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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Jul 14. 2021

서브컬처와 철학 (6)

『사랑의 기술』과 함께 읽는 마루토 후미아키



들어가며



‘사랑은 배우는 것이다’라는 명제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사람이 없진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사랑은 그저 간지러운 감정이며, 또 누군가에겐 호르몬의 화학 반응이 가져오는 환청, 환시, 망상 같은 정신병이며, 심지어 누군가에겐 육욕과 번식욕을 아름다운 운문으로 써놓은 선사 시대 이래 인류의 지혜로운 자기기만일 수도 있다. 그리고 『사랑의 기술Die Kunst des Liebens』의 에리히 프롬Erich Fromm에게 사랑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만이 아닌 결의이자 판단이고 약속이다.


프롬은 “능동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는 한, 참된 겸손, 용기, 훈련, 신념이 없는 한, 개인적인 사랑에도 실패한다”고 단언한다. 이에 따르면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연애 감정보다 더욱 근원적이면서도 치명적인 인간 실존의 영역에 있는 셈이다. 연애를 두고 사람들은 곧잘 ‘사랑에는 완전한 죄인도 완전한 무죄인도 없다’고 한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화자들의 대부분은 “감정이 시키는 일인 걸 이성으로 미주알고주알 따져서 무슨 소용이냐”는, 적나라하게 말하면 ‘사랑을 하루아침에 자신과 분리시켜놓고 유죄 판결하는’ 저의를 애써 감추고 있다. 그런데 프롬의 사랑의 명제에 따르면 개인적인 사랑의 실패의 이면엔 엄연히 모종의 덕성, 능력, 기술의 미숙함 내지 부재가 있다. 그것은 부덕vice의 소치라 말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쯤 되면 커튼을 걷고 “How dare you!” 라며 눈을 부라리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불특정 다수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며 유죄 판결을 내리고자 이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다. 프롬의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어느 시나리오 라이터의 이름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바로 00년대 러브코미디 에로게임의 대표주자이면서 나의 십대를 지배한 크리에이터 중 한 명이었던 마루토 후미아키丸戸史明다.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다양한 이성 관계와 연인들의 감정선을 개연성 있게 그려내는 그의 필력을 넘어서는 시나리오 라이터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그의 작품군을 바탕으로 프롬의 사색을 소개할 것이다.


단 미리 밝히자면 여기서 프롬이 의도한 심층적 담론이나 결론까지는 구태여 다루지 않으려 한다. 책 자체가 대중서의 성격이 강해서 진입장벽이 낮고, 저번 서브컬처와 철학 (4) 편처럼 ‘서브컬처’ 쪽이 찬밥 신세가 되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결론을 말해야 하는 소위 변증 구조를 지니지도 않으므로, 후미아키의 내러티브를 온전히 살린 채 글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 – 세계의 지식을 확충하는 활동



Image from『ショコラ~maid cafe curio~』Copyright by (C)GIGA



2003년에 발매된 게임 『쇼콜라 ~메이드 카페 큐리오~(ショコラ ~maid cafe curio~)』의 마나이 미사토 루트를 정리해 보자. 찻집 큐리오의 임시 점장인 주인공 유우키 다이스케는 2호점 구상 겸 신혼여행 중인 아버지의 재혼 상대의 딸이 같이 살기 위해 기차로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역으로 마중 나간다. 그리고 약속 시간보다 먼저 나온 다이스케는 집을 나온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 미사토와 마주친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적당히 자리를 뜬 다이스케였지만 아무래도 신경 쓰여 발걸음을 돌려 자칫 AV 배우로 데뷔할 뻔한 미사토를 구해내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독립을 하고자 막무가내로 집을 나온 미사토를 다이스케는 큐리오의 점원으로 고용하고 같이 집을 알아봐 준다. 미사토는 특유의 붙임성과 성실함으로 어느새 한 사람 몫을 하게 되고, 어엿한 큐리오의 일원이 된다. 이 와중 다이스케는 점점 성장해가는 미사토를 보며 여동생을 지켜주고픈 보호자의 마음이 점점 대등한 성인으로서 이성을 연모하는 감정으로 변해 감을 자각한다. 미사토 역시 다이스케를 만나며 점점 모르던 세상을 알아 가는 과정에서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이 생겨나게 된다.


어느 비 오는 날 미사토의 고백을 계기로 두 사람은 사귀게 된다. 첫 데이트를 하고, 미사토는 첫 월급으로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산다. 그리고 미사토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낡은 그녀의 방에서 둘은 몸을 섞는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만이 이어지리라 생각하던 어느 날, 보디가드를 동반한 나이 지긋한 화복和服 차림의 남자가 가게에 나타난다. 자신을 미사토의 아버지라 밝히고는 보디가드를 시켜 그녀를 끌고 가려는 걸 다이스케가 막아서자, 보디가드는 다이스케를 반 초주검으로 만든다. 미사토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가고, 잠시 후 나타난 사카키바라 주방장이 미사토의 가문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을 말한다.


미사토는 유력 야쿠자 조직인 마나카이真名会의 신임 두목의 딸로, 미사토의 아버지는 딸만큼은 밝은 세상에서 구김살 없이 자라게 하고자 자신이 야쿠자라는 사실도 숨기고, 그녀를 부잣집 영애들이 다니는 여학교에 진학시켰다. 그렇게 키운 딸이 집을 나와 메이드복을 입고 허드렛일을 하며 전직 불량학생이던 점장 놈과 사귀고 있는 걸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이스케는 미사토를 돌려받고자 담판을 짓기 위해 동료들의 도움으로 마나이 저택으로 잠입한다. 미사토의 아버지와 마주한 다이스케는 그가 딸의 지난 2개월을 쓸데없는 짓이라 폄하하자 분노한다.



“그거 알아? 미사토의 손은 지금 까칠까칠하다고! 매일같이 식기를 닦고 또 닦았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건 미사토가 사회에서 한 사람 몫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자 훈장이야!”

나는 품에 들고 온 물건을 미사토의 아버지에게 던졌다.

“당신에게 이걸 받을 자격이 있어?”

미사토의 아버지는 그것을 주워 들고 말했다.

“허리끈帯留め?”

“적어도, 내 건 아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모르겠냐고! 자식은 첫 월급을 받으면, 부모님의 선물을 산단 말이야! 지금까지 키워 준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그것은 미처 포장도 안 된 채, 미사토의 방에 놓여 있었다. 솔직히 선물의 대상이 연인인 내가 아니라서 질투도 났다. 하지만 미사토의 마음을 안 이상, 나는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나는 외쳤다.

“미사토는 세상에 나와 한 사람 몫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고, 이제 하나씩 그 결실을 맺어 가고 있어. 그런 그녀의 의지를… 꺾지 말아 주십시오!”



사랑에 대한 이론은 인간 실존론으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의 실존에서 본질적인 사실은 인간이 자연을 초월해 있다는 것이다. 자연과 분리된 인간은 더 이상 낙원 – 자연과의 합일 상태 – 에 있을 수 없고, 이성을 발달시키며 새로운 조화 곧 인간적 조화를 찾아낼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확실한 건 언젠가 다가올 죽음뿐이라는 인식은 인간 실존을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든다. 분리 경험은 불안을 일으킨다. 분리되어 있는 것은 무력하다는 것, 세계 – 사물과 사람들 –를 적극적으로 파악하지 못함을 뜻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분리되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아직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에 남남으로 남아 있다. 인간이 분리된 채 사랑에 의해 다시 결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 이것이 수치심의 원천이다. 동시에 이것은 죄책감과 불안의 원천이다.


미사토는 참으로 훌륭하게 자립을 이루어내었다. 새장 속의 새처럼 그저 아버지의 보호 속에서 살려고 하지 않았고,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연상의 이성인 다이스케에게 무조건적으로 의존하지도 않았다. 만약 미사토가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인생을 결정할 시도조차 안 하고 그저 다정한 아버지의 곁에 있고자 했다면, 미사토의 아버지 역시 자신이 미사토의 온 존재를 관리하는 것에 회의를 느낄 가능성이 희박하다. 가뜩이나 야쿠자 두목의 딸은 저택에서 한 발짝만 나가도 늘 신변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으니 말이다.


한편 미사토가 식당일에 익숙해지려고도 않고 그저 다이스케의 뒤에 숨고, 심지어 자신에 대한 다이스케의 호의를 이용해 그를 세상에 대한 방패막이로 삼았다면 그 또한 문제가 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과의 융합의 달성이다. 대인간적 융합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갈망으로, 이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자기 파괴나 타인 파괴가 일어난다. 문제는 통합성이 없이 한쪽이 다른 쪽을 흡수하여 팽창하거나 맹목적으로 자신을 내놓음으로써 분리 상태를 해소하려는 합일, 즉 공서共棲적 합일은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주는 것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 표현이다. 주는 것은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며 준다고 하는 행위에는 나의 활동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준다고 하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인간적인 영역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때, 자기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즉 생명을 준다. 이는 반드시 남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 즉 자신의 기쁨, 관심, 이해, 지식, 유머, 슬픔 –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모든 표현과 현시顯示를 주는 것이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으레 “물질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선물의 현물적인 가치에 연연하는 것을 경계했는데, 어느새 이 말이 “선물(물질)은 진심(어린 말, 행동 등등)보다 못하다”는 식으로까지 비약된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선물은 그 효용성이나 시장 가치와 상관없이 우리의 생명, 나아가 사랑을 나타내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미사토가 아버지에게 선물한 허리끈도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건 수단보다는 그에 앞선 능동적인 사랑의 표현이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은 사랑으로만, 신뢰는 신뢰로만 교환하게 될 것이다. 예술을 감상하려 한다면 당신은 예술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을 갖고 싶다면, 당신은 실제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발전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관계는 당신의 의지의 대상에 대응하는, 당신의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생명의 분명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사랑을 일깨우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곧 당신의 사랑이 사랑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생명의 표현’에 의해서 당신 자신을 ‘사랑받는 자’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능한 사랑이고 불행이 아닐 수 없다.> - 『Nationalökonomie und Philosophie』 (K. Marx 著) 中



사랑의 방향 그리고 자기애



Image from『パルフェ~chocolat second brew~』Copyright by (C)GIGA



이번에는 2005년에 나온 쇼콜라의 후속작인 『파르페 ~쇼콜라 세컨드 브류~ パルフェ~chocolat second brew~』의 진 히로인 나츠미 리카코의 이야기를 알아보자. 이야기를 극중 현재보다 좀 더 과거 시점으로 돌려서, 주인공 타카무라 히토시는 비행기 사고로 죽은 형이 자신의 아내이자 히토시의 이복 누나인 에마를 위해 지어 준 찻집 파미유의 점원이 되어 줄 것을 학부 동기인 리카코에게 부탁한다. 내심 히토시를 마음에 들어 하던 리카코는 “정말 히토시는 어쩔 수 없네.” 하며 승낙한다.


친부모를 일찍 여읜 히토시에게 가족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밖에 나갔다 올 때마다 히토시는 불귀의 객이 된 부모와 형의 위패에 대고 “다녀왔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이라 인사하는 게 당연한 일과였다. 파미유 1호점이자 에마와 히토시의 집이 불타 없어진 날, 그 위패들만은 부자연스럽게 마당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본인은 리카코였다. 제일 먼저 출근하다가 화재 현장을 발견한 리카코는 히토시가 에마의 생일에 자신에게 선물한 팔찌만 회수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히토시가 상처 받을 것을 생각하고 불구덩이 속에서 위패를 건져내었고, 그때 튀어나온 못에 찔려 왼팔 전체의 신경이 마비되었다. 왼손잡이였던 리카코에겐 사실상 손 기능 전부를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이를 알리지 않은 채 리카코는 태연하게 일상생활을 지속한다. 며칠 후 히토시의 고백을 받지만 리카코는 히토시가 겪을 고통을 생각하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시간이 지나고 다들 그날의 상처에서 회복될 즈음, 졸업학년이 된 히토시는 파미유 2호점을 계획하고 그를 실현하고자 동분서주한다. 바로 맞은편에 파미유의 모티프인 큐리오의 3호점이 입점하는 걸 안 리카코는 처음에는 히토시의 계획에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큐리오는 내가 이기게 해 주겠다”며 막강한 지원군이 된다.     

그 해 크리스마스이브, 히토시는 리카코에게 고백하고 마침내 둘은 연인이 된다.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리카코는 자신의 왼손을 숨기고자 화상을 입었다고 거짓말하며 붕대를 감고 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히토시는 주방에서 일하던 에마의 가벼운 부상을 눈치 채고 처치를 해 준다. 리카코는 ‘어째서 에마 언니는 눈치 챈 거야…’ 하며 몰래 입술을 깨문다. 며칠 후 리카코는 욕실에서 붕대를 풀다가 히토시에게 들키고, 히토시는 ‘나에게 응석부리고 싶었구나’ 생각하며 리카코의 왼손에 붕대를 쥐어주지만, 당연히 리카코의 왼팔은 힘없이 툭 떨어진다.결코 들키고 싶지 않던 비밀이 탄로나자 리카코는 반쯤 정신이 붕괴된 채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뒤따라간 히토시에게 리카코는 “연인 관계는 이걸로 끝. 처음부터 혹시 들키면 그러기로 각오했으니까.” 라며 이별 통보를 한다. 히토시는 왜 다쳤을 때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았냐며 질책한다. 그러자 리카코는 자신의 왼팔이 고장 났음을 깨닫고 히토시에게 의지하려 전화한 날, “에마 누나가 정상이 아니라서 돌봐줘야 할 것 같아. 리카코라면 기다려줄 수 있지?” 라며 뿌리친 걸 상기시킨다.


히토시는 이제까지 한결같이 자신에게 헌신한 리카코를 붙잡기 위해 학부에 연락해 그녀의 자퇴를 저지시키고, 장애인이 된 그녀를 위해 과제나 시험의 필기를 보조할 것을 신청한다. 그리고 리카코의 고향인 하마마쓰에 가 양친에게 인사를 드린다. 이를 안 리카코는 불같이 화를 내며 자신 때문에 고생길을 자처하려는 히토시를 질타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의사도 이 팔이 나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어. 평생, 난 너에게 빌붙어서 너를 힘들게 할 거야.”

리카코는 말했다.

“히토시가 날 의지하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내가 히토시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순간부터, 난 히토시의 첫 번째가 아니면 견딜 수 없을 거야.”

“네가 첫 번째인 게 당연하잖아. 내 연인이니까.”

“아냐!”

리카코는 울먹이며 소리쳤다. 리카코의 눈에는 애절함과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히토시의 첫 번째는… 지금 곁에 있는 가족!”

곁에 있는 가족. 내 첫사랑 에마 누나.

“두 번째는…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

멀리 친가에서 나와 누나를 걱정하고 있는 양부모님.

“세 번째는… 이제는 없는 가족!”

아버지, 어머니, 형…

“봐! 어떻게 해도 난 네 번째야. 히토시의 첫 번째는 될 수 없어!”

“첫 번째가 되면 돼! 나와 결혼해 주면 되잖아!”

마침내 나는 묵혀 뒀던 진심을 말했다. 리카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히토시와 리카코는 마침내 서로의 온전한 진심을 알게 된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 수많은 수술과 재활과 실패를 겪고 마침내 리카코는 자신의 딸을 자신의 두 팔로 안을 수 있게 되었다. 딸의 이름은 타카무라 나츠미. 엄마의 이전 성을 그대로 이름으로 썼으니 혹시라도 이혼하게 되면 나츠미 나츠미라는 난해한 풀 네임이 될 것이었다. 이는 결코 헤어지지 않겠다는 부부의 다짐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마루토 후미아키는 자신이 만들어 낸 히로인 중 쇼콜라의 아키시마 카나코와 파르페의 나츠미 리카코를 양대 다메온나駄目女, 옮기자면 몹쓸 여자라 칭한다. 그러나 그 방향성에는 차이가 있다. 전자가 스스로 몹쓸 행동을 해서 주변을 휘말리게 하는 여자라면, 후자는 자신이 혼자 도맡아 하고 짊어지려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격지심이 들게 하는 점에서 몹쓸 여자이다.


리카코의 사랑을 보며 나는 그녀가 ‘모성애’와 ‘성애’의 경계선에 있다고 보았다. 초기의 모성애는 어머니가 자식에게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형태로 이타적이고 비이기적이다. 그러나 한편 모성애는 분명 어린아이가 자신에게 의존하고 그가 종속되어 있다는 데서 지배욕과 소유욕을 느끼는 자아도취적인 면모가 있다. 그러나 언젠가 자식은 어머니 품에서 떨어져 나간다. 어머니는 분리를 관용할 뿐 아니라 바라고 후원해주어야 한다. 이 단계에서 모성애는 모든 것을 주면서도 자식의 행복 말고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지 않는 어려운 과업이 된다.


이와 반대로 성애는 서로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이 합일하려는 욕망이다. 사람은 상대방과의 분리를 우선 신체적 분리로 경험한다. 따라서 먼저 몸을 섞는 신체적 결합으로 이를 극복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두 사람은 서로가 다른 사고와 가치관을 지닌 개별자임을 실감하고, 모든 형태의 친밀감은 점점 희박해진다. 성애는 독점하고자 하며, 이기적이고 배타적이다. 성적인 모든 행위들은 서로 완벽히 합일할 수 없는 연인을 자기기만하며 유지시킨다.


그리고 리카코의 말과 행동에서 미루어 볼 때 그녀는 이러한 성애의 본질을 꽤 정확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히토시에게 적극적으로 헌신하면서도 히토시가 자신에게 헌신하는 상황만은 피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건강한 상황이 아니다. 모성애가 성립할 수 있는 건 엄마와 자식이 한 몸이었고 자식이 아직 홀로서기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으로 만난 남녀 사이에 일방적인 희생이 있는 관계는 모성애는 물론 건전한 성애도 아니다.


요즘처럼 힐링을 강조하는 시대에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상호 배타적이다’는 논리는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나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인간 개념은 있을 수 없다. 자기 자신의 통합성과 특이성에 대한 존경이 다른 개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이해로부터 분리될 수 없음을 이해한다. 나 자신의 자아에 대한 사랑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쉽게 말하면, 나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면 다른 존재 역시 제대로 사랑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모든 사람에게 발견될 것이다. 앞에서 한 이야기지만, 순수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의 성장과 행복에 대한 능동적 갈망이며, 이 갈망은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근원이 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는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이기심과 자기애는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의 것이다. 이기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과 배려의 결여는 그를 공허하게 만들고 좌절시킨다. 그의 지나칠 정도의 자기보호는 실은 자신의 실패한 자아를 은폐하고 보상받고자 노력하는 모습이다.


자기애가 결여된 비이기적인 사람은 어떨까? 이들은 내심 자신을 구원적인 성격이라고 자아도취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살며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음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체로 불행하며,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조차 원활하지 못하다. 그들은 사랑하는 능력이나 즐기는 능력이 마비되어 있고, 삶에 대한 적의로 가득하며, 강렬한 자기 본위가 숨어 있다.


자기애가 결여된 비이기적인 어머니가 자녀에게 끼치는 해악은 이기적인 어머니의 그것보다 훨씬 지독하다. 자녀는 어머니의 비난을 두려워하고, 어머니의 기대에 따라 살려고 애를 쓰고, 덕德이라는 가면 아래서 삶에 대한 혐오를 배운다. 성애 관계라고 크게 다를 바 있을까. ‘이렇게 우울하고 불행하지만 주변을 열심히 챙겨서 스스로를 돌볼 겨를이 없는, 이런 나’에 중독된 사람이 전염시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사랑일까, 냉소일까?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리카코의 헌신을 두고 과연 헌신에 비중을 두어 상쇄할 수 있을까?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 『Meister Eckhart』 中



실존은 사랑에 앞선다          



Image from『ショコラ~maid cafe curio~』Copyright by (C)GIGA



이번엔 다시 쇼콜라로 돌아가서 진 히로인 아키시마 카나코의 이야기를 해 보자. 고등학교 시절 다이스케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매일 싸움을 일삼고 다니는 불량소년으로 교내외에서 악명이 높았다. 중학생 때부터 다이스케를 짝사랑해 온 오오무라 미도리는 그런 그를 저버리지 않고 곁에 있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이스케는 옥상에 도시락을 먹으러 올라갔다가 한 학년 위의 전교 일등 우등생인 카나코를 발견하게 된다.


며칠 전 다이스케는 CD 가게에서 도둑질을 하려는 카나코를 눈치 채고 사장이 의심스런 눈길로 보고 있다며 경고해 주었다. 점심을 굶어 배가 고픈 카나코에게 다이스케가 자신의 크로켓 도시락을 반강제로 준 걸 계기로 두 사람의 사이는 가까워진다. 카나코는 부모의 불화라든지 교사들의 기대 같은 마음 속 응어리를 다이스케에게 털어놓고,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비슷한 상처를 지닌 다이스케는 카나코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전교 최고의 우등생과 전교 최고의 문제아의 교제는 결코 주변에서 곱게 비칠 리 없었고, 이미 서로 외엔 아무것도 지킬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던 두 사람은 카나코의 어머니가 그녀를 센다이로 데려가려는 것을 계기로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기로 한다. 어느 겨울 밤, 역에서 만날 약속을 하고 카나코는 부모의 감시를 피하느라 신발도 제대로 못 신고 집을 나선다. 다이스케 역시 집을 나서려 하지만 문 밖에는 아버지와 담임 그리고 두 명의 체육 교사가 가로막고 있었고, 그대로 저지당하며 어린 연인들의 야반도주는 미수에 그친다.


학교 측은 다이스케에게 카나코와 동반 퇴학을 당하지 않는 조건으로 졸업할 때까지 그녀와 거리를 둘 것을 선고한다. 다이스케는 단장의 고통을 느끼며 카나코를 밀어냈고, 카나코는 그런 다이스케와 조금이라도 함께 있기 위해 시험을 치르지 않고 유급을 했다. ‘카나코’ 라는 호칭은 ‘카나코 선배’가 되었고, ‘다이스케 군’이라는 호칭은 ‘유우키 군’이 되었다. 그렇게 다이스케와 미도리 그리고 카나코는 같이 졸업을 하고, 다이스케와 미도리는 큐리오의 정식 스탭, 카나코는 근처 여대의 학생이 된다.


다이스케와 카나코는 여전히 서로에게 미련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카나코에겐 다이스케에 대한 사랑과 동시에 자신을 바람맞히고 이후 거리까지 둔 데 대한 원망이 남아 있었다. 이는 자신의 꿈이었던 소설가를 포기하고 자연과학 쪽 전공을 선택하고, 타지에 사는 부모의 연락을 쌀쌀맞게 대하고, 큐리오 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유급 사실을 밝히는 등 삶에 대한 자학적 태도로까지 나타난다. 자신을 상처입힘으로써 다이스케에게 더 큰 상처를 주는 카나코를 용서할 수 없던 미도리는 그녀와 대판 싸우고, 카나코는 자포자기한 상태로 고등학생 시절 올 수 없는 다이스케를 기다리던 역 앞에서 맥주를 쌓아놓고 자작을 한다.


카나코는 자신을 발견한 다이스케에게 “삼년 반 지각이야”라며 쐐기를 박는다. 그날 밤 만취한 상태로 둘은 운우의 정을 나눈다. 다음 날 수화기 너머로 자신을 ‘다이스케 군’이라 부르는 카나코에게, 필름이 끊긴 다이스케는 평소처럼 ‘카나코 선배’라 대답한다. 다이스케에게 과거의 감정을 되살린 채로 이별을 통보하여 복수하려던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자 카나코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며 “정말 싫어”라 내지르고 전화를 끊는다.


미도리는 진실을 알려주겠다며 카나코를 식당에 부르고 그보다 앞서 다이스케를 자신의 뒷자리에 앉힌다. 미도리는 카나코에게 다이스케와 잤음을 확인하듯 물어보며 지난밤의 사건을 다이스케에게 알려준다. 자신의 계획이 틀어졌음을 한탄하는 카나코에게 미도리는 다이스케와 재결합할 것을 종용한다. 그러나 카나코는 센다이에 있는 부모가 예전보다 누그러진 태도로 편입할 학교까지 알아보았다며 기어이 다이스케를 떠날 것을 선포한다. 그러면서 “다이스케는 미도리에게 맡길게.”라는 무책임한 말까지 내뱉는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미도리는 그렇게 전부 부셔버리고 싶으면 흔적도 안 남게 부셔 주겠다며, 그날 다이스케와 카나코의 야반도주를 고자질한 게 자신이었다고 밝힌다. 다이스케는 그제야 자신이 미도리에게 도주 자금으로 십만 엔을 빌렸던 걸 기억해내고, 오랫동안 알 수 없던 밀고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복수할 상대를 잘못 골랐다며 깔깔거리는 미도리의 뺨을 때리고 카나코는 도망치듯 식당을 빠져나간다.


기어이 떠나는 카나코를 마지막으로 설득하기 위해 다이스케는 그녀가 탄 기차에 올라탔다.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는 카나코에게 다이스케는 도시락을 건넨 채 어느 무인역에 내린다. 그리고 노숙을 하고자 담요를 까는데, 멀리서 차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



불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사람이 내리는 택시에서 기사의 목소리와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익숙한 실루엣이 이쪽을 향해 뛰어왔다.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카나코는 씩씩대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유우키 다이스케, 너란 놈은…!”     

나는 그날의 의기양양한 말투로 대답했다.     

“남김없이 싹싹 비웠겠지? 조금이라도 남겼으면 가만 안 둔다?”     

카나코는 빈 도시락통을 집어던졌다. 그 안에 들어 있던 건 옥상에서 만난 날 그녀가 먹었던 감자 크로켓이었다. 이걸 보고서도 카나코가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다면 정말 가망이 없었겠지만, 마음이 바뀐다면 당장이라도 달려오리란 확신이 있었다. 있는 힘껏 달려든 카나코는 나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다이스케와 카나코는 두 번째로 몸을 겹치며 명실상부한 연인 관계가 된다. 미도리와의 관계도 회복되고, 카나코는 다시금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자신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찻집 정령의 이야기를.



Image from『ホワイトアルバム2』Copyright by (C)Leaf / AQUAPLUS



이번에는 후미아키가 시나리오 라이터로서 절정을 찍은 역작 WHITE ALBUM 2의 메인 히로인 오기소 세츠나의 이야기를 해보자. 호죠대학 부속고등학교에 다니는 주인공 키타하라 하루키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으며 신문부에서 활약하고 있다. 하루키는 2년 연속 미스 호죠대 부속 우승자인 세츠나를 찾아가 3년째 참가 여부를 묻는다. 세츠나는 이때 하루키가 보여준 인간미에 호감을 느낀다.


한편 하루키는 동시에 와해된 경음악 동호회를 살리기 위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토우마 요코의 딸인 토우마 카즈사에게 학원제 무대에서 합주를 할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카즈사는 자신이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홀로 유럽으로 떠나버린 어머니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상태였다. 뛰어난 재능과 미모를 가졌음에도 수업이나 시험 등의 학교생활을 놓다시피 하여, 현재 시점에서 학교 측의 방침에 따라 음악과에서 보통과로 전과해버린 상태였다.


끊임없이 밀어내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루키를 어느새 카즈사는 크게 의식하고 있었다. 옥상에서의 자신의 키보드와 하루키의 기타, 그리고 지나가던 세츠나의 노래가 앙상블을 이룬 것을 계기로 우여곡절 끝에 카즈사와 세츠나는 친구가 되고 세 사람은 본격적으로 학원제 무대 준비를 하게 된다. 중학교 때 이성 문제에서 오해가 생겨 단짝 친구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세츠나는 마음을 열고 대할 만하다고 여긴 새로운 친구인 카즈사와 하루키가 서로 강하게 끌리고 있음을 눈치 챈다. 세츠나 역시 하루키를 호감 가는 이성으로 의식하며 점점 마음이 강해지면서도, 자신이 그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고 생각하며, 합숙 등 세 사람과의 만남을 거듭할수록 번뇌가 쌓이고 있었다.


학원제 무대를 성공리에 마친 날 밤, 그 동안의 스케줄에 지쳐 잠들어 있던 하루키에게 카즈사는 몰래 입을 맞추고, 좋아하는 친구들과 힘을 합쳐 축제 분위기를 끌어올렸다는 행복감에 차 있던 세츠나는 이를 보고 배신감을 느낀다. 어느새 중학교 때 자신을 미워한 단짝 친구들과 비슷한 입장에 놓인 것이다. 잠시 후 하루키가 잠에서 깨며 “토우마…” 라고 웅얼거리자 세츠나의 질투는 극에 달한다. 카즈사가 보는 앞에서 세츠나는 하루키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하루키는 얼떨결에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카즈사는 겉으로는 두 사람을 축복해주었지만 ‘이제 내가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며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세츠나는 두 사람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자신의 예상보다 강함을 알고 아예 몸을 내던져 하루키와의 연인 관계를 굳히려고 하였다. 가족이 여행을 가고 홀로 남은 집에서 세츠나는 ‘모두 함께 생일파티를 하자’며 하루키를 초대한다. 이를 곧이곧대로 들은 하루키는 카즈사를 데리러 그녀의 집에 갔다가 요코로부터 카즈사의 유학에 대해 알게 된다.


하루키는 세츠나의 생일파티를 뒤로 하고 카즈사를 찾아간다. 숨겨 왔던 서로의 마음을 말로 부딪치며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미 하루키는 세츠나의 연인이었고, 카즈사는 세츠나에 대한 우정을 저버릴 수 없었다. 세 사람의 마음이 엇갈린 채 졸업을 맞고, 카즈사는 유학, 하루키와 세츠나는 호죠 대학에 진학한다. 이 관계에서 남은 건 카즈사와 하루키의 마음을 알면서도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선 데 대한 세츠나의 죄책감과, 세츠나를 한구석에 둔 채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만 카즈사와 하루키의 죄책감뿐이었다.


삼 년의 시간이 흐르고, 세츠나와 하루키는 대외적으로는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실상 남보다 못한 사이라고 해도 무방한 상태였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카즈사의 존재가 끊임없이 상흔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 지경이 되어도 하루키는 세츠나를 놓아주지 않았고, 세츠나는 어쩌다 하루키와 마주칠 때 주고받는 무미건조한 인사치레만으로 위안을 얻고 있었다. 하루키에겐 그런 사소한 일조차 고문과도 같았지만 말이다.


이를 보다 못한 친구 타케야와 이오는 크리스마스에 둘이 고급 레스토랑이 딸린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 있게 예약해 준다. 하루키는 자신이 쓴 카즈사의 과거에 대한 가십적인 기사를 세츠나와 읽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목욕을 마치고 나온 세츠나는 하루키가 자신이 쓴 자필 기사를 계속 읽고 있던 모습을 발견한다. 기사를 몇 번이나 읽어본 세츠나는 그 내용이 고교 시절 하루키가 자신에게 카즈사에 대해 이야기하던 분위기의 그것임을 절절히 느끼고 있었고, 아직도 하루키가 카즈사를 마음에 두고 있음을 깨닫는다. 세츠나는 분노에 몸서리치며 하루키에게 축객령을 내린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자신의 마음을 정리한 하루키는 세츠나에게 다시 제대로 된 교제를 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혼자서 고민하던 세츠나는 내심 기뻐하면서도 여전히 하루키를 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고교 시절 경음악 동호회를 위기 상황으로 몰고 갔지만 학원제 무대에서 세츠나의 노래를 듣고 팬이 된 야나기하라 토모가 모습을 드러낸다.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는 세츠나에게 토모는 노래 좀 해보라며 그녀를 극단으로 몰아붙이고, 토모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던 세츠나는 급기야 하루키에게 전화해 “키타하라 하루키는 바보!” 라며 감정을 터뜨리게 된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하루키와 세츠나의 관계는 점차 회복된다. 한편 토모는 기어이 세츠나를 강제로 발렌타인 콘서트에 나가게 만들고, 하루키는 가출해 있던 세츠나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온다. 이번에야말로 하루키와 이어지겠다고 세츠나는 마음을 굳게 먹지만 그녀를 기다리던 건 기타를 치고 있는 하루키였다. 콘서트를 완강히 거부하는 세츠나에게 하루키는 세츠나를 세상에서 두 번째로 좋아한다고 말한다.



“결국 카즈사인 거야? 하루키의 첫 번째는, 그때나 지금이나 카즈사고, 내가 아니잖아!”     

세츠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말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세츠나가 이런 마음으로 괴로워하고 있던 건. 호텔에서 나를 내쫒았을 때? 집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 아니면 오래 전 내가 세츠나를 내버려두고 카즈사에게 갔을 때? 아니면… 내가 카즈사에 대해서 즐거운 듯이 세츠나에게 이야기했을 때?     

나의 애매한 태도가 이제까지 세츠나를 괴롭게 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분명하게 단언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나에게 세츠나가 특별한 존재가 된 순간은 변하지 않은 채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전심전력으로, 줄곧 변하지 않는 마음이 말소리가 되어 나온다.     

“내 서투른 기타 소리에, 홀연히 나타나서는 멋대로 노래를 부르는, 세츠나야.”     

그래.

옥상에서 너의 노랫소리를 듣던 날부터, 너는 나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가 되었어.

미스 호죠대 부속도, 안경을 쓰고 일하는 소녀도, 모두에게 상냥한 미소로 대하는 학교의 아이돌도, 응석을 부리며 자기 감정을 거침없이 퍼부어대는 왈가닥도, 그 어떤 오기소 세츠나도, 세츠나야.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이자 세츠나의 생일, 콘서트에서 그녀는 다시 마이크 앞에 서서 삼년 전 불렀던 ‘닿지 않는 사랑’을 새로운 마음으로 부르고, 하루키와 다시 연인이 된다. 그리고 삼년 전과는 달리 모두가 모인 행복한 생일파티를 맞이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카나코도, 세츠나도, 그리고 카즈사도 미숙한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 공통분모는 자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을 우상화하는 사이비 사랑이다. 그런 사랑에 빠지면 자기 자신을 도외시한 채 사랑하는 사람에게 존재의의를 투사하게 된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을 우상시하는 타인의 기대에 따라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게 끝나버린 사랑은 보상으로서 다시 새로운 우상을 찾아 헤매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러한 우상 숭배적 사랑은 묘사되는 강렬함과 깊이만큼 숭배자의 갈망과 절망을 드러낼 뿐이다. 로맨스 영화나 사랑 노래에서 묘사되는 이러한 감상적 사랑은 결국 대상에 대한 만족이며 현실이 아닌 환상을 소비하는 일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현대 사회에서 이미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현대인은 감상적으로 유년기를 회상하고 미래의 행복한 계획을 세운다. 현대인의 추상화되고 소외된 사랑의 형태는 개인의 현실적 고통과 고독과 분리를 완화해주는 마취제로서 작용한다.


아무리 우상에 자신의 소망을 투사한들 실존의 문제는 스스로의 힘으로서만 해결할 수 있다.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서로가 상대에게 투사하여 여러 갈등을 극복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상 본질적인 진짜 갈등을 은폐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은 불편할지언정 불순한 것이 아니다. 내면적 현실의 같은 차원에서 경험되는 갈등은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명료해지며 카타르시스 작용을 하여 당사자들에게 더 많은 지식과 힘을 갖게 하는 것이다.


각자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두 사람이 사귈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이러한 핵심적 경험에만 인간의 진실이 있고 사랑의 기반이 있다. 이러한 사랑은 안식이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도전하며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고 일하는 곳이다. 거기에는 싸움도 있고 오해도 있고 환희도 있고 쾌락도 있겠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 서로의 존재의 정수를 경험하는 장면이 있다.


앞서 인용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문장에서도 나타나듯, 사랑의 대상과 성숙도는 달리 말하면 신을 대하는 태도와도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에 현대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증명할 수 없는 신 같은 걸 인정하지 않거나, 종교의 영역이라고 애써 선을 긋는다. 그러나 신을 믿든 안 믿든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현실을 수월하게 해 줄, 혹은 속된 말로 ‘인생역전’을 시켜 줄 초자연적인 힘을 기대하고 있다. 겉보기에는 번듯한 조건을 충족한 사람들이 자아에 대한 확신이 없이 미신이나 종교에 빠져 사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런 경향이 전근대 사회에는 오히려 더했다. 그러나 최소한 전근대의 신에 대한 숭배에는 신의 정의나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자는, 공의와 진리의 화신인 신의 모습을 닮자는 의지가 동반되어 있었다. 지금은 종교인조차 신을 복종과 구원이라는 계약 관계로 보는 게 최선이다. 이는 아무리 좋게 봐 줘도 ‘우상으로서의 신’으로의 퇴보이다. 우상으로서의 신을 숭배하는 것과 우상으로서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통하는 구석이 있다. 우상은 아무리 미사여구를 붙여봤자 결국 우상 자신을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우상 숭배자들은 자기 자신을 지향하는 건강하지 못한 양태로서 자신이 만든 우상에 몰두한다.


일본에서 한때 유행했던 “사랑을 사랑한다恋恋する”는 표현은 이러한 자아도취적 사랑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그 의미는 ‘사랑을 하고 있는 풋풋하고 싱그러운 나’, ‘사랑에 상처 받은 비극의 히로인인 나’에 도취되어 정작 상대방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태이다. 카나코의 시간이 사실상 삼년 반 이전부터 멈춰 있는 것이나, 카즈사가 어릴 적엔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커서는 하루키에게 의존하는 것이나, 세츠나가 진작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지 못한 채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나, 미성숙한 자아도취의 발로인 셈이다.



마치며



앞서 말했듯 마루토 후미아키는 나의 십대를 지배한 크리에이터 중 한 명이다. 그의 시나리오를 번역하며 작가의 꿈을, 번역가의 꿈을 꾸었을 정도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철학의 프리즘을 통해 그의 작품을 말하고 싶었다. 대학생 때 서가에서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발견했을 때 언젠가 이를 통해 그가 그려낸 연애의 인간 군상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번 글을 통해 그것을 성취해 내었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현실의 과제는 남아 있다. 신을 잊어버린 사람들은 어느 샌가 사랑마저 잊어버렸다. 입으로는 가볍게 사랑을 말하지만 그 무게와 깊이는 한없이 초라해졌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우주의 지식을 확충하는 행위로서의 사랑을, 그러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스스로의 실존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은 사랑은 하나같이 우상이요, 허상이요, 피그말리온에 불과하다.


<너희들은 아직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서기도 전에 이 나를 찾아냈다. 신자란 자들은 모두 그렇다. 그렇기에 모든 신앙은 이다지도 초라한 것이다. 이제 나는 너희들에게 명하노라. 나를 버리고 너희 자신을 발견하라. 그리고 너희들 모두가 나를 부정했을 때 비로소 나는 너희들의 곁으로 돌아오리라.> - 『Also sprach Zarathustra』 (F.W.Nietsche 著, 정동호 譯) 中







참고 문헌



『Die Kunst des Liebens』 E. Fromm 著, 황문수 譯

『Meister Eckhart』

『Nationalökonomie und Philosophie』 K. Marx 著

『ショコラ~maid cafe curio~』Copyright by (C)GIGA

『パルフェ~chocolat second brew~』Copyright by (C)GIGA

『ホワイトアルバム2』Copyright by (C)Leaf / AQUAP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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