 흉하게 생긴 새가 있었다. 얼굴은 메주를 얹어 놓은 듯 반점 투성이에 입가는 납작한데다 귀까지 찢어져 있었다. 다른 새들에게 ‘동료 새들의 수치다’며 힐난을 받았다. 쏙독새는 매의 형제가 아니었다. 벌새의 형이었지만 꽃의 꿀을 먹는 벌새와는 대조적으로 쏙독새는 날벌레를 잡아먹었다. 어느 날 매는 “밤매 이전의 이름으로 돌아가라” 며 그에게 불평했다. 매는 쏙독새가 매의 종에 속하는 걸 거부했고 그를 배척하려 했다. 쏙독새는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자신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내몰리는 처지를 비관했다. 그리고 쏙독새는 밤하늘을 날아갔다. 날벌레가 입 안에 잔뜩 들어갔다. 벌레를 삼키며 그는 ‘아아, 무당벌레를 비롯한 수많은 날벌레가 매일 밤 나에게 죽임을 당하는구나! 그리고 이제는 내가 매 때문에 죽겠구나! 이제 그만 죽자꾸나. 먼 하늘 너머로 가 버리자.’ 하고 생각한다.

쏙독새는 다음 날 아침 햇님을 향해 날아가며 “타 죽어도 상관없다. 흉한 몸이라도 타오를 때만큼은 조그마한 빛을 내지 않으랴.” 고 말했다. 그러나 햇님은 “밤하늘을 날아 보려무나. 너는 밤의 새가 아니더냐.”고 말한다. 밤이 되자 쏙독새는 오리온자리, 큰곰자리, 작은곰자리, 독수리자리 각각의 별을 향해 이리저리 날았지만, 어느 별도 함께하기를 거절한 끝에, 그는 땅으로 떨어진다. 쏙독새는 씩씩거리며 곧바로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추위에 그의 날개가 시렸다.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이 쏙독새의 최후였다. 솟아오르는지 추락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몸이 도깨비불처럼 아름다운 빛이 되어 고요히 타는 것을 보았다. 쏙독새의 별은 지금도 계속 타오르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상처에 따른 용서’를 고찰해보자. 쏙독새는 흉하게 생긴 새였다. 그는 여러 이유로 열등감이 가득했다. 그것은 마음의 상처였고, 존재를 지속하는 데 대한 어려움이었으며, 존재의 상처였다. 그 자신의 과실이나 책임에 의한 상처가 아니다. 타고난 천연적인 문제였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후천적인 자신의 책임으로 전부 감당할 수 없는 선천적인 부분에서의 문제로 마음에 균열이 일어나 상처를 입는 일을 수없이 겪는다. 후천적인 업과 선천적인 문제는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왕왕 있다.


쏙독새는 매로부터 여러 비방과 중상, 매도와 폭언을 당한다. 그에게 그것은 괴롭고 슬픈 사건이었다. 우리 역시 세계에서 자신의 행위보단 존재 자체를 두고 까닭 없는 차별을 받고 오해를 받는 일이 많다. 남에게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건 그 자체로 괴로운 일이다. 쏙독새는 그렇게 자신의 선천적인 흉함 때문에 열등감을 갖고 다른 새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다. 이는 쏙독새의 존재 자신의 균열이며, 상처이며, 아픔이었다. 누구로부터도 존재를 용서받지 못한 채 존재의 의의를 부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형제인 벌새가 꽃의 꿀을 빨아먹는 데 비해 그는 입을 벌리고 날면서 날벌레를 들이마신다. 이 먹이사슬에서 그가 벗어날 순 없다. 매를 비롯한 새들에게 전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동시에 자신 역시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취할 수밖에 없다. 다른 생명의 희생 위에 자신의 생이 성립할 수밖에 없다. 쏙독새의 입장에서 그것은 세계 존재의 상처로서, ‘갈라져 열림’으로서, 아픔으로서 울려 퍼지는 것이다.


쏙독새는 단순히 자살한 게 아니다. 그는 햇님에게 가서 “햇님, 햇님, 부디 저를 당신의 곁에 데려가 주세요. 불타 죽어도 상관없어요. 저와 같은 흉한 몸이라도 타오를 때는 조그마한 빛을 내지 않겠어요?” 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던져 사람들의 등불이 되고자 한다. 쏙독새는 자신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의 상처와 균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리고 희생 끝에 죽어서 별이 된다. 생명을 내던져 죽음으로써 자기와 세계의 상처와 아픔을 모두 짊어지게 된다. 그 상처에 의해 별이 된 쏙독새는 사람들의 세상에 빛을 내린다. 이 자기희생에 의해 자기 자신의 존재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세계의 존재의 상처와 아픔을 속죄한다. 그렇게 쏙독새는 별이 되었을 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가 자기의 존재를 마침내 긍정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것은 속죄의 증표가 아닐까. 별이 된 쏙독새는 그 빛으로 자기와 세계의 상처와 아픔을 용서하고 있다.     


그러나 용서를 행함은 죽어서 별이 됨으로써 성취될 수 있는 것일까. 죽음은 여러 가지 상처가 수렴하는 끝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상처의 의미이다. 상처는, 작은 죽음이다. 쏙독새의 상처는 타자와 상처와 조우하며 공명한다. 상처는 상처를 입은 사람끼리 이어준다. 상처를 입은 사람은 그 상처를 통해 자신을 무無로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사태 일체를 희생할 수 있다. 그렇게 상처 입은 자와 공명하여, 상처 입은 자의 존재를 용서할 수 있다. 무無가 된 자신은 타자를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이 타자의 수용, 타자와의 연결을 공명이라고 하자. 공명이란 생명의 교환이다. 그리고 상처의 공명에 의해 상처의 부정적인 의미가 존재의 긍정으로 전환된다. 몸 혹은 마음의 상처는 본래 의미로서의 생명을 야기하는 계기가 된다.


초기 헤겔은 이 사태를 “불행이 너무나도 커져 그의 운명 즉 생명을 방치하는 자기멸망이 그를 두들겨 일으켜 완전한 공허로 되돌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러나 그 인간은 완전한 운명 자신과 대립하는 동시에 온갖 운명을 넘어 자신을 고양시킨다.”(『헤겔 초기 신학 논집』 中)  고 말한다. 초기 하이데거 역시 바울 서간을 분석하여 사실적 생의 경험의 역설적 논리를 도출해냈다. 그리고 타자의 용서는 자기 자신의 과실의 용서가 된다. 그에 따라 자기의 존재가 긍정되게 된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오 복음서 10장 39절, 새번역판) 즉 상처에 따른 상실로써 도리어 본래의 생명을 얻게 된다.     


이렇게 사람은 치유되고 찾고자 하는 의의를 밝혀낼 수 있다. 상처는 공명을 통해 전도되어 치유가 된다. 그러나 그 치유는 존재해도 좋다는 용서를 부여함에 의해 이루어진다. 상처는 공명하고 용서하고 이윽고 치유한다. 사람들을 비추는 등불이 된다. 그에 따라 자기 자신도 치유된다. 이는 헤겔이 말하듯 사람들이 생명이라는 깊은 곳에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가장 지고한 ‘빚지지 않음’과 가장 지고한 ‘빚짐’이, 온갖 운명을 넘은 상태와 최고로 지독한 불행한 운명이, 합일할 수 있다.”(『헤겔 초기 신학 논집』 中) 상처에 의한 구제의 신비는 역설의 신비이다.


그러나 상처가 아예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다. 자신의 신체가 멋있어지지도 않고, 먹이 사슬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자신과 세계의 상처의 문제는 형태 자체가 개선되지 않는다. 상처 자국이 소거되는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그 상처 자국을 통해 자신과 세계의 상처는 공명하고 세계의 존재에 용서를 행할 수 있다.


쏙독새의 상처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와 공명하며 존재를 용서받는 경험을 한다. 쏙독새의 죽음과 별이 되어 세계에 빛을 내림은 우리들의 존재에 용서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용서를 통해 우리들의 인생을 비추는 빛, 세계를 비추는 빛이 되고 있다. 상처에서 비롯된 슬픔은 조용한 기쁨으로 전도한다. 상처를 통해 공명하고 용서받아 그를 기뻐함은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타인의 상처와의 공명이 필수 불가결하다.


흔히 상처를 부정적인 것,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상처를 단지 악으로 간주하는 차원을 넘어서면, 상처가 부정적이면서도 그 자신에 의해 스스로 치유될 수 있음을 통찰할 수 있다. 여기에 상처의 역설적인 의미가 있다. 상처는 상처를 통해 비로소 치유된다. 이는 상처라는 감각적인 것이 감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생명, 존재를 부여하는 신비와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거기에는 신의 사랑이 선행하여 깃들어 있는 게 아닐까. 존재하며 고통을 기억하는 바로 그 장면에 신 자신이 상처를 입은 채 깃든 장소가 있다. 신은 그러한 장소를 끊임없이 찾고 있는 게 아닐까. 신의 상처가 우리의 상처보다 선행하며 그를 통해 공명한다. 그 결과 상처는 신의 존재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게 아닐까. 그곳에야말로 본래 의미의 용서와 구원이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은 오직 믿는 신앙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신비이다.


여기엔 보복이라든지 인과응보 같은 발상은 없다. 상처 입은 사람이 상처를 준 사람에게 보복한다는 논리는 없다. 또 세상에서 악을 행했으니 벌을 받아 상처를 입었다는 논리도 없다. 이런 점에서 상식이나 논리 등으로 예속할 수 없는 역설이 있다. 즉 상처를 입은 자가 다른 상처에 공명하여 서로의 존재를 수복한다는 역설적인 신비가 있다는 말이다.     


이런 신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역시 인간을 넘어선 인격적 존재자에 의한 용서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게다가 그가 지금도 우리 곁에 임재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쏙독새의 경우 다른 벌레를 잡아먹는 생식을 통해 선천적으로 다른 벌레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 자신이 살아갈 수 없다는 부분이 남아 있지만 신 자신은 인간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건 생각도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에 의한 ‘상처로부터 비롯된 용서와 구원’이라는 신비가 최종적으로 전제되지 않으면 인간끼리의 ‘상처로부터 비롯된 구원’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를 이해하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존재를 일절 부정하지 않고 십자가에 매달려 옆구리를 찔려 피와 물을 쏟는 상처와 죽음을 경험한다.(요한 복음서 19장 34절) 그리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이사야서 53장 5절)는 예언이 성취된다. 이러한 신비를 믿는 신앙이 우리의 생에 선행할 때, 늘 그보다 앞서 존재를 용서받을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우리 역시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는 구원이 일어날 가능성이 생겨나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용서받은 존재로서의 신앙인이 될까? 우선 마태오 복음서 4장 18절에서 22절까지 예수가 어부들을 제자로 맞이하는 ‘낚음’에 대해 독해해보자. 이는 예수가 서른 살 이후 세상에 나와 제자를 얻는 이야기이다. 갈릴리 호수를 걷던 예수는 어부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는 광경을 본다. 그리고 “나를 따라오십시오. 그대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입니다.” 라 예수가 말하자 둘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따랐다. 일행이 길을 가다가 마찬가지로 어부인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과 만난다. 그들을 부르자 형제는 배와 부모를 두고 예수를 따랐다.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그러나 몇 가지 사태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우선 예수는 역시 신의 아들이라는 자각이 있었다. 그는 인간을 용서할 수 있는 권능이 있었다. 그가 부르는 소리는 신의 그것과 대등했다. 그리고 이 네 명은 예수가 부르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따랐다’고 되어 있다. 그들은 의심하거나 주저하여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물을 버리고’, ‘배와 부모를 두고’ 따랐다. 자신의 가족, 역할, 재산, 생계를 모두 버리거나 남겨 두고 예수를 따랐다. 그들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다. 예수를 따르는 장래가 어떻게 될지, 이대로 어부를 계속하는 게 나은 게 아닌지를 두고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걸 재지 않고 오직 예수의 목소리에 순종했다. 이러한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보통 우리는 스스로의 인생이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 단정한다. 스스로 수험을 칠 학교를 선택하고, 취직할 직군을 선택하고, 결혼을 결단한다. 충분히 사전조사를 하여 정보를 취합하고, 시뮬레이션하고, 플랜 B를 세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린 인생 전체를 꿰뚫어보고 나아갈 수는 없다. 자신의 힘이 닿지 않는 부분이 반드시 있다. 결단하고 나아간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완벽히 측량할 수 없다. 병에 걸릴 수도 있고,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그로 인해 계획이 틀어질 수 있다. 우연히 만난 누군가의 조언이나 충고를 듣고, 혹은 상사와의 관계로 인해, 진로를 변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읽은 책이나 들은 이야기로 인해 생각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인생은 자신의 의도와 비의도가 씨줄과 날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여전히 미래를 살아갈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허락받았음을, 용서받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판단의 실착이나 능력의 한계에 따라 혹은 이런저런 사태에 따라 인생을 수월하게 운용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런 경우라도 인생은 어떠한 의의가 있으며 생의 영위를 용서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신앙은 그러한 미래에의 신뢰를 나타낸다. 신으로부터 우리의 존재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기를 허락받은, 용서받은 것이다. 여기서 용서란 곧 증여이다. 프랑스어 pardon(용서)은 don(증여)를 어근으로 하는 어휘이다. 이는 영어의 forgiveness의 어근이 give이며, 독일어 Vergebung의 어근이 geben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네 명의 제자가 예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앞으로의 인생을 예수에게 맡김을 결단할 때, 그들은 인생 최대의 용서를 ‘받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로부터 이후의 인생에서 어떤 괴로움, 슬픔, 혹은 상처가 있어도 그때마다 자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는 예수의 용서가 선행한다는 신앙을 가질 수 있던 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스스로의 존재를 초월한 어떤 존재자로부터의 용서를 믿는 신앙이 있을 때, 혹은 미래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가 본래적으로 자유로운 결단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우리가 신의 용서를 믿을 때, 또는 그 음성에 따를 때, 비로소 우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마치며 – 기독교 철학의 가능성과 존재의 구명을 바라며     



『힘에의 의지』에서 니체는 “오롯이 사실로서의 진리는 없으며 단지 해석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어떤 사실 ‘자체’도 확신할 수는 없다.”라 말했다. 진리나 가치는 개인, 사회, 시대의 시점에 따라 상대적인 신념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그는 일생을 그러한 진리와 가치가 생성되는 구조 원리를 구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진리란 ‘힘에의 의지’가 날조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진리의 적은 의심이 아닌 확신이라는 니체의 격률은 오늘날의 어느 학문이나 종교도 피해갈 수 없다.     


20세기 이후 진리는 파괴・해체되고, 주체 개념 자체도 파괴・해체되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그러한 철학사를 연 하이데거의 존재론・진리론의 신학에 대한 사색과 동시에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기독교가 어떤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지 고민해보았다. 기독교의 근본 원리이자 예나 지금이나 더하거나 덜할 수 없는 주장 내지 대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며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달 방식을 충분히 숙려하지 않으면 기독교는 여전히 그리스 형이상학에 얽매인 존재신론으로서의 신을 말하는 철 지난 교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형이상학 이후post-metaphysics의 시대에서 니체 이후의 기독교는 말하는 방식을 바꿔야 하며 이 글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기독교는 변증학과 더불어 역사를 거쳐 왔다. 신학에서 간주하는 변증학은 병행하는 학문 분야가 아니라 그 본질에 내재한 학學이다. 19세기 슐라이어마허 이후 신학자들은 세속화가 진전되는 근대사회에 기독교 신앙을 조정調停하는 과제에 몰두했다. 슐라이어마허 자신은 교리학과 철학의 조정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주라는 초월에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을 주창했다. 파스칼이나 키르케고르 등은 “인간의 이성은 신의 생명에 적대하는 과오를 범할 수 있음과 동시에 신을 향한 동경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불트만은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인간은 자신의 실존이 복음과 이성의 결합점이 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거기서부터 철학과 신학이 조우하는 지점을 도출할 수 있다.   


종합하자면 근대의 변증학은 ‘기독교와 그 비판자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 공통 기반’을 구축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를 통해 같은 토대 위에서 상대의 사상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비판자 자신 안의 주장의 성취가 기독교에 의해 이미 선행되었음을 드러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리해보자. 첫째로, 기독교 철학의 내용은 근대의 주관・객관 도식으로 지탱된 이성에 의해 포착될 수 있는 유의 철학적인 내용이 아니다. 기독교의 신앙의 생의 경험의 내실은 일종의 신비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계시로만 나타나는 내용이며 인간의 지智가 닿지 않는 영역이다. 그러나 그 신비 안에 깃든 역설성이라는 논리를 파스칼이나 초기 헤겔은 드러내 보였다. 기독교 철학은 가능한 한 그 신비의 내용을 사랑과 생명의 논리로써 나타내 보이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신비 신앙의 생의 사실성의 논리는 형이상학으로 지탱되는 단순한 철학적 통찰을 거부하며, 거꾸로 이 신비를 향한 신앙의 생에 지지받아 비로소 사랑의 논리에 따른 사유가 가능해진다.

둘째로, 셸링이 말하는 신의 무근본의 성찰 또는 하이데거의 심연・탈근본의 성찰은 근대 이후 인간이 생의 깊숙한 곳에서 감지하는 샘임과 동시에 거기서부터 역설의 신비가 출현하는 근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역설의 논리는 사실 신의 무근본으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따라서 기독교 철학은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인간의 지智가 닿지 않는 무근본의 신을 향해 돌진하며, 거꾸로 그를 통해 가능케 되고 수행된다.

셋째로, 그에 따라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의미 내용을 전달하는 노력이 수행될 필요성이 환기된다. 일반적으로 문화에 내재한 기독교는 문화를 무시하고 존재할 수 없다. 일반 문화에서 될 수 있는 한 보편적으로 통용하는 말과 시간, 장소, 상황을 모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슐라이어마허 이후 신학자들이 문화와 복음, 철학과 신학의 조정을 꾀한 노력은 앞으로도 지속되지 않으면 안 된다. 상기한 철학자들은 신앙의 생의 내용을 가능한 한 사유를 통해 일반적・보편적인 형태로 나타내고자 했다. 기독교 철학을 구축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이들을 참고하여 수행할 필요가 있다. 사랑의 논리를 나타냄으로써 인간이 자기 자신만으로는 완결될 수 없다는 일반적・보편적인 구조를 나타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넷째로, 현대에서의 진리의 주장의 차원 역시 고려하여야 한다. 형이상학의 차원에서는 더 이상 진리를 이야기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소위 진리성이 사라진 건 아닐 터이다. 진리성이 없는 주장은 있을 수 없다. 단 지금까지 우린 진리의 유무가 아니라 진리를 말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봤다. 현대라는 시대에 걸맞은 진리성의 전달 방식이 필요한 것이다. 형이상학을 초월한 사랑과 정신의 논리로 말이다. 학자들은 이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흔히들 만화 『나루토』를 두고 골계적으로 “운명적으로 금수저여야 호카게가 된다.”고 말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물론 반은 우스갯소리이지만 나머지 반은 시기와 냉소 같은 부의 감정이 분명히 있다. 소년만화의 ‘쥐뿔도 없는 천둥벌거숭이’ 주인공이 더욱 강한 적과 싸우기 위해 부여되는 여러 가지 당위성은 자칫 ‘결국은 될 놈이었던 거네’ 하며 독자의 공감을 잃을 수 있다. 특히 독자 자신의 현실이 녹록치 않으면 더더욱 말이다.어느덧 우즈마키 나루토가 호카게가 되고 그 아들 보루토가 활약하는 지금 시점에서, 대부분 성인이 되었을 당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해 본다. 연재 막바지에 그들이 분명 읽었지만 워낙 소드마스터 야마토 급 날림 클라이막스라 지금쯤 기억이 가물가물할 검은 제츠와 나루토의 설전을 다시 보고, 나루토의 존재의 상처와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공명하며 기어이는 세계를 구원하는 과정을 다시금 상기하라고.       


검은 제츠 : 닌자는 나로부터 비롯되었고 닌자의 역사 뒤에는 늘 내가 있었다. 너 역시 결국은 내가 만들어 낸 역사의 피조물일 뿐이다.

나루토 : 역사는 많은 닌자들의 삶과 종적이다. 난 닌자를 통해 닌자가 무엇인가를 배웠다. 사람이 죽는 고통, 전쟁의 잔혹함을 배웠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인정받는 기쁨, 사랑받는 기쁨, 그것을 사람들의 삶과 그 종적이 가르쳐 주었다.     


모처에서 본 “요즘 웹툰은 연애와 우정을 그려도 그 안에 사이코패스와 인간혐오가 있다”는 단상이 생각난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주의해야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만화를 읽지 않게 된 시점이 ‘더 이상 휴머니즘을 자극하는 작품이 나오지 않아서’였다. 어느새 세계에서 인간은 참 진부한 대상이 되었고, 우정이니 사랑이니 하는 가치 개념들도 마찬가지로 신파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진부해 보일지언정 정말로 진부하지는 않고, 가치 개념들도 그것들이 개념에 불과할지언정 그 진리성을 쉽사리 부정할 수는 없다. 기왕 그 진리성을 부정하고 싶으면 자신이라는 인간에 대한 연민은 남겨둔 채 세계를 부수는 시늉만 하기 보단, 인간과 세계를 초극하여 자기실현하는 자가 되어 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지고한 로고스를 마냥 맹신할 수만은 없다. 존재의 역사만큼 진존재가 망각된 역사는 오래되었다. 이를 수용할 때 그를 회복하는 카이로스의 시간 역시 개시된다.


어느덧 2021년 현재, 21세기에 들어서고도 이십 년이 지났다. 철학과 신학, 어느 쪽이든 탈-근본의 관점에서, 진존재의 관점에서 우리의 존재를 구명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는 과연 울리고 있는가.



                

참고 문헌     



『The Two Horizons ~ New Testament Hermeneutics and Philosophical Description ~』 Anthony C. Thiselton 著, 박규태 譯

『Wahrheit und Methode』 H.-G. Gadamer 著, 이길우, 이선관, 임호일, 한동원, 임홍배 共譯

『Martin Heidegger』 E. Dinkler 著

『Is Exegesis Without Presuppositions Possible?』 R. Bultmann 著

《Das Problem der Hermeneutik》 R. Bultmann 著

《Die Geschichtlichkeit des Daseins und der Glaube》 R. Bultmann 著

《Adam, wo bist du? Über des Menschenbild der Bibel》 R. Bultmann 著

『Einfuhrung in die Metaphysik』 M. Heidegger 著, 박휘근 譯

『Sein und Zeit』 M. Heidegger 著, 소광희 譯

『Beiträge zur Philosophie』 M. Heidegger 著, 茂牧人 譯

『Frühe Schriften Werke』 G.W.F. Hegel 著, 久野昭 譯

『ハイデガーと神学』 茂牧人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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