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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Dec 13. 2020

하이데거, 예술 그리고 신학

(1) 하이데거, 예술


들어가며



이 글은 제목을 보면 쉽게 떠오르는 ‘예술 작품들을 두고 철학 용어를 동원해 감상하거나 정의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후설의 지향성에서 모티프를 따 와 자신의 존재론을 구축한 하이데거가 예술에 부여한 의의는 단순히 심미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의 본질은 예술’이라는 명제로 대표되는 존재사유이다.

하이데거에 대해 후대 철학자들이 곧잘 붙이는 수식어는 ‘시적인 언어의 철학자’이다. 그는 헤겔과 동시대에 활동한 시인 횔덜린을 높게 평가하여 그의 시를 소재로 자신의 사유를 강의하여 정리한 『횔덜린의 송가』를 발표했다. 또한 시적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고찰한 강의를 정리한 『언어로의 도상에서』도 손꼽히는 후기 저작이다.

국내 철학자 중 하이데거에게서 영감을 많이 받은 ‘둥지의 철학’의 박이문은 『인식과 실존』에 재수록한 사설 《문학과 언어의 꿈》에서 자신이 통찰한 철학과 시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철학은 삶의 살로서의 시를 갉아먹는 벌레일지도 모르지만 삶의 시는 철학 없이는 무의미하며, 시는 철학의 빛을 가로막는 그늘일지 모르지만, 철학의 빛은 시의 그늘 없이는 무의미하다. 시와 철학이 만나는 곳에 존재・마음・언어와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둥지가 지어진다. 그와 같이 해서 지어진 시와 같은 철학인 동시에 철학과 같은 시로서의 존재・마음・언어의 둥지 안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의 휴식을 얻고 행복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박이문 전집 『인식과 실존』, 《문학과 언어의 꿈》 中


하이데거의 철학적 인식의 대상은 시종일관 ‘존재’다. 전통적 철학에서 존재는 형이상학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형이상학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본질적으로 영원한 구성요소, 즉 실재Realitat와 그것들의 구조, 그리고 그것의 존재 의미 등을 탐구한다. 플라톤의 이데아Idée,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Substanz에 대한 이론들, 데카르트의 육체적 실체와 사유적 실체에 대한 이론, 그리고 헤겔의 정신Geist 등에 대한 이론은 형이상학의 대표적 예들이다. 이러한 존재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부득이 개별적이며 부분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고 논리적으로 결코 존재 일반, 즉 일괄적 존재일 수 없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론, 즉 형이상학을 지역 존재론die regionale Ontologie이라 부르고, 이와 대조해서 기초 존재론die fundamentale Ontologie이라고 호칭한 존재론을 제안한다. 이 두 존재론의 차이는 각기 존재론이 추구하는 대상의 폭에 있다. 그 대상의 폭이 전자의 경우 존재의 부분성・개별성에 제한되고 후자의 경우 존재의 총괄성・전체성으로 확장된다.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의 의도는 존재 일반, 즉 존재 전체를 인식대상으로 삼고 그것을 ‘하나’로서 파악하자는 것이다.

존재 일반, 즉 단 하나로서의 존재 전체는 바로 그것의 정의상 어느 것으로도 분석할 수 없는 ‘하나’이며, 따라서 그것은 한편으로 모든 개별적, 즉 현상적 존재자들을 개별적으로 분석하지 않은 채 포괄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모든 인식 주체자의 인식까지도 인식 객체로서의 존재 자체 속에 주객의 구별을 부수고 흡수・포괄한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존재에 대한 서술이 거의 대부분 부정적 성격을 띠며, 그를 ‘부정성의 철학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이 실제로 다룬 것은 존재 일반이 아니라 어떤 개념 속에 묶인 개별적 존재들에 불과했다”며 지역 존재론의 맹점을 지적한다. 하이데거의 입장에서 볼 때 플라톤 이후 서양 사상을 지배해 온 형이상학은 잘못된 존재-신학에 근거하고 있다. 존재-신학은 모든 현상이 영원불멸한 어떤 존재 원칙, 즉 바탕 혹은 실체에 비추어 논리적으로 설명됨을 전제하며 그러한 것들을 존재 자체와 동일시한다. 플라톤의 ‘최고선의 이데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 없는 원인’, 헤겔의 ‘정신’이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신 등은 그릇된 형이상학의 대표적인 존재론적 개념들이다.


존재를 분할 이전의 존재로서 파악하려는 하이데거의 철학적 의도는 플라톤 이전의 고대 철학으로의 철학적 ‘회귀’를 의미하게 된다. 철학적 사유의 과제가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이고 그런 작업이 기초 존재론의 목적이라면, 철학이 할 일, 즉 존재의 존재 그대로의 파악은 ‘형이상학의 기반으로서의 귀환’일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주관적 관점에서 존재 자체로의 ‘회귀’를 의미하고, ‘존재의 그 원천적 상황’ 파악을 뜻한다.

철학이 ‘회귀’하고자 하는 원래적 존재에 대한 인식과 서술은 문법・논리・이론을 넘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하이데거는 강조한다. 존재의 이와 같은 속성, 즉 존재의 비개념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존재를 Sein이라는 독어 대신 Seyn이라는 새 문자로 표시하기도 하고, 부정을 상징하는 기호 /를 그어서 기록한다.

그러나 ‘존재’를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도, 의식할 수도, 서술할 수도 없다는 주장은 다른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가 사고됐음을 함의한다. 이러한 사고가 발견하고 인지한 존재는 보통 언어와는 다른 언어로만 표상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유에서 후기 하이데거가 다다른 대표적 방법론이 일전에 쓴 《하이데거, 지젝,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 ( https://brunch.co.kr/@rh3244/17 )에서 짚고 넘어간 전회轉回이다.


<하이데거의 논고 『교설』, 『진리의 본질』, 『휴머니즘』에는 공통적으로 사색되는 사항이 있으니, ‘인간’, ‘진리’, 양자의 ‘연관’과 그 ‘진리의 변용’이다. 이로써 이끌어지는 유일한 질문이란 “어떻게 인간은 진리와 본질적으로 엮일 수 있는가?”이다. 플라톤의 성찰에 따르면 ‘드러남’으로서의 진리는 사물 자신의 성격이 아니라, 그 사물이 ‘무엇으로 보이는가’ 즉 ‘사물의 현전하는 방식(이데아)의 성격’으로 파악된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진리의 본질의 전향을 본다. 오늘날 진리는 보이는 것에 한해서만 부여되는 사물의 드러남에 제한된 것이다. 이 사태는 도야와 더불어 생겨난 진리의 본질 변용과는 결정적으로 구별된다고 말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오직 이 전향에 기반을 두고서야 도야는 사물의 드러남의 변용으로서 처음으로 말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결정적인 본질 변용이야말로 플라톤이 결코 말하지 않은, 아니 원리적으로 말할 수 없던 엄밀한 의미에서의 ‘진리에 대한 교설’에 다름없다. 그리고 여기서 처음으로 인간은 제 사물의 본질을 그것이 ‘무엇인지(이데아)’를 향해 ‘올바르게richtig’ 꿰뚫어볼 힘, 이후에는 이해력 내지는 인지력이라 불리는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이는 사물의 보이는 형태를 향하는 것Sichrigtung만이 일체의 올바름Richtigkeit으로서의 진리를 보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올바르게 향하여 본 사물’만이 그 자신의 보이는 형태를 본질로써 인간에게 맡길 수 있다.> - 《하이데거, 지젝,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 ( https://brunch.co.kr/@rh3244/17 ) 中


하이데거의 저작 『숲길』 역시 이러한 스탠스 아래 쓰인 걸작으로, 그에 수록된 논문 《예술작품의 근원》과 이를 철학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헤르만Friedrich-Wilhelm von Herrmann이 낱낱이 독해한 해설서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이 이번 글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횔덜린의 송가』와 비슷한 시기에 하이데거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를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니체』 Ⅰ권의 첫 장 《예술로서의 힘에의 의지》를 살펴볼 것이다. 뒤이어 시적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고찰한 강의를 정리한 『언어로의 도상에서』를 통해, 예술을 통해 치열하게 존재를 파악하려 한 하이데거의 의지를 더듬어 볼 것이다.



(1) 예술로서의 힘에의 의지



① ‘힘에의 의지’의 배경



<철학자들이 나타나는 것은 큰 위험의 시대 ─ 차바퀴가 갈수록 빠르게 회전하는 시대다. 그때 소멸해가는 신화를 대신해서 철학과 예술이 들어선다. 그러나 그들은 훨씬 앞에 내던져진다. 왜냐하면 동시대인들은 그들에게 매우 서서히 주목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위험을 감지하게 되는 민족이 천재를 낳는다.> - 『니체 전집』 제10권 p.112 中


‘힘에의 의지’는 모든 존재자의 근본성격을 형성하는 것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모든 존재자의 근본성격을 가리키는 명칭으로서 ‘힘에의 의지’라는 말은 존재자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하나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 물음은 옛날부터 철학이 일관되게 던져온 물음이다.

개관에서 언급했듯 하이데거의 평생의 물음은 ‘존재의 본질’이었다. 존재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서의 근본물음Grundfrage은 그 자체로서는 철학사에서 전개되지 않았다. 니체조차도 주도물음 내에 머물러 있다. 니체가 서양 사상의 주도물음을 어떠한 근본 입장으로부터 전개하고 있고 그것에 답하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밝히는 것을 우리의 목표로 한다.

하이데거 이전까지 오래 전부터 독일 철학 강단에서는 니체는 엄밀한 사상가가 아니고 ‘시인 철학자’라고 말해져 왔다. 이러한 풍설에 따르면 니체는 그저 추상적인 사태들, 즉 생으로부터 유리遊離된 그림자 같은 사태들만을 사유하는 철학자들에 속할 따름이다. ‘추상적인 사유를 마침내 일소한 생의 철학자’로서 니체를 환영하는 사람들에겐 편한 해석이지만 이런 통념은 그릇된 것이다.

니체는 추상적인 사유를 두고 축제이자 도취라 표현한다.(『니체 전집』 제14권 p.24) 그리고 그 축제의 본질은 모든 존재자에 대한 그의 근본 견해, 즉 힘에의 의지로부터만 사유할 수 있다.


<축제 속에는 긍지, 교만, 방자, 모든 종류의 진지함과 고지식함에 대한 조소, 동물적인 충만함과 완전성에서 발하는 자신에 대한 신神적인 긍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상태들은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교가 솔직하게 긍정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축제란 진정으로 이교적인 것이다.> - 『힘에의 의지』 916번


니체에 따르면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곳으로부터 규정될 수 있는 진정한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교적인 철학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교적인 것’이라는 것도 그리스도교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여전히 그리스도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의 사상가들과 시인들을 ‘이교도’라고 지칭해선 안 된다.


1889년에 광증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니체는 하나의 사상가로서 존재자 전체 내에서의 자신의 근본 입장을 발견하며 이와 함께 자신의 사색을 규정하는 근원을 발견하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학』 등 작품 자체로서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방대한 저작으로 이를 완숙시켜 갔다. 제정신이던 마지막 해인 1888년에 초조해진 그는 그 자신이 말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토로하며 세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고지하고 다른 사람들과 자신이 혼동되는 것에 대해 명확한 선을 긋기 위해 『우상의 황혼』, 『이 사람을 보라』, 『반그리스도』 등 작은 저술들을 내놓는다.

니체의 본래의 철학, 이러한 저술들과 그 자신에 의해서 발표된 모든 저술들에서 표명되고 있는 근본 입장은 1879년부터 1889년에 이르는 10년간에도, 또한 그것에 앞서는 여러 해 동안에도 결정적인 형태로 완성되지 않았으며 저작으로서 출간되지도 않았다.

니체가 죽은 지 1년 후인 1901년에 주저를 위한 니체 초고들의 최초 편집이 출간되었다. 이 편집의 기초가 된 것은 1887년 3월 17일에 쓰인 니체의 계획이며, 더 나아가 니체 자신이 이미 개별적인 단편들을 유형별로 정리한 목록이 이용되었다. 초판과 그 이후의 판에서는 손으로 쓰인 유고에서 선택된 개별적인 단편들에 일련번호가 부여되어 있다. 『힘에의 의지』의 초판은 483개의 단편을 포함했다.


“힘에의 의지”라는 표현은 존재자의 근본성격을 명명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존재하는 한 힘에의 의지이다. 그와 함께 존재자로서의 존재자가 어떠한 성격을 갖는지가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로고스의 끝을 본 사람이 다다르는 결정적인 물음은 ‘존재자의 존재의 성격’이 아니라 ‘존재 자체는 무엇인가’ 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각인하는 것 ─ 이것이 힘에의 의지의 극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생성은 그것이 존재로서의 존재에 근거지어질 경우에만 진정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회귀한다는 것은 생성의 세계가 존재의 세계에 극한에 이르기까지 접근하는 것이다 ─ 이것이 고찰의 정점이다.”(『힘에의 의지』 617번)

니체는 영원회귀설을 통해 서양 철학 전체를 철저하게 지배하는 사상, 즉 은폐되어 있으면서도 서양 철학 전체를 본래적으로 추동하는 사상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그 사상을 사유하면서 자신의 형이상학과 함께 서양 철학의 시원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보다 명확히 말하면, 니체는 서양 철학이 자신의 역사 속에서 통상적으로 해석해왔던 시원으로 되돌아가고 있으며, 그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을 근원적으로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통상적인 해석에 동참하고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니체가 자신을 혹사시킨 중심에 대한 물음은 (자각하지도 명시하지도 않았지만)철학의 자기 정초라는 물음이었다. 이 물음은 다음과 같은 사태, 즉 철학이 무엇이며 그것이 그때그때마다 어떻게 존재하는가는 오직 철학 자체로부터만 규정되는 것이지만 이러한 자기 규정은 그것이 먼저 자신을 정초하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저 사태와 관련되어 있다. 철학의 고유한 본질은 항상 자기 자신에게 향하며 어떤 철학이 근원적인 것일수록 그것은 그만큼 순수하게 이러한 전회轉回Kehre에서 자기 자신을 둘러싸고 요동하며, 그리고 이러한 원환의 범위도 무의 변경에까지 이를 정도로 멀리 나아가는 것이다.

존재, 즉 힘에의 의지를 영원회귀로서 사유하는 것, 즉 최대의 무게를 가진 철학사상을 사유하는 것은 존재를 시간으로서 사유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 사상을 사유했지만 그것을 아직 존재와 시간의 물음으로서 사유하지는 않았다. 하이데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이 존재와 시간의 물음을 두고 그토록 오랜 기간 (중간에 1부 3편 이후를 편집하는 저술상의 번복까지 감행하며)집필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니체의 메모들을 책으로 편집한 판본(『힘에의 의지』)은 니체 자신에 의해 기획되고 날짜까지 적힌 계획(1887년 3월 17일)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모든 가치 전도를 위한 시도


제1권 유럽의 니힐리즘

제2권 최고 가치들에 대한 비판

제3권 새로운 가치 정립의 원리

제4권 사육과 육성


니체는 ‘예술로서의 힘에의 의지’에 대한 물음을 셋째 권에서부터 착수하며 국한시킨다. 새로운 가치 정립이란 다시 말해 존재자의 존재물음에 대한 최고 가치의 정립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오래되고 낡아버린 가치에 대해 미래에 규정적인 의의를 갖게 된다.

종교, 도덕 그리고 철학은 최고 가치들을 정립하고 관철하는 근본 방식들이며, 오직 이 때문에만 그것들은 간접적으로 그 자체가 ‘최고 가치들’로서 간주되고 정립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최고 가치들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그 가치들을 참되지 못한 것들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가치들의 근원을, 그러한 가치들을 통해 부정되어야 하는 바로 그것을 긍정해야만 하는 정립들로부터 해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앞서 니체는 서양 역사의 근본 사실인 니힐리즘을 고발한다. 니체에게 니힐리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출현하는 하나의 세계관이 아니라, 서양 역사의 생기生起가 갖는 근본성격이다. 니힐리즘이 교설이나 요구로서 주장되지 않고 오히려 겉보기에는 그 반대가 주장되는 곳에서도, 아니 바로 그곳에서 니힐리즘은 작동한다. 니힐리즘이란 최고 가치들이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교에서, 고대 말기 이후의 도덕에서, 플라톤 이후의 철학에서 척도를 부여하는 현실과 법칙으로 간주되어왔던 것이 구속력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구속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니체에게는 항상 그것이 자신의 창조력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에게 니힐리즘은 단순히 그의 당대의 사실이 아니라, 그리스도 이전부터 자신의 사후 시대까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에게 니힐리즘은 결코 붕괴, 가치상실, 파괴만은 아니고, 장기간에 걸쳐서 일정한 창조적인 상승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필요로 하고 촉진하는 역사적 운동의 어떤 근본유형이다. 새로운 가치 정립은 필연적으로 종래의 가치 정립들을 비판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동시에 필연적으로 모든 가치들의 전도란 성격을 갖는다. 어떠한 역사적 운동도 역사에서부터 뛰쳐나와서 단적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그 운동이 근원 영역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한, 그것은 이제까지의 것을 근원에서부터 극복할수록 더욱더 역사적인 것이 되며 더욱더 근원적으로 역사를 근거 짓는다.


니체는 전도에 의해 새로운 가치질서가 생겨난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그는 그것을 통해 하나의 질서가 ‘저절로’ 생겨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지금까지의 가치들의 폭정이 분쇄되고 우리가 ‘참된 세계’를 철폐한다면, 가치의 새로운 질서가 저절로 틀림없이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힘에의 의지』 461번)

명제는 단순한 명제로서는 결코 원리가 될 수 없다. 새로운 가치 정립의 원리는 그 가치 정립을 지금까지의 것에 대해서 새로운 것으로 만드는 근거다. 그러한 가치 정립은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즉 가치로서 정립되는 것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가치들이 정립되는 방식이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니체가 원했던 것은 가치들이 정립되는 방식을 새롭게 정초하는 것, 즉 그 방식을 위해 새로운 근거를 놓는 일이었다.

새로운 가치 정립의 원리는 오직 힘에의 의지일 수밖에 없다. 힘에의 의지는 모든 존재자의 근본성격을 가리킨다. 그것은 존재자에서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형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본래적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것, 따라서 생성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확정되려면 그전에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존재를 형성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진리가 획득되어야만 한다.

‘무엇’이란 가치 정립이 생겨나고 뿌리를 두고 있어야만 하는 근거이다. 생 자체가 힘에의 의지라면, 생 자체가 근거, 즉 가치 정립의 원리다. 그러면 당위가 존재를 규정하지 않고, 오히려 존재가 당위를 규정한다. “우리가 가치들을 정립할 경우, 생 자체가 우리를 통해 평가한다.”(『니체 전집』 제8권 p.89) 새로운 가치 정립의 원리를 분명히 드러낸다는 것은 따라서 우선 힘에의 의지를 존재자의 근본성격으로서 존재자의 모든 영역들과 범위들에 걸쳐서 증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상기한 『힘에의 의지』 제3권 중 제4장 《예술로서의 힘에의 의지》에서 3권 전체에 대한 해석을 시작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우선 니체가 예술의 본질을 어떻게 보고 또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라고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은 이미 제4장의 제목이 알려주듯 힘에의 의지의 한 형태다. 예술이 힘에의 의지의 한 형태라면, 그리고 예술이 존재 전체에서 우리에게 탁월한 방식으로 접근될 수 있는 것이라면, 힘에의 의지란 무엇인가는 무엇보다도 예술에 대한 니체의 견해로부터 가장 잘 파악될 수 있다.



② ‘힘에의 의지’의 규정



‘힘에의 의지’라는 니체의 표현은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의미의 의지는 본래 힘에의 의지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힘에의 의지’는, 의지가 통상적으로 일종의 욕망이지만 행복과 쾌락이 아닌 힘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니체는 행복 혹은 쾌락 혹은 의지의 포기 대신 힘을 의지의 목표로 봄으로써, 그는 의지의 목표뿐 아니라 의지의 본질 규정 자체를 바꾸고 있다.

니체적인 의지 개념이 갖는 의미에 엄격히 입각해서 보면, 힘이 우선은 의지 밖에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힘이 목표로서 의지 앞에 놓여 있는 것일 수는 없다. 의지는 자신을 초월하여 주인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향한 각오다. 의지는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의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지는 자신에게 힘을 부여하여 힘을 획득하게 하는 힘Mächtigkeit, die sich zur Macht ermächtigt이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는 근원적인 정동-형식이며 다른 모든 정동들은 그것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힘에의 의지』 688번)고 말하고 있다. 이는 힘에의 의지의 본질을 특징짓는 것을 정동, 정열, 감정으로서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부터 드러내라는 과제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단 하이데거는 여기서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하려면 심리학적 설명들을 개선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며 인간 현존재가 근거하고 있는 근본 방식들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먼저 통찰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원칙적으로 다음 한 가지를 고려해야만 한다. 즉 어떠한 과학의 성과도 우리는 직접적으로 철학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니체 Ⅰ』(M.Heidegger 著, 박찬국 譯) p.61 中


의욕함이라는 것은 ‘자신을 넘어서’ 의욕하는 것이라고 니체는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정동이 갖는 ‘자신을 넘어서 나가 있음’이란 계기를 염두에 두면서 힘에의 의지는 근원적인 정동-형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니체는 의지의 본질을 서술하기 위해 정동이 갖는 또 하나의 계기도 끌어들이려 한다. 그것은 정동에서 보이는 저 습격하고 우리를 덮쳐온다는 계기다. 이는 의지 자체가 ─ 인간의 본질과의 관계에서 볼 때 ─ 단적으로 습격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러한 습격으로 인해서 우리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자신을 넘어서 나가 있다는 것과 항상 그렇게 넘어서 나가 있다는 것이 가능해진다.

의지 자체는 의욕될 수 없다. 우리는 우선 의지를 우리 자신에게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의지를 가지려고 결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저 결의가 의욕함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는 이러저러한 것을 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말할 경우, 여기에서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은 의지 안에 본래적으로 서 있음, 자신의 전체적인 존재를 장악하고 있으면서 그것의 주인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가능성은 우리가 의지하지 않을 경우에조차도 항상 의지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모든 의욕함에는 첫째로, 다수의 감정들, 즉 어떤 것을 멀리하는 상태의 감정, 어떤 것으로 향하는 상태의 감정, 이렇게 ‘어떤 것으로부터 등 돌리면서 어떤 것으로 향하는’ 감정, 또한 ‘손발’을 움직이지 않고서도 우리가 ‘의욕하자마자’ 일종의 습관을 통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근육의 느낌이 존재한다. 이러한 근육의 느낌은 위에서 말한 감정에 수반된다.> - 『선악의 저편』(제7권 28쪽 이하)


니체가 어떤 때는 정동으로서, 어떤 때는 정열로서, 어떤 때는 감정으로서 지칭하고 있다는 것은 ‘의지’라는 하나의 거친 단어의 배후에서 보다 통일적이고, 보다 근원적이며, 동시에 보다 풍부한 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가 의지를 정동이라고 부를 경우에 그것은 양자를 단순히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정동이 갖는 특성에 주목하면서 의지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사실은 정열과 감정이라는 개념들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우리는 더 나아가 사태를 역전시켜야만 한다. 사람들이 보통 정동과 정열 그리고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니체가 보기에 그것의 본질 근거에서는 힘에의 의지다. 따라서 그는 ‘기쁨’(이것은 보통 하나의 정동으로 간주되지만)을 ‘자신이 보다 강해졌다고 느끼는 것’, 자신을 초월하여 나가 있고 그렇게 나가 있을 수 있다는 감정으로서 파악한다.


<자신이 보다 강해졌다고 느끼는 것 ─ 또는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기쁨 ─ 은 비교하는 것을 항상 전제한다(그러나 이러한 비교는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가 아니라 성장하는 과정 중에 있는 자기 자신과의 비교다). 그리고 이러한 비교는 자신이 어느 정도로 비교하고 있는지를 우선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 『힘에의 의지』 917번


힘에의 의지로서의 의지에는 본질적으로 상승과 고양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오직 끊임없는 고양을 통해서만 높이 존재하는 것은 높이 그리고 위에 자신을 보지保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 강력한 고양을 통해서만 가라앉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제까지의 높이를 단순히 보지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제까지의 높이를 단순히 보지하는 것만으로는 결국에는 한갓 힘의 쇠진이 초래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의욕하는 것, 살아 있는 유기체의 어떠한 가장 작은 부분이라도 의욕하는 것은 힘의 증가다.> - 『힘에의 의지』 702번


생은 자기 보존의 충동일 뿐만 아니라 자기 주장이다. 이는 위에 머물려고 의욕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본질로, 근원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자기 주장은 근원적인 본질의 주장이다.

힘에의 의지는 결코 어떤 개별적인 것, 어떤 현실적인 것의 의지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자의 존재와 본질에 관계하는 것이며 존재와 본질 자체다. 따라서 우리는 힘에의 의지는 항상 본질의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



③ 니체 미학 ─ 예술의 생리학 ─ 과 ‘도취’



하이데거는 『힘에의 의지』 제3권 ‘새로운 가치 정립의 원리’를 마지막 장인 제4장 《예술로서의 힘에의 의지》에서 시작한다. 우선 니체가 예술을 무엇으로 파악하고 그가 그것에 대한 물음을 어떻게 제기하는지를 주요한 특징에서 분명히 하는 것에 의해 왜 힘에의 의지의 핵심에 대한 해석이 굳이 여기에서, 즉 예술에서 시작해야만 하는지가 동시에 분명하게 된다.

힘에의 의지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즉 그것의 진리에서 규정할 경우, 존재자를 힘에의 의지로서 해석하는 것과 관련하여 진리에 대한 물음, 즉 진리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끊임없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니체가 모든 생기를 힘에의 의지로서 총체적으로 해석하는 과제 내에서 예술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할 경우, 진리에 대한 물음은 바로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예술과 진리의 본질적인 관계와 관련해 『힘에의 의지』에서의 니체의 구절에서 하이데거는 다섯 가지 명제를 발견한다.


1) 예술은 힘에의 의지의 가장 투명하면서도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형태다.

2) 예술은 예술가로부터 파악되어야만 한다.

3) 예술가에 대한 확장된 개념에 따르면 예술은 모든 존재자의 근본생기다. 존재자는 그것이 존재하는 한,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며 창조된 것이다.

4) 예술은 니힐리즘에 대한 탁월한 대항운동이다.

5) 예술은 ‘진리’보다도 가치가 있다.


니체는 “우리는 예술을 생의 가장 큰 자극제로 본다.”(『힘에의 의지』 808번)고 말했다. 이는 위의 다섯 명제에 동열로 병치될 수 있는 명제가 아니다. 그것은 예술에 대한 니체의 근본 명제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된 다섯 가지의 명제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다.


니체는 예술과 그것의 본질을 특징지음으로써 힘에의 의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예술에 대한 니체의 물음은 극단으로까지 추구된 미학, 말하자면 자신을 전도하는 미학이 된다. 예술이 그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산출하기 때문에, 즉 예술이 ‘아름다운’ 예술인 한, 예술에 대한 성찰은 미학이 된다.

예술은 힘에의 의지의 한 형태로서, 즉 존재 일반의 한 형태로서, 더 나아가 탁월한 형태로서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예술에 대한 성찰의 근본 양식이자 예술에 대한 지식의 근본 양식으로서의 미학에 대한 물음은 근본적으로만 취급될 수 있다. 미학의 본질에 대한 그러한 종류의 고찰의 도움을 빌려서 비로소 우리는 예술의 본질에 대한 니체의 해석을 파악하고 그것과 동시에 예술에 대한 입장을 파악할 수 있다.


헤겔이 예술에 대해 말했던 것 ─ 예술은 절대자를 표준적으로 형상화하고 수호하는 것으로서의 힘을 상실했다는 사실 ─ 을 니체는 ‘최고 가치들’, 즉 종교, 도덕, 철학과 관련해서 인식했다. 즉 그것들에는 인간의 역사적 현존재를 존재자 전체 위에 근거짓는 창조력과 구속력이 사라졌으며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에게는 종교, 도덕, 철학과 달리 예술이 니힐리즘에 떨어지고 과거의 것이 되어 비현실적이 되었던 반면, 니체는 예술에서 니힐리즘에 대한 대항운동을 구하고 있다. 이 점에서, 디오니소스적인 단순한 고양과 그것 안에서의 부유浮遊를 추구했던 바그너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통제와 형성을 추구한 니체가 본질적으로 등 돌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합 예술작품’을 구현하려는 바그너의 의지가 니체에게 일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보인다. 헤겔에게는 예술이 과거의 것으로서 최고의 사변적인 인식 대상이 되고 헤겔의 미학이 정신의 형이상학으로 나타났던 반면, 예술에 대한 니체의 성찰은 ‘예술의 생리학’이 되었다.

니체에 따르면 한편으로 예술은 니힐리즘에 대한 대항운동, 즉 새로운 최고 가치들을 정립하는 것이어야 하고 역사적-정신적 현존재의 척도와 법칙을 준비하고 정초해야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예술은 생리학에 의해 그리고 생리학의 방법에 의해서 본래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서로 전적으로 배치되는 것을 함께 사유하여 니체의 예술관을 통일적으로 파악해야만, 그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통해 힘에의 의지 자체를 그것의 본질에서 파악하고 이와 함께 존재자 전체를 그것의 근본 성격을 고려하면서 파악하게 된다.

‘미학은 생리학이어야 한다.’는 니체의 주장이 함축하는 것은 순수하게 심적인 상태로 간주되는 감정 상태는 그것들에 속하는 신체 상태로 소급하여 구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꾸로 신체 상태는 그 자체로 이미 항상 심적인 어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심리학’의 사태이기도 하다.

예술 ─ 즉 예술가 ─ 의 생리학으로서의 미학의 근본 문제는 무엇보다도 예술적인 행위와 관조가 말하자면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연 형태를 취하면서 수행되는 저 상태들을 특히 인간의 신체적이고 심적인, 즉 살아 있는 자연의 본질 안에서 보여주는 것을 목표해야만 한다.


<예술가의 심리학에 대해서 ─ 예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이든 미학적 행위와 관조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생리학적 전제 조건, 즉 도취가 필수적이다.> - 『우상의 황혼』 제8권 122쪽 이하


미학적 근본 상태는 도취이며, 이것은 또한 여러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조건 지어지고 촉발되고 촉진될 수 있다. 니체는 도취와 관련해서 우선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첫 번째는 힘의 고양의 감정이며 두 번째는 충만의 감정이다. 이러한 힘의 고양은 자기초월의 능력이며 존재자에 대한 관계인데, 이러한 관계에서는 존재자 자체가 보다 존재적이 되고seiender, 보다 풍요로우며, 보다 투명하고, 보다 본질적으로 경험된다. 충만이란 감정은 내적인 사건들이 점증적으로 축적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기분, 즉 아무것도 낯설고 번거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모든 것에 열려 있고 모든 것을 향해 도약하고 있는 기분을 의미한다.

이윽고 도취 감정에 포함되어 있는 세 번째의 것에 마주치는데, 그것은 행위와 직관, 수용과 요구, 전달과 자기 해방이라는 모든 능력들이 전체적으로 고양되면서 상호 침투한다는 계기다.


<서로 무관한 채로 존재할 근거를 갖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들은 궁극적으로 이와 같은 형태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종교적 도취감과 성적 흥분(─함께 나란히 언급되는 것조차도 의아스럽게 여겨지는 두 개의 깊은 감정……).> - 『힘에의 의지』 800번


니체가 ‘도취’라는 말로 가리키면서 마지막으로 출간된 그의 저서에서 또한 통일적으로 미학적 근본 상태로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일찍부터 두 개의 상태로 나뉘어 파악되었다. 여기에서 그가 보통 사용하고 있는 ‘도취’라는 말을 피하기 위해 초기 니체가 사용하는 말을 원용해서 말한다면, 예술적 상태의 자연 형태는 꿈과 황홀이다. 왜냐하면 도취라는 예술적 상태란, 꿈과 황홀이 거기에서 비로소 자신들의 예술 창조적인 본질에 도달하고 니체가 ‘아폴론적인 것’ 그리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 부르는 예술적 상태들이 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니체에게는 두 가지의 ‘자연적인 예술력Natur-Kunst-gewalten’이다. 양자의 길항 관계에 예술의 모든 진전Fortentwicklung은 근거하고 있다. 양자를 하나의 통일적인 형태로 융합함으로써 최고의 그리스 예술작품인 비극이 탄생한다.

도취는 감정이고 신체적인 기분이다. 신체적 생은 기분 가운데 포함되어 있으며 기분은 신체적인 생 안으로 긴밀히 얽혀 들어가 있다. 그러나 기분은 현존재를 상승하는 현존재로서 개시하고, 현존재를 그것의 충만한 능력들에서 확대하며, 이러한 능력들은 서로를 자극하며 상승시킨다. 그러나 도취를 감정 상태로서 분명히 드러낼 때 특별히 강조되어야 할 것은, 그러한 감정 상태를 신체 ‘안에’ 그리고 영혼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서 취급해서는 안 되고 존재자 전체에 대한 신체적이고 기분적 존립의 한 방식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④ 예술에 대한 니체의 근본 입장



아름다운 것의 본질을 해명함으로써 미학적 상태의 본질도 보다 분명하게 된 이상, 우리는 미학적 상태의 영역을 보다 정확하게 측량하려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이제 미학적 상태에서 수행될 수 있는 근본적인 태도 방식들 ─ 미적 행위와 미적 직관, 혹은 예술가의 창조 활동과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향수享受 ─ 를 고찰하려 한다.

창조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 우리는 이제까지의 논의에 기초하여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그것은 도취 상태에서 아름다운 것을 작품 안에 산출하는 것이다. 작품은 단지 창조에서만 그리고 창조를 통해서만 실현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창조의 본질은 작품의 본질에 의존하며, 따라서 오직 작품의 존재로부터만 파악될 수 있다. 창조는 작품을 창조한다. 그러나 작품의 본질은 창조의 본질의 근원이다.

니체가 작품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우리가 물을 경우, 우리는 아무런 답도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술에 대한 니체의 성찰은 ─ 그것은 바로 가장 극단적인 미학이기에 ─ 작품 자체에 대해서 묻지 않고 있으며, 어떻든 제일 우선적으로 묻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우리가 산출이라는 창조의 본질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 말도 듣지 못하고 본질적인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오히려 창조에 대해서도 항상 도취에 의해 조건지어진 생의 수행으로서만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따르면, 창조 상태란 ‘하나의 폭발적인 상태’(『힘에의 의지』 811번)이다.

창조 과정은 도취와 아름다움의 본질인 자기 자신을 넘어서 상승하는 것에 대한 상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나야만 한다. 그것이 드러나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간주하는 것에 상응하는 것에 도달할 수 있다. “예술가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아서는 안 되고 보다 충만하고 보다 단순하며 보다 강하게 보아야 한다.”(『힘에의 의지』 800번) 창조에서 보다 충만하고 보다 단순하며 보다 강하게 보는 것을 니체는 ‘이상화Idealisieren’라고도 부르고 있다.

창조란 주요 특성들을 보다 단순하면서도 보다 강하게 부각하는 것이며, 최고의 법 앞에서 견뎌내는 것이고, 그것의 제어이며, 그 때문에 이러한 위험에 견뎌내는 최고의 환희다. 니체는 감상하고 향수하는 사람들의 미학적 상태를 창조하는 사람들의 미학적 상태와 상응하게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예술작품의 작용은 창조하는 자의 상태를 향수하는 자 안에 다시 일깨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의 감상은 창조의 추수행인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술작품의 작용은 예술을 창조하는 상태인 도취를 일으키는 것이다.> - 『힘에의 의지』 821번


도취는 그 자체로 주요 특징들, 즉 일정한 질서 구조와 연관되어 있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어떤 단순한 상태가 갖는 성격을 외관상으로는 일면적으로 고찰하는 것으로부터, 기분에 젖어 있는 상태에서 기분을 규정하는 그것으로 새롭게 향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의 주요 개념인 유정성Befindlichkeit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니체도 따르고 있는 미학의 관용적인 개념 언어를 빌리자면 ‘형식’이라고 부르게 된다.

니체는 형식과 작품에 대해서 말할 경우에조차도 어디까지나 예술가를 본위로 하여, 즉 항상 우선적으로 예술가로 소급하여 그리고 예술가로부터 출발하여 통찰하지만, 예술가의 근본적인 자세는 “형식이 될 줄 모르는 사물에는 어떠한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다.”(『힘에의 의지』 817번)는 것이다.

‘형식이 된다’는 것을 니체는 이 부분의 삽입구 안에서 ‘자신을 포기한다’ ‘자신을 공개한다’는 말로 해설하고 있다. 이것은 형식의 본질에 대한 규정으로서는 첫눈에 기이한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규정은 ─ 니체는 여기에서도 그리고 다른 장소에서도 특별히 지적하고 있지는 않지만 ─ 그리스인들에서 형성된 근원적인 형식 개념에 일치하는 것이다.

예술가 ─ 여기에서 우리는 그것을 지금 미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 는 형식에 관계하지만, 무언가 다른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서의 형식에 관계하는 것은 아니다. 형식에 대해서 예술가가 갖는 관계는 형식 그 자체를 위하는, 형식에 대한 사랑이다. 따라서 니체는 동시대의 화가들과 관련해서 부정적인 의미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들 중의] 어느 누구도 단순히 화가인 자는 없다. 그들은 모두 고고학자, 심리학자이며, 어떤 기억 혹은 이론의 연출자다. 그들은 우리들의 박식, 우리들의 철학을 자랑한다. (…) 그들이 형식을 사랑하는 것은 형식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형식이 표현하고 있는 것을 위해서다. 그들은 박학하고 고민이 많으며 반성적인 세대의 자식들이다. 그들은 책을 읽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에만 전념했던 옛날의 거장들과는 1000마일이나 떨어져 있다.> - 『힘에의 의지』 828번


형식은 존재자의 상승하는 힘과 충만의 상태가 자신을 실현하는 영역을 비로소 규정하고 한정한다. 형식은 도취 자체가 가능하게 되는 영역을 정초한다. 형식이 최고로 단순하면서도 가장 풍부한 단순성으로서 주재하는 곳에 도취가 존재한다. 그리고 니체에게 도취는 형식의 최고의 승리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모든 비예술가들이 ‘형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내용으로서, 즉 ‘사태 자체’로서 느끼지 않으면 예술가가 될 수 없다. 이와 함께 사람들은 물론 전도된 세계에 속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제 사람들에게는 내용이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생을 포함해서 말이다.> - 『힘에의 의지』 818번


‘사태 자체’란 표현에서 현상학적 통찰을 떠올렸는가? 물론 후설이 『논리 연구』를 출간하여 현상학을 확립한 1901년에 이미 니체는 차가운 땅 속에 묻혀 있었지만, 후설의 지향성 개념을 저 문단에 적용하더라도 두드러지는 위화감은 없을 것이다. 니체는 형식 법칙성을 논리적인 규정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시사하고 있으며, 이러한 환원은 사유와 존재에 대한 그의 설명과 연관되어 있다.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논리적인 법칙성과 관련되는 그러한 감정들을 ‘지반’으로 갖는다.(『니체 전집』 제14권 p.133) ‘논리적 감정’이라는 표현은 어떤 것에 대해서 감정을 갖는다는 것이 질서, 한계, 조망에 의해서 기분이 규정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미학적 가치 평가가 논리적 감정에 근거하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도덕적 가치 평가보다 근본적이다’. 니체의 결정적인 가치 정립은 ‘생’의 고양과 확보를 척도로 갖는다. 그런데 논리적 근본 감정, 즉 질서 있는 것, 한정된 것에서 유쾌하게 느끼는 것은 “모든 유기체가 자신들 상태의 위험성과 영양의 곤란함과 관련해서 유쾌하게 느끼게 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유쾌하게 만들며, 사람들이 쉽게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의 모습 등은 유쾌하게 만든다.”(『니체 전집』 제14권 p.133)


니체의 미학을 통해서 나아가는 우리의 이제까지의 도정은 예술에 대한 니체의 근본 입장으로부터 규정된다. 미학적 근본 상태인 도취로부터 출발하면서 우리는 아름다움으로 이행했고 그것으로부터 창조와 감상의 상태로 돌아갔으며, 이것으로부터 그것들이 자신들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관계하는 형식으로 이행했고, 형식으로부터 신체적인 생의 근본 조건인 질서 있는 것에 대한 쾌감으로 이행했다.

이와 함께 우리는 다시 출발 상태에 도달했다. 왜냐하면 생은 생의 고양이기 때문이며, 고양하는 생은 도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왕복 운동이 이루어지는 영역 자체, 즉 도취와 아름다움, 창조와 형식, 형식과 생이 그 안에서 그리고 전체로서 서로 연관되어 있는 전체는 우선 규정되어 있지 않은 채 있으며, 더군다나 도취와 아름다움, 창조와 형식 사이의 연관과 교섭의 방식은 규정되지 않은 채로 있다. 모든 것은 예술에 속한다. 그 경우 예술은 하나의 집합명사일 뿐이며, 자체 내에 근거 지어져 있고 한정된 어떤 현실을 가리키는 명료한 명칭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은 니체에게는 하나의 집합명사 이상이다. 예술은 힘에의 의지의 한 형태다. 이러한 의지에 주목할 경우에만 위에서 언급된 막연함은 극복될 수 있다. 힘에의 의지가 자체 내에서 근거가 주어지고 명료하게 밝혀지고 그것의 구조에서 밝혀지는 한에서만, 예술의 본질도 자체 내에서 근거가 주어지고 명료하게 밝혀지며 그것의 구조에서 밝혀진다. 힘에의 의지는 예술에 속하는 계기들의 공속성을 근원적으로 근거 지어야만 한다.



⑤ 예술과 진리의 관계, 플라톤주의와 대결한 니체



<예술과 진리의 관계에 대해서 나는 극히 일찍부터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성스러운 경악을 느끼면서 이러한 분열 앞에 서 있다.> - 『니체 전집』 제14권 p.368


니체에게 예술과 진리의 관계는 경악을 불러일으키는 분열의 관계다. 예술 자체가 어떠한 의미에서 진리와 관계를 맺게 되는지를 볼 수 있기 위해서는 그전에 니체가 ‘진리’라는 것으로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지금까지보다도 더 분명하게 밝혀야만 한다.

우리들이 부주의한 용법을 넘어서 ‘진리’라는 단어를 사용할 경우에 우리들이 움직이고 있는 영역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진리, 아름다움, 존재, 예술, 인식, 역사, 자유와 같은 근본 단어들을 분명하게 밝히려고 할 경우에 항상 우리는 다음 두 가지에 주의해야만 한다.

1) 이러한 단어들의 해명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은 그러한 단어들이 명명하는 것의 본질이 은폐되어 있다는 데에 그 근거가 있다. 인식이 근본 단어들이 명명하는 것의 본질과 가까이에 있는지 아니면 그것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지에 따라서 그러한 단어가 명명하는 내용과 영역도 변하며 그것이 갖는 명명하는 힘의 구속성도 다르게 된다. 근본 단어는 다소간의 명료함과 함께 우리들에게 하나의 주도적인 의미를 통해서 말을 걸어오는 것인데, 그러한 의미는 우리들이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다. 근본 단어들은 역사적이다. 비단 과거 각각의 시대에 상이한 의미들을 갖고 있었단 것만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지배적인 해석에 따라서 지금 그리고 미래에 역사를 근거 짓는다는 것이다.

2) 각기 다른 시대의 다른 사람이 근본 단어를 명명할 경우 상이한 세계들이 지배하고 있다. 언어라는 것이 의사소통을 위한 기호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기호의 선택과 사용처럼 임의적이고 아무래도 좋은 것일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음성을 통한 의미전달로서 우리들을 근저로부터 우리들의 대지에 뿌리박게 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들의 세계 안에 진입시키고 구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와 그것의 역사적 힘에 대한 성찰은 어떠한 경우에도 현존재를 형성하는 행위 자체다. 이 때문에 언어의 근원성, 단어의 엄밀함, 절도에 대한 의지는 결코 미적인 유희가 아니고 역사적 현존재인 우리들의 현존재의 본질적 핵심과 관련된 일이다.


우리가 참된 것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물론 진리의 본질을 함께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참된 것을 염두에 두면서 자신 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려고 할 때에도 우리들은 진리의 본질을 이해해야만 한다. 본질 자체가 특별히 그리고 주요 대상으로 불리지 않고 항상 단지 함께 그리고 미리 불리는 것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을 가리키는 ‘진리’라는 단어는 참된 것 자체에 대해서 사용된다. 본질을 가리키는 명칭은 그러한 본질을 갖는 것을 가리키는 명칭이 된다. 이러한 과정은 우리가 대개는 존재자의 본질 자체에 의해서보다는 존재자 자체에 의해서 규정되기 때문에 조장된다. 따라서 근본 단어들을 사유하는 방식은 본질을 향하는 궤도와 본질에 등을 돌리지만 그것에 재귀적으로 관계하는 궤도라는 두 개의 주요 궤도에서 움직인다.

그렇다면 예술과 진리의 관계를 논구하는 것과 관련해서 ‘진리’라는 말이 니체에서는 어떠한 의미 궤도 위에서 움직이는가? 답은 ‘본질에 등 돌린 궤도 위에서’이다. 이는, 경악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원칙적인 물음을 물으면서 니체는 참된 것의 본질을 논구한다는 의미에서 진리를 본래적으로 묻는 것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본질은 자명한 것으로 전제되고 있다. 진리는 니체에게는 참된 것의 본질이 아니라 진리의 본질을 충족하는 참된 것 자체다.

니체가 본래적인 진리물음, 참된 것의 본질과 본질의 진리에 대한 물음, 그리고 그와 함께 진리의 본질 변화의 필연적인 가능성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지 않으며 이러한 물음의 영역을 따라서 결코 전개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을 아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많은 사상가들이 진리의 개념을 구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데카르트는 진리를 확실성으로 이해하고, 칸트는 이러한 해석에 상당히 의존하면서 경험적인 진리와 초월론적인 진리를 구별하고 있으며, 헤겔이 추상적 진리와 구체적 진리, 즉 과학적 진리와 사변적 진리라는 중대한 구별을 새롭게 규정하고 있고, 니체는 ‘진리’가 오류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은 사상적 물음의 본질적 약진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 진리의 본질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니체가 데카르트로부터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고 데카르트로부터의 이러한 거리를 아무리 역설해도 니체는 본질적인 점에서 데카르트에게 너무나 가까이 있다. 하지만 ‘진리’라는 말의 용법을 무리하게 한정해 엄격하게 이 말의 의미 궤도를 지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현학적인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근본적 단어인 동시에 또한 일반적 용어이며 따라서 별로 엄격한 의미로 사용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참된 것이란 무엇인가? 여기에서 진리의 본질을 충족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이러한 본질 자체는 어떤 점에서 규정되고 있는가? 참된 것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진실로in Wahrheit 현실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진실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답변 : 진실로 인식된 것이다. 왜냐하면 원래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는 것은 인식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인식의 진리다. 인식이야말로 진리의 고향이기 때문에 참되지 않은 인식은 인식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러나 인식은 존재자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참된 것은 참으로 인식된 것, 현실적인 것이다. 인식에서 그리고 인식을 통해서 그리고 인식에게는 오직 참된 것만이 참된 것으로서 확정된다. 진리는 인식의 영역에 속한다. 여기에서 참된 것과 참되지 않은 것이 결정된다. 인식의 본질이 어떻게 한정되느냐에 따라서 진리의 본질 개념이 규정된다.> - 『니체 Ⅰ』(M.Heidegger 著, 박찬국 譯) p.175 中


‘진리’라는 말은 니체에게는 참된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진실로 인식된 것을 의미한다. 인식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현실적인 것에 대한 이론적-과학적 파악이다. 진리의 본질에 대한 니체의 견해는 서양 사유의 위대한 전승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예술은 니체적 의미에서는 예술가로부터 파악되어 일종의 창조로 간주되며, 이러한 창조는 아름다움에 연관된다. 그에 상응하여 진리는 인식이 관계하는 대상이다. 따라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예술과 진리 사이의 경악을 불러일으키는 관계이지만, 이것은 예술과 과학적 인식의 관계, 내지 아름다움과 진리의 관계로서 파악되어야만 한다.

니체의 진리 개념을 보다 정확하게 특징짓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인식을 어떤 의미에서 파악하고 있으며 인식에 대해서 무엇을 척도로 설정하고 있는지를 물어야만 한다. 니체의 인식관은 인식 해석의 두 가지 방향인 플라톤주의와 실증주의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니체는 일찍이 그의 최초의 저서 『비극의 탄생』을 준비하면서 쓴 짧은 메모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철학은 전도된 플라톤주의다. 참되게 존재하는 것에서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보다 순수하고 보다 아름다우며 보다 선하다. 가상 내에서의 삶이 목표다.> - 『니체 전집』 제9권 p.190


니체는 창작이 가능하던 자신의 마지막 수년 동안 플라톤주의의 전도를 위해서 전력을 쏟았다. 플라톤주의에게는 참된 것,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초감성적인 것, 이데아다. 이에 반해서 감성적인 것은 메 온μη ογ이다. 그것은 단적인 비존재자, 즉 우 온ου ογ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메 온 ─ 즉 단적으로 무는 아니지만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감성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말해도 되는 한, 감성적인 것은 초감성적인 것을 기준으로 측정되어야만 한다.

플라톤주의를 전도시켰다는 것은 척도 관계를 역전시킨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플라톤주의에서 하위에 있고 초감성적인 것을 기준으로 측정되어야 했던 것이 상위를 차지해야 하며, 초감성적인 것이 그것에 봉사해야만 한다. 이렇게 역전이 수행됨으로써 감성적인 것이 본래 존재하는 것, 즉 참된 것, 진리가 된다. 참된 것은 감성적인 것이다. 이것은 실증주의가 주장하는 바다. 물론 그렇다고 니체의 인식관-진리관을 실증주의적이라 간주하는 것은 성급하지만 말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존재에 대한 통찰은 항상 거듭해서 획득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이러한 통찰의 회복과 부단한 혁신 그리고 보존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된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존재를 광휘 속에서 나타나게 하고 아름다운 것으로서 그 자체가 가장 매력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을 동시에 자기 자신을 통과하면서 자기 자신을 넘어서 존재 자체에게로 향하게 한다.

아름다움과 진리의 관계에 대한 플라톤의 주요 명제는 다음과 같다. 즉 인간의 본질에는 존재에 대한 통찰이 속하며, 그것에 의해서 인간은 존재자와 관계하고 그에게 외관상 존재하는 것으로서 나타나는 것에 관계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이 처음으로 도입되었던 곳에서 플라톤은 인간이란 형태의 근본 조건은 “원래부터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통찰한다”는 것에 있다고 말하지 않고, “그 전에 영혼이 존재자의 비은폐성을, 즉 존재자를 그 비은폐성에서 통찰하지 않았다면 영혼은 이러한 형태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진리는 존재를 개현하고 아름다움은 존재의 개시성인 진리로 초탈한다, 진리와 아름다움은 그것들의 본질에서 동일한 것, 즉 존재에 관계하며 그것들은 존재를 개시된 채로 보지하고 개시한다는 결정적인 것에서 공속한다. 그러나 양자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곳에서 양자는 인간에게는 분리되고 분열될 수밖에 없다. 존재는 플라톤에게 비감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존재의 개시성, 진리는 또한 오직 비감성적 광휘das nichtsinnliche Leuchten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존재는 존재에 대한 통찰에서 자신을 개시하고 존재에 대한 이러한 통찰은 항상 존재 망각으로부터 끄집어내어져야만 하고 이를 위해서는 가장 가까이서 빛나는 외관das nächste Scheinen des Anscheins이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의 개시는 진리로부터 평가될 때 비존재자가 현존하는 곳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이 비감성적인 것이 아름다움의 장소다.

플라톤주의는 아름다움과 진리의 분열을 회피할 수 있고 이러한 회피가 그 자체로서 드러나지 않도록 존재를 정립하는 방식으로 그러한 분열을 회피한다. 니체가 경악했던 건 이러한 플라톤주의가 전도된 곳에서 그것을 특징짓는 모든 것조차도 전도되어야 하며 은닉되고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예술과 진리는 관점적인 형상함의 방식들이다. 그러나 실재적인 것의 가치는 그것이 실재의 본질을 얼마나 충족시키는지, 그것이 나타남을 어떻게 수행하며 실재를 어떻게 고양시키는지에 따라 정해진다. 변용으로서 예술은 어떤 현상의 확정인 진리보다도 생을 더 고양시킨다.

전도된 플라톤주의로서 니체 철학에게 예술과 진리의 관계는 어떤 의미에선 하나의 분열일 수밖에 없다. 분열은 분열하는 것들이 공속의 통일로부터 그리고 이러한 통일을 통해서 서로 분리되어 나갈 수밖에 없는 곳에서만 존재한다. 실재적인 것이 실재적으로 존속할 수 있기 위해서 그것은 자신을 초월하여 자신을 변용해야만 하며 예술에 의해서 창조된 것의 빛남에서 자신을 고양시켜야 한다. 즉 그것은 진리에 대항하여 나아가야만 한다. 진리와 예술은 실재의 본질에 똑같이 근원적으로 속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서로 분리되며 대립하게 된다.

존재의 본질로부터 예술은 존재자의 근본 사건으로서, 즉 본래적으로 창조하는 것으로서 파악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파악된 예술은, ‘진리’는 어떻게 존재하고 예술과 진리는 서로 어떠한 관계를 갖는지가 평가될 수 있는 시야를 부여한다.



(2) 언어로의 도상에서 – 하이데거의 시詩에 대한 사유



① 하이데거의 언어의 본질



하이데거는 현대의 다른 분석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언어에 대한 성찰이 사유의 핵심적인 과제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어에 대한 탐구에서 그는 분석철학자들이 도출한 것과는 아주 다른 교훈을 도출했다. 분석철학자는 언어의 논리적인 구조를 연구함으로써 인간의 심적인 상태들과 태도들의 구조에 관해서 알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언어의 논리적인 구조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오히려 갖가지 언어들이 갖가지 세계-내-존재의 방식들을 확립하는 데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언어 이해의 주요한 특징은 언어에 대한 우리의 응답에, 이를테면 ‘우리가 말하기 이전에’ 언어가 우리 자신 및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형성하고 인도하는 방식에 주목할 때 드러난다.


<말하기는 우리가 말하는 언어Sprache에 대한 듣기다. (…) 우리는 단지 언어 자체만을 말하지 않고, 언어로부터aus 말한다. (…) 언어는 말한다. 언어는 무엇보다도 먼저 본디부터 말하기의 본재성das Wesende을, 즉 언명하기를 따른다. 언어는 언명함으로써, 즉 현시함으로써 말한다.> - 『언어로의 도상에서』 (M.Heidegger 著, 신상희 譯) p.123~124


말하기는 우리의 특정한 의향에 의해서 좌우될 수 없는 어떤 것에서, 이를테면 세계에 관해서 말할 수 있도록 그러한 방식으로 세계를 현시해주는 어떤 것에서 솟아 나오게 마련이다. “말하기는 우리가 말하는 언어에 대한 듣기다”라고 하이데거가 언급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현상이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듣고 있는 그것을 언어 본질Sprachwesen이라고 칭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언어의 본질은 사물들을 현시하는 ‘언명하기’에 있다. 즉 “언어는 언명함으로써, 즉 현시함으로써 말한다. (…) 언어는 현시자답게 현존하기의 모든 방역들에 다다라서 그때마다 현존하는 것을 이 방역들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도록 함으로써 말한다”라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본질Wesen이라는 낱말을 통상적인 방식에서처럼 명사로 쓰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동사로 바꾸어서 쓰고 있다는 말이다. ‘동사로 본 본질’은, 즉 본재本在한다wesen는 것은 ‘어떤 것을 그것의 본질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을 뜻한다. 한 사물의 본질은 그 사물의 편에서부터 우리를 습격하는 것이다. 본질은 우리가 그 사물 및 그것과 관련된 다른 사물들과 어떻게 적절하게 관계하는가를 규정한다.


<그것이 본재한다es west라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습격하며angeht 길을 내면서be-wëgt 우리에게 이르러서 우리와 관계하는be-langt 동안에 그것이 현존한다anwest는 것을 뜻한다. 본질Wesen은, 이렇게 생각해볼 때, 존속하는 것das Währende을, 모든 것을 향해서 길을 내기에 모든 것에 걸쳐서 우리를 습격하는 것을 지칭한다.> - 『언어로의 도상에서』 (M.Heidegger 著, 신상희 譯) p.190


전통 철학에서 한 사물의 본질은 그 사물을 그 사물답게 존재하도록 만드는 본질적인 속성이나 우리가 그 사물이 뭔지를 파악할 때의 개념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경우, 우리로 하여금 본질적인 속성이나 개념을 본질적인 것으로 인식하도록 이끄는 모든 것이 한 사물의 본질을 이룬다.

어떤 것이 본재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우리와 관계하’고, ‘모든 것에 걸쳐서 우리를 습격할’ 때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본질적인 속성들을, 즉 전통적인 의미에서 본 사물들의 본질들을 드러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본질은 우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과 접촉하도록 유인함으로써 특정한 “존재자들의 성격을 (…) 돋보이”도록 하기 때문이다.



② 언어로의 도상에서



『언어로의 도상에서』는 단일한 하나의 글을 담고 있는 책이 아니라, 하이데거가 1950~1959년 사이에 여러 곳에서 발표한 그의 여섯 개의 강연들 ─ <언어>, <詩에서의 언어>, <언어에 관한 대화로부터>, <언어의 본질>, <말>, <언어에 이르는 길> ─ 을 담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이 중 <언어>를 다룰 것이다.

<언어>는 막스 코머렐을 기념하기 위해 1950년 10월 7일 독일 뷜러훼에에서 발표된 강연문으로, 하이데거는 이 글에서 독일 시인 게오르그 트라클의 시 <어느 겨울저녁>을 해명하면서 ‘언어가 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숙고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 글에서, 인간이 말하기 이전에, 이미 그에 앞서 언어가 말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말함은 오로지 언어가 말하는 것에 참답게 귀 기울이는 한에서만, 자신의 말함의 본질장소를 되찾게 된다고 그는 역설하고 있다. 이는 소쉬르의 “인간은 언어를 매개로 해서야 세계와 관계한다”는 사고,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주체가 세계가 관계한다”는 사고를 떠오르게 한다.


<인간은 말한다spricht. 우리는 깨어 있을 때도 말하고, 꿈속에서도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말한다. 우리가 아무 말도 소리 내지 않고 경청하거나 읽을 때에도 우리는 말하며, 심지어 특별히 경청하거나 읽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떤 일에 몰두하거나 한가로이 여가를 즐길 때에도 우리는 말한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끊임없이 말한다. 말한다Sprechen는 것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말한다. 말한다는 것은 특별한 욕구에서부터 비로소 발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천성적으로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sagt.> - 『언어로의 도상에서』 (M.Heidegger 著, 신상희 譯) p.15


이 책에서 하이데거는 Sprechen(말함)과 Sagen(말함)을 구분해서 사용한다. Sprechen은 자신의 생각을 밖으로 표명하는 인간의 발언Aussprechen을 포함하되, 이러한 통속적 견해를 넘어 특히 ‘언어가 말하고’, ‘존재가 인간에게 말을 건네는(zuspricht, anspricht) 방식으로 말하는’ 그런 근원적 말함의 방식을 가리킨다. 이에 반해 Sagen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인간이 말하는 방식을 포함하여 말이 말하는 방식을 통칭한다. 언어의 근원은 존재를 개시하고 존재를 수립하는 ‘시짓는 말’에 고요히 머물고 있으며, 더 나아가 시짓는 말은 ‘존재의 말없는 소리’에서부터 발원한다고 하이데거는 생각한다. 또한 언어의 말함을 포함하여 다양한 형태의 말함은 언어의 본질영역 안에서 현성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언어의 본질영역 안에서 현성하는 참말Sage의 말함은 우리에게 ‘정적의 은은한 울림’으로서 조용히 다가와 사태의 존재를 가리키면서 그 사태를 나타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사태를 보게 하고 듣게 한다. 이런 점에서 말함은 그 본질에 있어서 ‘가리킴’이고 ‘나타나게 함’이고 ‘보고 듣게 함’이다. 이러한 말의 말함에 상응하여 인간은 말한다.

인간이 말하는 방식에는 ‘일상적인 말함’의 방식과 ‘비범한 말함’의 방식이 속하는데, 비범한 말함의 방식 중에서 ‘가장 탁월한 말함’의 방식을 하이데거는 ‘시지음Dichten’과 ‘사유함Denken’이라고 부른다.


<어떠한 경우에도 언어는 인간존재와 가장 가까운 이웃관계Nachbarschaft에 속해 있다. 도처에서 언어는 마주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존재하는 바의 그것(das, was ist)을 사유하면서 살펴볼 때마다, 그가 이내 곧, 언어에 의해 현시되는sich zeigt 것을 주시하려는 표준적인 관점 속에서 그 언어를 규정하고자 언어와 마주치게 된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 『언어로의 도상에서』 (M.Heidegger 著, 신상희 譯) p.17



하이데거는 《언어에 이르는 길》에서 언어의 본질은 가리킴Zeigm에 있다고 강조한다. 즉 사유해야 할 사태의 존재를 가리키는 손짓 혹은 눈짓에 언어의 본래적 비밀이 은닉되어 있다는 것이다. 언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Zeigefinger이므로, 하이데거는 언어가 그 본질에 있어서 가리키는 것die Zeige이라고 말한다.


언어가 말하는 것에 체류하기 위하여, 언어는 언어가 말하는 그 말함 속으로 우리가 관여해 들어갈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의 영역에 당도한다. “그곳은 그 영역으로부터 언어가 우리에게 자신의 본질을 말 건네주는zusprechen 일이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는 그런 영역이다. 우리는 언어에게 말함을 내맡긴다.” 이는 존재의 언어가 우리에게 말 걸어오는 참말Sage의 영역이자, 존재의 진리가 고유하게 생기하는 생기의 영역이다. 이것이 언어를 숙고하는nachdenken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영역을 두고 사이-나눔으로서의 존재가 정적의 은은한 울림으로서 울려 퍼지는 근원적 말함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언어에게 말함을 내맡긴다.” 언어 자체로부터 존재의 언어가 말하는 말함의 본질영역 속으로 우리가 관여해 들어가게 됨으로써 인간의 말함은 언어의 말함과 공속하는 본질차원에 이른다.


언어를 숙고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게 말 건네주는 존재의 진리로서 언어의 말함이 고유한 생기Ereignis의 방식으로 언어가 말하는 말함에 도달함을 뜻한다. 하이데거는 ‘말함’의 정의를 “인간 정서Gemüt의 율동을 소리로lautlich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이라 하며, 이러한 언어의 특징에 따라 세 가지 사항을 유념해야 한다.


- 말한다는 것은 표현한다Ausdrücken는 것이다. 의사를 표명함은 내면적인 것의 표상을 전제한다. 의사표명으로서 언어가 수용될 때 언어는 외면적으로 표상되는데, 이는 사람들이 의사표명을 어떤 내면적인 것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설명할 때 생긴다.


- 다른 한편 말한다는 것은 인간이 행하는 하나의 활동으로서 간주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이 말하는 것이요, 그가 그때마다 어떤 언어를 말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말해야만 한다. 이 경우에 우리는 ‘언어가 말한다’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언어가 말한다는 것은 곧, 언어가 인간에게 작용을 미치어 그 결과 비로소 인간의 말을 열어-주는er-gibt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 인간에 의해 행해지는 표현활동은 언제나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을 표상하고 서술하는 활동이다.


<언어의 본질이 오로지 표현의 영역에서 확정될 경우에, 사람들은 여타의 활동들 가운데 하나의 활동으로서의 표현활동을, 인간이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온갖 작업 활동들의 전체 경제학 속으로 설정해 놓음으로써 더욱 포괄적으로 표현활동을 규정하게 된다.> - 『언어로의 도상에서』 (M.Heidegger 著, 신상희 譯) p.22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말의 의미를 개념으로만 파악하려는 배타적 특성화에 맞서서 언어의 형상과 상징 특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한편, 모든 언명Aussage들을 권위적인 언어의 현상방식과 관련지어 언어 본질 전체와 관련하여 이미 확정된 관점을 공고히 한다. 결국 언어에 대한 인식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변화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에 관한 문법-논리적, 언어철학적, 언어학적 표상은 2500년 전 이래로 동일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언어 현상에 대한 종래의 고찰은 올바름의 구역 안에 머물고 있을 뿐, 비은폐성으로서의 존재의 진리의 영역 안에서 숙고되지 못했다고 하이데거는 비판한다.


언어의 말함은 말해진 것 안에서 가장 일찍이 발견되며, 거기서 스스로를 완성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존속과 자신의 본질을 모아들인다. “우리가 말해진 것 안에서 언어의 말함을 찾아야 한다면, 자의적으로 말해진 것을 제멋대로 취하기보다는 순수하게 말해진 어떤 것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순수하게 말해진 것은 詩이다.”

현성하는 언어의 본질에 의해서 인간의 본질은 이미 결속되어 있다. 순수하게 말해진 詩는 결속의 적합성을 경험하게 해 준다. 詩를 대수롭지 않게 내용을 분절시키고 형식을 정확히 구분시켜 버릴 경우 우리는 도처에서 수천 년 동안 지배해 온 언어의 표상관념에 사로잡힐 것이다. 詩의 언어 역시 표현으로 입증되지만, 이렇게 입증된 것은 말함이 본질상 표현함이 아니라는 전제 아래 제시되었던 ‘언어가 말한다’는 명제와 대립된다. “우리가 詩의 표현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는 이유는 언어에 대한 그런 표상의 올바름과 통용성이 언어의 본질장소를 해명하고 근거 짓기에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으려는 언어의 말함은 시적으로 말해진 것 안에 놓여 있다. 언어는 말한다. 이것은 동시에 그리고 그 이전에 ‘언어가 말한다’는 것을 뜻한다. 천지만물의 존재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면서Sprechen 다가오고 있는 ‘한에서’, 즉 존재의 언어가 말하는 한에서 인간은 이러한 언어의 말함에 상응하여 말한다. 시적인 말함의 호명은 말Wort 속으로 부른다. 이 말은 단순히 인간의 말das menschliche Wort이 아니라 참말Sage로서의 말, 즉 우리에게 말 걸어오는 존재의 언어를 가리킨다.

시인의 호명은 정적의 은은한 울림이 울려 퍼지는 곳, 즉 언어의 본질장소로, 다시 말해 일체만물이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현성하는 존재의 열린 장 가까이로 사물들을 부른다. 부름은 도래하도록 부르는 가운데, 그 부름은 부름받은 것을 향해 이미 부르고 있었다. 부름받은 것이 여전히 부재하는 것으로서 머무르고 있던 저 먼 곳Ferne, 현존의 가까움이 은닉된 곳을 향해서. 부름은 부재의 먼 곳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먼 곳을 현존의 가까움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부름 속에 현존하는 것은 존재자의 존재, 즉 우리에게 말 걸어오는 존재의 소리Stimme des Seins이다.


<우리는 사물들의 사물화 속에서 하나로 어우러져 머무르는, 하늘과 땅, 죽을 자(인간)들과 신적인 것들의 사방을 세계라고 명명한다. 호명(명명) 속에서 호명된 사물들은 자신의 사물화 속으로 부름받고 있다. 사물화하면서 사물들은 세계를 펼쳐-보이는데ent-falten, 이러한 세계 안에서 사물들은 머무르면서 그때그때 그렇게 (세계에)머무르는 사물들로 존재한다. 사물들이 사물화하는 가운데, 그 사물들은 세계를 내어준다.> - 『언어로의 도상에서』 (M.Heidegger 著, 신상희 譯) p.32


사물들은 죽을 자(인간)들을 (사물-세계에 구속하여) 사-물화한다be-dingen.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는데, 즉 사물들은 그때마다 죽을 자들을 세계와 더불어 고유하게 찾아온다. 사물들이 부를 때 죽을 자들이 모두 부름받는 것이 아니다. 더러 몇몇 사람들만이 부름받는다. 그들은 어두운 오솔길을 따라 방랑하는 이들이다. 이 죽을 자들은 죽음을 향한 방랑으로서 철저히 죽음을 떠맡는다. 죽음Tod은 죽어가는 모든 행위Sterben, 죽음에 이르는 존재의 종말을 이미 넘어서고 있다. ‘방랑길에 오른’ 이들은 어두운 오솔길을 지나 비로소 집과 식탁을 체득해야 하는데, 이러한 것은 결코 오로지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이들을 위해서이다.

세상에 편히 거주하고 있다고 해서, 많은 이들이 거주함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들의 삶의 진정한 회복을 위해서는, 사방세계 안에 거주하면서 존재의 진리를 깨달아 세상에 전해주는 방랑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하이데거가 생각하는 시인과 사상가는 이러한 방랑자일 것이다.


사물들을 호명하는 부름(시적인 dichterisch)이 (현존하는 것의 비은폐된 현존 속으로)도래하도록-부르고 향해-가라고-부르고 있듯이, 세계를 호명하는 말함Sagen(사유적denkerisch 말함)은 그 자체가 도래하도록-부르고 향해-가라고-부르고 있다. 말함은 세계를 사물들에게 맡기며, 이로써 세계가 사물들에게 머물게 한다. 세계는 사물들에게 자신의 본질을 베풀어 주는데, 이는 사물들이 사물들 자신으로 존재하도록, 세계가 자신의 빛의 증여를 사물들에게 아낌없이 허락해 준다는 뜻이다. 이렇게 베풀어줌(gönnen, 허락해 줌)으로써 세계는 세계화한다.

호명의 방식은 사물들을 세계로 다가오도록 명함 그리고 세계를 사물들에게 다가오도록 명함의 방식이 있다. 이 둘은 나뉘어 있을 뿐 분리된 것이 아니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병합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세계와 사물들은 서로 나란히 병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관통하고 있다.

여기서 이 둘은 한가운데Mitte를 통과한다. ‘한가운데’는 사물과 세계가 공속하는 친밀성의 영역으로서, 존재의 진리가 생기Ereignis로서 고유하게 생기하는 가까움Nähe의 영역이요, 일체만물이 서로 화동하여 관계 맺고 있는 무-한한 관계의 중심이다. 이 한가운데에서 둘은 어우러져 일치하며, 친밀하게 존재한다. 이 둘의 한가운데가 친밀성Innigkeit이다. 이 둘의 한가운데를 독일어로 사이Zwischen라고 부른다. 라틴어로 말하면 인터(inter, 중간)이며 이에 합당한 독일어는 ‘사이’unter이다.

세계와 사물의 친밀성은 혼합이 아니다. 친밀한 것, 즉 세계와 사물이 순수하게 스스로 나누고 또 나뉘어져 머무르는 곳에서만, 친밀성은 주재한다. 이러한 사이Unter-에는 나눔Schied이 편재하고 있다. 사이Unter-는 동일성의 본질이 유래하는 친밀한 근원이요, 나눔Schied은 일체만물의 차이의 본질이 유래하는 터전이다. 세계와 사물의 친밀성은 사이-나눔Unter-Schied 안에서 현성한다.

사이-나눔의 친밀성은 디아포라(Διαφορα, 차이)를, 즉 실어 나르는 내어줌der durchtragende Austrag을 화합하는 것이다. 사이-나눔은 세계를 그것의 세계화 속으로 내어주고, 사물들을 그것들의 사물화 속으로 내어준다. 이렇게 사이-나눔은 그것들을 서로에게 실어 나른다einander zutragen.

사이-나눔은 세계와 사물들을 결합하는 식으로 차후에 매개하지 않는다. 사이-나눔이라는 말은 우리의 표상활동을 통해서 비로소 대상들 사이에 설정되는 그런 구별을 결코 뜻하지 않는다. 사이-나눔은 표상활동을 통해 확정될 수 있는 세계와 사물 사이의 한갓된 관계에 불과한 것이 전혀 아니며, 세계와 사물에 의해 차후에 이 둘의 관계로서 지양되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세계와 사물을 위한 사이-나눔은 사물들로 하여금 세계를 낳도록 사물들을 고유하게 생기하며ereignet, 세계로 하여금 사물들에게 베풀어 주도록 세계를 고유하게 생기한다.


사이-나눔이 세계와 사물들을 부르는 명령은 정적의 은은한 울림das Geläut der Stille이다. 사이-나눔의 명령이 이 둘이 친밀하게 하나로 포개지도록 부름으로써, 언어는 말한다. 언어는 정적의 은은한 울림으로 말한다. 정적이 세계와 사물들을 각각의 본질 속으로 내어줌으로써, 정적은 고요하게 한다. 이렇게 고요하게 하는 방식으로 세계와 사물을 내어준다는 것, 바로 이것이 사이-나눔이 고유하게 생기하는 사건Ereignis이다.

인간이 언어의 본질 즉 정적의 은은한 울림에 속해 있는 한에서만 인간은 자신의 방식으로 소리로 울려 퍼지는 말함das verlautende Sprechen, 즉 음성적 소리로 발화되는 언어활동을 행할 수 있다. 죽을 자들(인간)의 말함은 호명하는 부름이며, 이것은 사이-나눔의 하나로 포개짐으로부터 사물과 세계가 다가오도록 명하는 부름이다. 죽을 자들이 말하는 가운데 순수하게 명해진 것이 詩로 말해진 것이다.

순수하게 말해진 것, 즉 詩와 대립되는 것은 산문이 아니다. 순수한 산문은 결코 ‘산문적’이지 않다. 순수한 산문도 시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시문학(Poesie, 詩歌)만큼이나 매우 드문 것이다.

사람들이 인간의 말함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표상된 말함을 언어 자체라고 간주한다면, 그때 언어의 본질은 언제나 단지 인간의 표현과 활동으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의 말함은 죽을 자들의 말함으로서 인간의 주체적 의지에 따라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죽을 자들의 말함은 존재의 언어가 말하는 그런 말함과의 관계 속에 존립한다.


<언어에 관해 어떤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은 언어의 말함에 거주하는 것을 배우는 데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본래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로 그렇게 응답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시험해볼 필요가 있다. 본래적으로 응답한다는 것, 이것은 뒤로 물러서면서 앞질러 다가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어에 (상응하여-)응답함으로써만 말하기 때문이다.> - 『언어로의 도상에서』 (M.Heidegger 著, 신상희 譯) p.52



③ 시詩와 철학



과학적 지식의 가속적 개발・축적과 더불어 시적・철학적 지식은 무용한 사변적 골동품으로 들통난 것같이 보이게 되었다. 오직 과학적 지식만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진리를 대표할 수 있다는 확신이 더욱 굳어가고 있는 듯하다.

일반인들이나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믿어왔던 것과는 달리 시 작품과 철학적 저술은 정서적 혹은 지적 유희의 오락적 산물이 아니다. 시인과 철학자는 세계와 삶의 진리에 대해 어느 과학자보다도 진지하며 그러한 진리를 정열적으로 추구함을 그들 스스로 의심하지 않았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시는 상상의 이야기, 즉 허구가 아니다. 시인이 시에서 의도하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경우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이 발견했거나 경험했다고 확신하는 어떤 객관적 진실・진리를 재현해 보이려는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언제나 진리다. 그가 재현하려고 하는 진리가 객관적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적 세계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인지적이라는 점, 즉 세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표상하고자 하는 점에서 시나 철학의 의도는 과학적 의도와 동일하나, 각기 그것들의 인식대상과 인식의 목적은 서로 다르다. 한편으로 과학의 인식대상들이 물리적으로 환원될 수 있는 존재에 한정되는 데 반하여 시나 철학의 인식대상은 물리적 존재만이 아니라 인지, 반성, 사색 등 모든 정신활동을 총괄적으로 포함한다.

과학적 인식대상인 물리현상은 오직 양적으로 처리되고 ‘과학적 방법’이라는 획일적 논리의 기계적 틀 안에서 처리되므로 그것의 실용적 조작을 가능하게 한다. 과학이 자부하는 진리의 객관성이란 그 인식대상의 진상이 아니라 과학적 인식의 실용적 효과를 지칭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과학적 인식과 진리는 어디까지나 공리적 전략을 가장한 것이다.

시나 철학은 공리적 목적과는 상관없이 인식대상을 조작・변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개체로서 파악하고자 한다. 과학적 진리가 전략적이면 시나 철학적 진리는 관조적이다. ‘진리’의 가장 원초적 의미는 ‘존재 자체의 구현’이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공리적 목적에 비추어 조작된 과학적 방법의 틀에 맞는 신념인 과학적 지식은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중요한 것은 똑같은 ‘진리’라는 말이 과학적 맥락과 시나 철학적 맥락에서 어떻게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가를 명확히 의식하는 데 있다. 과학적 진리가 ‘이성적’ 인식・진리를 대표한다면 시나 철학적 진리는 ‘사유적’ 인식・진리의 표본이다. 이성이 전략적이며 개별적인 존재를 배타적으로 획일화하는 정신활동을 지칭한다면, 사유는 관조적이며 개별적인 것들을 포괄적으로 존중하는 정신활동을 지칭한다.


논리적 사고, 즉 철학이든 아니면 시적 사고, 즉 ‘사유’든 모든 사고는 필연적으로 언어적이며, 모든 언어적인 것은 문법적 구조, 논리적 관계, 그리고 언어적 ‘의미’를 필연적으로 전제한다. 그리고 모든 ‘의미’는 필연적으로 관념적인 것이며, 모든 관념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개념적, 즉 비非물리적이다. 존재를 사고하거나 인식한다는 것은 그것의 관념화 혹은 개념화를 지칭하며, 존재의 관념화에 지나지 않는 인식 작업은 존재를 반드시 어떤 구조를 가진 키로 걸러내는 작업에 비유된다.

이러한 작업은 존재의 인위적 변형을 뜻한다. 즉 모든 사고와 인식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그 대상의 파악에 있지만, 그것이 파악한 존재는 결코 존재 자체일 수 없고 변형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사유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개념적, 즉 관념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의 의미를 비관념적으로 사용하여 관념적이 아닌 구체적, 즉 ‘물리적’인 ‘존재’와 유사하게 하여 그 ‘존재’ 자체를 의미화, 즉 관념화 이전의 상태로 파악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사유는 언어를 동원함에 있어 ‘관념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의 의미를 최대한 ‘물리적’이게 해야 한다. 의미를 물리적으로 만들면 그 의미가 존재 자체를 보다 유사하게 반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언어는 철학가나 과학자나 일상인들의 언어와 똑같다. 그러나 같은 낱말 혹은 문장을 시인이 자신의 작품 속에 사용할 때 그는 그 언어의 개념적 의미만을 고려하지 않고 시각적・청각적・연상적 효과, 즉 ‘물리적 의미’를 총동원하여 활용한다. 시와 사유는 ‘시적 사유’이며 깊이 있는 시인은 ‘사유적 시인’이다. 그것은 횔덜린의 말대로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한다”는 사실과 하이데거의 주장대로 ‘현존재’, 즉 인간과 존재의 원초적 관계는 ‘인식적 관계’, 즉 ‘이론적 관계’가 아니라 ‘도구적 관계’, 즉 ‘실천적 관계’라는 데에 근거한다.

하이데거가 시인들의 사유가 어떤 철학적 이론보다도 깊은 존재론적 진리를 담고 있다고 주장하고 예술 일반, 특히 고흐나 세잔의 작품에 대한 깊은 사색을 쏟은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참된 사유는 논리적이 아니라 시적이며, 그 내용은 투명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모호하며, 따라서 그 언어의 의미는 ‘관념적’이 아니라 ‘물리적’이다.

하이데거는 진리를 ‘비은폐’ 혹은 ‘가까이 있음’, ‘현현’ 혹은 ‘빛’ 혹은 ‘개방’ 등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정의들의 일반적 특징은 ‘진리’가 어떤 상황 혹은 현상, 즉 어떤 구체적 실체를 지칭하는 데에 있다. 철학에서 ‘진리’는 명제의 속성을 가리킨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와는 정반대로 ‘진리’라는 말을 명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명제의 대상, 즉 명제의 내용인 존재의 속성으로 본다.

사유는 진리와의 일치를 이상으로 한다. 이상인 이상 사유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표상하고 그것이 옳음을 주장하게 된다. 그런 사유는 부득이 한 언어공동체에서 사회적, 즉 공적으로 그 의미가 이해될 수 있는 언어를 필요로 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유가 부닥치는 문제는 그가 발견한 진리, 즉 언어로는 완전히 ‘표현할 수 없는 것’, 즉 그냥 존재 자체를 말할 수 있는 언어를 발견하는 일이다. 사유의 의도는 근본적으로 모순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사유의 내재적 본질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언어는 인간이 자신의 신념을 전달하기 위해 고안해낸 문화적 산물이 아니라 존재가 자신을 현현하는 수단으로 존재의 기관, 나아가 존재의 한 측면이다. 그의 책 『시의 본질』에서 하이데거는 “언어가 있는 곳에만 세계가 있다”고 쓰며, 언어에 형이상학적 자리를 부여하고 있다.

“언어는 존재 자체를 밝히면서 동시에 은폐하는 도래到來”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우리는 구별할 수 없는 하나로서의 존재 자체를 인식할 때 부득이 어떤 개념적 범주 속에 갈라놓지 않으면 안 된다. 최소한의 개념적 구분이 없이는 언어는 물론 사고도 지각도 의식 자체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개념적, 인위적으로 구분한 것들을 실재하는 것으로 믿게 된다. 그렇다면 사물현상 간의 모든 구별들은 존재론적 실재성이 부족하고, 따라서 그것들은 언어에 의해서 조작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가 성립된다. 언어가 그 대상인 존재의 실체성을 왜곡한다는 결론이 바로 위와 같은 이유에서 주장될 수 있다.

이러한 양면적 관계는 철학・과학・예술적 언표에서도 동시에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유독 하이데거가 과학적 서술과 주장에 집중적으로 주의를 쏟고 그것을 맹렬히 비판한다면, 그 이유는 과학이 철학적・종교적・예술적 또는 일상적 존재 서술과 설명을 제쳐놓고 자신의 서술과 설명만이 객관적 진리라고 자처하는 데에 있다. 과학을 존재에 대한 전형적 이론으로 쳐 버리면 모든 이론은 그 대상을 개방하고 밝혀주기보다는 그것을 더욱 은폐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문제 해결의 핵심은 어떻게 존재를 은폐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존재를 밝혀낼 수 있느냐이다. 사유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어떻게 하면 존재를 되도록 덜 ‘은폐’하고 가능한 한 그것을 최대로 ‘밝힐’ 수 있는 언어를 발견하는가에 있다. 그렇다면 ‘가장 적고 희미한 의미를 가진 언어’, 바꿔 말해 ‘가장 물리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해결의 단초로 삼을 수 있다. 이러한 언어적 시도에서 가장 좋은 문자 언어의 예로 시 작품을 들 수 있고, 비문자언어의 예로서 미술작품들을 위시한 모든 양식의 예술작품을 제시할 수 있다.

시의 맥락에서 언어의 물리적 측면은 관념적 측면과 적어도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거나 그 이상의 무게를 갖는다. 시에서 언어는 사물현상, 즉 존재와 혼동되고 그 의미는 가능하면 최대한으로 ‘물리적’, 즉 ‘사물적’이고자 한다. 사유가 근본적으로 시적일 수밖에 없듯이, 모든 언어는 근본적으로 시적이며, 사유가 사용하는 언어는 더욱더 시적임을 지향한다. 사유의 가치는 그것의 논리적 정확성이 아니라 그것의 존재론적 ‘엄격성’을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하며, 사유가 사용하는 시적 언어의 의미는 그것의 개념적 불투명성에 비추어 규탄받을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존재론적 진리성에 비추어서만 파악된다.

하이데거는 일찍이 “철학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이 자신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는 가장 본질적 낱말을 보존하는 데 있다”고 언명했다. 따라서 그의 목적은 망각됐던 원초적 언어를 회복하는 것이며, 하이데거의 텍스트의 난해성과 그의 사유의 불투명성은 이와 같은 언어의 해방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3) 예술작품의 근원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① 예술철학과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의 저자 헤르만의 목적은 “『숲길』에 실린 하이데거의 논문 《예술작품의 근원》을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기획된 예술철학의 근본특징을 서술”하는 것이다. 헤르만은 하이데거의 사유의 관점을 세 가지 관점에서 추적한다.


ⅰ) 예술작품 논문에서 펼쳐 보여진 예술철학의 체계학Systematik

ⅱ) 30년대 중반 『존재와 시간』에 비해 달라진 하이데거의 근본입장의 체계학


전자의 체계학은 예술작품, 예술미, 예술적 창작, 예술이해, 예술 자체 등등에 대한 본질규정들이 하나의 분류된 전체 안에 구조적으로 함께 속해 있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예술-철학의 체계적인 전체 틀을 올바로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예술작품 논문이 작성된 당시의 존재물음을 정리작업하는 근본입장을 규명해, 예술철학의 사태 자체를 괄호 치는(예속하는) 게 선결 과제이다. 그를 위한 게 후자의 체계학이다. 그리고 예술작품 논문에서 취해진 근본입장의 변화(하이데거의 표현으로 전회Kehre)를 사태에 적합하게 파악하려면 마지막으로


ⅲ) 『존재와 시간』의 근본입장에 대한 일차적인 체계적 정리작업


을 지속적으로 유의하면서 원문 해석을 행해야 한다.


<『존재와 시간』을 끌어들임은, 우리가 하이데거의 이 근본저작으로부터 그의 근본입장의 근본윤곽을 하나의 실마리로서 건네받아야 할 그런 필연성을 통찰했기 때문이다. (…) 하이데거 자신이 『존재와 시간』으로부터 예술작품 논문에 이르는 길을 걸어왔다. 이 길은 하나의 새로운 길을 시작하기 위한 전향에 의해 중단되어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곧, 그 변화에 있어 여러 주요특징들 가운데 하이데거 사유의 통일성이 고지되는 그런 동일한 것을 보존하고 있는 하나의 길이다.> -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F.W.Herrmann 著, 이기상, 강태성 譯) p.19


헤르만 이전까지는 하이데거가 『숲길』과 이후의 모든 후기 저작들에서 『존재와 시간』에서 준수되었던 제시와 증명이라는 현상학적 방법을 포기했다는 게 학계의 시선이었다. 그러나 헤르만은 그의 《예술작품의 근원》을 상기의 세 관점에 따라 읽어나가면 “하이데거가 예술작품 논문에서 자신의 생각들을 얼마나 엄밀하게 펼치고 있는지, 그의 언어가 얼마나 엄밀하게 사유된 것에 잘 부합하는지, 그의 개념성이 얼마나 정밀하게 형성되어 있는지에 대해 계속 놀라게 될”(『하이데거의 예술철학』 p.19) 것이라 주장한다. 헤르만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해당 논문에서 현상학적으로 제시하면서 진행해 나가고 있음은 물론, 그 자신과 독자에게 분명하게 현상학적인 봄과 제시라는 지침을 주고 있다.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숙고는 전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로지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부터만 규정된다. 예술은 문화적 업적의 한 분야로 간주되어서도 정신의 나타남으로 간주되어서도 안 된다. 예술은, 존재의 의미가 거기에서부터 비로소 규정되는 존재사건Ereignis에 속한다.> - 『숲길』 p.73


“예술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은 이 예술을, 어떤 하나의 문화적 성취의 영역이라는 근대적-주관주의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절대정신의 객관화(이념의 감각적 나타남)라는 헤겔적 의미에서도 아닌, 오히려 유독 존재물음의 지평의 내부에서만 고려에 넣어야 한다.”(『하이데거의 예술철학』 p.22) 예술은 존재의 본질에 대한 포괄적인 물음 안에서 그리고 존재물음을 새로이 정리작업해 내는 진행과정에서 하나의 탁월한 방식, 즉 존재자의 비은폐성Unverborgenheit과 탈은폐Entbergung로서의 존재의 진리가 발생하는 방식으로서 입증된다.

예술에 있어서의 비은폐성의 탁월한 발생 방식을 하이데거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원칙적인 물음에서, 다시 말해 밝힘Lichtung과 비은폐성으로서의 진리에 대한 물음에서 제시하고 있다. 예술작품 속에서 비은폐성이 발생하는 방식은 탁월한 방식으로서, 비은폐성의 발생의 여러 형식적-일반적 구조와 그리고 예술 이외의 영역에서의 다른 구체적인 발생 형식들의 구조들과는 뚜렷이 구분되어야 한다. 이것이 예술작품 논문을 읽는 해석자에게 제기되고 있는 요청이다.

하이데거의 요구는 다름 아닌 “존재물음의 정리작업에서 얻어지는 하나의 새로운 바탕 위에서 예술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 제기되어야 한다는 요구”(『하이데거의 예술철학』 p.23)이다.



② 사물과 예술작품



<어떤 것이 무엇인 바 그것과 어떻게 존재하는 바 그것을 우리는 그 어떤 것의 본질이라 칭한다. 어떤 것의 근원이란 그 어떤 것의 본질의 유래이다. 예술작품의 근원에 대한 물음은 예술작품의 본질유래에 대해 묻는다. (…) 예술가는 작품의 근원이다. 작품은 예술가의 근원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 없이는 있을 수 없다. (…) 예술가와 작품은 각기 그 자체로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상호관련에 있어 어떤 제삼자에 의해서, 즉 거기에서부터 예술가와 예술작품이 제각기 자기의 고유한 이름을 갖게 되는 바로 그러한 것, 즉 예술에 의해 존재한다.> - 《예술작품의 근원》(『숲길』 p.7, 이기상・강태성 譯)


예술작품은 자신의 방식으로 “예술가를 예술의 한 대가로서 출현시킨다.”(『하이데거의 예술철학』 p.81) 예술가는 그가 그인 바 그임을 자기 자신에게 힘입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한 관점에서 예술작품에 힘입고 있다. “예술가적 산출은 자기 자신에 기인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발원케 함의 상호적인 관계에 속한다.”(위의 책 p.81) 즉 한 방식에 있어서 예술가가 예술작품의 근원이며, 다른 한 방식에 있어서 예술작품이 곧 예술가의 근원이다.

그렇지만 예술가적 창작도 그 자체로부터 창작된 예술작품을 지탱하지 않으며, 예술작품도 그것의 발원케 함의 방식으로 그 자체로부터 예술가를 지탱하지 않는다. 양자는 각기 그 자체로 그리고 그것들 간의 상호연관에 있어 어떤 제 삼자에 의해 존재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예술이다.

1. 예술작품과 예술가를 발원케 함으로서의 예술, 2. 예술작품의 근원으로서의 예술가, 3. 예술가의 근원으로서의 예술작품. 예술작품 논문의 과제는, 이 세 가지 서로 구별되는 근원-존재의 방식들을 고유한 본질 및 그 차이성과 공속성에 있어 제시하는 일이다. 예술작품의 본질이 그 유래를 예술에서부터 가지므로, 예술작품의 본질의 유래에 대한 물음은, 예술의 본질이 예술작품과 예술가를 그 둘의 상호연관 속에서 산출케 해야 하는 한, 예술과 그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 바뀐다.


<모든 작품들은 사물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사물적 차원이 없다면 그런 작품들이란 무엇이겠는가? (…) 예술작품이란 일종의 제작된 사물인데, 이것은 순전한 사물 자체와는 또 다른 어떤 것, 즉 알로 아고레우에이αλλο αγορευει를 말한다. (…) 비유와 상징은, 예술작품의 식별을 위한 시각이 오랫동안 움직여온 그 궤도의 윤곽표상을 내준다. 하지만 다른 쪽을 드러내는 작품에서의 이러한 한쪽, 다른 쪽을 함께 한데로 데려오는 이러한 한쪽, 그것은 곧 작품 속에서의 사물적 차원이다. (…) 우리는 예술작품의 직접적이고 온전한 현실성을 적중시키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렇게 해서만 우리는 작품 속에서 현실적인 예술을 또한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작품의 사물적 차원을 시야에 데려와야 한다.> - 《예술작품의 근원》(『숲길』 p.9~10, 이기상・강태성 譯)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에 ‘사물’이라는 명칭을 붙인다. 즉 1. 자연적으로 생긴 생명이 없는 존재자(돌, 흙덩이), 2. 인간에 의해 제작된 비생명적인 존재자(항아리, 우물), 3. 단단한 사물에 속하지 않은 비생명적인 존재자(물, 우유, 구름), 4. 생명이 깃들인 존재자(엉겅퀴, 잎새, 매), 5. 오직 어떤 것의 나타남에서만 자기를 알리면서 그 자신은 나타내 보이지 않는 존재자(칸트의 물자체), 6. 철학의 언어 안에서 사용되듯이, 자기를 내보이는 존재자이든 자기 자신을 내보이지 않는 존재자이든지 간에 도대체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 7. 죽음과 심판과 같은 궁극적 사물 등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예술작품도 하나의 사물이며 이는 물질성의 관점에서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물의 본질개념에 힘입어 예술작품의 사물적 차원을 규정짓기 위해서는, 바로 본래적인 사물들 ─ 돌, 목재, 금속 또는 색조와 같은 예술작품의 질료적 하부구조가 속한다 ─에서 사물적 차원 그 자체가 규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취되고서야 사물적 하부구조와 예술형식이라는 상부구조로 이루어진 예술작품의 존재양식을 특정지을 수 있다.

사물의 사물성에 대한 해석의 역사를 하이데거는 세 가지 중심적 사물개념들에서 꿰뚫어 보고 있다.


ⅰ) 사물을 여러 속성의 담지자로서 보는 첫 번째 전승된 사물개념


- 우리가 길에서 고양이를 보면 여러 가지 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 ‘털 많음’, ‘귀가 두 개’, ‘지저분함’ 등등. 우리가 그 특징들은 그 고양이 자체에 특유한 것이라 말할 때, 우리는 속성들을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고양이 자체, 속성들과 구별되는 사물 자체는 무엇일까?

“사물 자체는 속성들의 총합Summe으로서 여겨지기보다는 오히려, 여러 속성들 및 이 속성들의 변화와 밑바탕에 놓여 있는 사물의 핵심Kern으로서─여러 속성들과 그것들의 변화를 지탱하고 떠받치고 있는 사물의 핵으로서─여겨진다. 변화하는 속성을 담지하는 것에 대한 사물표상이란 곧, 실체 및 그 우유성에 대한 표상이다.”(『하이데거의 예술철학』 p.108)


우리 모두를 규정하고 있고 그 안으로 우리 각자가 모두 잘못 던져져 있는 그런 지배적인 표상방식에 따르면, 사물의 사물존재를 우유성을 지닌 실체로서 해석하는 것이 우리의 자연적 시선이 사물에서 인식하는 그것에 들어맞는 듯이 보인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너무나 자명한 사물해석이 사물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 없는 자연적 시선이 사물적 차원으로서 경험하는 바 그것을 파악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사태적으로 언급하기에 앞서, 사물구조Dingbau와 문장구조Satzbau의 연관에 대한 물음을 건드린다. 우리는 간단한 발언문장에서 사물에 대해, 사물담지자에 대응하는 문장주어와 사물담지자의 속성에 상응하는 문장술어를 발언함으로써, 이야기하기도 한다.

여기서 이제 다음과 같은 비판적 물음이 생겨난다. 연계사Kopula를 매개로 한 문장주어와 문장술어의 결합인 문장구조가 과연 실체와 우유적인 것의 연관인 사물구조에 따라 모사되었는가, 아니면 그 반대로 사물구조가 문장구조의 표본에 따라 투사되었는가? 하이데거는 그 가운데 어느 한 가지 견해에도 결정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원칙적으로 이러한 양자택일적인 물음제기에 대해 자신의 회의를 표시하고 있다. “아마도 그런 형식으로는 물음이 잘못 제기되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 문장구조와 사물구조는 그 둘의 가능한 상호관계에 있어 하나의 ‘공통적이고 더 근원적인 원천’에서 발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암시가 시사하고 있는 것은, 첫 번째 사물 개념에 따른 사물구조에 대한 물음보다 더 근원적일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발언문장 내에서의 주어와 술어의 결합에 대한 물음보다도 더 근원적인 물음이 존재물음이라는 것이다.”(『하이데거의 예술철학』 p.113)


하이데거에 따르면 사물을 여러 속성의 담지자로서 보는 사물개념은 분명 각각의 모든 사물들에 다 적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오직 본래적인 사물들에만 적용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 개념은 ‘현성하는 사물wesende Ding’을 파악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덮친다überfällt’.(《예술작품의 근원》, 『숲길』 p.14) 현성하는(본질적으로 있는) 사물이란 곧, 그것의 본래적인 그러니까 일차적으로 경험된 사물성이 임시적인 방식으로 ‘자생적인 것Eigenwüchsige’과 ‘자기 안에 머무는 것Insichruhende’이라 명명된 그러한 사물을 지칭하는 낱말이다. ‘덮침’은 ‘억누름Zurückdrängen’과 ‘덮어버림Verdecken’이라는 특징을 띤다. 다시 풀어 말해 보자. 사물을 여러 속성의 담지자로서 보는 사물개념은 다음과 같은 사물의 성질을 덮어버리고 억누른다. 그 골자는 일차적으로 경험된 사물성, 임시적으로 말하자면 ‘자생적인 것Eigenwüchsige’과 ‘자기 안에 머무는 것Insichruhende’, 즉 ‘존재에 대해 열려 있는’, ‘현존재의 처해있음Befindlichkeit에서 자연과 그 사물들이 그것으로 개방 가능한 바 그것인’ 사물의 성질이다.


ⅱ) 사물을 감관에 주어진 것의 한 다양성의 통일로서 보는 두 번째 전승된 사물개념


- 사물의 자생적인 것과 자기 안에 머무르는 것을 가지는 사물의 덮침을 피하는 것. “그러한 덮침을 피하기 위한 전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물의 참되고 일차적인 사물성을 규정함에 있어 ‘사물이 자신의 사물적 차원을 직접적으로 내보일 수 있도록 우리가 그 사물에게 흡사 하나의 자유로운 장Feld을 보장해 준다’(《예술작품의 근원》, 『숲길』 p.15)는 전제이다.”(『하이데거의 예술철학』 p.120)

하이데거가 말하는 사물의 일차적 사물성의 파악에 대한 전제란 다름 아닌 현상학적 방법이다. 『존재와 시간』 서론에서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상의 양태에서 존재 및 존재구조를 만나는 양식이 가장 먼저 현상학의 대상들에서 획득되어야 한다. 그래서 분석의 ‘출발Ausgang’ 및 현상에로의 ‘접근Zugang’과 지배적인 덮어버림을 관통하는 ‘통과Durchgang’는 일종의 특별한 방법적 보장을 요구한다.> - 『존재와 시간』(M.Heidegger 著, 소광희 譯) 中


현상학의 현상이란 하이데거에게 있어서는 전적으로 존재의 현상이지 존재자의 현상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현상학을 방법으로서, ‘스스로 내보이는 것을 그것 자체에서부터 나타나는 그대로 그것 자체로부터 보이게 해줌’으로서 파악한다. 현상학적 탐구에 대한 이러한 형식적 규정은 동시에, 후설에 의해서 각인된 현상학적 탐구의 격률, 즉 ‘사태 자체로’에 대한 하이데거의 수용이자 해석이다. 또한 하이데거가 의미하는 현상학적 환원Re-duktion이란, ‘소박하게 파악된 존재자로부터 탐구하는 시선을 이러한 존재자의 존재에로 되돌려 이끔Rückführung’, 즉 ‘현상학적 관점을 어떻게든 규정된 존재자의 파악으로부터 … 이러한 존재자의 존재의 이해로 되돌려 이끔’이다.


사물과의 직접적 만남의 근본바탕은 감각에 부합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들을 신체적 감관들을 통해 그것들의 신체적 현재에서 감지하는 한, 사물들은 감각적 느낌을 거쳐 우리의 신체에로 다가온다.

두 번째 전승된 사물개념이 뜻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사물이란, 감관들 다시 말해 감각적 표상들 내에서 대상적으로 표상된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바 그것에 대한 그때그때마다의 통일이다. 이러한 두 번째 사물개념은 칸트적인 입장에서 예시될 수 있겠다. 감관들 속에 주어진 것의 다양이란, 칸트에게 있어서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순수 직관형식들 속에서 직관되는 경험적 직관재료이다. 그런 식으로 직관된 다양은, 『순수이성비판』 B판에 따르면 통각(인식)의 종합적 통일을 통해 결합되며(종합되며) 그리고 범주적 통일의 개념들에 따라 하나로 된다. 직관된 다양의 통일은 그것의 근원을 순수 지성의 기능에서 갖는다.

두 번째 사물개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사물과의 일차적인 만남은, 일종의 감각들의 쇄도로서, 다시 말해 여기서는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또는 촉각적으로 감각된 것들의 쇄도로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다음을 의미할 것이다. 즉 우리는 사물을 감지함에 있어 일차적으로는 대상적인 울림, 색조 또는 저항들과 만난다. 이와는 반대로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은 현상적 사실요소를 가리켜 보이고 있다. 즉, 만약 우리가 특정한 이론에 의해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물들과, 즉 여기서는 사용사물들과 만나는 양식에 주의해 본다면, 우리는 청각적으로 느껴진 울림Töne을 일차적으로 청취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발 엔진의 비행기라든가 또는 현대 승용차와 구별해서 르노삼성 승용차의 소리를 들을 뿐이다.

우리의 감각적 감지Gewahren는 사용사물과 연관된 그때그때마다의 사용사태Bewandtnis에 의해 이끌려지고 밝혀진다. 우리가 그것에 의해 주위세계적 사물들과 만나게 되는 사용사태 및 사용사태 전체성에 대한 선행적인 이해가 곧, 내가 주위세계적으로 만나는 사물들 곁에 체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차적 존재이해이다. 감각적 감지는 이러한 존재이해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두 번째 사물개념에 따르면 사물들이란 일차적으로, 순전한 감성적 감각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주어진 순전한 지각 사물들이다.

이러한 사물개념에 맞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자신의 원칙적인 회의를 제기했다. 『존재와 시간』의 실존론적-존재론적 분석을 염두에 두어야 예술작품 논문의 언급과 예시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일차적 지각 사물들보다 우리에게 가까운 건 사태로부터 규정된 사용사물들이다. 얼핏 감각적으로 인지된 것이 왜곡되지 않은 사물성으로 보이지만, 사물을 파악하며 접근하는 양식에서 사물의 본래적인 사물성은 빠져나가 버린 상태이다. 두 번째 사물개념은 감성적 만남의 방식뿐만 아니라 지각하는 신체의 신체성까지도 비현상적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써, 사물을 우리의 신체에 너무 가깝게 밀착시킨다. 결국 이는 또다시 은폐하는 개념으로서 판명이 된다.


ⅲ) 사물을 질료와 형상의 통일로서 보는 세 번째 전승된 사물개념


- 세 번째 사물개념은 사물을 질료와 형상의 통일로서 파악한다. 즉 사물을 형상지어진 질료로서 규정한다. 질료란 사물에게 그 사물의 지속적인 것Ständige과 핵심적인 것Kernige, 그 사물의 ‘자생적인 것’과 ‘자기 안에 머무는 것’을 내어주는 그것이다. 이와 동시에 질료란 사물에 있어서 색, 소리, 저항 등과 같은 감각적 쇄도를 야기시키는 바 그것이다.

질료가 결코 순수한, 형태 잡혀 있지 않은 질료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형상 또한 결코 순수한, 질료가 없는 형상이 아니다. 다른 두 사물개념들과 마찬가지로 그 근원을 고대 철학에 두고 있는 세 번째 사물개념은 사물을 두 가지 원리으 통일로서 규정한다. 처음의 두 사물 해석에서와는 달리 세 번째 사물개념에서는 사물의 질료적인 것이 높이 주목됨으로써, 세 번째 사물개념은 겉으로는 ‘자기 안에 머무름’의 사물적 차원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적합한 사물개념인 듯이 보인다. 이제 순전한 사물뿐만 아니라 사용사물까지도 형상지어진 질료이기 때문에, 세 번째 사물해석은 자연사물과 사용사물을 다 포함한다.

그러나 “만일 예술작품 논문이 이렇게 암시된 길에 발을 들여 놓는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예술작품 논문은 애초부터 두 개의 다른 사물개념이라는 에움길을 거쳐서 세 번째 사물개념에 이르렀는가?”(『하이데거의 예술철학』 p.131) 하이데거는 자신의 검토결과를 미리 앞질러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즉, 만약 세 번째 사물개념이 사물에서 질료적인 것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찾고 있는 사물의 ‘자기 안에 머무르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는 한, 세 번째 사물개념조차도 신뢰하지 못하겠다고 말이다.

정작 하이데거는 질료-형상이 단적으로 모든 예술이론과 미학을 위한 개념적 도식이라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그가 불신하는 이유는 첫째, 개념쌍에 대한 충분한 근거 제시, 다시 말해 근원적 영역의 제시가 없다. 둘째, 예술과 예술작품에 대해서는 하나의 다른 사태적 근원영역이 제시되어야 한다.


우리는 형상과 내용이라는 개념쌍을 마치 보편개념처럼, 어떤 식으로건 존재하는 모든 것과 우리가 파악하려고 추구하는 바 모든 것에 연관시킨다. 그런데 개념쌍의 도움으로 순전한 사물의 사물존재를 적중시키기 위해서는 개념쌍의 확장 및 이러한 확장과 함께 대두되는 공백을 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길은 세 번째 사물개념이 그 근원을 본래적인 사물의 영역 안에서 가진다는 사실을 알 때에만 밟아나갈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우리는 어떠한 방향으로 그러한 개념쌍의 확장을 메꿀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도구의 도구존재는 도구의 용도 안에 존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용도 자체는 도구의 한 본질적인 존재의 충일함 속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그것을 신뢰성Verläßlichkeit이라 칭하자. 도구의 신뢰성에 힘입어 농촌 아낙네는 이러한 도구를 통해 대지의 침묵하는 부름에 내맡겨져 있고, 도구의 신뢰성에 힘입어 그녀는 그녀의 세계를 확신한다. 세계와 대지는 그녀 그리고 그녀와 더불어 그녀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자들에게 오직 그렇게 거기에, 즉, 도구 안에 존재한다. 우리는 “오직”이라고 말하면서 이때 혼미 속에 빠진다. 왜냐하면 도구의 신뢰성이 비로소 단순한 세계에 대해 그 세계의 포근함Geborgenheit을 내어주고, 대지에게는 그 지속적인 쇄도의 자유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도구의 도구존재, 즉 신뢰성은 모든 사물들을 각기 그것들의 방식과 범위에 따라 자기 안에 밀집된 채로 견지한다. 도구의 용도는 그럼에도 단지 신뢰성의 본질귀결일 뿐이다. (…) 자기 안에 머무르는 도구의 고요Ruhe는 신뢰성 안에 존속한다. 그러한 신뢰성에서 비로소 우리는 도구가 진실로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게 된다. (…)

도구의 도구존재는 발견되었다. (…) 단지 우리가 반 고흐의 회화 앞으로 데려와짐으로써 그랬다. 반 고흐의 회화가 말해 준 것은 이것이다. 즉 작품 가까이에서 우리는, 갑자기 통상 우리가 있던 곳이 아닌 어떤 다른 데에 있게 된다. (…) 작품에 의해 비로소 그리고 오직 작품 속에서만 도구의 도구존재가 제대로 나타나게 된다.> - 《예술작품의 근원》(『숲길』 p.23~25, 이기상・강태성 譯)


<존재자의 비은폐성을 그리스인들은 알레테이아αληθεια라고 일컬었다. 우리는 진리를 말하면서 이러한 진리라는 낱말 곁에서 덜 충분히 사유하고 있다. 존재를 그것이 무엇인 바 그것과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 바 그것으로 열어보이는 일이 작품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이때 이러한 작품 속에서는 진리의 한 발생Geschehen이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예술의 작품 속에서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 속으로 정립되었다. “정립함Setzen”은 여기서, ‘서 있음Stehen’에로 데려옴을 말한다. 하나의 존재자, 즉 한 켤레의 농부의 신발이 작품 속에서 그 존재자의 존재의 빛 속에 서게 된다. 존재자의 존재가 그것의 빛남의 지속Ständige에 이른다.

그렇다면 예술의 본질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 ‘존재자의 진리가 스스로를 작품 속으로 정립함(Sich-ins-Werk-Setzen der Wahrheit des Seiendes)’> - 《예술작품의 근원》(『숲길』 p.25, 이기상・강태성 譯)


예술작품 논문에서의 세계-개념은 『존재와 시간』의 그것에 비하자면 확장된 셈이다. 『존재와 시간』의 세계란 곧, 사용사태 연관들의 전체를 의미하며, 이러한 사용사태 연관들의 열어밝혀져 있음 안에 현존재 이행이, 다시 말해 주위세계적으로 만나는 도구에 대한 배려의 다양하고도 서로 맞물린 방식들이, 머물고 있다.

『존재와 시간』에는 대치되는 존재양식이 등장한다. 이론적인 인식에 접근가능한 그런 사물의 존재양식으로서의 ‘눈앞에 있음Vorhandenheit’과, 도구적 존재자의 존재양식인 ‘손안에 있음Zuhandenheit’이 그것이다. 『존재와 시간』에서 시도된 도구와 사물의 구별은 예술작품 논문에서의 사용사물과 순전한 사물의 구별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예술작품 논문에서 순전한 사물은 그것에 독특한 그 사물존재에 있어 규정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도 이론적인 인식에게가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자연사물들에 대한 자연적인 직접적 경험에게 그것이 그 안에서 개방되는 그런 사물존재에서 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손안의 것으로부터는 물론 순전히 눈앞에 있는 자연으로부터도 자연의 만남의 방식을 구별하여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만남의 방식에서는 자연이 우리에게 생동하는 것과 역동하는 것으로서 덮쳐 오거나 또는 산악의 풍경으로서 포착된다. 그것은 곧 자기에게 기인하면서 자기 안에 머무르는 자연으로, 예술작품 논문에서는 이를 ‘대지’와 ‘퓌지스φνσιζ’라는 이름 아래 특별히 논구한다.

도구는 그 도구적 차원 안에서 보존해 주는 그런 세계에서부터만 그러한 도구로서 존재한다. 한편 대지는 도구처럼 세계 안에서 그리고 그 세계에서부터 그것이 무엇인 바 그것으로 존재하게 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도구는 대지에 귀속해 있다. 도구의 도구존재는 대지와 세계에 대한 하나의 이중적 연관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연관을 하이데거는 ‘보호된 귀속함behütetes Zugehören’이라고 파악한다.


“현존재는 배려된 도구와 거기에서 이해된 도구의 도구존재를 넘어 대지의 개방가능성과 세계의 열어밝혀져 있음에 대해 이해하는 관련을 맺고 있다.”(『하이데거의 예술철학』 p.172) 도구 사용에 있어서 나는 나 자신을 도구와의 친숙한 왕래에 내맡기는데, 이때 이 도구는 그 도구존재에 있어 나에게 믿을 만한 용도로서 개방되어 있다. 도구가 그 도구존재에 있어 대지에 귀속됨에서부터 일어서는 한, 글을 쓰는 나는 노트북의 신뢰성에 힘입어 ‘대지의 침묵하는 부름’에로, 다시 말해 대지의 독특한 개방가능성 안으로 내맡겨진다. 노트북이 그 도구존재에 있어, 특히 나의 세계 안에 보호되어 있는 한, 나는 이러한 도구의 ‘신뢰성에 힘입어’ 나의 세계를 확신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일종의 비주제적인 세계이해 속에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와 대지는 나와 그리고 나와 더불어 나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자들에게 오직 그렇게 거기에, 즉 도구 안에 존재한다.”(《예술작품의 근원》 p.23)

‘세계와 대지가 거기에 존재한다’는 말은, 세계와 대지가 도구 안에서 현전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도구존재에 있어 도구의 개방성은 대지의 개방가능성과 세계의 열어밝혀져 있음을 지시한다. 대지에의 귀속에서부터 도구가 그 도구존재에서 개방되기 위해서 도구는 대지에 귀속될 필요가 있다. 반대로 대지 또한 대지로서 개방가능하게 될 수 있기 위해 도구를 필요로 한다. 이와 똑같은 치환 관계가 도구와 세계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도구는 그것의 세계내부적으로 있음 안에서 개방될 수 있기 위해 세계를 필요로 한다. 다른 방식으로, 세계 또한 그것의 세계내부적으로 있음 안에 감싸간직되기Bergung 위해 도구를 필요로 한다.


‘작품에 의해 비로소 그리고 오직 작품 속에서만 도구의 도구존재가 제대로 나타나게 된다.’ 이 문장을 오직 예술작품만이 우리로 하여금 도구의 도구존재에 사유하면서 해석하는 접근을 가능하게 해준다 라고 추론하려고 하는 한 잘못 해석될 것이다. 여기서의 ‘~제대로 나타난다’는 말은 다음을 뜻한다. 오직 예술작품 속에서만 도구존재는 탁월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내보임에 이르며, 그리고 이러한 탁월한 방식, 즉 작품에 따른 방식이 곧 ‘밖으로-나타남Her-vor-scheinen’과 ‘빛남Scheinen’이다. 이는 ‘스스로를 내보임Sichzeigen’과 동일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 “빛남이란 예술 작품 속에서 존재자가 그것의 존재의 비은폐성 안으로 튀어나오는 뛰어난 방식이다.”(『하이데거의 예술철학』 p.186)

진리를 비은폐성으로서, 즉 존재자의 비은폐됨의 발생으로서 사유하는 일은, 하이데거가 자기 자신과 그리고 오늘날의 사유에 부과하는 과제이다. 만일 비은폐성이 진리의 보다 근원적인, 즉 ‘올바름’보다 그리고 ‘확실성’보다 더 근원적인, 본질이라고 한다면, 이때, ‘작품 속에서는’ 도구가 그 존재의 비은폐성 안으로 튀어나옴과 더불어 ‘진리의 발생이 작용하고 있다’.

예술이란 예술작품 속으로 스스로를 정립하는 진리이다. 예술이란 그 안에서 존재자의 비은폐성이 발생하는 탁월한 방식이다. 존재자의 비은폐성은 그것이 스스로를 작품 속으로 정립할 때 즉 작품 속에서 자기를 세움에로 데려오고 이러한 입지확보Standgewonnenhaben에서부터 빛날 때, 예술로서 발생한다. 이것이 이 장에서 우리가 파악한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본질규정 ‘존재자의 진리가 스스로를 작품 속으로 정립함(Sich-ins-Werk-Setzen der Wahrheit des Seiendes)’의 골자이다.


이러한 본질규정은 예술을 진리의 주변에 정착시킨다. 예술의 친숙한 이해에 있어서 그것은 미Schöne와 아름다움Schönheit의 영역에 속한다. 우리는 심지어 ‘미술’을 ‘수공업적인 기술’과는 구별지어 이야기한다. 미술은 그 예술작품들로써 미를 부각시켜 드러낸다. 여기서의 미는 예술-미라는 특출난 의미로서 자연-미와는 구별된다.

지금까지 글을 따라온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직 예술의 본질의 핵심으로서의 예술-미를 맞닥뜨려 보지 못했다’고. 이는 착각이다. 왜냐하면 존재자의 비은폐성으로서의 진리가 스스로를 예술작품 속에 정립하는 방식은 예술-미에 대한 첫 본질규정을 또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예술-미를, ‘예술작품 속에서 존재자의 존재가 빛남’이라고, 즉 ‘그 존재에서 존재자의 비은폐성으로서의 진리가 빛남’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움과 진리는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진리는 일종의 판단인식의 올바름이나 확실성으로 생각되지 않고, 오히려 비은폐성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비은폐성의 작품적인 빛남이 곧 예술-미의 본질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미술은 예술작품을 산출해내면서 존재자의 비은폐성의 빛남을 부각시켜 드러낸다. 그렇기에 미술은 미를 부각시켜 드러낸다.



③ 예술작품과 진리



<예술작품의 근원은 예술이다. 그러나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은 예술작품 속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애초부터 작품의 현실성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에 성립하는가? 예술작품들은, 비록 전혀 상이한 방식들에서이긴 하지만, 대체로 사물적 차원을 내보인다. 작품의 이러한 사물성격을 통상적인 사물개념들의 도움으로 파악하려 했던 시도는 실패했다. 그 까닭은 이러한 사물개념들이 사물적 차원을 붙잡아 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작품을 그것의 사물적 하부구조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하나의 ‘앞서 잡음’ 속으로 밀어넣기 때문이다. 그러한 앞서 잡음은 우리가 작품의 작품존재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다. 작품의 순수한 ‘자기 안에 서 있음Insichstehen’이 분명하게 내보여지지 않는 한, 작품에서의 사물적 차원은 결코 결정될 수 없다.

그럼에도 작품이 언젠가는 그 자체에 있어 접근될 수 있는가? 이러한 일이 성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작품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인 그런 것과의 모든 연관들에서부터 작품을 벗겨내옴으로써 작품으로 하여금 유일하게 자기에 대해 그리고 자기에게 기인하게 해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예술가의 가장 고유한 눈길이 이미 그리로 쏠려 있다. 작품은 예술가에 의해 그 순수한 ‘자기 자신 안에 서 있음’에로 해방되어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오직 위대한 예술에 대해서만 언급할 수밖에 없겠는데, 바로 그러한 위대한 예술에 있어서 예술가는 작품에 비하자면 단지, 창작을 행하는 가운데 작품의 생성을 위해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하는 그런 통로와 거의 다를 바 없이, 상관없는 어떤 것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 《예술작품의 근원》(『숲길』 p.29, 이기상・강태성 譯)


세 가지 사물개념들의 도움을 빌려 사물의 사물적 차원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이유는 첫째, 셋 모두 근원적인 사물적 차원을 파악해낼 수 없다. 근원적인 사물존재 일반을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고 하면, 그 개념들은 또한 예술작품에서의 근원적인 사물적 차원도 파악하지 못하는 셈이다. 둘째, 예술작품을 사물적 하부구조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서 하나의 앞서잡음 속으로 밀어넣는 건 우리가 예술작품의 근원적인 작품존재에로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다.

“우리는 사물적 차원 일반과 예술작품에서의 사물적 차원을 전승된 사물개념의 도움을 빌려서는 파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에서의 사물적 차원을 도대체 ‘사물적인 하부구조’로서 단초잡아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존재론적인 정립은 예술작품의 작품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인 경험을 불가능하게 하며 그로써 또한 예술작품의 작품존재에 대한 존재론적인 경험을 불가능하게 하며 그로써 또한 예술작품의 참된 사물적 차원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하이데거의 예술철학』 p.198)


예술작품이 그것의 ‘자기 자신 안에 서 있음’에 있어 접근될 수 있기 위해서는 예술작품은 모든 다른 것과의 관련들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오직 그렇게 해서만 예술작품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 자신에 기인하게 된다. 존재자를 열어보임 즉 탈-은폐의 사건 내지는 존재자의 진리의 사건이 곧 예술작품의 작품존재이다. 예술작품은 그것이 그것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서부터 접근될 때에만 그것의 ‘자기 자신 안에 서 있음’에 있어 접근된다.

예술작품의 대상화는 예술작품에서의 진리의 사건을 주목하지 않는 데서 성립한다. 대상화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작품들이 발견되는 장소와 주변이 아니라, 오히려 하이데거가 세계박탈Weltentzug과 세계붕괴Weltzerfall라고 지칭하는 바 그것이다. 세계의 박탈과 붕괴는 한때 예술작품 속에서 열려보여진 그것을 닫아버리는 것Verschließung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임의로 말할 수 있다. 닫아버림의 방식들로서 박탈과 붕괴는 열어보임과 마찬가지로 존재자의 탈은폐로서의 진리의 사건에서부터 사유되어야 한다.


우리가 만약 작품존재를 낯설게 만드는 연관들의 이면에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예술작품의 작품존재 앞으로 인도된다면, 작품존재는 ─ 사람들이 생각하고 싶어하듯이 ─ 모든 연관의 바깥에서 우리에게 내보여질 것이다. 순수한 ‘자기 자신 안에 서 있음’은 마치 무관련성과 동등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러한 성급한 생각은 거부된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이 모든 연관 바깥에 서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예술작품은 더 이상 예술작품일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관들 안에 서 있음은 아마도 본질적으로 작품에 속할 것이다. 문제는 다만, 예술작품의 ‘자기 자신 안에 서 있음’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예술작품의 참된 연관들을 보는 일이다. 예술작품의 순수한 ‘자기 자신 안에 서 있음’은 무관련성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연관적인 본질에서 찾아져야 한다.


<대지란, 피어오름이 모든 피어오르는 것을, 그것도 그 자체로서, 거기에로 되감싸버리는 그것이다. 피어오르는 것 속에서 대지는 ‘감싸는 것’으로서 현성한다.

신전작품은 서 있으면서 한 세계를 열어보이고 동시에 이 세계를 대지 위로 되돌려 세우는데, 이때 대지는 세계가 그 위로 되돌려 세워지는 정도에 따라 그 자체가 비로소 고향의 근거로서 솟아나온다. 그러나 인간들과 동물들, 식물들과 사물들은 결코, 현전하는 것에 장차 또 추가될 그런 신전에 대해 적절한 주위환경으로서 일시적으로 서술되기 위한 불변하는 대상들로서 눈앞에 있거나 그런 것으로서 알려져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뒤바꾸어 사유할 때 우리는 존재하는 것에 보다 더 가까이 이르게 된다.

(…) 신전이 서 있는 가운데 비로소 신전이 사물들에게 그것들의 모습을 그리고 인간들에게는 비로소 그들 자신에 대한 전망을 내준다. 이러한 시야는, 작품이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하는 한, 신이 그 작품에서부터 떠나버리지 않은 한, 열린 채로 남는다.

(…) 작품은 그 작품존재에 있어 ‘봉헌하면서 찬송하는 건조함’을 요구한다. 이런 요구에 이르는 까닭은 예술작품 자체가 그 작품존재에 있어 건립하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품으로서 작품이 건립하는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 솟아 오르면서 작품은 하나의 세계를 열어보이고 이렇게 열려보여진 세계를 전개하며 머무름 가운데서 견지한다.

작품존재란 하나의 세계를 건립한다는 것을 일컫는다. (…) 세계의 본질은 우리가 여기서 걸어가야 할 그런 길 위에서만 제시될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제시는, 본질 쪽으로 향한 시선을 우선적으로 현혹시킬지도 모르는 그런 것으로부터 방어하는 데에 한정된다.> - 《예술작품의 근원》(『숲길』 p.32~33, 이기상・강태성 譯)


‘하나의 세계를 작품적으로 열어보임’이 구조적-개념적으로 ‘한 세계의 건립Aufstellung’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Aufstellung이라는 낱말은 우리들에게는 예술작품과의 한 특정한 행동관계에 대한 지칭으로서 철학 이전의 언어에서부터 알려져 있다.

‘Aufstellung(진열)’은 사물적 존재자로서의 예술작품과의 존재적 행동관계를 명명한다. 반면에, ‘예술작품 속에서 하나의 세계를 건립함’이 이야기될 때,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의 존재적 사실 구성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존재론적인 사건이다. 예술작품의 첫 번째 본질특징을 밝혀 보이기 위해 예술작품 논문은 예술작품의 사물적인 차원과의 한 존재적 행동관계에서부터, 그러니까 이미 오래 전 부터 잘 알려져 온 작품의 피상적인 것Vordergründiges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그것은 Aufstellen의 존재적인 의미에서 벗어나, 그 똑같은 낱말이 존재론적인 사태연관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그런 존재론적인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이다.


‘건립’은 봉헌Weihen과 찬송Rühmen이라는 본질성격을 갖는다. 봉헌이란 ‘성스럽게 함’을 의미하며, 그리고 이 ‘성스럽게 함’은 그 본질을, 성스러움을 성스러움으로서 열어보이고 신을 그의 현전성의 열린 장 안으로 불러들이는 데에서, 즉 신을 성스러움의 본질 공간 안에 현전케 하는 데에서 갖는다. 봉헌에 속하는 찬송은 거기에서 신이 드러나게 되는 그런 품위와 광채에 대한 찬양으로서 일어난다. 품위와 광채는 신의 속성들이 아니라 오히려 신이 현전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광채의 반조 속에서 우리가 세계라 지칭했던 그것이 빛난다. 다시 말해 환히 트이게 된다.”(《예술작품의 근원》, 『숲길』 p.33)

예술작품은 그 작품존재에 있어 봉헌과 찬송으로서 성스럽게 함과 찬양함을 요구한다. 예술작품에 대해 건조하고 건립하는 행동관계는 예술작품의 작품존재에서부터 규정된다. 다시 말해, “예술작품 자체는 그 작품존재에 있어 건립하면서 존재한다.”(《예술작품의 근원》, 『숲길』 p.33)


하이데거는 말하길, 하나의 세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신전을 언급하는 가운데 암시되어 있다고 한다. “세계의 본질은 예술작품 논문이 예술작품을 관통해 나가는 길 위에서 단지 알려질 수 있을 뿐, 포괄적으로는 전개될 수 없다.”(『하이데거의 예술철학』 p.224)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이 실존하고 있는 그런 하나의 세계를 열어보이는 일이 곧 예술작품의 한 본질특징이라고 한다면, 이때 세계에 관한 이야기는 “셀 수 있거나 셀 수 없는 또는 잘 알려져 있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그런 눈앞의 사물들의 순전한 축적”(《예술작품의 근원》, 『숲길』 p.33)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계란 공간-시간적인 사물들의 전체가 아니다. “그 철학적인 완결형태를 이를테면 비판 이전의 세계의 형이상학에서 발견한 이러한 세계-개념을 거부하면서도 하이데거는 결코, 독단적인 세계-개념을 이율배반적인 형태로 만들어 비판적인 결정에서 퇴치한 칸트의 전철을 밟지는 않는다.”(『하이데거의 예술철학』 p.224)

“세계는 그러나 단지 상상된, 즉 눈앞의 것의 총합에 덧붙여서 표상된 하나의 틀도 아니다”(《예술작품의 근원》, 『숲길』 p.33)라는 이 문장은 현상들의 절대적 총체성에 대한 주관적인, 즉 순전히 규제적인 이념으로서의 세계개념에 대한 저지로서, 나아가 주관적 세계개념에 대한 저지로서 해석될 수 있다. 객관적 세계개념이 세계를 하나의 실재하는 객관적 전체로서 표상하는 반면에, 주관적 세계개념에 따르면 세계는 실제 경험가능한 가능적 대상들을 모두 포괄하는 하나의 지평의 성격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규제적 이념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존재자의 전체성에 방향잡혀 있다는 점에서 칸트의 비판적 세계경험과 후설의 현상학적 세계개념은 일치한다.

하이데거에게 세계란 분명 하나의 전체성을 의미하는 것이긴 하지만, 존재자의 전체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결코 존재자가 아니며, 어떠한 개별적인 존재자도 아닐 뿐만 아니라 존재자 모두를 포괄하는 통일도 아니요, 객관적인 것도 주관적 지평표상도 아니다. 세계는 그 나름의 방식대로 ‘존재’한다. “세계는 세계화한다welten.”(《예술작품의 근원》, 『숲길』 p.33)


<작품 속에서 진리가 작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일종의 참된 것만이 작품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니다. 농부의 신발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그림, 로마의 분수를 이야기하고 있는 시는, 만약 이 그림과 이 시가 각기 어떤 것을 알리고 있다면, 이러한 개별적 존재자가 이것으로서 존재하는 바 그것을 알리고 있기도 하겠지만, 이에 못지않게 그 그림과 그 시는 오히려 전체로서의 존재자와 관련해서 비은폐성 자체를 발생케 하고 있다. 신발도구가 보다 더 단순하게 그리고 보다 더 본질적으로 솟아나면 솟아날수록, 이것들과 더불어 일체의 존재자가 더욱 더 직접적으로 그리고 더욱 더 받아들이기 쉽게 더욱 더 존재적이 된다. 바로 이와 같은 식으로, 스스로를 은닉하는 존재가 밝혀져 있다. 그러한 식의 빛은 그 빛남을 작품 속으로 맞추어 잇댄다. 작품에로 맞추어 잇대어진 빛남이 곧, 미Schönes이다. 아름다움이란 비은폐성으로서의 진리가 현성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 《예술작품의 근원》(『숲길』 p.44, 이기상・강태성 譯)


예술작품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즉 여기서는 신발이, 저기서는 분수가 작품적으로 발현함(개방됨)과 아울러 전체로서의 존재자의 작품적인 비은폐성 안에서 존재 ─ 그것의 고유한 진리가 곧 이중적인 은닉을 띤 탈은폐인 그런 존재 ─ 가 스스로를 탈은폐했으며 그리고 전체로서의 존재자를 비은폐되게 했다. 존재는 스스로가 예술작품 속에서 밝혀지게 하는데, 그것도 이 “그러한 식의 빛”이 그 빛남을 작품 속으로 “맞추어 잇댄”다는 식으로 그렇다.(《예술작품의 근원》, 『숲길』 p.44)

빛남이란 존재자의 비은폐성의 작품적인 방식이다. 밝힘을 예술작품 속으로 ‘맞추어 잇댐’으로써 빛이 빛나게 되는 사정은 ‘비은폐성을 서 있음에로 데려옴’으로서 수행된다. 그것은 일종의 비은폐된 것으로서의 예술작품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술작품 속에서 비은폐성이 발생하는 탁월한 방식을 지칭한다. 비은폐성이 예술작품 속에서 발생하면서 도래하고 유지되고 서 있음에로 데려와지고 맞추어 잇대어지는 탁월한 방식이 곧, 존재자의 비은폐성의 빛남이다. 그런데 이러한 빛남이 바로 예술미인 것이다. 예술미란 “진리가 현성하는”(《예술작품의 근원》, 『숲길』 p.44), “다시 말해 이중적인 은닉을 띤 탈은폐로서의 진리의 본질이 전개되는 탁월한 방식 중의 하나이다.”(『하이데거의 예술철학』 p.329)



④ 진리와 예술



<작품의 ‘창작되어 있음’은 분명 창작의 진행에서부터만 개념파악될 수 있다. 이렇듯 예술작품의 근원을 적중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태의 강박 아래서 오히려 예술가의 활동성을 조사해 들어가는 일에 동의해야 한다. 작품의 작품존재를 순수하게 작품 자체에서부터 규정하려는 시도는 실행불가능한 것으로서 입증된다.

(…) 창작Schaffen을 우리는 일종의 산출함(이쪽으로 앞에 데려옴)으로서 사유한다. 그러나 산출함은 도구를 제작해 냄이기도 하다. 물론 수공업은, 이상한 말장난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어떠한 작품도 창작하지 않는데, 설령 꼭 필요한 것으로 존재하는 그런 수공업적 생산물을 우리가 공장제품과 구별할 때에조차도 그렇다. 그렇다면 무엇에 의해 창작으로서의 산출함이 제작의 방식에 의한 산출과 구별되는가? 작품의 창작Schaffen과 도구의 제작Anfertigen을 우리가 글자소리에 따라 쉽게 서로 구분지어내는 만큼이나, 산출함의 그 두 방식들을 각기 그것들의 고유한 본질특징들에 있어 추적하는 일은 그만큼 더 어렵다.> - 《예술작품의 근원》(『숲길』 p.46~47, 이기상・강태성 譯)


원초투쟁에 근거하고 있는 세계와 대지의 투쟁이 자기 안으로 밀집된 것인 그러한 발생사건에서부터 획득된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자기 안에 서 있음’이라는 규정은 일종의 작품창작에 있어 작용된 것으로서의 예술작품을 아직은 전적으로 주목하지 못했다. ‘창작되어 있음’으로서의 ‘작용되어 있음’은, 원초사건 속에서 발생하는 한 세계의 건립과 대지의 이쪽으로-세움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작품존재에 속한다. 더군다나 예술작품을 일종의 작용된 것으로서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창작된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일은 가장 자명한 듯하다. “왜냐하면 작품Werk이라는 낱말에서 우리는 작용된 것임Gewirkte을 듣기 때문이다.”(《예술작품의 근원》, 『숲길』 p.47) 작품Werk이란 작용Werk을 말한다. 왜냐하면 작품은 일종의 작업활동Werken에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창작을 예술작품 속에서 발생하는 비은폐성과 그것의 본질적 관련으로부터 또다시 단절시키는 것은 저지해야 한다. 비록 예술작품이 창작의 이행 속에서 비로소 현실적인 것으로서 생겨나오고, 그런 한에서 창작에 의존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바로 그러한 까닭에 창작의 본질은 작품의 본질에 의존하고 있다.”(《예술작품의 근원》, 『숲길』 p.48)

예술가는 일차적으로 예술작품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예술작품 역시 그 나름의 방식으로 예술가와 그의 창작의 근원이다. 예술작품의 ‘창작되어 있음Geschaffensein’은 창작에 대해 일종의 소급적인 연관을 갖는다. 하지만 창작과 그리고 그것과 아울러 예술작품의 ‘창작되어 있음’이 예술작품의 본질에서부터, 즉 작품존재에서부터 규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모순되지 않는다.

예술작품의 작품존재는 세계와 대지의 투쟁에 기인하고 있으며, 또한 이 투쟁이 하나의 근본특징으로서 탈은폐와 이중적인 은닉의 원초투쟁에로 맞추어 넣어져 있기 때문에, 예술작품의 작품존재는 전체로서의 존재자의 비은폐성이라는 진리의 발생사건에 기인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제시된 이러한 작품존재를 염두에 두면서 예술작품에 대한 창작이 일종의 “산출된 것 안으로 밖으로 솟아나게 함”(《예술작품의 근원》, 『숲길』 p.49)이라 특징부여된다.

이 규정에서는 예술작품의 창작과 그리고 도구의 제작 사이의 구별이 아직 파악되고 있지 않다. 구별점은 다음과 같다. “도구는 비은폐성의 발생 속에서 산출되기도 하지만, 도구에서 비은폐성의 발생이 일어나지는 않는다.”(『하이데거의 예술철학』 p.346) 이에 반해서 예술작품을 창작하면서 밖으로 솟아나오게 함의 특기할만한 점은, 산출된 것(이쪽으로 앞에 데려와진 것) 속에서 비은폐성이 발생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즉 창작과 창작됨은 비은폐성과의 연관에서부터만 발생하지는 않는다. 예술작품의 작품생성 속에서 비은폐성은, 창작이 끝난 작품 속에서 그 비은폐성이 작용하고 있다는 식으로, 그렇게 발생한다.


<진리는 밝힘과 이중적인 은닉의 상호대립 속에서 그 자체로서 현성한다. 진리란, 그 안에서 그때마다 하나의 방식으로 열린 장das Offene이 쟁취되는 그런 원초투쟁인데, 존재자로서 자기를 내보이고 빠져나가는 그 모든 것이 그러한 열린 장 안으로 들어서고 거기에서부터 스스로 물러난다.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이러한 투쟁이 터져 나오고 발생하건 간에, 싸움을 벌이는 것들, 즉 밝힘과 은닉이, 이러한 투쟁을 통해 서로 갈라져 비켜선다. 이렇게 해서 투쟁공간의 열린 장이 쟁취된다. 이러한 열린 장의 열려 있음, 다시 말해 진리는, 그것이 스스로 그의 열린 장 안으로 스스로를 맞추어 넣을 때에만 그리고 그런 한에서만, 그것이 무엇인 바 그것으로, 즉 이러한 열려 있음으로 존재할 수 있다.

(…) 존재자의 비은폐성의 본질이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 자체에 속한다면 이 존재 자체는 자기의 본질에서부터 열려 있음(‘거기’의 밝힘)의 놀이-공간을 발생케 하여 이 놀이-공간을 그 안에서 각각의 존재자가 자기네 방식으로 출현하는 그러한 것으로서 내어온다.

진리는, 진리 자신을 통해 스스로를 여는 그런 투쟁과 놀이공간 안에 스스로를 맞추어 넣는다는 식으로만, 발생한다. (…) 진리를 통해 열려보여진 존재자 속에 그 진리가 스스로를 맞추어 넣는 그런 본질적인 한 가지 방식이 곧, ‘진리가 스스로를 작품 속으로 정립함’이다. (…) 스스로를 존재자 속으로 맞추어 넣음으로써 비로소 그렇게 진리가 생성한다고 하는 점이 곧 진리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에, 진리의 본질에는 존재자 한복판에서 스스로 존재적이 되려는 그런 진리의 한 탁월한 가능성으로서 ‘작품에로의 성향’Zug zum Werk이 놓여 있다.

(…) 산출함이 존재자의 개방성을, 즉 진리를, 제대로 데려올 경우, 산출된 것(이쪽으로 앞에 데려와진 것)은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한다. 그러한 산출함(이쪽으로 앞에 데려옴)이 곧 창작이다.> - 《예술작품의 근원》(『숲길』 p.49~50, 이기상・강태성 譯)


존재의 사유란 비은폐성이 ‘생성하는’ 하나의 본질적인 방식이며, 이러한 사유에서는 비은폐성이 그 자체로서 사유된다. 사유 속에서 근원적으로 발생하는 비은폐성은 스스로를 사유의 사유된 것 속으로 맞추어 넣는다. 사유된 것이란, 예술작품과는 구별되어야 하는 사유의 작품 속에 맞추어 넣어져 낱말에 담은 사상들이다.

존재의 사유란, 존재자의 드러냄Enthüllung을 모든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개방되도록 해주어 이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앞에 놓이게 되도록 하는 바 그것으로 사유함으로써, ‘존재자 그 자체의 본질적인 드러냄’에 이른다. 이렇게 앞에 놓이게 된 것으로서 그것은 여러 상이한 관점들에 있어 존재자에 관한 학문들의 주제가 된다. 존재의 사유는 모든 학문들 중에서, 거기에서 진리가 근원적으로 발생하는 유일한 학문이다. 이러한 탁월함이 존재자에 관한 실증적인 학문들에게는 없다. 그러한 실증적인 학문들 내에서는 어떠한 비은폐성의 근원적인 발생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실증적인 학문들은 이미 개방된 존재자에 관한 학문으로서, 각기 이미 열려보여진 하나의 진리영역 내에, 다시 말해 각기 이미 놓여진 열려 보여진 진리의 근거 위에─이러한 학문들을 지탱하면서 가능케 하는 바로 저 근거를 알지 못한 채─서 있기 때문이다.

오직 존재에 관한 학문으로서 철학만이 “올바름을 넘어 진리에로, 다시 말해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본질적으로 드러냄에로”(《예술작품의 근원》, 『숲길』 p.50) 나아간다. 철학은 진리를 그 본질에 있어 비은폐성으로서 사유함으로써 ‘하나의 진리’에로 다가간다. 철학은 그러한 비은폐성을 ‘밝힘과 이중적 은닉의 발생’으로서 사유함으로써 비은폐성으로서의 진리의 본질을 사유한다.


창작하는 산출함은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 같은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다. 즉 그것은 존재적인 예술작품을 현전에로 데려오면서, 이러한 생성하는 예술작품으로 하여금 동시에, 그 안으로 그것이 존재적인 예술작품으로서 솟아나오는 그 열린 장의 열려 있음을 밝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이데거 예술철학의 중심 사상 앞에 서 있다. 이러한 사상의 수수께끼 같은 측면과 쉽게 파악이 안 되는 측면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즉 여기서는 스스로를 여는 열려있음이 예술작품 및 일체의 존재자를 비은폐되도록 하게 하고, 존재자를 탈은폐하는 밝힘이 이 밝힘에 의해 탈은폐된 존재자 속으로 스스로를 감싸간직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예술작품이 개방됨으로써 그 안으로 예술작품 자체가 솟아나오는 그 열린 장의 열려있음을 예술작품이 밝힌다는 것이다.

창작이란, 일종의 내던져져 있음에서 자기를 던져오는 열려있음을 받아들이는 기획투사로서, 이쪽으로 앞에 데려와야 할 예술작품 속으로 그러한 열려있음을 데려옴이다. 솟아나오는 예술작품 속으로 열려있음을 데려옴에 있어서 예술가는 예술작품을 그것의 개방성 안으로 솟아나오게 한다. 그리고 거꾸로, 예술작품을 이쪽으로 앞에 데려옴에 있어서 예술가는 자기를 던져오는 열려 있음을 개방되는 예술작품 속으로 데려온다. 예술작품을 ‘이쪽으로 앞에 데려옴’은, 수공업적 또는 공장에서의 대량 산출과는 달리, ‘일종의 이쪽으로 앞에 데려와야 할 예술작품 속으로 열려있음을 대응 투사하면서 그리고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면서 데려옴’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예술가적인 창작의 본질에 대한 물음에 대해 지금 주어진 대답은, 예술작품의 작품존재에서부터, 다시 말해 예술작품 속에서 전개되는 비은폐성의 발생에서부터 찾아진 것이다.


<시작詩作으로서의 예술은 진리의 투쟁의 야기라는 세 번째 의미에서의 설립, 즉 시원으로서의 설립이다. 전체로서의 존재자가 존재자 자체로서 열려 있음 안으로의 정초를 요구할 때는 언제나, 예술은 설립이라고 하는 그의 역사적 본질에 이르게 된다. 서양에서는 예술이 처음으로 그리스 정신에서 일어났다. 장차 무엇이 존재라 일컬어지는지가 결정적으로 작품 속에 정립되었다. 그런 식으로 열려보여진 전체로서의 존재자는 그 다음에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존재자로 변화되었다. 이 일은 중세에 일어났다. 이러한 존재자는 근세가 태동하고 경과하면서 다시금 변화되었다. 존재자는 계산적으로 지배가능하고 꿰뚫어 볼 수 있는 대상으로 되었다. 매번 그때마다 하나의 새롭고 본질적인 세계가 돌출돼 나왔다. 매번 그때마다 존재자의 열려 있음이, 진리가 형태로 확립됨으로써, 존재자 자체 속으로 맞추어 넣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매번 그때마다 존재자의 비은폐성이 발생했다. 존재자의 비은폐성은 스스로를 작품 속으로 정립하며, 그러한 정립을 예술이 온전히 수행해낸다.

(…) 예술은 역사적이며 그리고 역사적인 예술로서 예술은 진리를 작품 속에서 창작하는 보존이다. 예술은 시작詩作으로서 일어난다. 이러한 시작이란 곧, 선사, 정초, 시원이라는 삼중적 의미에서의 설립이다. 예술은 설립으로서 본질적으로 역사적이다. 이러한 사정은, 예술이 시대의 변천 속에서 무수히 다른 시대와 나란히 출현하기도 하고 이때 변화하다가 사라져 변화하는 볼거리를 역사학에게 제공한다고 하는 그런 피상적인 의미에서의 역사를 예술이 갖는다는 것만을 일컫고 있는 게 아니다. 예술이 역사의 지반을 놓는다고 하는 그런 본질적인 의미에서 예술은 역사이다.

예술은 진리를 발원케 한다. 예술이란 설립하는 보존으로서 작품 속에서 존재자의 진리를 도약시킨다. 어떤 것을 도약시킴, 즉 설립하는 도약에서 어떤 것을 본질유래에서부터 존재에로 데려옴, 이것이 근원(원초-도약)이라는 낱말이 의미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근원, 다시 말해 창작하는 자와 동시에 보존하는 자의 근원, 다시 말해 한 민족의 역사적 현존재의 근원은 예술이다. 그러한 까닭은, 예술이 그 본질에 있어 하나의 근원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즉 예술은 진리가 존재적으로,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되는 하나의 탁월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 《예술작품의 근원》(『숲길』 p.63~65, 이기상・강태성 譯)


한 민족적 현존재의 역사는 시간내재적으로 경과하는 발생이 아니라 오히려, 비은폐성의 발생에서부터 사유된, 전체로서의 존재자의 비은폐성 안으로의 민족적인 들어섬이다. 이는 ‘자기를 작품 속으로 정립함’과 ‘창작하고 보존하면서 작품 속으로 정립함’의 통일로서의 예술이 역사를 정초하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진리가 존재적으로,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되는 하나의 탁월한 방식이다. 예술이란, 비은폐성이 존재적이 되는, 다시 말해 하나의 탁월한 존재자 속으로 맞추어 넣어지는 여러 탁월한 방식들 중에 하나이다.

비은폐성의 발생의 탁월한 작품적인 방식은, 그것이 진리발생의 통상적인 방식과는 명시적으로 구별될 때만이 그 구조 내용에 있어 파악된다. 예술의 방식으로 발생하는 진리가 논의될 수 있는 경우란 오직, 진리발생의 탁월한 방식뿐만 아니라 통상적인 방식까지도 규정하는 진리의 형식적-일반적인 본질이 논의 속으로 편입될 때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 일반에 속하는 바 그것과 그리고 예술이라는 의미에서의 진리의 탁월한 발생방식에 속하는 바 그것 사이를 구분하는 과제 앞에 우리의 해석이 언제나 거듭 이르게 됨을 보았던 것이다.

철학적-미학적 근본토대 위에는 예술을 일종의 정신의 나타남으로서 그리고 일종의 문화성취 영역으로서 보는 견해들이 서 있고 이것들이 예술작품 논문에서 물어지리라는 기대를 하이데거는 거부한다. 그가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숙고가 하나의 새로운 지반 위로 데려와진다는 그것이다. 예술의 철학을 새롭게 정초하는 일은 ‘존재의 본질에 대한 물음의 길 위에서’ 이행된다.



마치며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인들은 대지를 우리가 사물들에 부여하는 형상에 저항하면서도 역시 그 형상을 떠안는 물질로 경험했다. 대지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속성들은 하나도 갖지 않으면서 한 사물의 온갖 속성들을 떠안고 있거나 그 속성들 ‘아래에서 서 있는’ 것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든지 간에 그때마다 우리의 이해는 우리의 세계에 기초하고 있으며, 대지의 물러남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되게 마련이다.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고, 우리의 경험에 호응하는 대지의 나타남의 양상을 지적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대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단 ‘대지’가 추상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관행에 저항하면서도 관행을 지탱해주는 것이 늘 있고 그러한 것이 현실의 모습을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대지와 세계 사이의 투쟁을 유발하되, 모든 것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지배할 수 있는 일관된 존재 양식이나 존재 방식을 세우는 일에 기여함으로써 유발한다. 대지와 세계가 서로 투쟁에 돌입할 수 있도록 예술 작품은 각자에게 확고한 형태를 부여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사물의 본질을 순수하고 소박하게 현시한다. 어떤 존재자를 환히 빛나고 아름답게 나타나도록 하고,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다른 각도에서 느끼도록 이끈다.


그러나 예술 작품만이 우리를 예술로 인도할 수 있는 새로운 실존 양식이나 방식을 제시하진 않는다. 하이데거는 새로운 존재자의 진리를 창조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세계를 의미 있게 만드는 새로운 양식을 명료히 표명하는 철학자를 통해서 열린다고 피력하였다.

문제는 하이데거가 그러한 기대를 국가사회주의(나치즘)에 걸었었다는 것이다. 그의 맹점은 대지를 물러나게 하여 등장하는 진존재, 다른 각도에서 본 세계가 기존의 실존 양태보다 끔찍할 수 있음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음을 시인하고 여생을 자신의 정치적인 단순성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오늘날까지 나치 부역자로서 그의 이론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좋은 구실이 되고 있다.


철학자 데리다는 자신의 논문 《정신에 대하여》에서 하이데거의 텍스트 중 정신Geist이라는 어휘의 사용을 추적하고 있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은 하이데거에게 ‘정신’ 이라는 용어가 전혀 핵심적인 말이 아니란 것이다. ‘현존재’, ‘배려’ 와 같은 중심 개념도 아니고, 『존재와 시간』에서는 이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까지 선언하며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하이데거는 불과 6년 전 『존재와 시간』에서의 다짐과 달리 1933년에 ‘독일대학의 자기주장’ 이라는 명백히 나치를 지지하는 의향을 내비치는 연설을 할 때 Geist를 언급한다. 무려 ‘존재의 본질을 향한 결의’ 라고까지 정의를 부여하면서 말이다.

얼마 후인 1935년에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입문』을 출간한다. 여기서 정신은 모순된 2가지 장면에서 사용된다. 첫 번째는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기준이다. 동물은 세계를 갖지 않지만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은 세계를 갖는다. 여기서 세계는 아주 정신적인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한편 하이데거는 정신을 ‘특수성’ 과 ‘보편성’ 의 맥락에서 각각 제시한다. 유럽-독일을 특징적, 특권적으로 구분시키면서도 모든 인간을 보편적으로 정의하는 조건을 정신이라 한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정신의 운동성’ 이다. 1942년에 횔덜린에 대해 논한 강의에서 ‘정신은 처음에는 자신의 것이 아니다. 정신이라는 것은 조국을 위해 희생한다. 정신은 식민지를 사랑하고 용감한 망각을 사랑한다.’ 는 ‘정신의 과정의 관계’를 논하는 횔덜린의 표현을 하이데거는 중시한다. 상기한 대로라면 ‘정신의 운동성’은 ‘제국주의와 자본의 메커니즘’ 과 평행한다.

최후에는 ‘정신은 불꽃’ 이다. 1953년 게오르그 트라클에 대해 쓴 문장에서 하이데거는 트라클의 ‘정신의 이미지는 불꽃’ 이라는 부분을 상당히 중시하고 있다. 불꽃은 모든 걸 다 태워버리며, 따라서 자신에게 머물 수 없고, 존재로서의 자신을 부정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정신은 자기-밖-존재das-Außer-sich’라고 논한다. 불꽃이 지나간 자리엔 하얀 재만 남는다. 이는 ‘악의 이미지’ 이며, 정신은 ‘선’ 이 아닌 ‘악’ 에 의해 정의된다 - 고 데리다는 비판한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사변에서 조심스럽게 ‘정신’을 논했지만 결국 세계-내-존재인 자신이 ‘인간중심주의’ ‘게르만중심주의’를 비껴갈 수 없었다. 통상적으로 떠올리는 ‘형이상학적 동일성을 공유하는’ 정신이 아닌 ‘외재하며 순수한 차이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정신이란, 실천의 영역에서는 ‘악’ 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야말로 니체부터 데리다까지 주창한 ‘탈구축(해체)’ 그 자체다. 데리다가 비판한 하이데거야말로 데리다적이었던 셈이다.

하이데거가 스승 후설의 현상학을 독창적으로 해석하고 실천한 반反존재의 존재론, 존재자로서의 현존재의 인식론은 좋든 나쁘든 이후의 철학 사조를 양분했고, 구조주의든 포스트구조주의든 무엇이든 부정의 철학을 꾀하는 모든 학자들은 하이데거에게 조금이라도 신세지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인 단순성, 현실을 보는 좁은 시야는 마땅히 비판해야 하지만, 니체, 비트겐슈타인과 더불어 오랫동안 계승된 진리를 근본부터 재정의, 재구축하고자 했던 용기는 오늘날에도 조명할 의의가 있는 학자의 덕목이다.




참고 문헌


『인식과 실존』 (박이문 著)

『Nietzsche: Der Wille zur Macht als Kunst』 (M.Heidegger 著, 박찬국 譯)

『Unterwegs zur Sprache』 (M.Heidegger 著, 신상희 譯)

『Heideggers Philosophie der Kunst』 (F.W.Herrmann 著, 이기상, 강태성 譯)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M.Heidegger 著, 이기상 譯)

《De l'esprit: Heidegger et la question》 (J.Derrida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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