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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Sep 01. 2022

서브컬처와 철학 (8)

『비밀』과 『타나토스의 사랑』 그리고 인격



마이클 크반테, 뮌스터대학 촬영





들어가며



한자어 인격人格을 사전에서 찾으면 ‘사람으로서의 품격’이라 나온다. 동진東晋의 왕희지가 제자들에게 한 말인 ‘비인부전非人不傳’은 ‘인격을 갖추지 못한 자에게 도道, 예藝, 기技를 가르치지 말라’는 의미인데, 여기서 非人은 문자 그대로 사람답지 못한 사람을 의미한다. 즉 인격은 상대적인 조건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갖출 절대적인 조건이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신체-정신의 문제’, ‘자유의 문제’, ‘자기의식의 문제’, ‘윤리의 원천의 문제’ 등은 철학에서 중요하게 생각되고 독립적인 연구와 사색을 요구하는 화제들이다. 인격 개념은 이 네 가지 전통적인 철학 문제가 서로 영향을 끼치는 가운데 중심점으로 간주될 수 있다. 철학적 입장에 의존할 때 인간 인격은 신체적인 존재거나 혹은 신체를 보유했고,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자주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그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자유의지가 있거나 혹은 없다. 인간의 인격 성립은 모든 철학적 윤리의 출발점이거나 종점, 최소한 중심 주안점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인격이 늘 동일한 것일까? 아니면 일종의 통일성을 보장할 수 있을까? 독일 철학자 미하엘 크반테Michael Quante는 저서 『인격Person』에서 다양한 이론과 사례를 끌어들여 이 문제를 사색한다. 인격의 동일성에 대한 탐구는 인격 개념의 다양한 양상을 이해하는 이상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접근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의미 있는 개념은 그에 수반하는 실재의 동일성을 파악할 때만 성립하며, 2) 철학적・역사적 관점에서 인격 개념의 논의 대부분은 최근의 것일수록 통시적이거나 지속적인 동일성의 탐구에서 유발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속적인 동일성이란 어떤 시점의 인격 A가 다른 시점의 인격 B와 동일한지에 대한 질문이다.


글 내내 인격Person, 인격성Personalität, 성격Personlichkeit이라는 개념이 반복해서 나올 텐데, 혼동을 막기 위해 어느 정도 정의를 내려두고자 한다. 인격은 위에서 밝혔듯 ‘사람으로서의 격’으로 ‘사람은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명제에서 읽어내면 인격은 사람에 대한 필요조건이다. 한편 인격성은 인격을 형성하는 규준으로 인격에 종속된 것으로 여기서는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인격성은 기술記述적인 인식론적 규준뿐 아니라 실천적인 실재를 구성하는 규준이며 이에 성격이 포함된다. 크반테는 인격성과 성격 각각이 발현하는 사태를 살펴보며 인격의 동일성의 외연을 논리적으로 정리해나간다.


이번 글에서는 해당 저서에 나오는 인격에 대한 모든 접근과 해석을 다룰 순 없다. 대신 로크John Locke 이론과 동시대의 리드Thomas Reid, 버틀러Joseph Butler, 라이프니츠G. W. Leibniz의 반박을 토대로 한 인격의 동일성 화두의 역사적 기원을 소개할 것이다. 뒤이어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 히로스에 료코 주연의 영화 『비밀秘密』과 레드 레이블Red Label의 에로 게임『타나토스의 사랑タナトスの恋』을 소개하며, 인격의 지속적 통일의 조건을 사색한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인간 인격이 일반적으로 인격적 삶을 통일로서 경험하는지 가능한 해석을 탐색할 것이다.





로크 그리고 리드, 버틀러, 라이프니츠



① 로크의 ‘인격의 통일’ 분석


로크의 기본 구상은 인격의 통일의 조건을 혼의 본질의 개념과 인간의 통일의 조건 양자로부터 떨어뜨려 그들을 자기의식 안에 재배치하는 것이다. 모종의 숙고 후 그는 증명에 대한 중심 목표에 눈을 돌린다. 통일의 조건의 분류적 의존성에 관한 자신의 세부 사항에 따라 그는 다음과 같이 언명한다.


- 인격의 동일성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인격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


로크의 에세이에서 인격에 대한 언명을 문맥별로 문단을 정리해 보겠다. ( 대괄호는 내가 임의로 매겼다 )




< [1] 그것은 이성과 반성을 가지며 즉자적인 자신으로서 사고하는 지성적인 존재이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동일한 사고를 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2] 그것은 사고와 분리할 수 없는 의식에 의해서만 행해진다. 그리고 다음의 명제는 불가결한 사항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 ‘자기가 지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각하지 않은 채 지각하는 건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명상하고, 무언가 하고자 할 때, 우리는 그렇게 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늘 우리들의 현재의 감각과 지각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모든 사람은 즉자적으로 포착한 그것을 자기 자신이라 한다.

[3] 이 경우 동일한 자기가 동일한 본질로 계속되는지 아니면 다양한 본질로 계속되는지는 고려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식은 늘 사고를 동반하며 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즉자적으로 포착한 자기라 부르기 때문이다. 그로써 다른 모든 사고하는 것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구별한다. 이것만으로 인격의 동일성 즉 합리적(오성적) 존재의 동일성이 구성된다.

[4] 그리고 이 의식이 과거의 행동이나 사고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확장할 수 있는 한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미루어 보건대) 그 인격의 동일성에 도달한다. 그것은 그때 당시와 동일한 자기이다. 그리고 지금 그를 반성하는 현재와 동일한 자기에 의해 그 행동이 행해진 것이다.> -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 J. Locke 著 ) 中




위 문단들은 로크의 인격의 통일 개념의 핵심을 나타낸다. 이제 네 핵심 문단 각각에 우리가 염두에 둔 상위의 의문에 대해 의견을 정리해보자.


[1] 로크는 인격 개념의 정의로부터 시작하며 따라서 통일의 조건을 결정하는 데서부터가 아닌 인격성의 조건의 세부 사항에서 시작한다. 로크의 언명을 요약하자면 인격은 시간의 의식과 자기 자신의 시간적으로 확장된 존재의 의식 따라서 자기의식을 소유한 합리적(오성적)인 실재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로크가 일인칭 관점에서 동시적・통시적(역사적) 통일을 구별하지 않는 건 그가 동일성 개념을 도입한 방식에서 볼 때 지극히 명백하다. 따라서 자신의 동일성에 관한 지식은 현재의 ‘나’와 이전의 ‘나’와의 비교이며 이는 자기의식 안에서 행해지므로 통시성(역사성)의 요소를 포함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로크는 일인칭 단수 관점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즉 그는 시간 간격을 넘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일인칭의 지식을 갖는 능력을 통해 인격을 정의한다.

이 정의를 인격 형성의 특성의 목록에 적용함으로써 우리의 조건들이 로크의 합리성의 조건에 의해 망라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의식과 자기 자신의 통시적 존재에 대해 일인칭의 지식의 요건은 부분적으로 우리의 조건에 대응한다. 분명 로크는 일반 차원의 성격의 중추를 형성하는, ‘자신과의 평가적 관계’ 라 부연할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2] 두 번째 단계에서 로크는 자기의식이 자기 자신의 통시적 통일에 대한 일인칭 지식의 토대임을 분명히 한다. 여기서도 우리의 인격성의 조건의 목록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인칭 관점 상태의 특수한 경우를 발견한다. (이 구조는 자기와의 평가적 관계의 진전에 불가결하다. 로크의 지론에서, 사고하는 존재의 모든 의식을 특징짓는 자기 자신의 정신 조건에 관한 일인칭 지식이 바로 이 유형이다.)


[3] 세 번째 단계에서 로크는 일인칭 가치판단 관점에서만 확실성이 있다고 간주되는 일인칭의 ‘나’를 포함한 이 2단계의 일인칭 명제 상태로부터 결론에 도달한다. 즉 기초 본질에 대한 탐구에서 통일의 조건에 대한 관점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는 본질 간에 특수한 의존성의 관계가 있는지의 여부, 그것이 물질적이라 생각되는지 비물질적이라 생각되는지의 여부, 그리고 그 자신(예를 들면 인과적 관계, 부수付隨 혹은 출현의 관계)을 물을 수 있음을 배제하지 않는다. 로크에게 중요한 건 인격의 통일의 문제에 한해 동시적 및 통시적 통일의 조건이 앞서 존재한다는 것뿐이다.


[4] 마지막 단계에서 로크는 이 통시적 통일의 규준을 보다 정확히 특정한다. 과거의 행동이나 사고의 기억을 통해 특정 관점에서 의식을 확장할 수 있는 한 경험은 보충되어야 한다. 로크에 따르면 이 인격의 통시적 통일은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미루어 보건대) 과거에 도달한다. 현재의 기억은 현재 기억하는 자기가, 행동, 사고, 또는 경험의 당시 주체와 동일함을 보증한다. 그로써 결정적으로 그것이 단순한 (총체)인식론적인 개인이 아니라 본질적인 개인에 관계하게 된다. 이전의 행동 또는 경험의 주체와 현재의 기억의 주체의 통일은 단순히 발견되는 것만이 아니라 일인칭의 기억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다. 인격의 통일의 규준의 자율성에 관한 로크의 테제들을 이해해야 하므로, 2단계의 일인칭 상태에서 구성된 통일의 진리값의 조건으로써 기능하는 자기의식을 넘어 성립하는 사실 같은 건 없다.


해당 장의 여분에서 로크는 무엇보다도 사고 실험을 사용하여 그의 명제의 타당성과 이점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 그의 논의의 일부분의 매우 복잡한 증명을 추적할 필요는 없다. 로크는 늘 근저에 있는 본질의 통일로부터 인격의 통일이 독립해 있음을 증명하기를 절실히 바랐다. 그럼으로써 그는 통일의 조건이 실재의 종류에 의존한다는 그의 중심적인 통찰을 사용하여 기초가 되는 본질의 물질성 또는 비물질성의 문제에 중립적 입장을 고수하며, 각각이 근저의 본질이라 주장하는 유물론과 관념론의 인격의 통일에 대한 분석을 서로 양립할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자신의 제안이 진정한 대안으로 보이게 하는 게 성공했다. 게다가 로크는 그의 기억 규준이, 상과 벌을 귀속시킨다는 우리의 실천에 가장 적합하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고자 했다.


로크의 기지가 돋보이는 이 명제는 적어도 그것이 해결하고자 꾀하는 것처럼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이들의 난점 중 몇몇은 로크와 동시대를 산 철학자들에게 지적된 바 있으며, 로크의 이 모델의 옹호자가 수정을 감행하기도 했다. 다음 문단에서 이러한 논의를 자세하게 설명해보겠다. 더불어 인격의 통일의 조건에 대해 체계적으로 대답해나가며 로크의 모델을 수정하여 새로운 이론의 토대로 삼으려고 한다.



② 라이드, 버틀러 그리고 라이프니츠 : 동시대의 반대


인격의 통일을 기억에 기초하여 자율적인 관계로 해석하고 본질의 통일로부터 떨어뜨린다는 로크의 명제는 동시대 철학자들과 현대의 후계자들 사이에서 이미 큰 규모의 비판을 일으켰다. 오늘날까지 이 현대적 논의에 관련하는 가장 중요한 이름은 라이프니츠, 버틀러, 그리고 리드이다. 이 세 철학자는 현존하는 논의와 이론 형성을 효과적으로 구축하는 화두를 정식화했다. 이 전승된 역사적・철학적 연결에 따라 로크의 명제에 대해 이론異論을 제기한 수많은 저자들이 있지만 지금부터 우리는 위 세 저자를 다루는 데 한정할 것이다. 이유는 이 셋은 오늘날까지 인격의 통일의 체계적인 문제에 대해 중요하게 다룰 저자이기 때문이다.


동일성은 추이推移적인 관계이다. A가 B와 동일하며 B가 C와 동일할 때, A도 C와 동일하다. 이 전제에 기초하여 리드는 로크의 기억 규준에 대해 이론을 제기한다. 다음의 인용 문단은 그의 탁월성과 인접성을 드러낸다.


<용감한 장교가 학교를 다니는 소년 시절에 과수원에서 서리를 해 매를 맞고, 첫 번째 임무에서 적군에게 군기軍旗를 뺏고, 눈에 띄는 생활 끝에 장군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다음과 같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도 가정해 보자. 그가 군기를 빼앗았을 때 그는 자신이 학창 시절 매를 맞은 사실을 의식하고 있고, 장군이 되었을 때 그가 군기를 빼앗은 사실을 의식하고 있지만 매를 맞은 기억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이렇게 사례의 밑그림을 그리고는 리드는 로크의 명제의 결론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로크의 원칙에 따르면 학교에서 매를 맞은 인격은 군기를 뺏은 인격과 같고 군기를 뺏은 인격은 장군이 된 인격과 같다고 추측할 수 있다. 논리적인 사실에 따르면 장군은 학교에서 매를 맞은 인격과 동일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리드가 제대로 관찰한 것처럼 동일성의 관계가 추이성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로크의 인격의 통시적 통일의 규준을 참조하면 이는 모순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장군의 의식은 매를 맞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따라서 로크 선생의 원칙에 따르면 그는 매를 맞은 인격이 아니다. 그러므로 동시에 장군은 학교에서 매를 맞은 그 인격과 동일한 인격이 아니다.>


이 이론異論에 대한 표준적인 반응은, 이 이론이 로크의 개념에 영향을 끼치긴 하지만 그렇게 광범위하진 않은데, 이론理論을 정제함으로써 더욱 대폭의 수정을 첨가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크반테는 이 개입이 실제로 철학적으로 중대하므로 위 두 논점에 착수하기 전에 수선을 하기 위해 이 제안을 간단하게 소묘한다.


로크는 인격의 통시적 통일을 기억하기의 실제 조건과 일인칭 관점에서 각각 인격이 접근할 수 있는 현재 기억의 주체인 과거 경험의 조건과의 사이에서 심리적 관계로서 분석한다. 이 관계는 정신적 사건 사이에 있으며, 이들의 정신적 사건이 영적 본질 또는 그 조건과 신체 또는 신체의 조건에 의존하는지의 여부 및 어떤 방식으로 의존하는지를 상정하지 않으므로 ‘심리적’이라 간주된다. 로크의 접근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있다 : 이 인격의 통시적 통일은 기억에 의해 이어진 심리적 유대가 확장하는 한 계속 확장한다.


이 관계를 ‘심리적 연결’이라 명명한다면 다음과 같은 심리적 계속성의 보다 약한 관계와 구별할 수 있다 : 어느 시점 t0에서의 인격의 의식 상태와 시점 t1에서의 인격의 의식 상태 사이에서 심리적 계속성은 두 의식 상태 사이에서 심리적 계속성의 관계에 있는 의식 상태의 계속적인 유대가 있을 때 확실히 존재한다. 그러한 유대가 있는 한 t0과 t1 두 시점의 의식 상태는 동일한 인격의 의식상태를 포함한다.


이로써 로크의 명제를 수정하여 인격의 통시적 통일은 실제의 기억과 과거의 경험 사이의 심리적 연결 관계로 구성될 필요가 없고 심리적 계속성의 관계만을 필요로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추이성의 원칙은 토마스 리드가 그의 사례에서 설명한 조건 아래서도 심리적 계속성의 관계에 적용되므로 검출하기가 용이하다. 그러므로 리드의 이론은 이와 같이 이어진다.


이 성찰은 로크의 전통에 따른 인격의 통일 문제에 답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종의 진부한 철학적 사색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방어 전략이 일반적으로 상정되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은 이유가 두 가지 있다고 크반테는 밝힌다.


첫째로, 로크 자신의 이론에 관해 로크의 최초의 명제의 본질적인 특징이 이러한 변경에 의해 방치됨을 기록할 필요가 있다. 로크는 인격의 통시적 통일을 각각 인격의 자기의식에 접근할 수 있는 것 즉 일인칭 관점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완강히 반대했다. 심리적 연결의 관계에선 이 조건은 명백히 충족된다. 한편 심리적 계속성의 관계에선 이 조건이 명백하게도 충족되지 않는다. 이로부터 로크가 상정한 것과 달리 심리적 규준은 인격의 통시적 통일을 구성하지만 이 통시적 통일은 각각 인격에게조차 일인칭으로 주어질 필요가 없는 모델을 얻게 된다. 심리적 규준에 기반을 두고 구축된 이론으로선 일인칭 관점이 언급되는 한편 이 이론들의 진전에선 정신 상태 간 기능적 내지 인과적 관계를 관찰자가 끌어내는 일이 현재의 논의에서 성찰될 것이다. 분명히 해두자면, 정신 상태 간 기능적 내지 인과적 관계는 문제의 인격의 일인칭 관점에서가 아닌 관찰자 관점에서 끌어낼 것이다.


둘째로, 지금 설명한 방어 전략은 리드의 이론異論을 확인하지 않는 전제를 채택하고 있으므로 적어도 그만큼 많은 파생물이 있다. 이 전제는 인격의 동시적 또는 통시적 통일의 규준이 동일성의 관계에 따라 나타나는 모든 특성을 나타내야 함을 드러낸다. (오늘날까지 지속적인)이 논의 전체에선 동일성의 언명 단계(시점 t1의 인격 A는 시점 t2의 인격 B와 동일하다)와 이 동일성의 언명들이 사실이 될 조건의 단계는 빈번하게 동일하다(차이가 없다). 둘의 차이를 성립시키려고 할 경우 동일성의 관계를 두고 다른 시점에서 인격의 동일성의 언명이 사실이 될 조건을 형성하는 같은 논리적 성질을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리드(그리고 많은 다른 학자들)의 이론을 거부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이들 언명에서 구체적 사례가 제시될 것이다.


단 리드의 이론 제기에 대해 답변 같은 건 제공되지 않는다. 오히려 추이성의 조건을 고려한 새로운 관계가 정의된다. 이는 막 명명된 두 단계가 서로 명확히 구별되어 있지 않은 조짐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는 이의와 옹호 양쪽에 대한 대답의 여러 시도에서 그 자체가 동일성의 논리적 특징을 나타내는 게 사실이 될 조건으로서의 관계를 발견한다든지 구축한다든지 하는 것이 목적임을 체계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③ 순환의 문제


로크의 기본 개념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기억에 부여된 인격의 과거 경험에 관한 일인칭의 지식은 이 인격의 통시적 통일을 구성하는 본질관계이다. 이와 대조하여 그러한 인격의 통시적 통일의 정의는 순환논리적이란 이의가 제기된다. 제의된 본질 규준은 그것이 구성했다고 가정하는 것 즉 인격의 통시적 통일을 전제로 한다고 주장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버틀러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인격의 동일성을 의식하는 필요조건은 자기 자신의 증명이다. 그러므로 인격의 동일성의 본질은 개념에 대한 지식을 넘어설 수 없다.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전제하는 사실을 구성할 뿐이다.>


리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여기서 관찰될지도 모르겠지만 (몇몇 위대한 철학자가 부정하지 않았었다면 관찰은 불필요했겠지만)‘나’를 그 일을 한 인격으로 성립시키는 건 ‘나’의 여느 행위에 대한 기억하기가 아니다. 이 기억하기는 ‘나’가 그것을 했음을 확실하게 알게 한다. 그러나 기억이 나지 않아도 ‘나’가 한 일일 수도 있다. ‘나’가 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나’의 관계는 ‘나’가 조금도 그 행위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동일하게 성립한다. ‘나’가 그런 일을 했음을 기억한다고 말한다든지, 기타 방식으로 표현하는 걸 선택한다든지 하면, ‘나’가 그 일을 했음을 의식함으로써 ‘나’는 그 일을 한 것처럼 된다. 이는 내 입장에선 굉장한 부조리인데, 마치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나의 믿음이 세계를 창조되게 했다는 논리와 같다.>


위대한 철학자 리드가 어떤 철학자를 두고 위대하다고 언급하는지, 버틀러와 리드에 의한 이러한 논의가 누굴 향한 것인지는 명백하다. 이 이의를 통해 무엇이 정확히 말해지는지 혹은 더 낫게 말해지는지도 명백하다. 단 이것이 기능한다고 가정하는 양상은 덜 명백하다. 결과 본문에는 두 가지 다른 해석이 있으며 그를 통해 원 저자 즉 버틀러는 여러 복잡한 논의에 기인하게 된다. 이 이론을 보다 세부적으로 분석하기 전에 그 두 점에 대해 간단히 짚어두기로 하자. 하나는, 버틀러와 리드 양측이, 인격의 통시적 통일은 그 근저에 있는 본질의 통시적 통일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로크의 중심 전제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통시적 통일에 대한 일인칭의 지식이 단지 이 지식에 기반을 둔 통일에 대한 사실이 성립할 때의 지식의 경우일 수 있다는 그들의 함의는 이 조건 하에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또 하나는 곧 중요하게 다룰 사항인데, 일인칭 지식의 경우 인식론적・존재론적 차원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다고 버틀러와 리드가 가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경계가 추후 자기의식의 특별한 경우에 대해 정말로 지지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스스로에게 염두에 둘 것이다.


하지만 우선 순환논리를 반대하는 핵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는 단순하게도 복합적으로도 제시될 수 있다. 단순하게 제시해보면, 버틀러의 이론은 단지, 현재 기억하고 있는 주체와 과거의 경험이 의식적으로 그 자신의 경험이었던 당시의 주체가 동일하다는 게 사실이라는 정신적 사건에만 기억 개념을 사용함을 언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해석되는데, 이는 언어학적 사실의 문제이며 그 이상의 철학적 깊이는 없다. 순환논리에 대한 단순 제시 차원의 반대에 대한 감상은, 이는 그저 중간 지대의 개념을 정의하고, 기억 개념을 교체하고, 이 새로운 개념을 사용해 인격의 통시적 통일에 대한 로크의 규준을 재정립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이 새로운 개념이 기억 개념을 통해 정의되지 않고 그 개념 혹은 인격의 통일을 간접적으로 암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복합 제시 차원의 반대는 그러나 그 전제 조건이 적어도 리드의 발언으로 암시되며, 로크주의자들의 방어 전략에 맞서 정립될 수 있다. 버틀러와 리드 중 누구든 복합적 독해에서 그들의 이론을 의도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선 잠시 밀어 두고, 이제 이 복합적 독해에서 이론이 어떻게 정립할지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


순환논리에 대한 복합 이론은 우리의 기억이 망상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실제로는 행하지 않았는데 무언가를 했다고 기억하는 경우도 있다. 때때로 실제로는 다른 누군가가 행한 일을 자신이 한 것으로 기억할 가능성이 있다. 리드는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든다.


<오늘 아침 손과 얼굴을 씻었다고 믿고 있을 때 이 명제의 진실에는 필연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즉 그랬을 수도 있고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그것을 전혀 믿지 않은 채 뚜렷하게 그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것을 믿게 되는 걸까? ‘나는 그것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이게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이 기억하기는 나의 마음의 행위이다.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기억한다는 행위가 일어났을 거란 사실은 불가능할까? 전자와 후자 사이에 필연적인 연결을 찾을 수 없음을 나는 고백한다.>


이로부터 도출하는 결론은 기억이 틀림없는 지식을 나타내고 있지는 않으며, 잘못에서 비롯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첫 독해에서의 순환논리에 대한 이의는 새로운 개념의 적절한 개발에 의해 무효화할 수 있다는 언어적 사실을 주장할 수도 있다.) 게다가 기억의 경우 크반테는 실제 지금 그리고 여기서 기억하고 있는 주체로서의 자신과 지금 막 기억한 과거의 경험의 주체 사이의 동일성을 의식하고 있지 않음이 명백하다고 밝힌다. 그러한 동일성이 자기의식에서 순간적으로 우리에게 명백해졌을 경우 기억과 통시적 통일은 틀림없이 일치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동일성 주장이 사실이라는 지식은 기억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리드는 우리 자신의 통시적 통일의 지식은 기억하는 능력과는 별개의 요인에 기반을 둘 필요가 있다고 추론한다. 앞서 말한 동일성의 사실이 인격의 자기의식에 현존할 필요가 없음을 시인함으로써 말이다.


이로써 우리는 순환논리에 대한 복잡한 이론을 정식화하는 입장에 선다. 기억에 ‘기억하는 대상’과 ‘과거에 경험한 대상’의 동일성에 관한 지식이 없는 경우, 참된 기억과 거짓 기억이 같이 있는 경우, 그리고 기억하는 주체에게 참된 기억과 거짓 기억이 인식 차원(즉 그들의 현실에서)에서 구분되지 않는 경우, 참과 거짓의 기억을 구분할 수 있도록 본질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나 추가적인 규준이 필요하다. 그러나 순환논리에 대한 이론異論에 따르면 그러한 규준은 오직 인격의 통시적 통일만이 될 수 있다. 이는 참된 기억과 거짓 기억을 본질적으로 구분함을 가능케 하는 추가적 본질 규준을 제공한다. (인식론적 차원, 즉 이 차이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기선 무시해 둘 수 있다.)


이 이론을 피하고 싶다면 ‘기억하기’와는 대조적으로 인격의 통시적 통일을 전제하지 않는 새로운 개념을 정의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그 자체가 이미 기억과 그에 포함되는 통시적 인격의 통일의 전제에 의존하지 않는 이 인격의 통시적 통일을 위한 본질적 규준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현재 목적을 위해 순환논리에 대한 이론을 논의하는 것은 이쯤에서 종료할 수 있다. 그러나 순환논리에 대한 복합적인 이론은 인격의 통시적 통일이 일인칭 관점에서 특정 사실을 나타내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것은 기억하는 인격의 자기의식을 초월하는 관계를 구성하는 통일을 통해 철학적으로 정의될 것임을 명시적으로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순환논리에 대한 복합 이론은 일인칭 관점에서 통시적 통일을 명확히 확언하고 있다는 내용의 마찬가지로 산발적으로 지지받는 논제들과 혼동되어선 안 된다.



④ 인격의 본질로서의 자기의식


여기 제시된 로크의 동시대의 비판자 셋은 모두 그 이상의 논의를 찾을 수 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공개한 것은 라이프니츠 형이상학뿐이다. 세 비판 모두 시공간에 존재하는 실재의 연속성 또는 자기의식을 갖지 않는 실재의 통시적 통일을 동일성과 혼동해선 안 된다고 어떤 형태로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버틀러는 '동일성'이라는 개념의 '느슨하고 일반적임'과 '엄격하고 철학적 맥락이 있음'을 구분한다. 리드는 또한 애매함이나 정도를 용납하지 않는 동일성을, 자연 또는 인공적 기원이 될 수 있는 불완전한 동일성과 구분한다. 마지막으로 라이프니츠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스스로 무엇인지 의식하며 '나'라고 말할 수 있는 합리적 혼은 형이상학의 의미뿐 아니라 안정성을 갖고 여타의 것들보다 훨씬 더 높은 정도로 견딜 수 있다. 이 '나'의 기억이 징벌과 보상을 가능케 하므로 도덕적으로 동일하게 남아 있으며 동일한 인격을 구성한다.




엄격하고 철학적인, 완전하거나 고도로 존재하는 동일성과 일반적으로 더 낮은 정도로 존재한다고 간주되는, 불완전하거나 경시되는 동일성의 구분에서 이 점은 확실하다 : 그것은 동일성의 언명이 참이 되는 조건을 나타내는 관계, 그리고 동일성의 관계, 양자의 차이의 경우가 아니다. 오히려 버틀러, 리드 그리고 라이프니츠는 동일성의 언명이 참이 되는 조건으로서 기능하는 이 통일성의 관계 자체가 인격의 경우 동일성의 질을 가리키지만 다른 실재들의 경우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버틀러, 리드, 그리고 라이프니츠는 인격의 통일의 기저에 있는 본질이 있고, 그 통일은 언급된 논리적 질質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리드는 다음과 같이 쓴다.




따라서 나의 인격의 동일성은 내가 자기 자신이라 부르는 불가분의 것의 계속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이 자기가 무엇이든 그것은 사고하고 고찰하고 해결하고 행동하고 고뇌한다. 나는 사념이 아니며 행동이 아니며 감정이 아니다. 나는 사고하고 행동하고 고뇌하는 주체이다. 나의 사념, 행동, 그리고 감정은 시시각각 바뀐다. 그들은 계속되진 않지만 연속적인 실존을 가진다. 그러나 그들이 속하는 그 자기 또는 나는 영속적이며, 내가 나의 것이라 부르며 잇따르는 모든 사념, 행동 및 감정과 똑같은 관계를 갖는다.




버틀러와 리드는 이 본질의 본성에 아무것도 추가하지 않는다. 또한 어째서인지 물질적이고 시공간적으로 확장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애매하지 않고 종래의 성질을 답습하지 않고 점진적이지 않은 별개의 종류의 통일성을 나타낸다. 기본적인 본질이 물질적 본성의 것일 가능성을 배제하는 가정이 있지만 여기서 그 문제를 딱히 파고들 필요는 없다.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라이프니츠에서 우린 엄밀한 연속성과 다른 연속성 사이에 점진적인 차이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얼핏 보기에 놀라운 개념을 발견하지만, 원칙이나 엄밀한 차이는 발견할 수 없다. (그는 이 구절을 훨씬 높은 단계에서 사용한다. 이는 라이프니츠 형이상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버틀러와 리드의 접근과의 결정적 차이를 나타낸다.) 라이프니츠에게 현실의 모든 기본 유형은 많든 적든 독특한 의식 또는 자기의식을 지닌 정신적 실재이다. 라이프니츠가 기본적인 존재론적 실재라 부르는 이 모나드monad가 더욱 명시적일수록, 자기의식을 가지며 순수한 자기의식의 소멸점으로 동일성의 특징을 획득하는 통일성도 보유하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그의 사후 오십 년째인 1765년에 초판이 나온 『인간 이해에 관한 새로운 기고』라는 제목의 글에서 로크의 글에 대한 해설을 실었다. 대화 구조가 없는 서문에서 라이프니츠는 그의 합리론적(오성적) 체계와 로크의 경험론적 체계와의 결정적인 차이를 강조한다.


이는 본질이 자발적으로 활동할 수 없으며 운동이 없는 신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내가 상정하는 사실에 기반을 둔다. 경험이 이러한 관점에서 나를 지지하며 이를 확신하려면 활동의 결여에 대해 보일Boyle의 책을 참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나는 합리성이 여기 있다고 믿으며, 이것이 내가 원자atom의 존재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유 중 하나다.


여기서부터, 로크와 라이프니츠의 체계의 전체적인 형이상학적 개념의 근본적 차이가 나타난다. 이와 같이, 동일성과 다양성에 관한 로크의 장章에 대응하는 장에서 라이프니츠는 동일성과 개별화에 관해 그가 정반대의 전제에서 출발함을 분명히 한다.


공간과 시간의 차이에 더해, 미분의 내적 원리가 존재함은 항상 필연적이다. (…) 공간과 시간(즉 외부 세계와의 관계)은 사물을 구별하는 역할을 완수하는데 그 자체는 규준에 의해 구별되기가 어렵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을 구별하는 건 가능한 채이다. 따라서 동일성과 차이라는 정확한 용어는 시간과 공간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사물의 차이는 시간과 공간 둘 중 어딘가에 연관됨은 사실이다. 공간과 시간, 그리고 다른 공간과 시간은 그 자체가 완전히 유사하나 실체나 완전한 현실을 제시하진 않으므로 사물을 통해 공간과 시간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라이프니츠가 ‘모나드’라 부른 이 구별의 내적 원리는 개별화와 통일의 필요조건이다. 라이프니츠는 그를 ‘지각’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대행자로서 의식의 구조를 가지며 여러 강도에서 존재한다. 가장 명백한 형태는 자기의식이며 이는 ‘나’라는 어휘의 사용에 나타나므로 라이프니츠는 다른 실재보다 일인칭의 지식을 보유한 인격으로부터 보다 높은 통일성을 귀속시킬 수 있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의식과 반성이 없는 끝없는 대량의 지각은 우리가 의식하고 있지 않은 혼 자체에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이 지각의 모나드의monadic 생의 원칙을 자기의식과 동일시할 수 없음은 그의 사유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라이프니츠는 인격의 통시적 통일을 분석하고자 이들 무의식의 지각이 적어도 복잡한 방식으로 인식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할 경우 일인칭 단계를 자기 자신에게 맡길 권리 역시 유보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존재론에서 정신과 물질 본질의 이원론, 바꿔 말하면 res cogitans와 res extensa의 이원론을 상정하진 않지만 모나드의 원리에 따라 본질을 의식으로서 채택하고 있으므로, 인격의 통일과 다른 실재들의 통일의 차이의 문제에서 단계적인 차이로 그 자신을 제한할 수 있다. 대조적으로 버틀러와 리드는 두 가지 다른 종류의 본질의 고전적 개념을 가리키는 두 종류의 동일성의 구별을 염두에 두고 구별되는 통일성의 관계를 유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서 이 일반적인 형태에 대해서는 현재 그다지 지지자가 많지 않다. 그러나 버틀러, 리드, 그리고 라이프니츠는 인격의 통일이 자기의식이므로 다른 실재의 통일과는 구별되는 종류의 것이라는 논제에 관해 오늘날 이루어지는 논의에서 당연한 듯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입지를 정립했다.


그러므로 라이프니츠와 대조적으로 버틀러도 리드도 자기의식으로부터 이 특별한 인격의 통일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분명히 리드는 인격의 동일성이 특별한 본성을 지녔다는 논제를 정당화하는 시점에서 아마도 라이프니츠를 참조하여 “인격은 모나드이며, 여러 부분으로 나눌 수 없다.”고 말했다. 라이프니츠의 존재론과는 관계없이 체계적으로 연관되는 문제는 다음 두 주장이 개연적인지의 여부일 것이다. (1) 자기의식 즉 인격의 일인칭 관점은 인격의 통시적 통일을 결정하는 데 충분하며, (2) 자기의식의 특별한 특징은 왜 인격의 통시적 통일이 엄격하고 철학적인 동일성에 요구되는 특성을 가지며, 또 가져야 하는지 설명한다.



『비밀』 그리고 『타나토스의 사랑』





① 딸의 몸에 들어간 아내의 인격, 『비밀』


영화는 설산의 좁은 도로를 달리는 야간버스 안에서 시작한다. 집안 행사 겸 스키 여행을 위해 친정에 가던 스기타 나오코와 모나미 모녀는 운전수의 졸음운전으로 추락 사고를 당하고, 나오코의 남편 헤이스케는 홀로 집을 지키다가 뉴스 속보를 보고 황급히 병원으로 달려간다. 모나미를 감싼 나오코는 헤이스케의 눈앞에서 끝내 숨을 거두고, 마지막 순간 헤이스케가 쥐어준 모나미의 손을 통해 딸의 육체에 들어가게 된다.


겉보기에는 틀림없는 열여덟 살 고교생 모나미였지만 말투와 행동 그리고 기억은 틀림없는 자신의 아내 나오코였다. 부부는 이 일을 세간에 함구하기로 한다. 모나미의 두뇌와 신체를 갖게 된 나오코는 다시 한 번 맞게 된 고등학교 3학년의 일상을 활력 있게 보내며, 자신이 이렇게 된 이유를 해명하고자, 또 기껏 딸의 나이와 신분으로 살게 된 이상 유의미한 인생을 살고자 의학부를 지망하게 된다.


모나미의 인격을 잃었지만 죽었어야 할 아내가 딸의 몸을 빌어서 살아 있다는 사실의 무게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오코가 모나미로서의 삶에 충실할수록 묵직하게 다가왔다. 여전히 한창 때의 남자였던 헤이스케는 딸의 얼굴을 한 아내를 차마 안을 수 없었고, 모나미의 묘령에 들어선 젊은 몸을 지닌 나오코는 달아오른 몸을 해소할 곳이 없었다. 중간중간 나오는 부부의 식사 장면은 마치 성욕을 식욕으로 달래려는 것처럼 보인다. 대학에 들어간 나오코가 서클 선배와 썸을 타기 시작하자 영화 도입부와 마찬가지로 혼자 밥을 먹는 헤이스케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건 남자로서 코너에 몰린 그의 처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라진 줄 알았던 모나미의 인격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한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나오코가 모나미로, 모나미가 나오코로 바뀌어 있었다. 모녀는 일기장을 통해 서로의 일상을 공유해간다. 점점 나오코로 있는 시간이 짧아지자 헤이스케와 나오코는 두 번째의, 이번에야말로 이승에서의 이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다. 운명의 그 날, 모나미는 “엄마가 미사키 등대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고 전언한다. 처음으로 데이트를 한 장소에서 모나미로 잠들었다가 깨어난 나오코는,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말과 함께 오열하며 헤이스케에게 작별을 고한다.


수 년 후, 모나미는 자신의 인생을 바꿔 버린 운전수의 양아들과 결혼하게 된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나미를 다독이고자 헤이스케가 다가가자, 모나미는 충격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면장갑을 낀 채 나오코가 늘 그랬듯 헤이스케의 턱을 어루만진 것이다. 그때서야 나오코가 숨겨왔던 비밀, 헤이스케 앞에서 자신을 완전히 감추고 여자로서 딸의 인생을 살고자 했던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헤이스케는 그런 나오코에게 “행복해야 돼.”라 말하며 축복해준다.




오랫동안 몇몇 저자들은 “인격의 통일성 화두는 인간 존재의 통일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논제를 주장해왔다. 생물학적으로 접근했을 때 이 발제는 도전을 받게 된다. ‘인간으로서 존재함’과 ‘인격성’의 상호 관계 규정 때문이다. “나는 근본적으로 인간 유기체일까?” 일반적인 인격Person과 성격Personlichkeit의 고찰에 따르면 꼭 인간에 속해야 인격일 수 있다는 필요조건은 없다.


생물학적 접근은 인격의 통일의 지속성에 대한 대답이 인간 존재의 개념의 조력으로 심화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오직 인간 존재가 인격이 될 수 있다고 암묵적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인격 개념이 아니라, 생물학적 인간의 개념이다. 따라서 ‘인간으로 존재함’은 사람에 대한 필요조건인 ‘인격’에는 필수적일지언정, 인격을 형성하고 지속하는 실재이자 규준인 ‘인격성’에 필수적이진 않다. ‘인간으로 존재함’이 지속시켜 주는 것은 생물학적 유기체로서의 인간뿐이다.


생물학적으로 모나미의 몸을 갖고, 모나미가 살던 일상을 지속한다면 이는 더 이상 종래의 나오코의 인격의 지속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세상에서 자신을 나오코라 규정하는 사람이 단 둘이고 그 외에 모두가 모나미라 규정하고, 자신 역시 나오코로서 모나미를 의태할 때, 과연 그 인격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자신의 본체의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와서는 결혼반지를 두고 “이제 못 끼고 다닌다”며 슬퍼하던 나오코였지만 대학에 들어가서는 남편에게도 함구한 채 서클 선배와의 관계를 내심 즐기게 된다. 이를 눈치 채고 질책하는 헤이스케에게 “난 사생활도 없어?”라 대꾸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모나미 그 자체이다.


나오코는 자신이 존재하는 한 헤이스케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안길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헤이스케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지우고자 했다. 그런 방법으로 나오코의 인격이 지속성을 잃고 완전히 새롭게 쓰일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





② 타인의 몸에 뇌를 이식한다면, 『타나토스의 사랑』


유우키 나오미는 어릴 적 부모를 교통사고로 여의고, 유산으로 남겨진 대저택에서 남동생 코우타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고교 시절 수영부 선출이자 현재 의대생인 문무를 겸비한 재원인 나오미에겐 누구에게도 말 못할 비밀이 있었는데, 그것은 남동생 코우타를 오래 전부터 이성으로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언젠가 코우타를 덮치고 말 것이란 두려움에, 나오미는 아버지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뇌외과의 요시자와 타쿠야에게 대쉬한다. 그러나 남동생이 아닌 남자와 한 첫경험은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묘한 감각과 떨떠름한 기분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남동생을 멀리하기 위한 교제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나오미는 집 근처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뇌를 제외한 전신이 망가지는 사실상 사망 직전의 부상을 입은 나오미. 수술을 집도한 타쿠야는 때마침 두부만 완전히 으깨진 여고생 키타하라 아카네의 몸에 나오미의 뇌를 이식한다.


눈을 뜬 나오미는 자신이 젊고 팔팔하고 보다 육감적인 몸으로 바뀌었음을 실감한다. 뇌 이식은 공개만 하면 노벨 의학상은 따 놓은 당상인 대업적이었지만 동시에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범죄행위였다. 상용화라도 된다면 DNA 감정을 기반으로 하는 현재의 과학 수사 대부분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었다. 범죄를 저질러도 어딘가에서 머리만 다친 시체로 갈아탄다면 잡을 방법이 없다. 빈부 격차에 따라 개인의 수명의 차이도 커질 것이다. 이를 걱정한 타쿠야는 나오미의 기존 신분에 사망 선고를 내린 채 키타하라 아카네로서 살아갈 것을 종용한다.


나오미로선 오히려 반가운 소식이었다. 키타하라 아카네의 몸과 신분이면 코우타를 사랑하고 이어지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삼 개월만에 퇴원하여 아카네의 친부모의 집에 들어간 나오미였지만, 예상치 못한 장애물들이 있었다. 우선 생전 아카네에게는 코바야카와 요시토라는 날라리 남자친구가 있었다. 아카네와 요시토는 뒷골목에서 수시로 짐승과도 같은 교미를 즐겨 왔고, 성적 쾌락의 차원에서 아카네의 몸은 생전의 나오미를 훨씬 웃돌게 개발되어 있었다. 또, 사실 타쿠야는 나오미와 몸을 겹치기 훨씬 이전부터 간호사 하시모토 아키와 약물을 동반한 SM 플레이를 즐겨 왔다. 나오미의 뇌 이식 수술을 보조한 아키는 아카네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밖에서 보면)타쿠야와 교제하던 정숙한 의대생 나오미의 인격이 젊고 예쁜 아카네의 육체까지 가지게 된 것에 적잖이 질투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없는 석 달 사이에 슬픔과 고독에 빠진 코우타의 마음의 빈틈을 파고든 동급생 모치즈키 카오리의 존재였다. 그럭저럭 귀여운 외모와 사근사근한 태도로 남녀를 불문하고 인기가 많은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전학을 온 아카네(나오미)가 코우타에게 접근하는 것을 내심 좋게 보지 않았다.


나오미는 아키를 경계하고, 요시토의 욕구를 온 몸으로 받아내고, 카오리의 음험한 뒷공작에 맞서면서, 대부분의 루트에서 인간으로서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고 만다. 아키와 타쿠야를 약물에 죽게 하기도, 요시토를 오토바이째 바다에 빠뜨려 죽이기도, 양부모에게 수면제를 먹인 채 집에 불을 질러 죽이기도, 요시토와 양부모를 자동차째 바다에 빠뜨려 죽이기도, 카오리를 윤간 교사한 끝에 자살로 내몰기도,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둘 끔찍하게 죽는 상황에 진절머리가 나 아카네(나오미)를 인간적으로 거부하는 코우타를 패닉 상태에서 목졸라 죽이기도 한다. 그 와중 자신 역시 숱한 죽음을 맞기도 한다.





한편 동시에 작중에는 끊임없이 사고 이전의 나오미와 사고 이후의 나오미가 과연 동일인물인지의 사색이 등장인물이나 나오미의 일기장을 통해 언급되고 있다. 인간의 의식, 자기의식, 인식, 이성, 오성… 인격의 저변에 있는 것에 어떤 이름을 붙이든 그것은 신체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게 현대 의학의 접근 방식이다. 책상에 앉아 있는 게 당연하다시피 하던 몸에서 짧은 옷을 입고 춤추는 게 당연하던 몸으로 의식이 옮겨 간다면, 그런 식으로 자신의 신체가 바뀌고, 정체성이 바뀌고, 세계가 바뀐다면, 그 인격은 더 이상 동일하다고 할 수 없다.


프롤로그에서 아카네와 타쿠야를 마주친 나오미는 ‘도저히 저런 질 낮고 머리 나빠 보이는 족속들과 어울릴 수 없다’고 혐오한다. 의대생으로서 일종의 지적 우월감도 있었겠지만, 그만큼 보편적인 윤리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남동생을 생각하며 자위하면서도, ‘차마 품어서는 안 되는 마음’이라며 끊임없이 자책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카네의 몸을 입게 된 이후, 쾌락과 욕망에 눈을 뜬 나오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상기한 끔찍한 범죄를 스스로 계획하거나 우발적으로 저지르고, 그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목 ‘타나토스의 사랑’에서 타나토스Thanatos란 그리스 신화에서 죽음을 의인화한 신의 이름이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서는 자신을 파괴하려는 죽음 본능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서는 《서브컬처와 철학(7)~프로이트 이론과 함께 읽는 모토나가 마사키~ ( https://brunch.co.kr/@erasmut/49 )》을 참고하도록 하자) 이 사랑을 이루려고 발버둥칠수록 본래의 나오미의 인격은, 인간성은 점점 죽어가는 것이다.




마치며



『비밀』에서도 『타나토스의 사랑』에서도 결국 정신과 육체는 완전히 구분될 수 없었다. 바꿔 말하면, 인격과 육체는 완전히 구분될 수 없으며,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지배할 수도 없다. 이는 지극히 스피노자적인 귀결이다. 이윽고 인격은 육체의 정념에 영향을 받아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전개한다.


인간 인격은 어떻게 일반적으로 인격적 삶을 통일로서 경험할까? 인격성과 인간 성립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양하게 상호 연결하며 크반테의 연구에서 겨냥하는 축적된 테제와 전제의 토대에서 서로를 확고히 한다. 이 글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논의를 통해, 크반테는 인격의 통일의 조건을 도출하는 시도를 중단하는 회의적인 결론을 낸다. 대체 담론을 거쳐 변경된 ‘인격의 통일’ 화두에 대한 대답은, 생물학적 죽음 너머 인간의 불멸성이나 존재의 계속을 사색하는 모종의 종교적・형이상학적 믿음과는 양립할 수 없다.


크반테의 연구가 시사하는 가장 큰 메시지는 이제 인격의 문제에서 데카르트적, 주체의 동일성으로서의 접근은 진정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얄궂게도, 그렇기 때문에 난 이 글을 헤겔이 자신의 주저 『논리학』에 인용한 스피노자의 문장으로 마무리지을 수밖에 없다.


<Omnis determinatio est negatio(모든 규정은 부정이다)>


인격의 통일성에 대한 단서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전기적 일관성, 삶의 형태의 지속 등 인격성의 규준이 되는 여러 관점을 사색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명료하면서도 고정된 단수의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현대의 패러다임에서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싶다.  

















참고 문헌



『Person』M. Quante 著

『Ethica』B. Spinoza 著, 조현진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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