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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Nov 03. 2021

서브컬처와 철학 (7)

프로이트 이론과 함께 읽는 모토나가 마사키




지그문트 프로이트, 1921년 촬영



들어가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ergo sum cogito’, ‘주체성’으로 대변되는 근대 서양 철학의 포문을 연 데카르트의 이 언명은 바로 그 주체성을 회의한 의심의 세 대가 마르크스, 니체, 그리고 프로이트에게 대대적으로 반박 당한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과 인간 역사의 근본 궤도가 (지금까지 막연히 믿어졌듯)인간 주체의 관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설명된다는 골자의 사적 유물론을 주장했다. 니체는 플라톤과 기독교의 출현 이래 인간이 본연의 생명력을 망각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노예 상태인 인간을 넘어서야 한다는 초인 사상을 주장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을 비롯한 ‘무의식’ 이론을 통해 인간이 주체적 이성의 동물이 아님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주체를 의심한 대가라 불리는 만큼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은 회의와 부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생에 대한 욕구와 욕망은 동시에 죽음에 대한 욕구와 욕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후대의 몇몇 연구자들이나 독서가들이 비평하듯 개인 중심의 자폐적이고 독선적인 귀결이 결코 아니다. 이번 글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걸 알게 될 것이다.


모토나가 마사키는 2000년 otherwise社에서 발매한 『sense off ~a sacred story in the wind~』이래 꾸준히 게임 시나리오와 라이트노벨을 통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일상에서 비일상으로의 전환 속에서 사랑, 생명, 가족 등의 가치 개념을 자신의 철학적 사색을 통해 풀어내는 그의 일관된 작법을 나는 아주 좋아한다. ‘나’의 입장에서 세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의심하면서도 동시에 세계와 공유할 만한 가치를 고민하는 그의 작품 전반의 기조에서 프로이트가 연상된다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번 글은 (대부분 모토나가 마사키를 모를)독자 여러분들에게 그의 작품 세계를 소개할 기회로도 유용할 것이다.



① 이야기를 의심하고 세계를 의심한다, 세카이계セカイ系



Image from 『未来にキスを』Copyright by (C)otherwise 2000~2001



헤라클레스, 테세우스 등 여러 영웅 신화들을 떠올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어렴풋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떨어져 비범한 환경에서 성장하게 된다. 또한 그림 형제나 안데르센의 동화에서 많은 경우 주인공은 어릴 때 숲에 버려지거나 부모의 자의로든 타의로든 세상과 단절된 채 다른 양육자에게 길러진다.


전근대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런 식으로 ‘고아 상태가 되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프로이트는 이를 두고 ‘아이가 부모의 지배로부터 정신적으로 완전히 독립하는 건 인간의 발달에 불가결하다’ 고 논한다. 사회의 진보는 늘 그렇게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대립을 통해 야기된다. 그리고 자식은 부모로부터 정신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내가 만약 고아라면(이 집 자식이 아니라면)’이라는 공상을 한다. 이러한 현상을 프로이트는 가족 소설Family Romance이라 부른다.


<아이의 공상은 가치가 떨어진 부모를 쫓아내고 원칙으로서의 사회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자신의 부모라 상정한다. 이에는 현실의 경험을 동반한 우연의 관계가 동원된다.> - 《신경증자의 가족소설》(S.Freud 著, 中山元 譯) 中


이러한 공상을 하거나 이야기를 읽는 것은 개인의 성장이나 사회의 진보에 불가결하다고 위에서도 밝혔다. 그러나 또한 ‘(이런 덜 떨어진 부모와 집구석이 아닌)진짜 핏줄’이라든지 ‘이곳이 아닌 어딘가’를 추구하는 자세는 근대 이전의 낭만주의와 친화성이 크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촌락’이라는 공동체에서 벗어나 ‘사회’라는 타자와의 공생을 모색하기 시작했을 때 근대가 열렸다고 간주한다.


산업 혁명 이후 도시 속 개인의 타자와의 공존은 하루하루가 고독과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이를 대변하듯 사르트르, 카뮈 등의 저자들은 『존재와 무』,『이방인』등의 저서를 통해 세계에서 규정되는 본질에 앞선 인간 실존을 사유하였다. 한편 전후 일본의 문학에서는 패전의 고통과 상실감 속에서 이제 명명백백히 서구의 헤게모니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현실을 작품 속에서 회귀나 타자화 등의 방식으로 그 근대성을 부정 내지 초월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근대를 넘어선 이제 일상의 ‘나’는 ‘촌락’ 속의 일원도, 기계 사회의 부속품도 아닌, 움직이는 하나의 ‘세계’이다. ‘나’의 영향력은 가족, 마을에 국한되지 않고 심지어 나라, 세계의 존립마저 좌우한다. 이것이 지난 수십 년 간 서브컬처 문학에 영향을 끼친 ‘세카이계’ 담론의 골자이다. 여기까지 온 데는 최초의 ‘나’에 대한 회의를 증폭시킨 끝에 ‘세계’를 회의하는 데 이르렀음을 눈치 챌 수 있다.


물론 위에서 말했듯 ‘사회’라는 타자와의 공생을 모색하길 잊어버린 세카이계 담론은 실존철학의 대가 하이데거가 비판받는 점인 ‘독단성’을 피할 수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오타쿠 비판’의 골자인 ‘방구석에서 혼자 카피캣 짓이나 하는 녀석들’에서 근본적인 방점은 ‘카피캣’보다는 ‘방구석에서 혼자’에 찍혀 있는 셈이다. 그의 작품들에서 근대 이전 공동체의 모습에 대한 동경이 깃들어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이야기를 돌려서 모토나가의 작품들은 적든 많든 이런 세카이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01년 9월에 발매한 『미래에 키스를未来にキスを』의 오프닝곡 Kiss the future는 다음과 같은 가사로 시작한다.


小さな心 僕の世界ではただ君のことしか見えてない

頭使ってそっと想うより君に触れていたい

조그마한 마음 속 나의 세계에서는 그대밖에 보이지 않아

머리를 굴려 살며시 생각하기보단 그대에게 직접 닿고 싶어


주인공 사사모토 코스케는 자주 집을 비우는 부모님의 사정으로 사촌 여동생 아스카이 카스미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 이모 부부가 한 달간 집을 비우게 되고 둘만 있게 되자 카스미는 코스케에게 “나를 오빠의 노예로 삼아 줘.”라며 고백한다. 이어지는 게임 본편은 이 한 달 동안 카스미를 포함한 네 명의 히로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신변잡기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부터 코스케가 세계의 전부라고 공표한 것과 다름없는 카스미를 제외하면 나머지 히로인들의 루트에서는 반드시 모종의 회의가 나타난다. 유즈키 시키코는 코스케에게 사랑을 느끼고 일시적으로 연인 관계가 되지만, 지나치게 이성과 논리를 중시한 나머지 ‘보장할 수 없는 관계의 영속성’과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 가능성’ 때문에 마지막에는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관계로 돌아간다. 모리사토 시이나는 세계가 무한히 순환하는 영구기관이 아닐까 생각하고, 칸자와 유우카는 ‘어떤 대상을 특별하게 생각하면 그것의 이면까지 알아버리게 되고, 그렇게 평범한 일상에 녹아들면 더 이상 특별하게 여길 수 없다’며 코스케와의 관계를 고민한다.


히로인들은 하나같이 주인공을 두고 ‘(세계와의 관계에서)기존의 인간을 넘어선 특별한 존재’라고 평한다. 작품 내내 암시되는 세계의 진실은 최종장 Genesis에서 카스미의 사촌인 케이코의 말을 통해 밝혀진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사람은 관계에서 상대방 자체에 주목하고자 했으나 이는 곧 상대의 전적인 소유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고, 사람은 서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은 성취할 수 없는 과제였다. 그렇기에 정보를 공유하며 서로에 대한 상像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현대인은 점점 더 이상 상대방 자체를 보기보단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며 상대방의 ‘개념’을 소유하려 한다. 그를 통해 비로소 서로가 서로를 소유할 수 있게 되고, 새로운 인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시키코와 유우카 루트에서 직간접적으로 다루는 테마이다. 상기한 시키코와 유우카의 고뇌는 결국 ‘서로를 전적으로 소유하지 못하는 데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우카 루트에서 코스케는 유우카의 눈을 감게 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선배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죠. 선배의 생각 속에는 분명히 내가 있어요. 나도 모르는 내가 있고, 대상 자신도 모르는 모습이 얼마든지 있어요. 적어도 그것들은 선배 안에서만 있는 특별한 것들이에요.”


시키코는 케이코의 말에 동의하냐는 카스미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동의하냐, 반대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 인식의 문제야. 우리들은 더 이상 상대방을 보지 않아. 그저 우리 안의 ‘속성’에 불과한 것을 보고 있을 뿐이지. 자신 안의 속성을 환기하며 눈앞의 인간에게 끼워 맞출 뿐이야. 우리들은 스스로의 안에 있는 속성을 바라보며 그것을 상대로 대화하고 있어. 외적 세계를 내적 세계에 대입한다고 할까, 거꾸로 내적 세계를 외적 세계에 부연한다고 할까, 뭐라 말하면 좋을까… 세계의 바꿔 읽기? 인식의 외계를 향한 피드백? 그런 느낌이야. 우리들은 지금 최전선에 있어. 거기서부터 새로운 역사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고 있어. 우리가 서 있는 장소를 경계로 해서 역사가 바뀌어. 우리는 진화하려 하고 있어. ‘사회성’을 극복하고 말이지. 지금까지 인류를 지배해 온 최악의 감옥을 빠져나와서는 자신만의 감옥에 들어가는 거야. 존재를 존재로 인식하지 못하고 비존재에 대한 사랑을 존재에 쏟아 붓는 거야. 우리가 되려는 건 그런 종족이야. 낡은 인류는 멸망하고 우리가 살아남은 거지. 그러니까 웃어도 돼, 이 앞에는 낙원이 있을 뿐이니까.”


세계에 대한 회의 끝에 다다른 건 아예 새로운 개념의 인류이다. 시키코가 말하듯 어디까지나 현실 인식의 문제이지만, 그렇기에 ‘내 안에 있는 세계’가 그러한 것을 반박할 구실은 아무것도 없다. 모토나가가 직접 작사한 Kiss the future 2절의 가사를 보자.


もう滅びつつある人と世界には語りかける必要はない

僕ら生まれ変わる新しい人に 最後のGenesisをこえて

이제 멸망해가는 사람과 세계에 말을 걸 필요는 없어

우리는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최후의 창세기Genesis를 넘어


세카이계의 이러한 자폐성은 지지층에게는 결정적인 매력인 동시에 반대층에게는 불쾌함의 결정적 요인이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 논고』에서 말한 ‘침묵해야 하는 말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카이계를 싫어하는 미야자키 감독이 열심히 자신의 상념에서 투영한 이상적인 공동체를 그린 작품을 만들어내는 건 어찌 보면 유일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대항 수단인 셈이다.



➁ 죽음을 향하는 충동



Image from 『Sense Off ~a sacred story in the wind~』Copyright by (C)otherwise 2000~2001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기 자신과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이중적 존재 방식’에 대한 증거이다. 나는 내 자신의 생존과 쾌락을 걱정하는 개별적 존재인 동시에 인간이라는 종의 일원으로서 번식과 생존을 걱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 논지를 더욱 진전시키면 우리는 종으로서 인간의 ‘삶’과 ‘죽음’조차도 염두에 두는 존재라 말할 수 있다.


<모든 생명체는 보존적인 충동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 이러한 충동은 태곳적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힘이라고 보아야 한다. (…) 만일 생명체가 아직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이것은 보존 충동에 위배될 것이다. (…) 본질적인 이유로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맞이한다. 다시 한 번 생명이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는 원칙이 예외 없는 진실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모든 생명체의 궁극적 목표는 죽음이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 『쾌락원리를 넘어서』S.Freud 著


타인에 대한 사랑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심각한 육체적, 감정적, 지적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수많은 자극 앞에 기꺼이 노출시키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이러한 자극은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안겨주며 우리의 외부 세계와 내적 경험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침입해 들어온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신체적 경제성 원리’에서 “우리의 정신세계는 자극의 수준을 가능한 한 낮게 또는 겨우 지속될 수 있을 만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고 규정하는데, ‘죽음 충동’ 이론은 절묘하게도 이와 어긋나지 않고 이어진다.  프로이트는 무기력감이 죽음에 대한 충동의 표현이라고 주장하는데, 긴장을 최소화하려는 소망은 그것을 없애버리려는 욕망에서 출발하며 결국 우리가 나왔으며 우리가 돌아가게 될 무생물의 안정적 상태로 돌아가려는 욕망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인생에서 확률로나 직감으로나 안 될 걸 알고 시도했다가 비참한 실패를 맞은 적이 숱하게 많다. 반복적으로 실망감을 맛보는 이유는 우리의 내면에 삶을 포용하고 발전해나가려는 성애 충동에 맞서는 ‘죽음 충동’이라는 악랄한 괴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죽음 충동은 극히 보수적이라 모든 자극을 최소화하며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원시 생명체’ 즉 ‘변화를 싫어하는 성질’을 일깨우려 한다.


00년에 발매한 『sense off』본편과 주인공 모리무라 나오야는 마치 작가가 이러한 ‘죽음 충동’을 모티프로 상정하고 집필한 듯한 인상을 준다. 자전거 사고로 병원에서 뇌파 측정을 받은 결과 때문에 인식역학 연구소로 초빙된 나오야는 그곳에서 히로인 오리나가 나루세, 하니지마 타마키, 마카베 시이코, 산죠 미나기, 미사사기 토오코를 만난다. 이들은 각기 뇌파 측정에서 평범한 인간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가 나와 궁극적으로 모종의 ‘이능’을 갖고 있음이 확인되었고 그러한 이유로 연구에 협력하고자 모인 것이다.


사실 이 이능력자들은 ‘사유 생물’이라 불리는 외계의 정신 기생체의 일종으로 오래 전 지구에 불시착한 이래 각기 다른 사람으로 환생을 거듭하며 역사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나오야의 최초의 전신인 연산자는 지구의 원시인들을 지키고자 우주선의 경로를 약간 변경했고, 그 결과 우주선이 피폐해진 끝에 완전히 파괴되며 수많은 동족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때 생긴 저주로 아직까지도 다른 동족과 관계를 맺으면 자신과 주변이 불행해진다.


1700년 경 독일의 베르톨레 레제라는 수학자로 환생하여 시대를 초월한 이론을 발표했으나 동시대의 라이프니츠조차 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사기꾼으로 전향하여 근근이 먹고 살다가 시이코의 전생인 게르트루트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시이코(게르트루트)의 치유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다가 결국 사망하는데, 본편에서도 나오야는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행동을 주저 없이 한다.


주인공부터가 이러니 본편의 대부분의 루트는 주인공이나 히로인의 죽음으로 끝난다. 본작보다 과거 시점을 다루는 차기작『미래에 키스를』에 등장하는 아스카이 케이코(소녀 A)의 경우 본편 시작부터 병 속의 뇌만 남아 의식을 유지하는 상태이다. 유일하게 아무도 불행해지지 않는 루트는 아무하고도 이어지지 않은 채 소풍을 가는 엔딩이다. ‘현상 유지’가 되고 있으니 보수적인 죽음 충동이 발휘될 일이 없다는 뜻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단 프로이트는 모든 에로스적 충동에서 비롯된 생의 활동을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멈춰 서서 다시 돌이켜보자, 그럴 리가 없다.”그러한 논리를 그대로 밀고 나갔다간 정신분석학적 사고 활동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성애 충동은 죽음 충동의 부차적인 산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생물학적 지식을 활용, 성애 충동이 죽음 충동에서 독립을 쟁취한 방법을 설명하려 했다. 그에 따르면 원시 생명체들 중 일부는 자기 파괴의 길을 거부하고 ‘생식세포’로서 스스로의 성장과 발달을 도모하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이 생식세포들은 생물체의 죽음에 대항하여 잠재적인 영속성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죽음에 이르는 길을 연장했다.> - 『쾌락원리를 넘어서』S.Freud 著


강한 죽음의 동인은 역설적으로 강한 생의 동인이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과 히로인들은 역사 속에서 그리고 본편의 현재에서 그때그때의 생에 충실했다. 그들은 사랑을 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죽었다. 인류를 이끌어 온 것은 보수적인 죽음의 충동만이 아니다. 태곳적부터 내재된 생과 사랑의 충동은 현대 과학으로 측정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하며 계승되어 왔고, 우리는 그 증인이다. 필연적으로 생명이 없는 상태로 돌아갈지언정 우리에게서 생과 사랑을 계승받은 자들은 또 우리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 부른다.



③ 생과 사랑에 대한 충동



Image from 『猫撫でディストーション』Copyright by (C)WHITESOFT 2010~2015



프로이트는 “인간은 ‘리비도libido’라 부르는 성적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논한다. 이것은 단순한 성욕이 아닌 삶의 충동 그 자체이다. 이 충동은 삶의 변화를 통해 우리가 정신적 발달과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인식을 토대로 적극적으로 변화에 대응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신경증의 원인은 억압된 성적 에너지가 신체 증상으로 전환되어 나타난 것이다.


리비도는 보존하는 힘인 동시에 파괴하는 힘이기도 하다. 일례를 들면 나르시시즘은 자아-리비도ego-libido와 대상-리비도object-libido가 혼동된 상태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타인의 자신을 향한 사랑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랑의 원형은 영원한 가학・피학적 계약관계sadomasochistic pact이므로 나르시시스트의 격렬한 자기애는 자기보존 본능에 따라 타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집착적 욕구와 완벽히 맞물려 있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에겐 타인에 대한 사랑조차도 나르시시즘의 대체물일 뿐이다. 나르시시스트를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자기폐쇄성과 무관심에 상처입기 마련이다.


프로이트는 “진정 행복한 사랑은 대상 리비도와 자아 리비도가 하나로 통합된 원초적 상태를 의미한다” 고 말한다. 이는 자기애와 타인에 대한 사랑이 구별되지 않는 상태이다. 여기서 말을 좀 더 건설적으로 바꾸어 보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동등하게 타인(만인)을 사랑할 수 있는 상태’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사랑이 아닐까. 리비도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측정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어도 ‘바람직한 상태’를 상정하고 유도하는 것뿐이다.


2011년에 모토나가는 『네코나데 디스토션猫撫ディストーション』을 발표한다. 여기서 모토나가는 전작 『미래에 키스를』에서 어느 정도 정돈한 그의 철학적 사색을 바탕으로 각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빌려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개념 중에 감각질qualia이라는 게 있다. 이것은 무언가를 지각하며 느끼는 기분, 떠오르는 심상 따위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특질을 가리킨다. 감각질은 철저히 주관적이기에 객관적인 관찰이 극히 어렵다.


20세기에 뇌과학자들은 뇌의 기전을 알 수 있으면 ‘의식’의 수수께끼도 풀리리라고 생각했다. 감각질의 존재를 지지하는 철학자 차머스David Charmas는 이를 부정한다. 차머스에 따르면 이는 심리학과 신경과학이 대답할 수 없는 문제에 해당한다. 주관적인 감각질에 따라 지각하고 느끼고 심상을 떠올린다면, 거꾸로 물리적이고 동일한 뇌가 아닌 무언가가 감각질을 가질 수 있다고 우린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또한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 정신 작용을 하는 나와 똑같이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어떠한 의식적 내용도 경험하지 않는 물리적 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 이를 차머스는 ‘철학적 좀비’라 명명한다. 철학적 좀비는 우리와 겉모습에서 전혀 차이가 나지 않으며, 다만 의식적 내용만을 결여하고 있다. 나와 동일한 기능적, 계산적 상태를 취할 수 있는 존재를 나와 똑같은 존재라고 말해도 어떻게 그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철학적 좀비는 차머스가 물리법칙과 물량론으로 모든 설명을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인 유물론을 공격하고자 내세운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의식, 감각질, 경험 등을 모두 뺀 세계를 현재의 물리학으로 상상할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철학적 좀비만이 있는 좀비 월드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세계에는 물리법칙에 포함되지 않은 의식, 감각질, 경험 등이 갖추어져 있다.


타츠키의 애묘 기즈모는 하루아침에 메이드복 차림의 미소녀로 변한다. 그리고 타츠키를 비롯한 가족들은 이런 기즈모를 보는 순간 ‘사람’으로 인식하는데, 차머스에 따르면 그것은 기즈모가 물리적으로 완벽한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타츠키를 비롯한 가족 개개인에게 있는 감각질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현상적인 것 또는 현상적인 것을 이루는 보다 근원적인 "(물리적인 것에서 비롯되지 않는)X"의 존재를 긍정하지 않으면 차머스의 감각질도 프로이트의 리비도도 긍정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랑이라는 감정 역시 눈에 보이지 않으나 우리는 그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 나와 완전히 똑같은 물리적 구조를 지닌 고깃덩어리가 ‘생명을 유지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걸 상상할 수 있을지언정 내가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살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리비도보다 더욱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는 충동을 프로이트는 ‘에로스Eros’라 명명한다. 이는 곧 타인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은 에로스를 통해 종을 번식하고 집단 형성과 생활, 미적・과학적 업적을 달성한다. 에로스를 맨 처음 그러한 의미로 포착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에로스는 사랑의 본질이다. 완벽한 이상idea을 그리워하는 사랑이야말로 본질적인 사랑이라고 플라톤은 사유한 셈이다.



마치며



언어로 규명하지 못하는 것들에는 알 수 없는 흡인력이 있다. 프로이트가 당대의 명사들에게 칭송을 받은 데엔 언어로 규명하지 못하는 것들을 과학과 예술의 개념을 빌려 규명하려 했다는 점 역시 크게 작용할 것이다. 현대의 뇌과학자들과 심리학자들 그리고 유물론적 딜레탕트들에게 가장 많이 인용되면서도 가장 많은 반감을 사고 있는 프로이트지만, 언젠가 또 다시 시대의 지성으로 칭송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계정신으로서 근원적인 X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헤겔이 말한 이성의 꾀List der Vernunft를 부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X가 세계정신이든 인류에게서 난 사상의 괴물이든 딱히 상관없다. 나에게 근원적인 X는 규명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열렬히 사색하고, 열렬히 전개할 영역이다. 하야오가 그렇고 모토나가가 그렇듯 말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 그 침묵의 저편에는 무한한 ‘나’와 ‘세계’가 있고, 그를 중개하는 '사회'가 있다. 길고 짧은, 고 얕은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그를 확장하는 것 역시 동서고금 인간 본성에 내재된 생의 욕망이 아닐까.













참고 문헌



《The Family Romances》S.Freud 著, 中山元 譯

《Jenseits des Lustprinzips》S.Freud 著, 강영계 譯

『Die Traumdeutung』S.Freud 著, 이환 譯

『The Conscious Mind』D. J. Chalmers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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