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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Jul 18. 2022

□과 ○ (9)

스피노자의 범신론과 자유

Image from  [Arcturus~The Curse and Loss of Divinity~] Copyright (C)Sonnori All rights Reserved



○에게




어제는 친척 모임이 있었습니다. 별로 참여하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어머니가 “네 하는 일이나 미래 배우자 같은 걸 다들 궁금해 한다. 뭐라도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꼭 자리 지켜라”며 으름장을 놓으셔서 어쩔 수 없이 가게 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친척 어른들은 “그렇게 돈 못 벌고 번듯하지도 않은 일 해서 어느 여자가 오겠냐”며, 마치 제가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돈이나 인정보다 더욱 크게 얻는 게 있으니 괜찮습니다.”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꼬장꼬장한 삼촌 한 분이 “하, 그게 뭔데?” 하고 빈정거리셨습니다. 이분은 옛날부터 푸념이 많고 뭘 좋게 보는 법이 없으셔서 친척 중 누구도 말을 오래 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전부 말씀드릴 수 있을 정도로 단순명료하면 왜 철학자들이 그렇게 오래 매달렸겠습니까.”라고 대충 매듭지었지요. 그러자 이분의 말씀이 가관이었습니다.


“백날 옛날 뜨쟁이들이 끼적거린 글을 들이파 봤자 그게 너한테 무슨 도움이 되냐? 결국은 거기서 벗어나서 네가 주체적인 사고를 하고 그를 통한 실천을 하지 못하면 시간 낭비고 돈 낭비일 뿐이다.”


정말이지, 저런 말은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비단 그 대상이 철학이 아니더라도 한 번도 깊이 사유하고 고민하지 않은 사람이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것들을 모두 허무로 돌릴 수 있는 야비한 논리란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논쟁을 했다간 분위기를 망쳤을 것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도 마찬가지라 대꾸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만,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군요.



□에게



‘주체적인 사고’ 말이군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실상 철학에서 주체만큼 비논리적인 독단dogma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개념도 없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얼마든지 변모하는, 그러면서 자기 자신도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이를테면 종교적인 신념과도 같은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신체 작용과 정신 작용이 본질적으로 분리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헤겔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대륙의 합리론을 지배한 이원주의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스토아 학파의 정신을 이은 데카르트는 인간은 정념을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는 의지를 지닌 존재라 주장했고, 이후의 대륙 철학에서 인간은 기타 모든 자연과는 다른 층위에서 주체적 동일성을 지닌 존재가 되었습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이런 사유에 반대했습니다. 스피노자 역시 인간을 정신과 신체로 이루어진 존재로 파악합니다. 단 신체성을 인간의 비본질적 요소로 폄하한 데카르트와 달리, 신체성을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요소로 간주합니다. 정신 상태와 신경 생리적 상태가 동반하여 작용한다는 믿음 아래 성립하는 현대 심리학・정신의학의 기조를 생각하면 스피노자의 사상은 시대를 앞선 부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실체를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철학의 원리』에서 데카르트는 이런 의미의 실체는 절대자인 신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그 자체로 존재하고 또한 자기 자신에 의해 파악되는 것, 다시 말해 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또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 정의합니다. 즉 스피노자는 실체를 자립적인 존재로 파악합니다. 또한 스피노자 역시 『에티카』에서 이런 의미의 실체는 신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은 인격성이나 순수 정신성을 소유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세계를 생성시킬 수도 소멸시킬 수도, 그리고 초자연적 힘으로써 개입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스피노자는 신을 그러한 초월적 존재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세계는 물론 신의 작동 방식까지 법칙적, 기계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늘 외부 대상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이는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자기 보존 욕구를 위축시킵니다. 그렇게 인간은 분노와 공포 등 부정적인 감정을 비롯한 수동적 정서의 노예가 됩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윤리적 과제는 일차적으로는 정념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의지의 절대성을 강조하며 훈련과 노력을 통해 모든 정념들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스피노자는 절대적 선택 능력으로서의 의지가 있다는 주장을 거부하고, 의지가 정념을 절대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주장 역시 거부합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정념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보다 강한 정서’입니다.


<정신은 모든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한에서 정서에 대해 더 큰 힘을 갖거나 정서의 작용을 덜 받는다.> - 스피노자 『에티카』中


우리는 스피노자의 주요 사상으로 ‘범신론’이 있음을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그에 따르면 신은 별개로 존재하는 인격신이 아니라, 우주, 세계, 자연의 모든 것과 자연법칙에 깃든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존재의 근간부터 시작해 생에서 품는 그 어떤 목적조차도 주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다른 모든 자연과 마찬가지로 자기보존 욕구를 통해 생을 영위하는 하나의 사태事態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주체적인 존재라 굳게 믿고 있던 인간이 이런 사유와 맞닥뜨리면 당연히 정념에 의해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를 끊임없이 이해함으로써, 스피노자처럼 신의 작동 원리마저 이해하려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지고한 위안을 얻게 됩니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정반합의 끝에서 절대정신에 다다르는 절대지絶對知absolutes Wissen에 다다르기 백오십 년 전에, 신체와 정신의 이원론에서 탈피한 스피노자는 선과 악에 앞선 자기보존의 욕구 끝에 신을 지적으로 사랑하는 데서 오는 지복至福에 도달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인간이 완전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며, 완전성의 소유 혹은 분유分有는 인간이 수동적 정서에의 예속에서 벗어나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자유인 능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00년에 나온 국산 게임 악튜러스에서 타락한 인류는 신의 분노를 사 멸망 위기에 이르고, 방주에 들어간 144,000명을 제외한 인류는 악마의 힘을 빌려 신과 대적한 끝에 종을 보존하게 됩니다. 신은 자신을 본 따 만든 인간을 사랑했으며, 그렇기에 자신의 뜻을 거스른 인간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과 악은 본디 같은 기원에서 나왔기에, 인간은 선한 동시에 악할 수 있고, 신으로부터 비롯된 악마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알았는가. 신이 인간을 사랑했듯 악마도 인간을 사랑했기에 그렇게 싸우다 죽어간 것을…> 악튜러스 中


인간은 자신의 인지가 닿지 않는 상상과 신비의 영역을 대할 때 각자의 욕망의 상을 현현하기 마련입니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이는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 옛날 동굴 속 원시인의 벽화부터 시작된 이러한 현현은 인류 역사의 원동력으로서 생성과 발전, 파괴의 양상을 반복해 왔다ー고 흔히들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역사란 게 으레 눈에 비치듯 주체적인 한 사람 혹은 몇몇 사람의 비범한, 심지어는 초인적인 능력으로 움직이겠습니까. 오히려 어느 시대든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기보존을 위한 만인(이라는 이름의 자연)의 욕망이 있었고 그에 힘입어 인류는 문명이라는 걸 이룩했다고 말하는 게 설득력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 행복하십시오. 그것이 주체적 정신에서 비롯됐든 타성이나 허영심에서 비롯됐든, 세계를 살고 세계를 이해하고 이윽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과정 속에서 행복하십시오. 신이 깃들지 않은 게 아무 것도 없다면 신의 사랑이 깃들지 않은 것도 아무 것도 없으니, 잔인하리만치 방관적이면서도 몸서리치게 개입적인 신의 사랑에 전율해도 되고, 오히려 생리적 거부감이 들 정도로 냉소적이어도 됩니다. 다만 세계를 부정하기 위해서라도 세계를 더욱 알고자 정진하길 빌 뿐입니다. 언젠가 그 역시 신을 지적으로 사랑하고, 신의 완전성을 나누어 가지며, 이윽고 최고의 자유를 얻을 테니 말입니다.

















참고 문헌



『Ethica』B. Spinoza 著, 조현진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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