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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Jun 18. 2022

□과 ○ (8)

플라톤주의에 맞선 괴테와 비트겐슈타인


Image from dominiquenavarro.com


 
○에게
 



뷜렌도르프의 비너스 상은 미美의 기준이 통시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다는 데 대한 중요 사례로 언급되곤 합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보편적인 미에 대한 담론은 다소 시대착오적으로 비치기도 합니다. 심지어 모처에서는 지극히 정치적인 이슈로까지 변질되어, ‘보편적인 미’라는 개념 자체가 일종의 상징적인 억압으로 여겨지고 있더라고요.
 
그러나 맨 처음 누군가가 미의 개념을 발화할 때 모종의 진릿값이 없었다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미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미를 이야기할 때 그것만은 정치적 불편함을 이유로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이러한 확신이 사실은 진리의 적일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간과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보편적인 미, 그 진릿값, 참으로 기원적이고 까다로운 문제입니다만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게
 



 
말씀을 듣는 순간 ‘이건 플라톤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화이트헤드의 말마따나 서양 철학은 전적으로 플라톤에 주석을 달거나 반박하거나 하며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플라톤 사상의 핵심인 로고스의 보편성 역시 많은 도전을 받았는데요, 그 중에서 예술과 미의 관점에서 플라톤에 도전하여 의미 있는 성과를 낸 두 인물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플라톤의 철학은 존재론입니다. 플라톤은 데모크리토스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대립하여 존재의 새로운 견해를 연구하고 기초를 세웠을 뿐 아니라 존재의 보편적인 개념과 그에 따른 존재의 보편적인 문제를 처음으로 완전히 규정적이고 분명하게 제시하였습니다. 그때까지의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의 원리를 중심으로 한 엘레아학파를 포함한 그리스 철학은 플라톤에 의해 존재에 대한 단순한 신화로 전락합니다.
 
존재에 대한 플라톤의 로고스는 부정성을 통해 획득되고 규정됩니다. 사물의 세계라 불리는 감성 세계를, 존재에 대하여 대립하는 즉 항상 변화하는 것으로 파악할 때, 존재는 불변하는 것으로서 처음 드러나며 이러한 존재와 생성 사이의 지속적인 모순론이 플라톤주의의 초석을, ‘이데아론’의 기초를 이룹니다.
 
『파이돈』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의 진리, 즉 존재 그 자체에 도달하려는 자는 추론하고 결론짓는 방식 속에서 어떤 감각도 수용하지 않고 오로지 존재를 순수하게 사상事象으로 파악해야 하며, 『국가』에서도 변함없는 본질의 비가시적인 왕국과 항상 변화하는, 발생하고 사라지는 사물들의 가시적인 왕국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연, 즉 생성의 왕국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어, 플라톤에 따르면 자연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은 로고스의 상이자 비유일 뿐입니다.
 
괴테는 “생산적인 것만이 오직 진리이다”라 역설한 바 있습니다. 이는 결코 우연하고 피상적인 관점으로 대상을 고찰하는 게 아니라, 자연 혹은 역사에 해당하는 대상 자체를 직관함으로써 전적으로 창조될 수 있습니다. 괴테의 경우 이성과 생성 간의 결코 해체될 수 없는 상관관계가 플라톤의 모순을 대신합니다. 이성은 생성하는 것만을 파악하지 않으며, 오히려 생성이 중단되는 곳 즉 이성이 단지 여전히 고정되고 확고한 존재에 대립하고 있는 곳에서 이성의 힘도 제한되고 손상됩니다.
 
플라톤은 “인식의 주체와 객체가 동일한 종류의 것이고 따라서 존재가 결코 확정되어 있지 않고 영원한 원환 운동을 한다면, 지식 역시 내적인 고정성과 확실성에, 즉 그 지식의 개념들과 진술들의 규정성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괴테의 경우 ‘인식의 주체와 객체가 동일하다면’ 이라는 전제에서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는데, 바로 ‘이성은 자기 자체에서 유기적이다’는 것입니다. 이성은 오직 형태의 형성과 변형만을, 생성과 발생만을 진실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만일 자연작품과 예술작품들이 완성된 상태라면, 사람들은 그것들을 알 수 없다.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파악하기 위해서라면 발생상태 속에서 움켜쥐어야만 한다. - 1803년 8월 4일, 괴테가 젤터에게 보낸 편지 中
 



플라톤에게 인식의 한계를 의미하는 생성은 괴테의 경우 인식의 전제와 형식으로 변화합니다. 플라톤의 경우 좋음의 이데아가 이데아 왕국의 정점에 있으며, 최고 지식을, 모든 존재와 동시에 모든 인식의 최종적인 근원을 나타냅니다. 반면 괴테의 자연고찰은 다시금 삶을 전적으로 포괄하는 하나의 이념 속으로 합류합니다. 플라톤이 좋음을 분명하게 ‘존재의 저편’으로 밀어내면서 삶의 한계를 초월하는 곳을 가리키는 반면 괴테의 경우 삶의 현상에 대립하는 어떠한 저편도 초월도 있을 수 없습니다.
 
플라톤은 감성적인 사물들의 모순으로부터 순수한 개념의 왕국으로 달아나, 순수한 개념들 안에서 존재하는 것의 진리를 인식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는 추상적인 사상가에게 걸맞은 이야기로, 일반적인 인간 특히 세계와 정면으로 대치하는 예술가에게 이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위 문단의 괴테에 따르면 예술가는 이제 오히려 순수한 창조의 실천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고수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자연형태에 대한 고요한 고찰, 즉 수동적인 파악이 결국 우리를 이론적인 이율배반으로 이끌고, 동시적인 것과 계기적인 것을 하나로 정립하려는 사상은 ‘일종의 광기’로 바뀝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은 형태화되어 주어진 세계에서가 아니라 형태를 형성하는 과정 자체에서 오고, 이러한 과정 안에 사는 예술가는 이러한 대립이 완화되는 것을 느낍니다.
 
예술작품의 경우 순수한 정신적인 직관에서, 즉 형성의 내적인 활동에서 생겨난 존재가 우리와 마주합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활동은 자기 자신의 법칙과 필연성에서 감성적인 구체화를 촉진합니다. 정신적인 형식이 현상 속에 나타날 때, 정신적인 형식은 절대 줄어들지 않습니다. 추상적인 사상가, 형이상학자는 현상들의 배후에서 존재 궁극의 근거들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현상들의 감성적인 표면을 던져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가는 이러한 한정되고 폐쇄된 영역 안에서 살지만 그러한 영역과 함께 동시에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예술가가 자신의 삶을 ‘삶의 상Bild’에 내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 이러한 형상에서야 비로소 그가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소유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술가의 운명이자 사명입니다.
 



예술은 자신의 폭과 깊이에 관해 자연과 경쟁하도록 위임받지 않았다. 예술은 자연의 현상의 표면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예술은 자신의 고유한 깊이와 고유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예술은 법칙적인 것을 이러한 피상적인 현상들 속에서 인정하면서, 그러한 현상의 최고의 계기를 고정한다. - 괴테 『화가에 대한 디드로의 시도』주석 中
 



괴테에 따르면 미는 다른 것으로 측정할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내적 진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진리는 상의 진리, 곧 현상의 최고 계기들의 진리입니다. 플라톤주의는 상의 이러한 진리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플라톤이 예술을 포기하게 된 이유입니다. 플라톤에서 예술은 자연에서 이데아로, 모상에서 원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모상의 단순한 모상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을 ‘자연의 모방’이라 보는 플라톤의 견해에 괴테는 투쟁했으며, ‘양식’을 예술적인 창조의 근본능력과 근원적인 능력으로 보는 자신의 고유한 견해를 대립시켰습니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를 해 볼까요. 비트겐슈타인은 젊은 시절 쓴 칠십 쪽 짜리 원고 『논리철학논고』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릅니다. 여기서 그는 회의적이고도 명료한 언어로 낙관주의에 빠져 있던 당대 철학계를 철저하게 뒤흔듭니다. 논리철학논고의 첫 번째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Die Welt ist alles, was der Fall ist. (세계는 성립되어 있는 사항들의 총체이다) -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中
 



명료성과 애매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20세기 이후의 철학계를 울린 대전제입니다. ‘(언어로) 성립된 모든 사항(사실)’을 가리켜 세계라 부르는 이 논제에 형이상학이 낄 틈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말해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세계가 있을 뿐이지요. 이를 밑바탕에 두고 논리철학논고의 나머지는 각각 넘버링된 논제와 면밀한 정리가 연이어 이어집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논리적 함의를 다루며 소진했고, 이를 통해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보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유명한 문장으로 매듭짓습니다.
 



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ss man schweigen.(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 -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中
 



현대 사회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저 정리는 종종 저 문장만 똑 떼어 마치 정치적으로 불편한 사안, 혹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사안에 대해 섣불리 나서지 말 것에 대한 경구로 와전된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획책한 의미는 세계의 저편에 있는 메타meta 레벨의 담론(이해하기 쉽게 개념을 끌어들이자면 형이상학metaphysics)에 대한 섣부른 판단의 유보입니다. (참고 : 《아즈마 히로키 (1) 『존재론적, 우편적』의 저변들 ~하이데거, 지젝,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 https://brunch.co.kr/@erasmut/17 ))
 
이 말대로라면 플라톤의 ‘순수한 사상事象을 통해 파악하는 로고스’야말로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말할 수 없는 것’이자 ‘침묵해야 하는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것에 대해 그저 냉소적 태도만 견지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어디까지나 ‘침묵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를 마치 ‘(말할 수 없는 건)다 헛된 공상이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며 형이상학 일체를 공격하기 바쁜 열화된 실증주의 에피고넨들이 그의 사후 지금까지도 무수히 나타나고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생전에 자신의 언어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 했습니다. 그는 “논리철학논고는 불완전한 저술이다”라 말하며 자신을 칭송하는 학자와 학생들을 늘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그가 말년에 쓴 1부와 사후 유고를 정리해 나온 2부로 이루어진 『철학적 탐구』에서 그는 실천적 언어의 애매성과 우연성을 수용합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젊은 시절의 그의 지향성을 한 번에 비트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게임’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골자는, 실천의 문제에서 모든 상황에 통용되는 단 하나의 보편적인 언어는 없고, 대신 특정한 일관성을 갖고 비슷하게 겹쳐지는 복수의 게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관성은 사람들이 선험적・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언어에 대한 사태로,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직시적 정의’라 칭합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의미를 구하기보다 실천을 구할’ 것을 촉구합니다.
 



2의 직시적 정의에 ‘수’라는 말이 필요한가 여부는 사람들이 이 정의를, 이 낱말이 없다면 내가 바라는 것과는 다른 식으로 이해해 버리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정의가 주어지는 상황이나 내가 정의를 주는 사람에 의존하고 있다. 더욱이 사람들이 설명을 어떻게 ‘파악’하는가는, 그 사람이 설명된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의해서 나타난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언어에서 낱말이 일반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가 이미 분명한 경우 직시적 정의가 낱말의 사용─의미─을 설명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비트겐슈타인『철학적 탐구』中
 



이제 플라톤의 문제로 돌아가 볼까요.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를 묻고,『파이드로스』에선 사랑에 대한 정의를 묻고,『메논』에서는 덕virtue에 대한 정의를 묻습니다. 메논이 그에 대한 이런저런 사례들을 들자 소크라테스는 딱 잘라 “사례는 필요없소. 내가 원하는 건 덕 자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오”라 말합니다. 바꿔 말하면 소크라테스는 정의, 사랑, 덕, 아름다움에 대한 단 하나의 수학적이고 보편적인 언어를 요구한 것이지요.
 
소크라테스가 이러한 논쟁에서 이길 수 있던 이유는 아무도 저러한 가치 개념에 대한 가능한 모든 대답이나 보편적인 단 하나의 대답을 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이러한 산파술을 통해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무지를 일깨우려 했다는 건 교과서에도 나오는 마무리입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또 다른 사유를 도출해냅니다.
 
하나의 언어에 예속된 여러 가지 활동들(예를 들면 놀이라든지)을 우리는 계속 경험하며 습득합니다. 우리는 놀이를 ‘1인 혹은 복수 인원이 유희를 목적으로 관습적이거나 즉흥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란 정의를 통해 파악하지 않습니다. 축구를 하고, 말뚝박기를 하고, 전자 오락을 하며 그것들을 각자의 ‘놀이’의 패러다임에 편입시키지요. 이를 두고 비트겐슈타인은 ‘확장적(연장적) 정의’라 칭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단 하나의 정의’와는 대척점에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단일 정의, 플라톤의 유일 보편적 진리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대답은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요. “문제는 언어에 있지도, 사유 방식에 있지도 않다. 있다면 대상의 본성에 대한 (불가능한)절대적 확실성의 요구에 있다.” 이는 결국 논리철학논고에서 제기한 문제와 상통합니다. 어제 보도된 사건이 거짓임을 증명하고자 같은 신문을 여러 부 사는 게 무의미하듯, 비트겐슈타인에겐 언어의 저편에 있는 형이상학을 설명하고자 수많은 언어를 끌어 쓰는 게 무의미합니다. 절대적 확실성이란 말할 수 없는 것이니,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괴테는 플라톤에 맞서 ‘근원현상’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존재론 내지 예술론을 역설했고, 비트겐슈타인은 ‘침묵해야 한다’는 문장을 포함해 ‘침묵하지 않을 것’에 대해 평생을 말했습니다. 니체의 ‘진리의 적은 의심이 아닌 확신’ 역시 바꿔 말하면 그것이 곧 니체의 확신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실제로 진리성을 띠든 아니든 마음에 품고 발화한 게 중요하겠지요. 모든 역사와 학문이 그래 왔듯 말입니다. 살기 위해 침묵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기어이 말과 글을 남긴 사람들에게 깃들어 있던 진리眞理(눈目에 비수 들어와도 말해야 하는 이치理)에 대한 용기der Mut zur Wahrheit를 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참고 문헌
 


『Goethe und Platon』E. Cassirer 著, 추정희 譯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L. Wittgenstein 著, 김양순 譯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L. Wittgenstein 著, 김양순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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