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과 『타나토스의 사랑』 그리고 인격
<용감한 장교가 학교를 다니는 소년 시절에 과수원에서 서리를 해 매를 맞고, 첫 번째 임무에서 적군에게 군기軍旗를 뺏고, 눈에 띄는 생활 끝에 장군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다음과 같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도 가정해 보자. 그가 군기를 빼앗았을 때 그는 자신이 학창 시절 매를 맞은 사실을 의식하고 있고, 장군이 되었을 때 그가 군기를 빼앗은 사실을 의식하고 있지만 매를 맞은 기억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로크의 원칙에 따르면 학교에서 매를 맞은 인격은 군기를 뺏은 인격과 같고 군기를 뺏은 인격은 장군이 된 인격과 같다고 추측할 수 있다. 논리적인 사실에 따르면 장군은 학교에서 매를 맞은 인격과 동일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장군의 의식은 매를 맞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따라서 로크 선생의 원칙에 따르면 그는 매를 맞은 인격이 아니다. 그러므로 동시에 장군은 학교에서 매를 맞은 그 인격과 동일한 인격이 아니다.>
<인격의 동일성을 의식하는 필요조건은 자기 자신의 증명이다. 그러므로 인격의 동일성의 본질은 개념에 대한 지식을 넘어설 수 없다.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전제하는 사실을 구성할 뿐이다.>
<여기서 관찰될지도 모르겠지만 (몇몇 위대한 철학자가 부정하지 않았었다면 관찰은 불필요했겠지만)‘나’를 그 일을 한 인격으로 성립시키는 건 ‘나’의 여느 행위에 대한 기억하기가 아니다. 이 기억하기는 ‘나’가 그것을 했음을 확실하게 알게 한다. 그러나 기억이 나지 않아도 ‘나’가 한 일일 수도 있다. ‘나’가 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나’의 관계는 ‘나’가 조금도 그 행위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동일하게 성립한다. ‘나’가 그런 일을 했음을 기억한다고 말한다든지, 기타 방식으로 표현하는 걸 선택한다든지 하면, ‘나’가 그 일을 했음을 의식함으로써 ‘나’는 그 일을 한 것처럼 된다. 이는 내 입장에선 굉장한 부조리인데, 마치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나의 믿음이 세계를 창조되게 했다는 논리와 같다.>
<오늘 아침 손과 얼굴을 씻었다고 믿고 있을 때 이 명제의 진실에는 필연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즉 그랬을 수도 있고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그것을 전혀 믿지 않은 채 뚜렷하게 그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것을 믿게 되는 걸까? ‘나는 그것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이게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이 기억하기는 나의 마음의 행위이다.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기억한다는 행위가 일어났을 거란 사실은 불가능할까? 전자와 후자 사이에 필연적인 연결을 찾을 수 없음을 나는 고백한다.>
이는 본질이 자발적으로 활동할 수 없으며 운동이 없는 신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내가 상정하는 사실에 기반을 둔다. 경험이 이러한 관점에서 나를 지지하며 이를 확신하려면 활동의 결여에 대해 보일Boyle의 책을 참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나는 합리성이 여기 있다고 믿으며, 이것이 내가 원자atom의 존재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유 중 하나다.
공간과 시간의 차이에 더해, 미분의 내적 원리가 존재함은 항상 필연적이다. (…) 공간과 시간(즉 외부 세계와의 관계)은 사물을 구별하는 역할을 완수하는데 그 자체는 규준에 의해 구별되기가 어렵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을 구별하는 건 가능한 채이다. 따라서 동일성과 차이라는 정확한 용어는 시간과 공간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사물의 차이는 시간과 공간 둘 중 어딘가에 연관됨은 사실이다. 공간과 시간, 그리고 다른 공간과 시간은 그 자체가 완전히 유사하나 실체나 완전한 현실을 제시하진 않으므로 사물을 통해 공간과 시간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의식과 반성이 없는 끝없는 대량의 지각은 우리가 의식하고 있지 않은 혼 자체에 변화를 일으킨다.
<Omnis determinatio est negatio(모든 규정은 부정이다)>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